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10. 21. 06:24

2021년 10월 21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가 12,49-53)

 

 Do you think that I have come

to establish peace on the earth?
No, I tell you, but rather divis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시며, 한 집안의 식구들이 갈라져 맞서리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 세례명은 ‘마태오’입니다. ‘빠다킹’을 세례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는데, 이는 별명일 뿐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 이 세례명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멋진 외국말 같은 세례명도 참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그레고리오, 프란치스코, 헨리코 등의 멋진 세례명도 많은데 우리나라 이름과 비슷한 ‘마태오’라는 세례명을 부모님께서는 왜 정하셨을까 싶었습니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기에 제 뜻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세례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간 뒤, 마태오 성인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주보 성인을 따라간다는 말처럼 저는 마태오 성인처럼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모든 모범이 제게는 정말로 커다란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멋진 이름이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멋진 이름보다는 멋진 삶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멋진 이름을 가지고 엉망으로 사는 것보다, 어떤 이름이든 상관없이 멋진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응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멋진 이름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멋진 삶을 사는 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참 진리의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이 불은 어떤 불일까요? 아마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노력’이 이 불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노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에 잘 보이는 세상의 법칙에 더 관심이 많고, 이를 철저히 따르려고만 합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남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면서 재물을 모은다고 행복할까요?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라면서 각종 비리를 저지릅니다.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주님의 법칙은 세상의 법칙처럼 겉으로만 멋지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법칙을 따르는 사람이 ‘바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라는 비판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큰 분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평화가 아니라 분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분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법칙보다 주님의 법칙을 따르면서 주님 마음에 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멋진 삶입니다.

주님의 관점을 철저히 따르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는 만큼 자신의 행복도 커진다(제러미 벤담).

신앙도 안정 괘도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사고 나는 구간은 이륙할 때의 3분과 착륙할 때의 8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구간을 마의 11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착륙할 때의 사고는 조금 이해되기는 합니다. 날다가 땅에 착륙할 때의 충격이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금의 실수가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륙할 때의 사고는 왜일까요?

모든 엔진을 한꺼번에 가동해 폭발력을 내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일정 고도에 이르면 6개의 엔진 중에서 2개만 가동해도 비행기는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엔진이 켜지는 이륙 직전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비행기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비행기가 어느 정도의 고도에 이르러야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어느 정도의 괘도에 이르기까지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 안에서 커다란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금의 노력만 하고서 힘들다고 또 어렵다고 포기한다면 안정된 신앙생활이 아닌 불안정한 신앙생활로 큰 혼돈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노력하며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아무런 노력 없이 받기만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성령의 불이 붙으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를 일러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하시며,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라고도 하십니다.

당신의 세례를 통해서 세상에 불이 질러진다는 뜻입니다. 

‘불’은 ‘빛’이 되기도 하고 ‘나를 태우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을 받으신 분답게 당신이 짓눌러져야 함을 예상하십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의 세례로 불이 붙어진 이들은 이전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족과도 세상과도 분리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단편영화로 제작한 것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습니다. ‘44번 버스’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중국의 어느 시골길에서 한 청년이 2시간 가까이 기다려 44번 버스를 탑니다. 버스 운전자는 예쁜 여자입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가던 버스는 몸이 아파 보이는 두 사람을 발견합니다.

착한 운전자는 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버스에 태웁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변합니다. 강도였던 것입니다. 칼로 위협하며 버스에 탄 사람들에게 금품을 갈취합니다.

버스 안에 남자들도 많이 타고 있었지만 다치기 싫어서 모두 고분고분 가진 것을 다 내어줍니다. 

 

그들은 할 일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립니다. 내리다가 운전자의 얼굴을 보고는 운전자를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성폭행하려는 것입니다. 버스에 탄 남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힘을 합치면 강도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말리고 어머니가 말려서 누구도 운전자를 도와주지 못합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탔던 그 청년만이 밖으로 뛰어나가 싸웁니다. 그러다 칼을 다리에 찔립니다. 

 

여자 운전자는 심한 폭행을 당하고 다시 버스에 탑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승객들을 노려봅니다.

이때 절뚝거리며 청년도 버스에 다시 타려 합니다. 그러나 운전자는 그 청년의 가방을 밖으로 던져주고는

문을 닫고 출발합니다. 청년은 어리둥절합니다.

도와주려 피까지 흘린 자신만 태우지 않고 떠나버리더니! 나중에서야 청년은 알게 됩니다.

그 운전자는 길을 가다 높은 다리에서 버스를 추락시켰습니다.

자신과 함께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사망하였습니다. 

 

세례 때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은총과 진리’입니다. 진리는 마치 빛과 같아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은총은 그렇게 행동하도록 힘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불’이라고 언급하신 것이 바로 ‘진리’이고,

짓눌리게 만드는 ‘압력’이 바로 은총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어 은총을 받았기에 생전 모르는 형제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여자 운전자는 세례를 거부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 중 유일하게 그녀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청년밖에 없었습니다. 청년은 생판 모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그렇게 하도록 압력을 가합니다. 운전자는 그 부담스러움 때문에 그를 태우지 않습니다.

