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10. 20. 07:02

2021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 39-48)


You also must be prepared,
for at an hour you do not expect,

the Son of Man will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죄의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게 하고, 그럼으로써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50대 후반의 이 형제님은 당뇨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이 사실은 형제님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한 후 재활치료를 받는 데 비참함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어떤 환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그래도 열심히 재활치료에 임하겠다고 결심했다면서 함께 치료를 잘 받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두 다리가 그대로 있잖아요.”

그러자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고로 제 아내를 잃었습니다.”

누구의 상실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상실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상실 속에 있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상태에서도 힘차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나의 모습을 원하실 것 같습니까? 할 수 없다며 포기하는 삶이 아닌,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힘을 내는 삶을 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아무런 노력하지 않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우리가 할 준비가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십시오.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그 모든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해야 할 준비였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세상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이라는 구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술, 마약 등 다른 것에 의지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받은 만큼 많은 것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시는’(루카 12,48)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 실천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글을 쓴다는 것.

어느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하루 15분씩 나흘 동안 본인 인생의 가장 상처가 되는 경험에 대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강점’을 글로 쓰게 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학생들은 상처가 되는 경험이 귀중했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98%의 학생들이 다시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학생들은 글로 쓰는 것을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경험을 통해 건강이 오히려 개선되었다고 합니다. 상처가 된 경험을 글로 썼던 학생들은 이 연구 이후에 교내 병원 방문 횟수가 줄어든 것입니다.

글을 쓰면 객관적 시각을 얻게 됩니다.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해결책을 찾는데 쓸 수 있는 중요한 시각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잘하는 것을 원하실까. 끝까지 하는 것을 원하실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종, 특별히 사제들이 깨어있어야 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제들이 깨어있는 방식은 이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사제에게 부제가 필요한 이유는 사제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그러니 사제가 신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양식은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 성체도 포함되지만, 특별히 강론준비나 교리나 성경과 같은 가르침일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질은 떨어지더라도 제때에 말씀을 전하는 게 더 좋을까요? 오늘 말씀대로라면 질적인 것보다 ‘때’가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질 좋은 강론을 준비하다 때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때마다 강론을 준비하다 보면 저절로 질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때에 꾸준히 양식을 내어주지 못하게 만드는 최고의 적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완벽주의’입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데서 우울감이 오고 그래서 또 우울하게 만들어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완벽하다는 생각을 버리면 됩니다.

  

    영화 ‘비버’(2011)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 월터 블랙과 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내용 전체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자살 직전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월터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장난감회사도 망해가고, 가족 관계도 파탄이 납니다. 자살도 실패할 정도입니다.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립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고 아이디어가 보이기 시작해 회사도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도대체 영화에서는 월터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해나가게 되었다고 표현했을까요?

    바로 자기 손에 끼어 있던 비버 손인형과 대화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며 자신을 비버로 여깁니다. 사람들에게도 자신은 비버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처방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니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줍니다. 사람들은 월터와 이야기하지 않고 월터의 비버와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비버처럼 여기는 것은 분명 자기비하입니다. 그런 방법은 오래 못 갑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것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우울증은 자신이 자기를 평가하는 기대치보다 못 미치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 옵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버로 여기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비버가 하는 모든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결과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비버는 기껏해야 나무때기로 작은 댐을 만들면 그것으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비버라고 여기면 자기비하입니다. 결국, 월터는 비버 때문에 자기 팔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는 우리 자신이 정말 비버보다 더 나약한 존재로 보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내가 작아 보이고 그러면 그냥 작은 일을 해도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라 윌킨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다이빙 10m에서 미국인으로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다이빙은 중국 선수들에게 밀려 단 한 번도 미국이 금메달을 따보지 못한 종목입니다.

    윌킨스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합니다. 7주간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때 미국 팀의 코치와 주치의는 그녀에게 올림픽 출전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얼마큼 큰 부상이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3년간의 준비 과정을 수포로 돌릴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성적은 메달 밖이었습니다. 5차에 걸친 다이빙을 하는데 3차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4차에 완벽한 다이빙을 하여 바로 1위로 올라섰고 더 완벽한 다이빙으로 5차에서는 금메달을 확정 짓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루어냈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감격으로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는 그냥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포기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보다 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하셨지만, 자존감이 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 맨밥을 주시면서도 미안해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반찬이 없어 맨밥에 물 말아먹은 적이 있습니다. 둥둥 떠 있는 쌀벌레들을 제거하고 맨밥을 먹자니 헛구역질이 났습니다. 물론 밥을 먹다가 중간에 총각김치를 찾아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저희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그렇게 주는 것에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굶기지 않은 것에 만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양식을 거르지 않고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굶기지 않으신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완벽히 준비된 양식을 주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때에 주면 됩니다.

