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07년 5월 9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07. 5. 9. 02:25

 2007년 5월 9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5 )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그리스도는 참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다. 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자기 중심적으로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라는 점을 묵상하였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 말씀인 ‘포도나무의 비유’와 이 말씀을 더욱 승화시킨 바오로 사도의 “하나의 몸과 여러 지체”(1코린 12,12-31)라는 비유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시면서, 우리는 모두 그 가지이니 나무인 당신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떨어져서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더 나아가 그 반대의 논리도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곧, 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당연히 열매를 맺을 수 없지만, 반대로 나뭇가지가 없는 나무도 역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모두는 나뭇가지로서 나무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반대로 그 가지들인 우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나무 역시 제 몸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무라고 하는 하나의 몸은 가지라고 하는 지체들과 한 존재이며 한 생명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본당 공동체도 이와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그 공동체 안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공동체의 평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고, 본당 공동체의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겸손함이란 씨앗      

-김동하 신부-

 

 

연주가가 음악을 감동스럽게 풀어내는 길은 곡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심오하고 거침없는 연주는 곡을 이해하려는 거듭된 연습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든 일이 다 한 가지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탐스런 열매를 내기 위해서는
안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삶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겸손함이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겸손함이란 몸과 마음을 낮추는 것으로 인간의 삶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머무를 때 생깁니다. 몸과 마음으로 겸손함을 심고 가꿀 수 있어야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하늘께서 땅이 되신
것입니다(요한 1,14 참조). 드높으신 분께서 비천함을 마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서 하나로 머물러 있었기에 생긴 겸손입니다.
몸소 겸손을 실천하신 것은 당신 안에 머물면서 당신의 뒤를 따르라는
더할 수 없는 본보기입니다. 삶의 열매를 탐스럽게 맺을 수 있는 길을
알았습니다. 그분 안에 머물면서 겸손함을 키우는 것임을.
그분의 겸손함으로 인간 삶으로 들어가 머무는 것임을.

 

 

