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오 28,16-20)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드는 환시를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복음).
주님께 받은 행복을 이웃과 나누십시오
-키엣대주교-
우리는 막연히 우주를 3층으로 구분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사는 하늘과, 죄인과 마귀를 가두는 지하, 그리고 인간이 사는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주는 점점 더 팽창하고 있습니다. 무한대 우주에 대한 탐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넓은 우주에서 보는 지구는 그저 작은 점과 다름없습니다. 그럼 하늘은 어디를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시지만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하늘이란 우리가 올려다 보는 물리적인 하늘이 아닌 하느님이계시는 곳, 바로 그곳이 하늘입니다.
오른쪽에 앉으심
‘하늘로 오르시고 오른쪽에 앉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무형이시기에 볼수도 물리적 공간적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른쪽이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권능을 나누어가지심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분께서는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죽음까지 감내하는 모든 고난을 이기셨기에 마치 그 상으로 하느님의 하늘에 오르시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누리시는 영광이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신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자는 다른 누가 아닌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공정한 심판을 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그에 합당하는 모든 것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불의로 고통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더없이 정의로운 천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 옆에서 온전한 행복을 누리실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땅에서 정의를 위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오르셨기에 자녀인 우리도 하늘나라로 올려질 것입니다.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셨기에 자녀인 우리도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양들의 우두머리가 어디를 향하든 양떼는 그 우두머리를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기 위해,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먼저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은 하늘나라에서 참 행복으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행복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처럼 이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만이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임무는 바로 언제나 하늘을 지향하는 마음과 영혼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이 세상의 고통과 인연에 얽매여 내가 가야할 길을 잃지 마십시오.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오늘이 내일이 되고 내일이 모레가 되면 영원히 주님의 손을 놓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게 바로 지금은 보이지않지만 참행복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마음과 영혼은 행복과 사랑으로 가득 해워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행복과 사랑의 삶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주저하지 말고 선교의 길을 떠나십시오. 선교는 다름 아닌 주님 안에서의 행복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교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다면 바오로와 베드로 성인의 선교의 길을 따라가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주님과 가까이,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영혼으로 주님을 만나고,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선교의 시작입니다.
나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삶,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게 주님과 같은 사랑을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은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선교를 떠나기 전에 기도로써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스스로 믿음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며, 봉사와 박애정신의 실천을 보이는 생활, 나아가 바로 옆에 사람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 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미사에 참석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지만 그들 모두가 선교를 하지는 않습니다. 성당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을 읽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선교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희가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의 열정적인 선교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1.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이 위대한 선교자가 되기 이전에 체험한 것을 묵상해보십시오
2. 선교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 주님안에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을 이웃에게도 전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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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자로서는 너무 고되고 힘든 시간처럼 보이는 데도 기쁨을 가지고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저보다 더 힘드신 분도 많은데, 저만 힘들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언젠가 읽은 책을 통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물리학자 스테판 클라인에 따르면 힘든 시간을 받아들이면 그 기억은 더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험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면 전뇌의 영역이 편도체를 통제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이 있어야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집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모욕과 치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도 이를 긍정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소집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직접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의심하는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의 의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담겨 있는 복음을 접합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십니까? 그보다 사회의 법칙을 따라야 더 현명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회의 법칙에 충실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때 주님께 대한 의심도 생기게 됩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까요? 문제의 크기를 계속해서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법칙에 충실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말씀으로 사랑을 멈추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긍정적인 감정으로 지금을 사시길 바랍니다.


어느 한 부족의 추장이 자신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부족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 세 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산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온 사람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세 사람은 곧바로 산에 오릅니다.
시간이 흘러 한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귀한 약초를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로 도착한 사람은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뜯은 푸른 이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빈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부족의 미래를 보고 가슴에 담아왔습니다. 이는 바로 언덕 너머의 옥토입니다. 제가 추장이 된다면 그 넓은 옥토를 바탕으로 부족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추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미래에 대해 희망을 꿈꾸는 자가 바로 추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희망과 미래는 중요합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떤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초재 교회 전교의 패러다임: 특별하면서도 오를성싶은 나무가 돼라!