그렇게 못하게 되는 이유는 내 자존심 때문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그대로 때를 거르지 않고 양식을 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벽함을 도모하다가 시작도 못 합니다.

    완벽주의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매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쨌건 그렇게 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더 나은 양식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과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실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언가 할 수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축복이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데 실망스럽고 우울하고 멈추고 싶다면 생각하십시오. 그건 교만함 때문이란 것을. 예수님은 제때에 양식을 주라고 하셨지 그 질적인 면에서는 한말씀도 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고 제때에 양식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 죽이든 밥이든 깨어있음에 만족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집시다. 모든 것을 끝까지 가지 못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완벽주의는 주님 앞에 머물 줄 아는 사람들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초등학생 때는 중학생이 부러웠습니다그러면 더 많이 알고더 잘 할 것 같았습니다중학생 때는 고등학생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군대에서는 상급병이 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제대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사제가 되면 이제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될 것 같았습니다보좌 신부 때는 본당 신부가 되면 사목을 더 잘할 것 같았습니다사제생활 30년을 했지만 상황이 바뀐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중요한 것은 상황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였습니다과거의 굴레에 잡혀있으면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린다면 현재는 늘 근심과 걱정입니다주어진 현실에 몸을 맡기고즐기면 언제나 마음은 햇살 가득한 날들입니다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언제나 기도하십시오늘 감사하십시오항상 기뻐하십시오.

 

중세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속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희생하셨고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우리의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중세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관념의 세계를 따르기 보다는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삶을 이야기 하였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현대교회는 연대와 소통의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또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고백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라고 생각합니다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입니다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라고 이야기 합니다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민족사상의 벽을 넘어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자연과 생명과 연대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테이야르드 샤르댕메튜 폭스토마스 베리토마스 쿤과 같은 분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지구라는 작은 별을 넘어서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우리가 언제 하느님의 품으로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 있었습니다기도로 깨어 있었습니다그리하여 고난의 순간에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질 수 있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순교성인들에게 지복직관의 영광을 주셨습니다고인이 되신 부모님께서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언제나 감사하였고늘 기도하였고항상 기쁘게 사셨습니다그러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우리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시대와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던 것처럼오늘의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하게도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영원한 주인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한 조직이 성공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최고 책임자는 물론이고 구성원 모두가 지녀야할 한 가지 마음가짐이 있는데...그것은 바로 ‘주인의식’입니다. ‘주인의식’은 말마디 그대로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회사 일이지만 마치 내 일처럼 온갖 정성을 다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단체의 기물이지만 마치 내 물건처럼 여기며 아끼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입니다. 내가 소속된 조직의 구성원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주인의식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는 널리 알려진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창 건축 중인 공사장을 지나다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3명의 인부를 보았습니다. 그는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하루하루 일당을 받으니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벽돌을 쌓는 중이요.”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런데 때로 주인의식이 지나치게 되면 주인행세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인의식과 주인행세 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겸손의 덕의 유무입니다. 주인의식은 주인으로서의 당당함과 함께 주인으로서의 겸손도 함께 지녀야 합니다. 주인행세에는 당당함과 요구만 있지 겸손이나 배려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슬기롭지 못한 불의한 집사가 지녔던 태도는 100% 주인행세였습니다. 그는 분명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한낱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일정 부분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겸손과 배려의 덕이 전혀 없었던 불의한 집사는 갑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쥐꼬리만한 권한, 별것도 아닌 작은 완장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갑자기 어깨가 우쭐해지면서 주인행세를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잠시 맡긴 재산을 마치 자신의 것 인양 흥청망청 썼습니다. 

