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가12,54-59)
You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why do you not know how to interpret the present ti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이 시대는 풀이할 줄 모르냐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에게 1만 원을 나눠주고 익명의 낯선 이와 원하는 만큼 나눠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인심을 후하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소득 최하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수입의 3%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반면,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만을 기부했습니다(물론 이 1%가 전체 기부금의 70%를 상회합니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더 베푸는 경향이 많다는 실험이었습니다. 이들이 비록 돈은 적지만 사랑을 많이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이유를 찾게 됩니다. 부자가 더 많은 액수를 나누기는 하지만 여유 있는 데서 조금 나누는 것으로, 진정한 사랑 실천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왜 이렇게 판단력을 잃게 되었을까요? 사실 우리 삶의 방식을 잘 살펴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좋은 일이라도 하기 싫은 일이 있고, 반대로 나쁜 일이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면 묘한 핑계를 붙여서 꼭 내 마음대로 하고 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이득이 더 많은 쪽을 선택하는 우리였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던 모습이지요.
최초의 사람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서는 하와 핑계를 댔었고, 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어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으로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표징을 볼 수 있고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뜻인 사랑을 철저하게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독일의 재무부 장관을 지낸 마티 바덴(Marty bad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를 위해서도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게 된 하나의 계기는 어렵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 여행 중에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생겼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는데 자신의 낡은 신발이 없어진 것입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께 “하느님도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저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 가게 하십니까?”라며 외쳤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라 여관집 주인이 헌 신발을 건네며 미사에 같이 참석하자고 권했습니다. 마지못해 끌려갔지만, 신발을 잃어버린 생각으로 미사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바덴은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겠구나. 그런데 나는 겨우 신발이 없어졌다고 하느님께 원망까지 하고 있으니….’
이 체험이 그를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왜 인간은 저절로 사탄이 되어가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성령의 불을 붙이시기 위해 십자가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성령으로 죄가 씻겨지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그 ‘성령의 불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어야 타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서 오면 비가 올 것을 알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는 것을 압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로 번역되었지만, 직역하면 “이 시기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입니다. 곧 당신께서 성령을 주시는 이때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시기란 이제 우리를 고소한 자에게서 풀려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라고 하시는데, 합의한다기보다는 수동태로 “풀리도록(to be released) 힘써라!”로 번역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성령에 의해 풀려나는 것이지 내 힘으로 능동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인본주의적 생각이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죄는 내 노력이 아니라 용서로 풀리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가 새총으로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장작 사이에 죽은 오리를 몰래 감추어놓았지만, 이것을 여동생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동생은 오빠를 부려먹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나 심부름을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할머니에게는 “오빠가 다 하겠대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동생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너무 힘들어 할머니에게 다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단다. 단지 네가 동생에게 어디까지 끌려다니나 보고 있었던 거란다.”
내 죄책감은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대상에게서 용서를 받아야 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알려주는 시스템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하느님이 넣어주셨고 그래서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심판관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탄이 됩니다. 양심은 나를 고소하는 알람과 같은 기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나를 고소하기 위해 끌고 가는 사람이 바로 ‘양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재판관’에게 넘겨지는데 여기에서 재판관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스스로 죄인으로 심판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러면 ‘옥리’에게 넘겨지는데 옥리는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죄책감은 나를 사탄의 손아귀에 쥐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양심의 고발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엔 죄와 지옥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뻔한데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양심이 없다거나 스스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클랜’(2015)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를 믿다가 은퇴한 아버지 푸치오가 부자들을 납치해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을 뜯어냈던 사건을 담았습니다.
아들 알렉스는 친구를 납치하는데, 아버지를 위해 작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고는 아버지가 친구를 죽인 것을 알자 그 일에서 손을 떼려 합니다. 알렉스는 아버지를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다 경찰에 걸리고 맙니다.
알렉스와 아버지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가정을 위해 했다고 줄기차게 자기합리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못한 알렉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법정으로 가다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시도를 했지만 죽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법학 학위를 받아 2008년 출소하여 변호사 일을 합니다. 소시오패스가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려 해도 주위의 영향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저런 가정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도 원죄의 영향으로 죄에 물들지 않을 수 없는 환경입니다.
