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7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07. 5. 7. 08:34

  2007년 5월 7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21)

 

 “Whoever has my commandments and observes them
is the one who loves me.
Whoever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will love him and reveal myself to him.”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당신 제자들에게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해 주실 것이다

 

☆☆☆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호자,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게 해 주실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모든 미혹은 사라지고 진리가 드러날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많은 지혜 가운데 진정 우리가 청해 얻어야 할 지혜는 어떤 것일까요? 물론 사람마다 필요한 지혜의 은사가 제각각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한 저명한 신학자는 각 개인에게는 분별의 지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분별의 지혜를 하느님께서 성령의 은총으로 허락해 주시기를 다음과 같은 기도로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하느님, 제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소서. 만일 제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진정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정신적으로 혼란하기 짝이 없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은총이리라 생각합니다.

 

 

새벽을 열며

 

 작년 12월, 간석4동 성당에 부임한 뒤에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또 왜 이렇게 일들이 저를 좋아하는지……. 이것저것 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았던 것도 상당히 많았고, 그리고 많이 지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여유를 가지고서 다시금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그럼으로써 재충전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여행을 하다 보니 당연히 이제까지 새벽에 쭉 해오던 것에 문제가 있네요. 즉, 새벽 묵상 글과 새벽 인터넷 방송을 이번 일 주일 동안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시간이 허락하고 근처에 피씨방이 있으면 여행기를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요 며칠 동안 여행 준비를 하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번 여행은 자전거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고생을 사서 하냐고들 말씀하십니다. 편한 차를 놔두고서 자전거로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하는 신부님들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있는지 모른답니다. 왜냐하면 다들 자전거를 좋아하고, 너무 빠른 차를 타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힘들다고 피하려는 이런 여행을 하면서도 너무나도 기쁜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어떤 사람이 겪는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도 커 보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도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요? 그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이 실제로는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와 보통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들 어렵다고 하는 자전거 여행 안에서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이들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탓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중요한 계명을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이지요. 그 사랑을 지켜나가면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사랑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이 나를 바꾸고, 내 주변을 바꾸고,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서 힘차게 사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 여행이 끝나는 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합시다.

 빠다킹신부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것     

-김동하 신부 -


하늘에 맞닿은 달동네에는 아직도 사람내가 물큰합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 ‘변소’에서 나는 냄새, 간간히 어른들 싸우는 광경.
달동네 사람들이 버거우면서도 올망졸망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늘도 가깝지만 이웃이 지척이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하늘을
배운 터라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기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싸울 줄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법도 훤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가까이 하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내 몸의 자리를 내놓고 내 마음의 자리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이라면 반은 내놓아야 하고 셋이나 넷이라면 나를 삼등분 사등분하여
두 몫이나 세 몫은 내놓아야 합니다. 많이 모이면 모인 만큼 내놓아야 하기에
내 자리는 작아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예수님과 함께 살자면
전부를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부이신 분이고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필립 1,21참조). 하늘이신 예수님께 배우고
이웃이신 예수님과 부대낄 수 있다면 그분의 향기는 우리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계명 실천으로

- 송제호 신부 -

부활5주를 맞이하는 교회는 부활축제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움과 절망의 끝에 서서 모든 희망을 포기하려 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산을 넘어서야 하는 단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삶의 전부이신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절망감이 찾아오는 그 순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제촉 하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심지어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할 순간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가질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당신과 성령께서 늘 함께 하여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선포된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번째 고별 담론을 통해 성령의 보내심과 주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만이 그 제자 됨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일치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힘이 된다고 하십니다(15절). 즉 예수님의 계명은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천, 제자들이 체험한 사랑의 실천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계명에 따라 사랑을 실천한다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힘겹고 마치 멍에처럼 피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마치 계명의 실천이 나의 자유와 의지를 구속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변명을 준비해두고 일탈의 삶에서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늘 소극적으로 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더 크고 완전한 자유의 삶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을 통한 진정한 친교는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고 축복되게 합니다.

사랑을 살지 않는 이에게는 계명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멍에이지만, 사랑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라면 계명은 너무나도 가볍고 편한 멍에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선포함에 조금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필립보는 낮선 사마리아지방으로 달려가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복음을 선포함에서 더 큰 기쁨을 알게 하며,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1독서).

우리는 생명에로 초대받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의 증거만이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은 늘 우리의 사랑 고백보다 먼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독서강론> : 박해 속에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 경규봉 신부-

바울로 일행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티오키아 유대인들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리스트라까지 쫓아와서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로 일행을 박해했다. 그들은 바울로를 돌로 쳤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내어 버리기까지 하였다.