   용서는 조건이 없이

-고진배 수사(마리아회)-


 포도나무는 덩굴식물입니다. 포도나무 줄기는 기둥을 타고 올라가 잎을 키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묵은 가지에서는 절대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가지에서 풍성한 포도송이가 열립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언제나 나를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된 나는 그리스도를 매일 내 몸에 모십니다. 새롭게 태어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례로 다시 태어난 우리는 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로 다시 태어나고, 화해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원하기에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용서하는 습관을 길러 용서가 나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방법은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용서하는지를 배움으로써 나도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할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과 서로 용서하고, 내가 소속된 단체와 서로 용서하며,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자연과 서로 용서하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주님과 화해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 상대가 나를 용서할 것입니다. 나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먼저 용서하기를 바라는 것은 용서할 마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용서에는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돌아오는 작은아들을 멀리서도 알아보고 달려가 맞이했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열매가 하나인 것처럼 용서하는 마음과 새로 태어나는 마음은 하나입니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점점 내 안에서 커지시고 나는 점점 작아져서 결국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버린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
서유승 신부 -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은 가톨릭 성가 35번 「나는 포도나무요」의 가사로써 우리에게 친숙한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작은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라는 이 성가는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일 것입니다. 바로 이 유명한 성가의 가사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8절까지 봉독되는 오늘의 복음에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1절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말씀과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 8절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라는 세 구절을 뼈대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물러있거라” 나무의 가지와 같은 우리들이 하느님께서 가꾸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히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있는 모든 것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가집니다. 가령 예를 들어 의자는 사람이 거기에 앉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비싼 재료로 만들어진 황금의자라 할지라도 사람이 거기 앉기에 불편하다면, 그 의자는 의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연필은 사람이 글을 쓰기 위한 도구이며,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도구입니다. 만일 연필이 글쓰기에 적합하지 않고, 망치가 못을 박기에 불편하다면 그것은 도구로서의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를 두고 쓸모없는 것, 헛수고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포도나무는 포도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포도나무가 내어주는 포도를 통해 풍요로움을 맛봅니다. 조선시대의 궁궐을 가보면 왕비나 후궁이 머물던 곳의 담장을 포도그림으로 장식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포도그림을 그려넣었다는 설명을 들으면 알알이 영글어 있는 포도가 풍요를 상징하는 것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풍요의 상징인 포도를 잘 내기 위해서 농부는 자신의 정성을 다해 포도나무를 가꿉니다. 농부는 포도나무를 잘 가꾸는 것을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삼습니다. 나무는 제 뿌리를 깊게 하여 온갖 영양분을 각각의 가지들에게 전달해 줍니다. 나무가 뿌리를 통해 얻은 온갖 유익한 것들을 가지들에게로 올려주지 않고서는 가지들이 제대로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은 그 영양분을 받아 열매를 냅니다. 열매를 내는 것, 그것이 바로 가지들이 나무에 붙어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속담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복음서 7장에서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열매를 보고서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 또 그것을 가꾸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갔겠는지를 미루어 짐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서 예수님을 알고 하느님을 믿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꾸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 열매를 맺는 우리들은 세상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도구들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행실이라는 열매를 보고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알게되며,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람에 대해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㰡“(요한 1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교리 문답의 첫 번째 문답은 이러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세상 모든 것들은 그 태어난 이유,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난 첫 번째 이유는 천주를 아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좋은 열매를 맺어 세상의 사람들이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과연 많은 열매를 맺고있는 주님의 제자인지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여나 겉으로는 잎이 무성한데 열매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헛된 무화과 나무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가 여러분 모두에게 튼실한 열매를 맺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수하고 돌아오는 이들의 손 아름아름마다 탐스런 열매가 쥐어져있는 것처럼 오늘을 시작하고 마감할 때 여러분들의 이 하루가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독서 : 하느님과 사랑을 거스르는 전통에 얽매이지 말자.
-
경규봉 신부 -


소아시아 지방에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자 예루살렘에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유대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분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누구나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안티오키아 교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안티오키아 교회 안에는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또한 이들의 주장은 바울로의 사도직에 대한 정면도전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 방침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교리적 문제이기에 모든 교회가 함께 의논하여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 및 대표자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파견하여 이 문제를 의논하도록 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울로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그들의 가르침을 받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로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예루살렘 교회와 지도자들은 바울로 일행을 적극 환영했다. 이는 바울로의 전교 여행을 호의적으로 평가했음을 뜻한다. 바울로 일행은 선교여행의 결과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 결과라고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한다(14,26-27).

이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강조함으로써 이방인 전교가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교회에 인식시키는 동시에 반대자의 도전을 하느님에 대한 도전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바리사이파 출신 개종자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유대교적 전통을 고수하려 했다. 때문에 교회 안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열린다.

교회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교회의 중심은 언제나 하느님이다. 하느님을 잘 믿고 따르기 위하여 교회가 나름대로 일정한 형식과 틀을 만드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하나의 전통으로 굳혀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전통만을 바라보기 쉽다. 그래서 전통을 거스르는 것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처럼 생각하고, 전통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기까지 한다. 마치 그 전통이 하느님인 것처럼 생각하여, 전통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왜 너희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느냐?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마태 15,3.6)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꾸짖기도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셨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과감히 깨트리셨다. 설사 그것이 오래된 전통일지라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거스를 경우에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따른 전통을 고집했고, 그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기며, 분파까지 생겼다(6,1; 1고린 1,10-17참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열렸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주의적 전통을 거부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교회이다. 교회의 중심은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을 거스르고, 사랑을 거스르는 인간의 모든 제도와 형식은 깨트려져야 하고, 고쳐져야만 한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사랑을 거스르는 전통을 거부하고 개혁할 수 있는 참된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하자. 언제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의 관점에서 생활하는 신앙인이 되자.........◆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4-5절)라고 하신다. 이 비유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 비유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참 제자라고 한다면, 언제나 그의 생각과 행동과 말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같은 포도나무에 확고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지만 예루살렘에 와서 그 공동체에 함께 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모든 카리스마를 다 합친다 해도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줄기와 가지와의 관계, 그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수분, 같은 영양분이 통하며 한 나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런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생각,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여 진정한 친교를 예수님과 나눌 수 있을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줄기에 붙어있으면서도 그곳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 열매
를 맺는 양분을 허비하기만 한다면, 다른 열매에도 영향을 미쳐 필요 없는 가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주인은 그 가지를 자르고 새순을 돋게 할 것이다. 더 많은 열매를 위해서.

