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5-38)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개그맨이 ‘나는 항상 구쁘다’라는 글을 자신의 SNS 계정에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구쁘다’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자인지, 아니면 속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줄임말도 속어도 아닌 순우리말이라는 것입니다. 한국말을 50년 넘게 사용해왔음에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 말의 뜻은 ‘배 속이 허전하여 자꾸 먹고 싶다’, ‘먹고 싶어 입맛이 당기다’라고 합니다.
한국인이 한국말도 잘 모른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마 많은 분이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주님에 대해 우리는 완벽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주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조금만 알고 있으면서도 전부를 알고 있는 듯 사는 우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불평불만을 늘 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완전히 모르기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아는 사람은 불평불만보다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금을 살게 됩니다. 미움과 판단보다는 사랑의 삶에 머물게 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종은 바로 주인의 뜻을 듣고 기억해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도착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이 제대로 기다릴 수가 있을까요? 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과연 주인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오지 않는다면서 미움의 감정을 품는 사람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사람은 결코 이런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이 자리를 지키고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기다리며 주인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지금을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리도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특히 사랑으로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입니다.


걱정의 점수를 1에서 10점까지 매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집의 가보라 할 수 있는 도자기를 도둑맞았다.’
보물인 ‘가보’이기에 걱정의 점수가 꽤 높을 것입니다. 지금 최고의 고민거리라면 어쩌면 10점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면 이에 대한 걱정의 점수는 어떻게 될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큰 슬픔과 아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걱정의 점수는 최고 점수인 10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보물을 잃어버린 일의 걱정 점수는 어떻게 될까요? 10점이 될 수 없습니다. 7점 이하, 어쩌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지금 어렵고 힘들다면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별것 아닌 것으로 힘들어하냐며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가장 어려운 삶을 사는 중입니다. 이 점수를 낮추는 것은 남이 해주지 못합니다. 바로 나만이 최고의 걱정을 가져다주는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바라보면 점수를 매기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행복의 길: 열정의 띠를 매고 사랑의 등불을 들어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종들!”
주인이 왔을 때 깨어있는 종이란 '언제나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 종’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원하는 일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주인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돌아오면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야 하고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띠’가 무엇을 의미하고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 ‘깨어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띠’는 ‘봉사할 자세’를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받은 대로 해 주신다면 분명 우리가 한 대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불’이란 ‘사랑과 봉사’를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당신이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 뜻은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등불’을 들고 허리에 ‘띠’, 곧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십자가를 메시고 우리에게 봉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매 순간 사랑실천을 위해 성령으로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불행에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줄 힘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 등불을 들고 ‘실천’이라는 띠를 매고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영화 ‘네이든’(2017)은 영국 수학 천재 소년 네이든의 유년기 실화를 담았습니다.
네이든은 자폐아입니다. 감정을 표출할 줄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사회성이 뒤처집니다. 이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아버지는 네이든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주고 아버지는 특별히 네이든이 수학에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런데 불행이 닥쳤습니다. 네이든과 함께 차를 몰고 가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네이든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주려 하지만 네이든은 마음의 문을 닫아겁니다. 어머니는 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사 오라고 할 때 항상 소수(1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나눌 수 없는 수: 2, 3, 5, 7, 11, 13, 17, 19)로 사오기를 원합니다. 엄마는 새우튀김을 사갈 때도 9개 준다는 것을 7개만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항상 네이든에게 무식하단 취급을 받습니다.
어쩌면 네이든은 아버지가 죽은 원망을 어머니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이든은 수학에만 더 몰두하였습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폐증 환자에게 능력까지 없다는 것은 그냥 모자란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네이든은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 영국 대표 16명 예비 명단에 올라갑니다. 이 중에서 6명의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기 위해 대만에서 진행되는 2주간의 합숙 훈련에 참여하게 되어 네이든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됩니다.
16명의 영국 아이들은 대만 아이들과 짝을 이루는데 네이든은 장메이라고 하는 여자애와 짝이 됩니다. 그러나 악수도 못 하고 어찌 대해야 할 줄 모릅니다.