-전삼용신부-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내가 먼저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좋은 것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부분 더 믿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제가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전교는 이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전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요? 믿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을 주려는 것이 전교는 맞지만 바로 믿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납니다.
‘최고의 스타들은 왜 키가 작을까요?’ 『언씽킹』이란 책에 나온 소제목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수입이 가장 많았던 10명의 배우를 봅시다.
1. 해리슨 포드, 2. 애덤 샌들러, 3. 윌 스미스, 4. 에디 머피, 5. 니컬러스 케이지, 6. 톰 행크스, 7. 톰 크루즈, 8. 짐 캐리, 9. 브래드 피트, 10. 조지 클루니
배우로서 ‘주연’이란 말을 떠올리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키가 크고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에 거론된 주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은 니컬러스 케이지뿐입니다.
그런데 니컬러스 케이지가 조각 미남인가요? 조각 미남이라 한다면 톰 크루즈나 조지 클루니를 많이 말씀하십니다. 조지 클루니는 178cm이고 톰 크루즈는 176cm입니다. 물론 저보다야 다 크지만, 서양인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키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말론 브랜도, 멜 깁슨, 로보트 드니로, 알파치노, 실베스터 스탤론, 숀 팬, 맷 데이먼 등의 평균 키는 175cm입니다.
우리나라의 BTS 평균 키가 177.3cm입니다. 유일하게 RM만 181cm이고 나머지는 평균 175cm인데 모두가 사랑합니다. 우리나라의 배우들도 보면 키가 크면 소위 얼굴이 좀 만만하고 얼굴이 좀 부담스러우면 키가 만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180cm인 송강호 씨는 키가 크지만, 얼굴은 조각 미남이 아니고 이병헌 씨는 미남이지만 키는 좀 작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어떤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까요? 분명 솔직해서 자신을 다 드러내는데 또 뭔가 신비감을 감춘 여자입니다. 그냥 한 번 만났는데 다 알 것 같은 여자는 매력이 없습니다. 남자도 특별한 것을 꿈꾸고 누군가를 만날 때 특별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담스러우면 안 됩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면이 있으면서도 단순한 아름다움까지 있다면, 그래서 ‘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마음을 주는 여자가 가장 매력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르지 못할 나무만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오르지 못할 나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만 강조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것만 강조한다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불친절한 복음 전파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살기 부담스러운 나라에서 내 아이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특별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화해서 우리나라에 살려면 어떨까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게 낫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기 부담스럽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경쟁을 시키며 한국인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이상한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있으면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특징만을 강조하며 그것만을 부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매력적으로 되려면 큰 사고 안 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부자가 아니면 무시당하는 문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가 되면 자녀도 많이 출산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저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냥 어울려 사는 것을 ‘친교’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럽지 않은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가족’입니다. 가족이 부담스러우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속할 용기를 얻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리만치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아버지!”란 믿음만 강조할 게 아니라 우선은 모든 사람이 어울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어머니, 형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것이 오를성싶은 나무가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며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가진 것을 나누고 주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 했을까요?
성경에서 초대 교회 선교모델을 한 번 살펴봅시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사도 2,43-47)
일단 성직자들이 ‘놀라운 일과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물론 성사 거행보다 더 큰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친교’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 친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사제들의 몫입니다. 그 친교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이 바탕이 됩니다.
이를 위해 성사가 존재합니다. 성사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게 해줍니다. 이런 친교의 행복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세상에 ‘매력을 발산’합니다. 누구나 친교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보고 들어와 ‘신도들의 모임이 커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선교 방법이었습니다. 현재 성당에서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형제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교적 인원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냉담자를 말할 때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하고 성체성사 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기적을 통해 ‘친교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사의 목적이 친교입니다. 형제간의 친교를 지향하지 않는 성사는 어쩌면 방향을 잃고 무조건 달리는 자동차에 기름을 계속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전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듯, 믿는데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간의 친교로 참으로 행복하고 그 공동체가 구원의 백성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채우는 것에만 목표를 두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 열심히는 하는데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특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가 있기에 교회는 특별합니다.