이제는 주님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로서 원 그루터기로부터 나오는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과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열려진 마음이 있어야 하며, 또 그것을 이웃에게도 나눌 수 있는 결실을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제자가 될 것이다(8절). 이것이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으로 또한 복음선포의 결실도 곁들여 얻게 될 것이다.

하여간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붙어있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지고 말 것이다. 그들의 모습이 지금은 그럴 듯하지만 결국에는 파멸의 결과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께 대하여 어떤 가지이며, 어떠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하면서, 더 좋은 열매,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자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다

-김웅태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매일 생활속에서 예수님과 어떠한 인연속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포도나무"는 마치 우리가 생활에 필요한 무우, 배추를 심어서 먹듯이, 예수님께서 사셨던 팔레스티나 어느 곳이든지 유다 사람들은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음료수로 먹었던 것이기에 눈에, 흔히 띠고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재배하고, 어떻게 결실을 거두고 있는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생활 속에 이야기였습니다. 포도나무뿐 아니라, 어느 나무도 줄기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은 자연스런 상식입니다. 그렇다면 줄기와 가지, 그 관계, 그 인연은 어떠합니까? 그것은 서로가 남이 아니라, 같은 수분, 같은 양분이 통하며, 한나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그와 같은 관계! 그와 같은 인연 속에서 살아야 가지가 되는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생각, 예수님과 같은 마음, 행동으로 머물고 예수님과 모든 것을 나누는 친교 속에 살아가야만 하느님의 사랑과 상급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행함과 실천이 없는 말뿐인 크리스찬, 그것은 잎사귀만 무성하고 몸에 영양분만 낭비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잘려져서 불에 태워 버려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지금은 그럴 듯하지만, 결국에는 파멸의 비참한 결과가 그에게 닥치게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어떠한 가지이며, 어떠한 결실을 맺고 있는지?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아멘.

 

 

 -이재현신부-


우리는 방금 너무나 유명한 비유인 포도나무에 관한 비유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서를 읽을 때마다, 아니 강론을 준비할 때마다, 예수님의 비유이야기를 접하면 참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유이야기는 너무나 쉽고 때론 적절하게 그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기에 어떤 설명이나 강론이 필요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과 나,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며, 너희는 내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들에게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 나무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오늘 비유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떼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오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며,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고파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런 주님의 마음에 관한 체험이 하나 있습니다.

중3 예신캠프 때였다고 기억합니다. 그 캠프 중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그래프로 그리는 작업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X축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뜻하며, Y축은 X축을 기준으로 위쪽으로는 행복의 정도를 밑으로 불행의 정도를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짥은 16살 동안의 기억이지만 나의 삶을 정리하면서 열심히 그래프를 그렇고, 결국 완성된 나의 삶의 그래프는 위, 아래로 요동치는 파도 모양의 그래프였습니다. 그리고 그 그래프를 발표하면서 나의 머릿속에 강하게 스쳐간 느낌은 ‘아 나의 삶속에서 누군가 나와 함께 계셨구나, 그래서 특히 내가 힘들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셨고, 내가 기쁠때, 묵묵히 함께 기뻐해 주시는 누군가 계셨셨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후에 저는 한번도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한 적도 없고, 때론 그 느낌 때문에 겁 없이 세상을 살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피조물과 하느님의 관계는 이처럼 떼래야 뗄수 없는 그런 관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던 못하고 있던 말입니다. 하느님과 피조물과의 이 관계는 신앙인들이 겪는 깊은 신앙의 체험입니다.