장메이는 그냥 사랑 가득한 아이입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활달하고 아무 표현도 못 하는 네이든과 잘 놀아줍니다. 새우튀김이 8개라고 주저할 때 그냥 하나를 집어먹어 7개를 만들어줍니다. 자신의 가장 어려운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해주는 장메이에게 네이든은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낍니다. 다행히 둘은 각 나라 6등으로 나란히 올림피아드에 나갑니다.
시차 적응을 위해 하루 쉬는 날이 있었는데 장메이는 긴장을 했는지 네이든의 방에 찾아옵니다. 네이든은 좀 쉬다 가라고 합니다. 둘은 가벼운 뽀뽀를 하고 그냥 잠이 듭니다. 그러나 대만 지도자가 아침에 갑자기 들어왔고 장메이는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네이든은 시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랑의 공식만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시험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응원하러 왔던 엄마는 깜짝 놀랍니다. 네이든은 엄마에게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야 했느냐며 웁니다. 그런 네이든을 엄마는 안아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는 장메이를 만나러 역에 가자고 데려다줍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띠를 매고 등불을 들어주기만을 기다린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먼저 띠를 매고 등불을 들고 있습니다. 네이든은 교통사고 이후 처음으로 앞 좌석에 탑니다. 그렇게 네이든과 장메이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다니엘 라이트윙’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네이든에 의해 7등으로 아쉽게 떨어진 한 아이가 화장실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너도 자폐증 진단받았지? 난 특별한 재능이 있으니까 이상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근데 특별하지 않다면 그냥 이상한 거야!”
이것이 깨어있지 못함입니다. 빛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함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곧 수학이나 돈, 재능, 명예 등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지 못함입니다. 비록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칠 용기가 있어도 그것이 등불이 아니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종교를 통해서도 특별해지려 했습니다. 종교가 아닌 사랑으로 특별해지려 해야 합니다. 그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네이든의 아빠처럼 자녀들에게 특별해질 수 있다는 띠를 매어주고 네이든의 엄마처럼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사랑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불을 손에 들려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는 지혜를 줍시다. 이것이 자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모기 뒤에 숨은 코끼리’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모기는 아주 작지만 매우 귀찮습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물기 때문입니다. 밤에 잠자리에서 모기에 물리면 짜증이 나고, 결국 불을 켜고 모기를 잡기 마련입니다. 책은 사소한 일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기와 같은 사소한 일 뒤에 커다란 코끼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꽉 끼는 신발을 신으면 발의 뒤꿈치가 까질 수 있습니다. 불편한 신발을 신고 지하철을 탔을 때 누군가 실수로 발을 밟으면 평소와는 달리 더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신발 속에 감추어진 뒤꿈치의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감추어진 상처는 보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무시당한다는 생각, 간섭받는다는 생각, 나의 허물을 들추어낸다는 생각, 실패한 일들에 대한 생각들은 나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작은 일을 통해서 주체하기 어려운 ‘화’가 되기도 합니다.
아버님의 기일을 지내면서 어머니, 형수, 조카들과 추모관엘 다녀올 때입니다. 연도를 하고, 기분 좋게 돌아오면서 중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마침 어린이 날이라서 중국집에는 손님이 많았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40분 정도 기다렸는데 우리보다 더 늦게 온 손님에게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곧 우리가 주문한 음식도 나왔지만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족들은 주문한 음식을 먹고 나왔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직원이 실수로 그렇게 한 것을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참지 못하고 화를 낸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주문한 음식을 먹고 나왔으면 좋았는데 화를 참지 못하고 나왔기에 집에 오는 길에 배가 고파서 또 화가 났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는 부당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계급이 있었고, 하급 병은 그런 것쯤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화를 낸 이면에는 ‘코끼리’가 있었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익숙해진 편리함이 있었습니다. 식사할 때면 으레 음식이 먼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릴지라도 먼저 앞자리로 가라는 권유를 받곤 했습니다. 순례를 가는 버스에서도 맨 앞자리에 앉곤 했습니다. 조별로 자리를 바꾸었지만 저는 자리를 바꾼 적이 없었습니다. 민박집에 가서도 독방을 마련해 주곤 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불편하게 같은 방을 사용하는 것을 알면서도 같이 자자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무라시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모습이 제게 있었습니다. 사제복 안에 겸손, 희생, 나눔, 봉사, 인내가 있어야 했는데 권위, 자존심, 가식, 허영,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화’를 낸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의 무례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났지만 사제라는 이유 때문에 참아 주셨습니다. 화가 난다면 그 현상 뒤에 숨어있는 코끼리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는 죄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는 의로움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담의 불순종 뒤에 있던 코끼리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비열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 뒤에 있던 코끼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신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들고 깨어 있는 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렇게 깨어서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은 어떤 등불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가식, 교만, 게으름, 허영, 분노의 등불을 들고 있으면 그 등불은 본인과 이웃에게 큰 상처를 주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희생, 나눔, 겸손, 온유의 등불을 들고 있으면 그 등불은 희망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 환하게 피어나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종이요 죄인인 우리 각자를 위해 시중을 드시겠답니다!