하지만 성사만 강조한다면 교회의 특별함보다는 오르지 못할 나무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과 특별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누가 부담스러운 사람과 사귀고 싶겠습니까? 자신을 성장시켜 줄 특별함은 갖추어야 하지만 성사만 강조하며 부담을 주는, 그냥 특별함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960년 펜실베니아 중부에 있는 로제토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단 것을 좋아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녹초가 되도록 일했으며 비만도 흔한 이 마을에서 거의 심장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수 마을은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정착촌이었습니다. 그 마을은 계층이 없는 소박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듯하고 친절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바로 건강과 장수에도 직결된다는 의미로 ‘로제토 효과’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냉담자를 정할 때, 성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 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성당 공동체에서 친교를 나누는 사람에게 신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가야 합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없다면 어쩌면 교회도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어 결국에 사라지는 길로 가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성체가 아닌 공동체가 선교하게 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게 가장 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였고, 박해와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마침내 당시 가장 강대한 국가인 로마에 전해졌고, 콘스틴티노스 황제에 의해서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가 만든 길을 따라서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봉건주의 시대에는 군주가 명령하면 백성들은 모두 따라야 했습니다. 군주가 복음을 믿고 교회를 받아들이면 모든 백성이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마을은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유럽에는 그렇게 복음이 전해졌지만 아시아는 달랐습니다. 아시아의 군주들은 유교의 ‘틀’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고,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은 신정일치의 통치체제를 통하여 이슬람을 전하였습니다. 아시아와 이슬람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달라야 했습니다. 아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면서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슬람과 대화하면서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이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토착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이식하려했을 때는 많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이식하려했을 때는 전쟁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창과 칼, 총과 대포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사람들의 몸은 복종시킬 수 있을지라도 마음을 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려는 지식인들이 교리와 전례를 연구하면서 시작된 한국의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호기심이 있었고, 양민과 천민은 교회에서 높고 낮음이 없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가 와서 사목할 때까지, 한국의 교회는 소위 ‘가성직제도’를 만들어서 스스로 주교, 사제가 되어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법과 제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고 사제가 오면서 교회의 제도와 법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활발하게 뿌리를 내리던 한국교회는 몇 가지 이유로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박해는 근 100년간 이어졌고, 만여 명이 넘게 순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교회는 박해를 견뎌내고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100만 명이었던 한국교회는 매 10년 마다 100만 명씩 증가하여 2020년 현재 교적상 5,923,300명의 신자가 있습니다. 본당은 1,767개가 있으며 공소는 704개가 있습니다. 사제는 5,538명, 수도자는 11,788명, 주교는 40명이 있습니다. 박해를 견뎌내고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알릴 수 있는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가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도 참가했습니다. 80만 명이 넘는 신자가 여의도 광장을 가득 매웠습니다. 교회도 놀랐고, 한국사회도 놀랐습니다. 이후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한하여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주관하였습니다. 1989년에도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있었고, 교황님의 방한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활발한 사회참여입니다. 지학순 주교님을 중심으로 자유와 민주를 위한 활동이 있었고, 자유를 열망하던 사람들에게 교회는 희망의 빛이었고, 마지막으로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습니다. 꽃동네를 비롯해서 교회는 약하고, 외롭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종교를 갖는다면 천주교회를 선택하겠습니다.’ 자발적으로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비자 교리에 등록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인터넷이 있고, 각종 소통 수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이 예전보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입니다. 맛집은 멀리 있어도, 작은 곳이어도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맛집의 음식이 맛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알려주는 사람도 적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며 향기를 전해주는 분도 적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의 기쁨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 하셨고,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신앙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 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밝히는 등대처럼 위로와 용기의 희망의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둔 밤을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를 보고 길을 찾듯이,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사람들로부터 삶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교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어느 모임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합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같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비대면 시대를 맞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하게 되는데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선포>
-송영진신부-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1)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성직자들과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면 되지
꼭 모든 신앙인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의 답은 다음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신앙인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고,
동시에 그 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추는 일을 하지 않는 등불은 꺼진 등불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감추는 것과 같고, 신앙을 감추는 것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빛’과 ‘구원의 빛’을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앙인이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는 것과 같은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라는 말을,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신앙인으로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방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적당한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이 말씀이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런 권고도 했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물리치십시오. 알다시피 그것은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주님의 종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가르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또 악마에게 붙잡혀 그의 뜻을 따르던 그들이
정신을 차려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2티모 2,23-26).”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논쟁’처럼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선교활동은 전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봉사활동입니다.