흔히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다가 큰 어려움을 닥치게 되면,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하지만 그 고통이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며,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결국은 그분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설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나를 일어켜 주실 뿐은 오직 그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의 포도나무의 포도가지입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의 너무나 뜨거운 사랑을 느낍니다. 농부는 자기 마음대로 포도나무의 가지를 짜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주도권을 오히려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이는 너무나 큰 사랑의 역설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하찮은 미물인 인간이 되신 그분의 삶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주님의 포도가지입니다.

 

 

주님은 참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들

-이수철신부-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아는 것이 병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진정한 앎은 치유와 구원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은 몰라서, 무식(無識)해서 무리(無理)해서 병이 나고 병을 앓는 것입니다.

 

어제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에서 중세기의 신비가,

분도회의 힐데가르드 수녀의 영성 강의를 들으면서 퍼뜩 떠올랐던 생각들입니다.


무지(無知)의 병입니다.

불가에서의 탐(貪), 진(瞋), 치(痴).

즉 탐욕, 화냄,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도 무지의 인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마음의 눈을 가려버려 여기서 생기는 온갖 질병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잠언과 지혜서에서 그리도 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앎이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갈 때

탐, 진, 치의 삼독도 눈 녹듯 사라져 치유와 구원이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불가에서의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四聖蹄)의 진리가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세상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없앨 때 열반의 도에 이른다는 불교의 구원관인데,

이를 뒤집어 도(道) 자체이신 하느님을 알게 될 때

저절로 고통의 원인인 집착은 사라져

무욕(無慾)의 삶에 치유와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깨달음을 통한 치유와 변화도 같은 맥락입니다.

 
안다고 하지만 대부분 모르는 것들이 대부분이 아닙니까?
당연히 안다고 생각되는 진리도

새삼스런 깨달음의 앎으로 다가오는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아는 체험적 지혜가,

깨달아 앎이 참으로 치유이자 구원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

체험적으로 깨닫는 다면 그대로 치유요 구원이요 자유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구원의 진리 말씀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절대적 독립의 존재인 인간으로 여기는 것,

똑똑해 보이지만 엄청난 착각이요 무지의 어리석음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 안에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주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우리는 가지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물러야

주님의 제자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주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잘려나간 가지들의 비유가 아주 적절합니다.

 

하여 제가 강조하는 것은 딱 두 가지 ‘하느님 믿음’과 ‘건강’입니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참 포도나무 주님께 믿음으로 꼭 붙어 있어야

자연스럽게 뒤 따르는 그 가지들인 우리의 건강입니다.

하여 하느님 믿음의 끈을 꼭 잡고 살라고 권합니다.

 

어느 사랑에 빠진 자매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 역시 예전에 잠시 겪었던 체험이라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과의 만남이 저의 전부입니다.

  그분 빼놓고는 의미 있는 것은,

  재미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분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열병과도, 중독과도 같은 아주 위태한 사람과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진리가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분 대신에 하느님을 넣어보는 것입니다

.

바로 수도자들이,

열심한 신자들이 절감하는 진리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깊은 깨달음의 사랑이 있을 때 이런 사랑,

저런 사랑에 휘둘리지 않고 비로소 자유롭고 건강한,

절제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들입니다.

바로 이 진리를 온 몸과 마음으로 깨닫고 알아서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

치유요 구원의 기적입니다.

