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자의 슬기

죽은 나무보다 더 가난하게 /가난한자의 슬기

Margaret K 2007. 5. 10. 01:45

죽은 나무보다 더 가난하게


은둔소에서 멀지 않은 숲의 가장자리에서 거무스름한 연기가 가늘게 올라오고 있었다. 바람도 타지 않고 똑바로 가볍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큰 나무들과 같이 조용히 뻗어올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이 정경은 레오 형제의 호기심을 끌었다. 이 연기는 예사롭지 않은 연기이다. 누가 이른 아침부터 불을 피웠을까? 레오는 순진한 마음으로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관목 몇 구루의 기지에 프란치스코가 작은 불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엇을 저렇게 꼭 태워야만 할까? 그는 프란치스코가 허리를 굽혀 솔방울을 모아 불어 집어넣고 있는 것을 보았다.


레오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사부님 무엇을 태우십니까?”


“바구니” 프란치스코는 간단히 대답했다.


레오는 그의 바로 곁에 버들가지 바구니가 거의 다 타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요즘에 만들고 계시던 바구니가 아닙니까?”


“예, 바로 그것입니다.” 하고 프란치스코가 대답했다.


“왜 그걸 태우십니까? 바구니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레오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아주 잘되었습니다. 너무 잘 만들어졌지요.”


‘그런데 왜 태우십니까?“


“왜냐하면, 조금 전 내가 삼시경 기도를 바치는데 그 바구니가 내 마음을 차지하고 분심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대신으로 즉시 이것을 주님께 희생으로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하고 프란치스코는 설명했다.


레오는 놀라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가 아무리 프란치스코를 잘 알고 있다 해도 이러한 태도에는 항상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의 행위는 지나치게 엄격해 보였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도 중에 분심을 준다고 해서 모두 다 태워 버린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얼마간의 침묵 후에 레오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사부님도 알고 계십니다. 실베스텔 형제가 이 바구니를 얼마나 기다리는지를... 그는 바구니가 필요해서 열심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고 레오가 덧붙였다.


“예, 나도 알고 있습니다. 곧 그에게 다른 바구니를 만들어 주겠습니다. 그러나 이 바구니는 태워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더 급한 일입니다.” 하고 프란치스코가 대답했다.


바구니는 다 타 버렸다. 프란치스코는 남아 잇는 불을 돌로 문질러 끄고 나서 레오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리 오시오, 내가 왜 그랬는지 이야기해 줄 테니.”


그는 레오를 데리고 버드나무 울타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잘 휘어지는 버드나무 가지를 충분히 잘랐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앉아서 다시 바구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레오는 그 앞에 앉아서 사부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손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 모든 형제들 역시 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한 탐욕스런 원의로써가 아니고, 좋은 표양을 주기 위해, 또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일하지 않는 공동체보다 한심스러운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레오 형제, 일이 전부가 아니고 일로써 모두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일이 인간의 참된 자유에 무서운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흔히 인간은 자기 일에 빠져, 진실하시며 생활하신 하느님을 예배하기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묵상의 정신을 꺼 버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해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러나 기도 중에 분심을 줄 때마다 우리가 한 일을 그와 같이 파괴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희생으로 바칠 마음의 준비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인간은 영혼에 순응성을 가지게 됩니다. 구약의 법규에 따라 인간은 추수의 맏물과 가축의 맏배를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배의 행위였고, 자유로운 행위였습니다. 지금도 인간은 자기 영혼을 개방하고 이러한 희생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시야를 무한히 넓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과 자유의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침묵을 지켰다. 그의 모든 주의가 일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레오는 그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한 이야기와 연결되는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그대로 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침묵의 순간이 레오에게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침묵을 메꾸기 위해 무슨 말이든지 하고 싶었으나 신중히 생각하여 억제하였다.


그때 갑자가 프란치스코가 그에게 얼굴을 돌리며 매우 친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오 형제, 인간은 하느님만을 바라보기 위해 자기의 일을 초월하여 올라설 때만 위대합니다. 그때만이 자기 신분에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자기가 만든 바구니 하나, 비록 그것이 아주 잘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것 하나 태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나 온 생애에 걸쳐 이룩한 사업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그것과 아주  다릅니다. 이러한 포기는 사람의 힘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하여 인간은 어떠한 일에 자기를 바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열성과 정열을 기울입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열성은 창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 역시 불가피하게 빌린 것을 가지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의 종인 인간은 대단한 위험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기가 이룩한 사업에 애착하는 정도에 따라 이 사업은 그에게 있어서 세상의 중심이 되고 또 이 사업은 인간에게서 순응성을 근본적으로 없애 버리게 됩니다. 그를 이러한 상태에서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야 하며,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업 안에 일어나는 하느님의 섭리의 방법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이해와 결핍, 반대, 고통, 실패 등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죄까지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십니다. 그때 신앙생활은 가장 위기에 처하고,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도달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조만간 모든 생활 상태에 나타납니다. 인간은 깊이 자기 자신을 자기 사업에 바치고는 자기의 관대함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혼자 버려 두시는 것 같고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 관심도 가지시지 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보다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아예 자기의 사업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시는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몇 년 동안이나 기쁨과 슬픔 속에 몸과 마음을 바쳐온 것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같이 보입니다. ’네가 사랑하는 너의 외아들을 데리고 모리악 산으로 가서 번제로 바쳐라‘ 하신 이 무서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이지만 누구든지 자기 생애 중에 언젠가 이러한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참된 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많은 자식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을 얻게 되자, 하느님께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그를 희생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타격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똑 같은 것을 어느 때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같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이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셨고 인간은 응답했습니다. 이제는 인간이 부르고 있고 하느님은 침묵을 지키십니다. 이 비극적인 순간은 수도생활이 실망에 이를 때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홀로 붙잡을 수 없는 그분과 밤새도록 투쟁을 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두리기 위해 이것이나 혹 저것을 하면 충분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 자체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그가 이룬 업적이 아무리 선한 것일지라도 자신의 업적으로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는 창조주의 손 안에서 도기공의 손에 든 찰흙보다도 더 유순하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다만 비천한 이 처지에서 자기의 가련함을 고백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자기의 절대적인 신뢰와 구원을 맡길 때 하느님의 무한한 힘을 끌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거룩한 순종 안에 들어가 어린이가 되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게 되며, 즐거움과 괴로움의 저편에서 기쁨과 힘을 인식하게 됩니다. 태양과 죽음을 똑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고 같은 엄숙함과 같은 즐거움으로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


레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아무 질문도 하고 싶지 않았다. 프란치스코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사부의 영혼을 지금처럼 깊이 또 밝게 본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틀림없이 체험을 통하여 얻었을 이러한 엄숙한 이야기를 그토록 평온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레오는 전에 프란치스코가 ‘인간은 자기가 체험한 것밖에는 모른다. 고 한 것을 기억하였다. 확실히 그는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실제로 체험하였다. 그는 진실 된 어조로써 이야기했다.


레오는 이러한 체험을 한 사부 프란치스코와 특별히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을 생각할 때 갑자기 정다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참을 느꼈다.


프란치스코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떨리지 않고, 장난하듯이 버드나무 가지를 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