세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위해 은총과 진리를 쏟아내신 분이십니다.

만약 그분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분이 하신 일을 보고 또 그분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그분처럼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거부한다는 말은 그분처럼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버스 운전자처럼 됩니다. 

 

버스 운전자는 그 부담스러운 남성을 받아들여 자신도 똑같이 아무 잘못도 없이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피 흘림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청년을 받아들였다면

마치 깨가 열과 압력으로 기름이 짜이듯 자신도 버스에 탄 승객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위해 피를 흘린 그 사람까지 함께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내 안에 태우는 것이 세례입니다.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태웠다는 증거는 나도 누군가를 피 흘리게 한 사람이기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는 세례를 받고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이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빛과 열로 우리를 당신처럼 살도록 강요하십니다. 그 첫 열매가 ‘용서’인 것입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한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브라디는 수녀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수녀님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브라디의 빛이 되고 압력이 됩니다.

수녀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은총과 빛을 받아들였고 자신도 그렇게 불과 압력으로 기름이 짜이듯 죽었습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세례를 부르고 용서는 용서를 부릅니다. 이 시작이 세례가 되는 것이고 세례를 받았더라도

누군가 용서가 안 된다면 나는 예수님을 내 버스 밖에 내려놓은 것이 됩니다.

그렇게 불타고 있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재형신부-


지난 한가위 때입니다신부님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분은 예수님입니다마태오가 주인공이 아닙니다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도 주인공은 아닙니다복음서가 이야기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우리가 이렇게 신앙 안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신앙을 전해 주신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이렇게 추석 한가위를 함께 모여서 기뻐하는 것은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셨던 조상들에게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가진 것을 쌓아 놓고 기뻐하지만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부자처럼 어리석게 살지 않고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어서 천국에 보화를 쌓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것은 본질을 보지 않고현상만 보려는 태도입니다.

 

성서에는 달을 보지 않고손가락만 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달은 진실과 진리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손가락은 작은 것을 탐하면서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는 어리석음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아담이 먹었던 선악과는 손가락일 뿐이었습니다정말 중요한 본질은 하느님의 뜻을 어긴 것입니다다윗 왕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주어진 권력을 남용했고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하느님의 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동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늘 본질을 이야기하셨습니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아니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말이 있습니다. ‘거리두기손 씻기마스크 착용백신접종입니다제가 있는 뉴욕에서는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백신접종을 했다는 카드를 제시해야 합니다카드가 없으면 식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모두의 안전을 위한 조치입니다한국이 코로나 대응을 잘 한 것은 추적검사치료였습니다확진자와 만난 사람을 추적해서 검사하고 치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생활치료소와 같은 것을 만들어서 확진자와 만났던 사람들은 2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그렇게 하면서 사회의 시스템을 멈추지 않고코로나 시대를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추적검사치료의 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나라는 코로나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저는 같은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뽑을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자를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선이 아니면악을 행하는 것이라면 가족일지라도 따르면 안 됩니다악에 머무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같은 악을 행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진정한 평화는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진정한 사랑은 악한 행위를 멈추는 것입니다그래서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더 큰 아버지, 영원불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성경을 봉독하고 묵상할 때 유의할 사항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행간에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의미, 영적 의미를 파악하는 노력입니다. 어떤 부분은 있는 그대로 수용해서는 절대 안 되는 구절도 있습니다. 전후 맥락도 살펴보고 말씀이 의도하고 강조하려는 요지가 무엇인지도 따져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복음 12장 51~53절)

예수님께서는 평소 하느님 공경에 이어 이웃 사랑 역시 아주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복음 10장 27절)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족끼리 서로 등지고 갈라서라는 의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불효자나 패륜아가 되라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해결책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최 우선권을 드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 앞에 배치시키라는 요청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부모 사랑이나 자식 사랑을 금지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 모든 인연 위에 하느님을 모시라는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자녀는 실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복입니다. 그러나 복을 내리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보다 복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더 큰 아버지, 영원불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안내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의 기도(조이수 詩人)


주님 제가 아이들 곁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도록 하소서.

지난날은 아버지 없는 아이들로
거리를 헤매도록 했습니다.

이제, 눈 내리는 겨울 창가를 보며
말씀의 벽난로에 둘러앉아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치도록 도와주소서.

눈이 멎고 찬미가가 울리는 날 제 아이들이
마지막 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되게 하소서.