-양승국신부-
피정센터에 와서 형제들과 함께 주로 하게 되는 일이 시중드는 일입니다. 픽업해 드리는 일, 잠자리를 준비하는 일, 식탁을 준비하는 일, 서빙에다 뒷정리...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최고참 어르신 신부님께서도 예외 없이 바비큐 담당으로서 기쁘게 장작을 패시고, 화부 역할에 최선을 다하십니다.
오랜 세월동안 어디가나 늘 대접받고 살다가 시중드는 일을 해보니, 시중드는 일에 종사하는 분들의 고달픔이나 애환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저야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일이 될 때, 견뎌내야 할 몫이 얼마나 큰 것이겠는가, 하는 생각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시중드는 일아 만만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 이 일을 통해 느끼는 보람과 기쁨도 의외로 큽니다. 존중받고 환대받는 느낌을 받은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그 감동을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도 작지만 사목의 한 부분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개인적으로 화들짝 놀랐습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복음 12장 37절)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일입니까? 창조주시면서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죄인인 우리 한명 한명을 위해 식탁에서 시중을 드시겠답니다. 우리를 위해 직접 식탁보를 펼치시고, 손수 수저를 놓으시고, 서빙을 하신답니다.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시는 하느님의 모습 앞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어이없어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땅에 육화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성목요일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지친 제자들을 위해 아침상을 차려놓고 그들을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가장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식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겸손한 섬김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식탁의 특징 역시 겸손한 섬김이어야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시겠다는데, 아무에게나 시중을 드시지는 않습니다. 시중의 대상은 오직 깨어있는 종들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는 평생토록 허리끈을 단단히 매고 환하게 등불을 밝히며 살아온 우리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앞에 풍성한 선물과 영적 잔칫상을 차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수고한 만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반영억신부-
베드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 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본당신부를 할 때에 가끔 예고 없는 가정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러면 행복해 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집안정리를 잘 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 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물론 집안 정리가 잘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 맑은 것도 아닙니다만 열심한 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안 정리를 못해서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깨어있어 행복한 오늘입니다. 항상 깨어 안 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종은 그 신분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참으로 겸손하고 순종적이면서 바로 이웃에겐 그토록 교만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깨어있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깨어서 기다리던 주인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깨어 있어라.>
-송영진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원래 이 말씀은, 당신을 본받아서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인데,
“예수님은 지상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고, 하느님 나라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는 분” 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예수님의 시중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최고의 상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과 같은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ㄱ.13).”
그때 제자들은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평화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에 받게 될 ‘벌’이 아니라,
그날 받게 될 ‘상’과 ‘복’을 더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심판 때에 벌을 안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하느님께서 주실 ‘상’과 ‘복’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만일에 벌을 안 받는 것만을 바라면서(지옥에 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강제노동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을
희망하는 신앙생활은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됩니다.
그 신앙생활은 의무감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투덜거리는 생활이 아닌,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기뻐하는 생활이고,
누가 시켜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좋아서) 하는 생활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그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심판을 의식하면서 ‘깨어 있는 생활’을 하는 것도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말은, 일을 할 때의 복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맬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띠를 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고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은,
주인이 도착한 다음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켤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를,
“‘어둠 속에’ 있지 말고, ‘빛 속에’ 있어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죄 속에서 살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그 때’가 닥친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다는 말은 특별한 의미가 없고,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주인이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늦게 올 것이라고 마음대로 예상하고서 방심하면 안 되고,
지금 곧 온다고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의 수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복을(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인데,
지금은 불행한 상태에 있지만 나중에는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상태도
복 받은 상태, 또는 행복한 상태입니다.