 

이런 진리를 몰라서 어둠 속에 방황이요 혼란하고 무질서한 삶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온갖 마음과 육신의 질병들입니다.
또 함께 마음을 열고 나눌 때 계시되는 진리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을 수 있기에

할례를 베풀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해야 한다는 극성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문제 제기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형제들의 모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이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나의 관계를 깊이 깨달아 알 때 치유요 구원입니다.
주님이 포도나무라면 우리는 가지들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치유와 구원에 참 평화와 자유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도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을 떠나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살아있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삶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과의 일치 중에 생명 넘치는 가지들로 자라나는 우리들입니다.

 

오월의 무성한 신록의 나무들이 주님은 나무요

우리 모두는 주님 나무에 붙어 살아가는

가지들이라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멘.

 

 
아버지의 포도 사랑2

-노성호 신부-


자신이 애써 가꾸어 얻은 농작물에 대해 더 좋은 값을 받으려는 것은 모든
농부들의 공통된 심정이겠지만, 저희 아버지는 그 정도가 더 심하셨고, 굉장한
자부심까지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면 더욱 품질이 좋은 수확물을
거둘 수 있을까 고심하시면서 나름대로 연구도 하셨고, 포도나무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포도 수확철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포도를 따고, 상자에
포장하여 도매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자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볕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포도를 따고, 그것들을 가지고 저녁 무렵 차에 싣고
서울까지 가야 하는 그 일이 젊은 저도 힘들었는데 아버지는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요? 그런데도 아버지께서는 늘 싱글벙글이셨습니다. 도매시장에
도착하면 아버지의 성함이 적힌 포도들이 다른 포도들보다 훨씬 좋은 가격에
많이 팔리기 때문이었지요. 정말 정직하게 땀 흘려 얻으신 결실이 아버지의 피곤을
말끔히 씻어 주었고, 그로 인해서 아버지의 이름 세 글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포도밭에 나가면
‘애들아, 너희들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니. 부탁한다’ 하고 혼자 중얼거리곤 합니다. 우리 모두도 주님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늘 좋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네’ 하고 칭찬할
테지만, 결국 더욱 커다란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실 테니까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박아미 수녀(성바오로딸 수녀회)-


◆오늘은 주님께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 같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주님 말씀, 곧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기도/“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갈망하는 기도/“이루어질 것이다”:영원을 아우르는 기도

깨달음 하나: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기도
어머니는 생의 말년에 자주 말씀하셨다. “나는 저 거미처럼 남김없이 다 비우고 가볍게 날아갈란다. 잠자듯이 조용히….” 그 말씀에 창밖을 내다보면 투명한 껍질만 남긴 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거미가 보이곤 했다. 10남매를 낳아 기르신 어머니는 어느날 갑자기 막내딸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당신 소망대로 주님 품에 안기셨다. 그래서 확신하게 된다. 어머니의 기도, 소망은 하느님 뜻에 따른 것이기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깨달음 둘:갈망하는 기도
오래전에 ‘뽀네트’라는 영화를 봤다. 네 살짜리 꼬마가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아이의 시각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감독이 무릎으로 기면서 촬영한 것으로도 화제가 된 영화다. 그 영화에서 내게 가장 감동 깊게 다가온 것은 간절히 갈망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뽀네트가 엄마가 보고 싶어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하고, 들판에 나가 엄마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탈리타 쿰!” 하고 외쳐보지만 쓸쓸한 바람만 응대할 뿐이었다. 그때 뽀네트의 흐느낌이 얼마나 애절하던지 나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본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나타나 뽀네트에게 “웃음을 잃지 말고 행복을 배워라”는 말을 건네고, 엄마의 바람을 알아들은 뽀네트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다. 기도에 대해 생각할 때면 종종 뽀네트가 떠오른다. 나는 얼마나 갈망하며 기도하고 있는가?

