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자의 슬기

머리말 /가난한자의 슬기

Margaret K 2007. 5. 10. 00:15

가난한 자의 슬기

-성 프란치스코


엘로와 르끌레 지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옮김


차례

머리말...............................................

평화를 잃고........................................

어두운 밤에 홀로................................

마지막 별...........................................

가난한 자의 탄식................................

더 깊은 암흑으로................................

새벽이 밝아 오는가?...........................

들에는 종달새 노래............................

예배할 줄 안다면................................

아무것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태양이 빛나는 것을 누가 막으랴...........

죽은 나무보다 더 가난하게..................

여름 햇살보다 더한 ...........................




머리말


현대를 가장 무섭게 힐책하는 말은 아마 : “순박함을 잃어버렸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발전해 나가는 현대의 학문과 기술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발전 그 자체는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발전이 실현되기 위해 인간적인 면에서는 막대한 손실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학문과 기술로써 오만해진 인간은 그만큼 순박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솔직함과 순박함을 지녔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얻은 농부들의 슬기는 그리스도교 정신의 그것과 동화되었었다. 물론 우리 조상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정신보다는 땅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은총보다 물질을 더 많이 생각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때의 사람들은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때의 신앙은 인간의 성실성이라는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 기초는 조금도 흔들리거나 무기력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순박하게 사회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순박함을 잃어버리자, 인간은 행복의 비결 또한 잃어버렸다. 모든 학문과 기술은 사람을 불안하고 외롭게 만들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외롭고, 대중 속에서 외로우며, 자신과 타인의 불성실 앞에서 외롭다.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마귀와 싸울 때도 외롭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삶에 신뢰를 줄 수가 없다. 인간은 때때로 이것을 명백히 깨닫게 될 때가 있다. “어린이와 같이 되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복음 말씀은 인간적인 진리를 더 쉽게 깨닫게 한다.


단순하시고 평화로우신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들에게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갖도록 인도하는 길에 대하여 절실히 필요한 말씀을 해 주셨다. 그 말씀은 근본적이고 단호하다. 중세에 사셨던 이분은 놀랄 만큼 우리와 가까우며 우리의 어려움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여왕이신 지혜여, 기뻐하소서. 당신은 당신의 자매이신 순수하고 거룩한 단순함과 함께 복되도다. 라고 성인께서는 말씀 하셨다. 참으로 단순하지 않으면 풍부한 학문을 가졌다하더라도 슬기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아씨시의 가난한 자보다 누가 더 쉽게 참된 단순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 소책자는 성 프란치스코의 슬기, 즉 그분의 영혼을, 그리고 주님과 인간 앞에서의 그분의 깊은 내적 자세를 묘사하려 한다. 전기를 쓰려는 것은 아니지만 성실을 기하려 한다. 단순한 역사적 서술보다 문학적이지는 못하지만 좀 더 내적이며 좀 더 깊이 있게 서술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려 한다.


외부적인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영혼을 관찰하면서 성인의 생애를 살펴보려 한다.


이러한 방법은 흔히 필요하며 또한 일반적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내적 보화를 발견했을 때 이것을 충만히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려고 노력하겠다. 그 풍요함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하는 역사적 서술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적으로보다는 영적인 면으로 진지하게 표현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의 체험을 독자에게 두 가지 면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는 태양의 넘치는 빛과 자비하심에 대한 체험이며, 다른 하나는 철저한 이탈을 통한 밤의 체험이다. 이 두 가지 체험은 분리될 수 없다. 아씨시의 가난한 자의 슬기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고 빛나는 것같이 보이지만 위의 두 가지 일반적인 법칙에서 예외 일 수 없었다. 이 슬기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고 빛나는 것같이 보이지만 위의 두 가지 일반적인 법칙에서 예회일 수 없었다. 이 슬기는 체험과 시련의 열매였으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끊임없는 수렴과 포기 안에서 천천히 성숙해 나갔다.


자신이 창립한 수도회가 뒤흔들리는 위기를 당했을 때 성 프란치스코의 자아포기는 극치에 달했고 그는 이 위기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이 책은 시련 동안의 성 프란치스코의 괴로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인은 이 비탄의 상태에서 구원을 체험함으로써 슬기를 발견하였다.


“여왕이신 슬기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당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성 프란치스코는 슬기 자체가 구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으며 구원의 슬기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책에서 이야기할 위기의 출발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작은 형제회의 급진적인 확장과 함께 형제회 안에 학자들이 다수 입회한 데서부터이다. 이 새로운 상황은 적응하기에 어려운 문제를 제기했다. 6,000명의 많은 형제들이 12명의 형제들이 살아 왔던 것과 똑같은 조건 아래 살 수는 없었다. 또 다른 문제는 학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창립 당신의 이상을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생활양식에 맞출 필요가 있었던 점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깊이 인식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을 요구하는 형제들 중 많은 형제들의 과장된 정신을 자신의 그것과 같지 않음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자기 이상에 대하여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는 주님께서 영감을 주신 이 생활양식에 대하여 사명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부터 처음 받은 이 영감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초기 동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피해야만 했다. 무분별한 개혁을 하면 그 순박한 영혼들은 틀림없이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게 적응을 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기지와 분별력이 요구되었으나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성 프란치스코는 동방을 여행하기 위해 작은 형제회를 부총장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분은 필요한 순서를 밟지 않고 계획성 없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그 결과 수도회는 분열의 위기에까지 이를 만큼 큰 혼란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이 위기는 프란치스코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그러나 실패했다고 생각되었을 때 거기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이것은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남김없이 정화되는 길이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아씨시의 가난한 자의 이 쓰라린 시련은 자신을 온전한 이탈의 길로 이끌었다. 근심과 눈물을 통하여 마침내 평화와 기쁨에 이르렀다. 가장 높은 복음적 가난의 양식이 현재의 양식이라고 프란치스코는 말했다. 즉 참된 가난은 인성과 신성의 모든 차원에서 현실을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난의 정신은 형제회를 구원하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형제회는 이단에 빠지지 않고 성교회 안에서 내적 균형과 안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