(다른 종교의 교리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식한 일’입니다.
그런 논쟁은 반감만 일으키고, 역효과만 만들어냅니다.)
4)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걱정하지 않는 모습’ 자체가 믿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 말은, 의식주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모든 걱정에 다 적용되는 말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신앙인은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믿음 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보호자와 구원자가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힘든 상황을 만나면 걱정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숨이 막힐 정도로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으니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5) ‘사랑 실천’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이기도 하고,
선교활동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여기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인의 사랑 실천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세워 놓고서 울타리 안에서 신자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 실천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랑 실천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 실천이 없으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는 입장에서 ‘서로’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 실천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조욱현신부-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분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20)
-한상우신부-
모든
민족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진리가 복음이다.
복음과 봉사는
분리될 수 없다.
봉사가 가장
적극적인
복음의
모습이다.
복음은
모든 민족들을
향한 참된
봉사로
드러난다.
이와같이
복음은
봉사와
공동선의
추구로 우리를
초대한다.
전교는
신앙인들의
본래적
소명이다.
소명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집과
교만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나누는 것이다.
건강한 삶의
나눔이
진정한
전교이다.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일이다.
전교는
일방적이지
되어서는
아니된다.
참된 전교는
배려와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쌍방적인
사람의 소통이다.
서로를 통해
서로를 위한
우리의
복음화이다.
복음화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서로간의
위로와
정화이다.
전교는
거창한 구호가
아닌
생활 속의
참된 실천이다.
올바른
생활의
실천이 바로
전교이다.
우리의 전교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복음화의 미래는
복음화에 있다.
복음화는
올바른 삶의
나눔이다.
나눔의
한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나눔은 전교의
시작이며
힘찬
출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들 중 더러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열외로 내치지 않으시고 함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미 주님께 믿음을 굳힌 이들과 달리 그들은 사명을 수행해 나가면서 믿음 또한 키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수 차례의 수난 예고와 실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스승을 따르는 길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을 터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로마 지배층과 유다인들이 새로운 길에 적대적이니 '세상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큰 부담일 수 있지요. 자기들에게 여전히 신앙과 지혜가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동행 약속이 얼마나 든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은 당신 현존의 기간을 세상 끝 날까지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신 이 순간부터 앞으로 계속,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어느 한 시기를 살다 떠난 어느 위인 정도가 아니시지요. 그리스도교는 박제화된 과거를 전하는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존하시는 주님을 전하며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지붕 아래로 모여 들 평화의 날을 노래합니다. 그때에는 서로 대립할 일도 싸울 일도 없을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사 2,3)으로 모든 이가 깨우치고 위안을 받으며, 살상 무기들은 생산을 위한 도구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닫힌 마음들을 열고 무기들을 녹이며 어둠을 밝힙니다. 제자들을 통해, 제자의 제자, 그 제자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이 모든 이들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모성을 흔들어 깨워서, 사랑과 자비를 되살려내고 충만하게 키워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난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닮고 그분과 하나 되려는 열망을 심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빛 속을 걷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한 존재 안에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간결히 전합니다. 먼저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와 듣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포된 말씀께서 듣는 이의 마음 안에 믿음을 형성하십니다. 말씀께서 그이 안에 거처하기 시작하신 겁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정해진 날수가 계속되는 날까지 지속될 약속이지요.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 위안이고 용기이며 힘이 되어 주십니다. 설령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어둠과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는 듯해도 우리는 이성과 감각을 뛰어넘어 이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언어와 문화, 인종과 종교, 민족과 신분을 넘어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한 자녀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과 기도로 사심 없이 전하는 사랑의 복음이 모든 이에게 빛이 되고 평화를 선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실 겁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말씀 나누기 - 전교 주일-선교사적 사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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