깨달음 셋:영원을 아우르는 기도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롭게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느낀 시간의 영원성을 기억하곤 한다. 90평생을 누구보다 파란 많은 삶을 사신 분이었지만 아버지의 시신을 마주했을 때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때 깊이 깨달았다. 임종하시는 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못 다 한 이승의 행복을 채워주고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신앙인의 생명은 죽음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영원까지 아우르는 시간의 지평 안에서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양승국신부-


<강렬한 지중해의 태양아래>


지중해를 낀 남부 유럽이나 근동지방을 지나다보면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농장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일조량이 많은 지역이니만큼 포도를 많이 가꾸는데, 그 규모가 얼마나 방대한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여름에 접어들면 강렬한 지중해의 태양아래 끝도 없이 줄지어선 포도나무에는 가지가 휠 정도로 탐스런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포도농장들은 대체로 기업처럼 운영됩니다. 대부분의 공정이 자동화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아직도 어떤 농부들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포도주를 담급니다.


저도 언젠가 한 농가에서 일손을 도와주었는데, 묵은 포도주를 마셔가며, 안주로 신선한 포도를 먹어가며, 흥얼거리면서 새 포도주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병에 주입된 포도주들은 서늘한 지하저장창고에 보관됩니다. 거기 들어가 보면 별의 별 것이 다 있습니다. 커다란 돼지 다리 한 짝이 매달려 있기도 하고, 맷돌 크기 정도의 치즈도 줄줄이 매달려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그쪽 지방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나온 말씀입니다.


포도나무, 포도주, 당도(糖度), 쓸모없는 가지들에 대한 전지작업...이런 표현들은 그쪽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일상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사람들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시작하실 때, 늘 청중들의 입장을 고려하셨습니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일들, 하고 있는 일들, 직면하는 구체적인 상황들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들 만족했습니다. 속이 시원했습니다.


포도농사를 지은 포도밭 주인에게 있어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최대한의 수확을 거두는 일입니다.


그런데 풍성한 포도 수확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기저기 많이 매달려있지만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하는 쓸모없는 포도나무나 의미 없이 붙어있는 가지들일 것입니다.


늦겨울이나 초봄, 전문 농사꾼들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끈하게 전지작업을 해줍니다.


왜냐하면 쓸모없는 가지들, 붙어있어 봐야 일생에 도움이 안 됩니다. 당도만 떨어트립니다. 포도송이도 너무 왜소해져서 상품가치도 떨어집니다. 그럴 경우 차라리 과감하게 잘라내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렇게 잘라진 가지들이 트럭으로 몇 차나 됩니다. 어디 마땅히 쓸데도 없습니다. 한곳에 모아 불을 지릅니다.


보다 알찬 결실은 위해서.


농부에 의해서 잘려나가는 가지들을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잘려나가는 가지들은 어떤 가지들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오래된 가지들입니다. 비록 오래된 가지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원줄기와의 원활한 수액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결실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잘려나갈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가지이면서 점차 원줄기와의 소통이 부족해진 가지들, 원줄기와 단절된 가지들은 날이 갈수록 시들어갑니다. 행여 결실을 맺는다하더라도 말라비틀어져 볼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서원한지 벌써 10년이라고, 서품 받은 지 수 십년 되었다고 떠들 이유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세월, 나이, 연륜, 위치, 직책...너무 내세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소통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끊임없이 쇄신되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초심자의 마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와 액세서리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강영구신부-

당신은 얼마나 많은 액세서리(accessary) 장식물을 가지고 계십니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몇 가지 액세서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값비싼 보석이나 귀금속으로 만든 액세서리로 자신을 치장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誇示)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액세서리는 장식물일 뿐,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어떤 액세서리는 값비싼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서랍이나 장롱 구석에 처박혀서 그런 것이 있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당신과 예수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생명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액세서리처럼 취급하시지 않습니다.
액세서리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나무의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꽃을 피울 수 없고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나무는 가지를 통해서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감미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는 나무로부터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값비싼 다이아몬드로 만든 장식물에서 꽃이 피고 향기 나는 꼴을 본적이 있습니까?
생명 없는 액세서리에는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온전히 예수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으로부터 사랑받는 소중한 가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에게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피고 감미로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진짜 순 참 포도나무
-류해욱신부-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여러분들, 포도나무 또는 포도덩굴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이육사의 싯귀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큰 느낌이나 별 이미지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을까요? 우리가 ‘나는 포도나무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바르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해야 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도나무는 바로 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이 있다면 머리에 쓴 빵모자나 가슴에 단 별이 아닙니다. 바로 포도나무였어요.