 

하인과 하녀들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매일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해 지냈습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주인행세의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던지는 경고의 말씀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복음 12장 46절)

  

사실 우리 인간 존재는 본질상 그 어떤 것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가 그 사람의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라의 통치권을 물려주고 쓸쓸히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막대한 돈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그 돈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우리 모두 나이를 먹습니다. 80,90, 100... 그때 되면 천만 원짜리 수표를 손에 쥐어줘도 이게 돈인지 종이인지도 구별 못하게 됩니다. 애써 모은 돈들은 모두 자동으로 누군가의 소유로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그저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영원한 주인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변치 않는 든든한 주인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반영억신부-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가12,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몽땅 차지했으니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12,47).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집행과 복음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그에 맡겨진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권리이기보다는 책임입니다. 저는 한 기관의 책임자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철저히 ‘을’입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가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주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12,40).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혹 많이 받고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를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송영진신부-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종말과 재림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

2) 그런데 그날과 시간은 말할 수 없다는 것.

3) 그렇기 때문에 종말과 재림을 맞이할 준비는 ‘지금’ 해야 한다는 것.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지는 날과 시간은 인간이 미리 계산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4-6).”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는,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 않게 하려면

빛 속에서(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는,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는, “지금 ‘죄와 악’ 속에서

살고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그 죄와 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는,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신경 쓰지 않고 태평하게 살고 있는

‘안 믿는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평소에 늘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합시다.”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2-48).”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들도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은 전체 인류를 대상으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슬기로움’(지혜)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나중’을 생각해서 ‘지금’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반대로, ‘나중’은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쾌락에만 빠져서 사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내세,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면서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결국 ‘그날에’ 어떻게 되는지는 각자 자신이 선택하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세속의 재판처럼 법정 공방이 벌어지는 재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날의 심판을 맞이할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그날 어떻게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맡기셨고,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관리자이고 ‘집사’입니다.

인생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슬기로운 집사’이고,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은 ‘불충실한 집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을 얻으려고 지금 충실하고 슬기롭게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44절의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46절의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불충실한 자들’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과 길을

막지 않으셔도 그들 자신들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서

‘밖에’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시는 분인데,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는 말은, 종말의 날과 시간은

인간이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불충실한 자들이

아무 준비 없이 그날을 맞이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라는 말씀의 뜻은,

“신앙인이라면 내세와 심판을 의식하면서 신앙인답게 살아라.”입니다.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경고’ 말씀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라는 ‘호소’입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해서, 또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산 사람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은 피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복음: 루카 12,39-48: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조욱현신부-


매 순간을 충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어제의 말씀에 이어 오늘은 더욱 구체적으로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들어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41절) 물었다. 베드로는 이 비유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절)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의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을 하게 된다면, 그런 종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 이라고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절)이라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의 종인지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
집사는 압니다. 주인이 왜 자기를 다른 종들에게 봉사하는 자리로 불렀는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이미 주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충실하고 슬기롭게 제 역할을 수행하면서 맡겨진 종들에게도 유익을 주겠지만, 거기에 더해 차츰 주인을 닮아갈 겁니다. 그것이 그에게 허락된 가장 큰 선물일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로마 6,17-18)
복음에서 보듯, 집사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인의 뜻을 토대로 자기가 무얼 해야 하는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재물과 육의 질서에 묶여 살아갔고, 율법의 문자에 매달려 사고하고 행동했습니다. 단죄와 심판이 앞섰고 쾌락과 욕정에 타인을 희생시키며 자신을 드높였지요.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 6,14)
반면 은총 아래 있는 의로움의 종은 다릅니다. 복음 속 주인의 바람처럼 그는 맡겨 주신 다른 종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며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합니다. 그 일이 바로 주인의 일이기 때문이고, 주인이 그걸 바라시니 순종할 따름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율법과 전통의 그늘 아래서 태어나 숨 쉬고 교육받으며 살아온 구약의 백성 중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된 이들은 말하자면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문자를 넘어서 의미로, 형식을 넘어서 정신으로 모험을 시작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주인이 하셨듯 단죄가 아닌 포용으로, 심판이 아닌 용서로 맡겨진 이들에게 헌신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먹이고 키우고 돌보는 주인의 자비와 사랑을 따라하다가 닮아가고 닮아가다가 끝내 하나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의로우신 주인 마음에 순종하여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주인께서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느닷없이 오시더라도 사랑의 상태에 머물러 사랑을 살고 있다면 그 해후의 순간이 얼마나 행복할런지요! 은총 아래서 의로움의 종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9주 수요일-은총의 악용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