신도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바울로와 일행은 1차 전교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데르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각 도시마다 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또한 각 공동체마다 원로들을 세워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의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불림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며, 주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여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음으로써 현실적인 손해를 입을 수가 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고, 지금도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육체적, 정신적인 고문에 시달렸으며,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참 그리스도인에게 박해는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박해를 받고 십자가상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요한 17,14-16) 세상의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요한 15,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며 복음을 사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어려움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기쁨과 평화를 주님께서 주시며,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다(요한 20,19).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쁨에 충만하도록 하셨다(요한 20,22). 그들이 다락방에서 뛰어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셔서 용기와 힘이 넘치도록 하셨다(사도 2,1-4).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도들이 박해 속에서도 용기를 갖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까닭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마음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현실적 어려움과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움과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러한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주님의 말씀에서 힘과 용기를 얻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사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함으로써 세상의 고통과 박해를 이겨내는 신앙인이 되자.............◆

 

 
사랑은 움직이는 것

-노성호 신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율법의 준수를
그 어느 것보다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365가지의 금령과 248가지의
명령으로 구성된 총 613가지의 율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면서 살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의인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많은 율법 조문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기는 사람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람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폐단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하고 말씀하시면서 수많은 율법 조문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의 멍에와 짐에
짓눌려 있는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배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눈높이를 맞추시며, 어떠한 강박도 없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 쪽으로 움직여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어렵고 두렵고
저 멀리 계신 분으로만 생각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으로 찾아오셨고,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세상 곳곳에
전해 주시려고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움직여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양승국신부-


<꽃피는 봄이 오면>


최민식 주연의 ‘꽃피는 봄이 오면’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나니 마치도 한권의 서정적인 시집을 읽고 난 것 같이 머릿속이 환해져오고, 또 길고도 잔잔한 여운이 남더군요.


트럼펫을 전공한 현우는 관현악단 오디션에서 거듭 고배를 마실 뿐 아니라, 떠나가는 사랑도 잡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접은 현우는 강원도 산골 한 중학교 악대부 임시 교사로 가게 됩니다.


낡은 악기, 찢어진 악보, 색 바랜 트로피와 상장들, 전국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하면 강제 해산해야만 악대부, 그러나 현우는 시골 아이들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제자들을 위해 손수 라면을 끓이는 스승, 그 아이들과 함께 머리 맞대고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라면을 먹는 스승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를 돕기 위해 그렇게 강하던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카바레 밤무대까지 뛰는 스승, 가슴 아픈 제자와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스승, 가끔은 엄격함을 버리고 친구처럼 다가갈 줄 아는 센스를 지닌 스승의 모습,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또 다시 스승의 날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지난 세월 제가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제가 종사했던 일의 성격상 잘 풀린 아이들보다는 주로 늘 뭔가 꼬인 아이들, 노력해보지만 안타깝게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방황을 거듭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어제도 최근 가까운 소년원에 오게 된 한 아이가 ‘스승의 날’이라고 편지 한통을 보내왔더군요. 화가 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신부님,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편지를 드리니 정말 창피하네요. 신부님과 함께 했던 살레시오...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네요. 신부님, 보고 싶어요. 예전에 함께 외출하던 기억, 등산가서 한잔 하던 기억, 싸우면서 운동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많이 창피해하는 아이에게 빨리 답장을 써야겠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미안해할 것 하나도 없다. 다 네가 시대를 잘못타고 난 때문이다. 지난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란다. 널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 잊지 말거라...”


오늘 스승의 날을 맞아 고마우신 모든 선생님들, 잊지 못할 은사님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 바쳐야 하겠습니다. 열악한 교육 풍토 안에서 우리 선생님들 정말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꼬이고 꼬인 교육제도 아래에서도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선생님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다가서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들도 많으시더군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춤을 배우는 선생님들, 아이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학습을 제공하기 위해 불철주야 교안작성에 여념 없는 선생님들, 아이들이 너무 좋아 결혼조차 포기하신 선생님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장학금을 내어놓는 선생님들...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은 제자들이 나중에 자라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스승으로부터 듬뿍 영양분을 제공받은 그 제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그 사랑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더 풍성히 나누어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스승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듯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라는 예수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소리 없는 눈물 앞에 함께 눈물 흘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 안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많은 결실을 맺도록 지지해주고 격려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요한 14, 21-26)
    -유광수 신부-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신다."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세 번이나 말씀하시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한번 언급하신다.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강요하지는 않으시고 다만 당신의 뜻을 밝히시고 알려주시기만 하신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셨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내가 지키는가 아닌가? 가 그 기준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때 사용한 동사는 희랍어로 "Tereo"(떼레오)라는 단어이다. "떼레오"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돌보다, 보살피다, 지키다, 감시하다, 간직하다, 붙들다, 주시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 계명을 지키는 이"는 예수님의 계명(말씀)을 조심스럽게 돌보고,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누가 빼앗가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지키고 감시하고 붙드는 사람이다. 마치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계명(말씀)을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마치 애인의 글을 받았을 때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대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누가 나의 보물을 빼앗가지 않도록 지키고 감시하듯이 나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의 계명(말씀)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며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의 계명은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8, 105)라고 했듯이 등불이요, 빛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고, 생활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계명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 나의 삶이 주님의 계명을 따라서 생활했는가 아닌가를 점검하고 충실한 삶이었으며 주님께 감사드리고 충실하지 못한 삶이 발견되면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교정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을 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생활하니 주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 사랑 받을 일만 하고 사는데 사랑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도 사랑하고 예수님도 사랑하고 또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뜻이나 계획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 때 그 때마다 주님의 계명을 기억나게 해 주신다. 즉 무엇을 말하고 행동할 때 주님의 계명을 먼저 생각하고 그 상황에 알 맞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계명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실천하려는 생활에서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생활의 등불, 빛으로 삼고 생활하는 데에서 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중요성을 두지 않는 사람이며, 무관심한 사람이며, 주님의 말씀과는 아무 관계없이 생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말과 행동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에 준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즉 삶의 기준이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다. 주님과 관계를 맺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또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너는 너, 나는 나대로의 삶을 계속해서 살 때 점 점 더 주님과 멀어지고 주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멋대로 생활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가볍게 들릴런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차이는 엄청나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점 점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 차이가 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킨 사람은 예수님을 점 점 더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점 점 더 예수님을 모르게 될 것이고사랑에 굶주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함께 생활할 때 잘 드러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때 또는 대화를 할 때는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일이 잘 된다. 말이 통하고 대화가 이루어 진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이 일치되고 일을 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생활할 때에는 사사건건 문제가 일어나고 문제꺼리가 되고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힘들고 일하는 것이 힘들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일치를 이루고 알아듣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치가 안되고 자기 중심으로 일을 하고 말을 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게 된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보다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생활하게 될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서로 일치하기가 힘들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짊어져야할 십자가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의존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에 바탕을 두고 그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한테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려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순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코후 4, 8-11)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아니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