  구약에서 수없이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나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 몇 개를 듣기로 해요.
  시편 80, 8입니다. “이집트에서 빼내어온 포도나무, 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 자리에 심으신 후 그 앞에 땅을 가꾸시니 뿌리박고 널리 퍼졌사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하는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 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이사 5, 1-3)
  예언자 예레미야도 한탄합니다. “특종 포도나무를 진종으로 골라 심었는데 너는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구나.” (예레 2, 21)
  호세아 예언자도 참담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이스라엘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를 맺기는 했으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다.”(호세 10, 1)
  예제키엘 예언자는 15장 전체를 ‘포도덩굴의 비유’로 할애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를 외칩니다. “너 사람아, 포도덩굴이 무엇이냐? 숲 속에서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지어 넣듯,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을 나는 불에 집어넣으리라.”

  이렇게 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했고, 포도나무는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포도나무가 원래의 좋은 품성을 잃고 열매 맺지 못하는 잡종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통탄하며 경고를 퍼붓고 있습니다. 원래는 좋은 포도나무, 진짜, 순, 참 포도 나무였는데 생명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면서 변종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징으로 가장 잘 드러난 외적인 표징이 바로 성전 중앙에 있던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포도덩굴이었지요. 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성전의 중앙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포도덩굴은 다시 한번 이룩할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을 상징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저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포도덩굴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 힘없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당신이 바로 진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말로 ‘참’으로 옮긴 희랍어 단어는 alethinos (에이레씨노스)인데 정통적인,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 등의 의미를 지닌 낱말이지요. 우리가 참기름을 사려고 보면 ‘진짜 순 참기름’이라고 선전해 놓은 간판을 보지요. 알다시피, 가짜가 판을 치고 있는데 이 참기름은 가짜가 아닌 진짜 순수한 참기름이라는 말이지요. 그래도 사람들이 잘 안 믿어요.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실 때 가짜가 아닌 진짜, 진종의 포도나무라는 의미이고 여기서 ‘진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가짜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휘황찬란하게 보이는 성전의 황금으로 만든 포도덩굴은 가짜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셨을 말씀을 귀 기울이고 들어봅니다.

  “그대들은 이스라엘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만일 그대들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을 지니고 안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산일 뿐만 아니라 찬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그대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시오! 하느님께서 좋은 참 진짜 진종의 포도나무를 심으신 것은 사실이지요. 시편 말씀대로 그 좋은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빼내온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말이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대로 그대들은 점점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변했어요. 예언자 호세아 애통해하면서 한탄한대로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만 늘어갔구료. 하느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제단의 향이 아닌데 말이오. 예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마치 잘못 자란 포도덩굴을 땔감으로 불에 집어넣듯이 그대들이 불에 던져 질 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소이다. 이제라도 그 불을 면하려거든 제발 아버지께서 보내신 나 예수를 믿으시오. 내가 참 포도나무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대들을 구원한 진정한 구세주란 말이오. 그대들이 구원을 얻으려거든 모두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사실 단순히 나에게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느냐고요? 내 말을 실행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형식과 허례허식으로 전락한 율법, 그 중에서도 안식일 법, 정결례 법, 제사 등의 외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대들 자신의, 그리고 서로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이지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른다고요? 우선, 나와 함께 머무르시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하듯이 나에게 머물러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사랑이시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는, 다시 말해,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지요. 그대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봄이 오기 전에 가지치기를 당할 수밖에 없지요.