(만일에 벌을 주려고 오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종이라면,
그 종은 두려움 때문에 기다림 자체를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상을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생활이기 때문에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행복하고 기쁜 생활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주인과 종의 위치가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주인이 종에게 ‘큰 행복’을 주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루카 15,20-24).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을 옆자리에 앉히고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주면서
마치 시중을 드는 것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그 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8-10).”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서나 저쪽 세상에서나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은
당신이 원하셔서 하시는 일이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복음: 루카 12,35-38: 깨어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조욱현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하신 말씀과 비슷하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이는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들의 영에 좋은 것을 함께 찾아야 한다. 가야 할 길을 끝까지 다 가지 않으면 “한평생 믿음으로 산 것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바르나바의 편지 4,9) 때문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하지 못할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 37)
-한상우신부-
행복을
아는가?
깨어있음이
행복이다.
행복의
출발점은
언제나
깨어있음에
있다.
삶이란
깨어있음으로
삶을 채우는
여정이다.
깨어있음을
주님께
내어드린다.
깨어있음의 길이
즐겁고
행복한
신앙의 길이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
깨어있는 몸에
깨어있는 정신이
있다.
찌그러진
마음을
펴게하는
깨어있음의
정신이다.
나를 돌보고
너를 돌보는
깨어있음의
우리 마음이다.
내려놓는
결단과
진실한 소명이
깨어있음의
길이다.
사랑은
깨어있음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복음은
깨어있음의
기쁜소식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다.
사랑을 지켜내는
깨어있음이
우리 곁에 있다.
사랑은
깨어있음으로
행복하고
행복은
깨어있음으로
기적같은
사랑이 된다.
신앙공동체를
살리는
깨어있음은
회개이며
반성이다.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깨어있는
오늘 그날이다.
첫마음을
잃지 않는
깨어있음으로
주님,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절망을 치유하는
깨어있음
그 희망과
구원또한
깨어있음에
있음을 믿는다.
구절초를
적시는
가을비가
마음을 깨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깨어 있으라고 독려하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6)
예수님께서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는 종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주인이 기척을 하면 그때가 언제이든 용수철처럼 반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영육의 촉수가 주인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 주인은 띠를 메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이것이 그 결과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주인이 종이 되어 섬기고, 종이 주인처럼 섬김을 받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일까요? 그 답을 제1독서에서 찾습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먼저 죄가 왔고 그 다음에 구원이 왔습니다. 첫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새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은총이 도래하였어도 알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 율법의 지배 아래 자신을 묶은 채 구원의 해법을 율법에서 찾으려 골몰하는 동안, 새로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익숙하고 안전한 옛것에 취해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죄로 얼룩져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인간의 비참이 하느님의 자비를 움직였습니다. 죄와 죽음에 신음하는 인류에게 창조 때의 온전함, 첫 범죄 이전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리셨지요. 당신 백성을 만나시기 위해 혼인 잔치에서 숨가쁘게 달려오신 주인이 바로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새 아담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알아보는 이들, 구원을 갈망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열렬히 기다리던 이들과 더불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보통의 주인들과 다르게, 당신을 고대하다 맞이하게 된 이들을 되려 섬기시면서 자신을 낮추셨지요. 복음 속에 언급된 '주인답지 않은 주인'의 모습으로요.
그 결정적인 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많은 이들이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미래를 걱정하며 경쟁하고 모으고 쌓으면서 삽니다. 그런데 물질과 육체에 명민하게 깨어 있다 보면 영적 사정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니,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왜 기다리는지조차 잊고 영혼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를 각성시켜 주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복음 환호송)라고요.
언제라도 주인이신 분을 기쁘게 맞이하려 깨어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아 우리도 행복하고, 기다리는 우리를 보시는 주님 또한 더욱 행복하실 겁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9주 화요일-은총으로 죄에서 사랑으로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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