  

 

 

 성령의 약속과 성령의 정체성

 -박상대신부-

  우리기 익히 알고 있듯이 유독 요한복음사가만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긴 고별사를 보도한다.(13-17장)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13-14장이 요한복음의 원초적인 고별사에 속하고 15-17장은 추가로 편집된 것으로 주장한다. 요한복음 21장이 추가로 편집된 것과 같이 15-17장도 요한복음 공동체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후에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5-17장은 13-14장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14,21-26)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 행하신 기나긴 고별사(13-17장)의 원초적인 첫 부분(13-14장)에 해당된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씻김(1-11절), 발을 씻겨줌의 의미(12-20절), 유다의 배반예고(21-30절), 새계명 선포(31-35), 베드로의 장담과 배반예고(36-38절 끝) 등을 보도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선포하신 내용과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1-14절), 성령의 약속(15-26절), 그리고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27-31절 끝)에 관한 가르침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별사를 요한복음 13-14장으로 한정할 때, 고별사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 ② 아들의 자기계시와 정체,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公開)로 요약된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순서대로 다루어지거나 독자적인 단락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고별사 전체를 오가는 흐름을 주도한다. 물론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에 관한 보도는 14,15-26에 한정되는데, 여기에서도 사랑의 계명은 함께 언급된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성령의 약속과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의 시선을 오늘 복음(14,21-26)에 집중시켜보자. 우선 예수께서는 사랑의 테마를 재삼 언급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나아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통하여 아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21절) 그런데 11제자 중에서 유다 타데오가 예수께서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한정하여 나타내 보이려 하는 의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22절) 이 질문은 사실상 불만과 의구심을 담은 질문이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가 ’국가·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참에 왜 예수께서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수 없는지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질문의 의도를 비켜간다. 그것은 예수께서 분명히 세상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으며, 또 메시아로 자신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메시아적 자기계시는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즉 적어도 제자들에게 한정되는 셈이다.(23-24절) 제자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된 말씀을 들었으며, 듣고 응답하였으며, 응답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그 사랑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스스로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살아 있는 집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26절)을 통하여 밝혀지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다.

 

  이미 16-17절에 걸쳐 언급되었고, 26절에 다시금 언급되는 ’성령의 약속과 성령의 정체성’에 관한 보도는 요한복음의 특허품이다. 신약성서 전체에 ’성령’이라는 단어는 235번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용도는 ’성령’이라는 단독적인 표현에 머물거나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보도된다. 요한복음사가도 처음에는 이런 맥락에서 ’성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32; 1,33; 3,5; 3,8; 3,34; 7,39; 20,22 참조)  그러나 요한복음의 고별사에서 보도되는 표현은 전혀 다르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이 다소 ’비인격적 표현’에 머물거나 ’하느님께 속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엇’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는 글자 그대로 ’그분’(14,17)이라는 인칭대명사를 부여하여 하느님의 또 다른 ’위격’(位格)으로, 나아가 ’협조자’, ’진리의 성령’으로 계시하고 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진리의)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26절) - 병행구절 15,26; 16,13; 16,15 참조. 이로써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본성(本性)을 지니신 제3의 위격, 즉 ’하느님 성령’으로 계시하시는 것이다. 주님승천대축일을 일주일 앞두고, 성령강림대축일을 이주일 앞둔 시점에서 오늘 부활 제5주간 월요일에 성령 하느님의 강림에 관한 약속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영에 의해 생명을 부지(扶持)한다면 오늘부터라도 성령강림을 잘 준비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