아이들에게 참된 아버지는 제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란 걸 뼈져리게 가르치고
훨훨 떠나도록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송영진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여기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려고 왔다.”, 즉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겪으셔야 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했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원사업이 전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죄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 대신 속죄하신 일입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당신이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회개를 거부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고집을 안타까워하시는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13장에 다시 나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도시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전체 인류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대재난을 겪어도 깨닫는 것도 없고 바뀌는 것도 없고 그저 일상생활이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인류의 모습은 회개와는 너무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세속 사람들에게는 일상생활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회개를 통해서 ‘삶’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짓눌리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큰 일’을 겪고 죽을 고비를 넘겨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급할 때에는 하느님도 찾고 예수님도 찾고 성모님도 찾다가

그 고비가 지나가면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일을 잊어버리고

살던 대로 살면서 회개를 미루기만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 또 무슨 일을 당하면 후회하고,

예수님께 애원하고, 그 순간이 지나가면 또다시 변화 없는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는데, 내가 주는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치 내가 분열을 일으키려고 온 것처럼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분열시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화’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참 평화’를 뜻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는 관심이 없고,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간에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하느님 나라는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이 없는, 모두가 ‘함께’ 사는 나라이고,

그래서 분열과 갈등이 없고 참 평화만 있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살지 않고, 또 이웃과도 함께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구들이 갈라져서 서로 맞설 것이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맷돌질을 함께 하고 있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이거나

시어머니와 며느리거나 자매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함께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버려둘 것이다.’로 표현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버림받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 말씀은, 회개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해야 하고, 가족이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회개는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지 않으려면,

가족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 루카 12,49-53: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조욱현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말의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요 장차 당신을 심판주로 오시게 할 종말론적 세례로 묘사하신다. 이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 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지르시는 불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이 불로 채워주시도록 청하도록 하자.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한다고 한다(로마 12,11 참조). 또한, 이 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동반자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길을 배운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 사랑은 하느님 자녀들의 마음을 다니며 속된 것,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태워버리고 순수한 것으로 단련시킨다. 사랑은 그 불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이 불을 세상에 지르셨다. 그래서 믿음이 밝게 빛나고 신심이 불타올랐다. 사랑은 환해졌고 정의는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주님께서는 이 불로 사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셨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는 피와 순교로 이루어지는 세례인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다. 이 세례는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는 숭고하고도 복된 세례이다. 즉 당신 육신의 죽음을 말한다. 짓눌린다는 것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이 고통을 겪고 수난 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신앙을 가지면 가족과 불화하라고 하신 것일까? 만일 가정을 깨뜨려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지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면 어떻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자기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를 저주하신 분이(신명 27,16) 부모를 버리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공경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는가?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어찌 부모는 알아보겠는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게 되면 나의 이웃도 올바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의 것으로서 올바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다. 이 둘의 싸움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립되는 의미의 단어들이 줄곧 등장하여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신 분 맞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한때 평화라 믿었던 현실이 안주와 고착으로 화석처럼 굳어져 버렸을 때,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하여 현실을 흔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진실이었던 것이 여전히 진실인지, 그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직도 공동선에 유익한지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내는 이가 필요하지요. 그 안에서 질문을 일으키는 존재는 불, 곧 성령이십니다.

물론 그는,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기득권자들을 불안하고 성가시게 한 죄로 표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칫 사회부적응자나 반동세력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지요. 그가 제기한 논점은 사라지고 질문을 제기한 자체로 상종 못할 인간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이제 그가 감히(?) 깨뜨린 평화가 진정한 평화였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변치 않는 진리는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라 믿던 안위와 무탈과 야합의 가면을 찢고 진정한 평화에 이르려면 균열과 진동, 맞섬과 갈라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을 이루는 두 진영을 선명히 대조시켜 줍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로마 6,19)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은 더러움과 불법을 일삼고, 결국 죄와 악의 종이 되어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의 끝은 결국  죽음이지요. 그가 어떤 제도에 속한 어떤 신분의 사람이건 자기 선택에 따라 영혼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은 질식되고 악이 기승을 부리는 놀이터가 되고 말지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
그간 죄와 맺었던 달콤한 동맹을 깨고 죄에서 갈라져 나와 그동안 주인이었던 죄와 맞서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미 그 기울기대로 굳어져서 존재의 방향으로 틀어 올리려면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하지요.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 주인 자리를 다시 내어드린 이는 그간의 더러움이 어떠했어도 다시 거룩함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 구원 의지를 믿는 그 자체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화답송)
얕은 살얼음판 같은 거짓 평화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께서 영혼에 놓으신 성령의 불을 외면하고 있다면,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의 행복에 귀기울여 볼 일입니다. 시편 저자는 죄와의 오래되고 끈질긴 동행을 끊어내고 거룩함의 길에 들어서라고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진리의 불길이 닿으면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은 인간적 세속적 관계들에 얽혀 있다면 그 관계가 어디서 양분을 받으며 유지되는지, 이 관계가 우리 모두를 하느님 곁으로 모아 주는지, 궁극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진정한 평화를 향해 흔연히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9주 목요일-거짓 평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