  사실 아버지께서 굳이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셔도 나를 떠난 가지는 이미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리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 불에 태워 버리게 됩니다. 불을 보듯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시오. 그러니 제발 그대들은 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자양분을 받고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런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말씀들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제 진정으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 다투지 말고 아껴주고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기로 합시다. 제발 당신이 진짜 순 참 포도나무라고 외쳐야 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기로 해요.


 

 제자들인 가지는 사랑으로 포도열매를 맺는다.
-박상대 신부-

 


요한복음 15-17장은 예수님 고별사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후대에 와서 첨가된 부분이라고 했다. 누가, 왜, 이 대목을 추가로 편집해야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추가 편집된 요한복음 21장을 떠올리면 답이 보인다. 21장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위상(位相)을 높이기 위해 그와 부활예수와의 각별한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편집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15-17장의 의도 또한 그 내용 속에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다. 편의상 앞서간 13-14장을 1차 고별사라 하고, 이 대목을 2차 고별사라 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자.

예수님의 2차 고별사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15,1-17),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 찬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15,18-16,4), 오실 성령에 대한 말씀과 성령과 제자들과의 관계(16,5-15), 제자들의 기쁨과 슬픔(16,16-33), 그리고 예수님의 장엄한 기도(17장)로 구성된다.
예수님의 기도(17장)는 그 기도의 장엄함 때문에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는 제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기도(17,1-8)와 제자들이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기도(17,9-19), 그리고 미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라시는 기도(17,20-26 끝)로 마무리된다. 이렇게 2차 고별사는 1차 고별사보다 훨씬 길고 주제도 다양하다.

1차 고별사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사랑의 새계명, 성령의 약속과 성령의 정체, 예수님의 떠남과 재림에 관한 말씀이 반복되면서, 2차 고별사에는 새로운 주제들이 더해지고 있다. 새로운 주제들이 앞서간 내용들을 재삼 발전시켜 그 의미를 더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이 주제들을 미루어 볼 때 추가 편집자의 의도는, 첫째로 제자들이 앞으로 직면할 문제들을 극복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며, 둘째로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요한복음공동체 또한 이 대목을 자신이 당면한 문제들을 극복하는데 표본으로 제시하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추가 편집자는 대략 요한복음공동체의 일원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2차 고별사는 1차 고별사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학습적 효과를 내고 있다. "자, 일어나 가자"(14, 31b)로 끝을 맺고 있는 1차 고별사가 시기적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현장감(現場感)을 부각시키고 있다면, 2차 고별사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 나아가 예수님과 요한복음공동체 간에 필요한 관계를 확실하게 정립하려는 학습감(學習感)이 고조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2차 고별사를 1차 고별사에서 완전히 떼어 독립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1차 고별사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포도나무 비유는 '나무-가지-포도'라는 상징성 이상의 실재(實在)를 담고 있어 별다른 해석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도 "나는 ~이다"는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언명이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하느님은 농부이시다"는 것이다. 하나 특이한 점은 "너희는 가지다"(5절)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특허가 제자들에게도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포도나무의 가지에 해당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 이미 잘 가꾸어진 가지들로 소개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서 열매는 포도를 가리키며, 나아가 가르침에 따른 행동실천을 의미한다. 이 행동실천의 골자는 1차 고별사의 핵심주제인 사랑의 새계명이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기 위해 사랑 자체인 나무에 끝까지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공동체이든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 공동체가 예수님께 신앙을 둔 믿음의 공동체라면, 예수님 때문에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길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생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 안에 어려움이 있다면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말씀을 재삼 음미하면서 우리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다시금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며,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포도원 주인에 의해 잘려나갈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는 꼭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경고성의 말씀도 되겠지만, 제자들이 우선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강렬한 소망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