알렉스가 자살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가족을 위한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자기 힘으로 무마하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양심이 없다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기합리화하면 됩니다. 물론 자기합리화가 지나치면 결국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양심의 문제를 내버려 두면 끊임없는 자기합리화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자기합리화를 멈추면 그 죄책감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은 사이코패스가 되었고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굴레에서 인간은 점점 더 사탄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물론 자살한다고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용서를 청하고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통해서만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변하지 않는 굴레를 이해하고 빨리 성령을 받고 탈출하라는 말씀입니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알람이기에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하고 하느님만이 다시 바로잡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 방법은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가죽옷이 성령의 불입니다. 그런데 가죽옷을 입으면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죄만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 그리스도로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을 받으면 부모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닌 이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자아와 사탄에게 넘겨져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하나의 법칙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리스도로 사느냐, 인간으로 사느냐는 그리스도로 사느냐 사탄이 되어가느냐와 같은 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고발자인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계속 끌려가 지옥으로 들어가느냐,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불가에서는 선을 수행하면서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부처의 가르침일지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폴 카퍼는 ‘열린사회와 적들’에서 인류의 철학적인 스승이라고 존경받는 ‘플라톤, 칼마르크스’를 비판하였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뛰어난 지도자가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는 자칫 전체주의에 빠질 수 있고, 우생학을 근간으로 타 인종에 대한 억압을 행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폴 카퍼의 열린사회는 뛰어난 지도자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발전시키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국가는 발전은 느릴 수 있겠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칼마르크스는 역사를 필연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다음은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 인식은 맞지도 않고, 있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는 필연의 과정이고, 인류는 그런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21일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였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존의 국제질서는 강대국들이 이끌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을 막지도 못했고,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앞으로의 세계 질서는 모든 나라가 연대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백신의 개발도, 치료약의 개발도, 방역도 연대와 협력이 없으면 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백신의 허브로 백신을 공급하고, 어려운 국가를 위한 지원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기후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탄소중립을 이루어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대화와 타협만이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음을 경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북한과의 판문점 선언이 있었고, 북한과 미국의 싱가포르 선언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정전중인 한반도에 종전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엔의 지지와 협력을 부탁하였습니다. 한국의 방탄소년단도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하였습니다. 지난 2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고, 앞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일상의 소중함을 알았고,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율법도, 계명도 하느님의 나라로 가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듯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와 함께 했던 지난 2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 성사인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눔이 더욱 절실한 시대임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하느님께 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징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양승국신부-
나라 안팎이 시끌시끌한 요즘 유난히 그리운 한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평화의 사도 성(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20-2005, 재위 1978-2005)입니다. 그분은 발길 닿는 곳 마다 목소리를 높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전쟁은 가장 무거운 죄임을 천명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들을 직접 찾아가 화해와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자행된 전쟁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평생토록 ‘전쟁과의 전쟁’을 주도하셨던 그분의 평화와 관련된 메시지를 요약해보니 오늘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길 내용이더군요.
“나는 전쟁과 폭력을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선언합니다. 폭력은 악입니다. 폭력은 결코 건설의 도구가 아닙니다. 폭력만이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는 외침을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인간의 품위에 맞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폭력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무릎을 꿇고 호소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애원합니다. 길을 바꾸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평화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자비로우신 주님께 청합니다. 극단의 야만에까지 떨어진 우리 인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한국 교회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그분은 순교자들의 땅이자 분단국가, ‘전쟁 발생 고위험군’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을 각별히 마음에 두셨습니다. 당신도 어린 시절 나치 독일과 소련 치하에서 큰 고통을 겪으셨기에 분단된 한국의 아픔을 당신의 고통처럼 느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셨던지 교황 재위 시절 두 차례나 방한하셨습니다.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은 로마 밖에서 실시된 최초의 시성식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세계성체 대회 참석차 방한하셨는데, 당시 주제는 한반도 평화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메시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평화와 정의 속에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비극적 분단을 가슴아파합니다. 분단된 대한민국의 고난은 분열된 이 세계의 상징입니다.”
2011년 5월 1일 바티칸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어떤 분이신지 감동 깊게 묘사하셨습니다.
“저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82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저를 로마에 부르셨습니다. 저는 23년 동안 그분 바로 옆에서, 매일 그분을 뵈면서, 그분의 인격을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은 언제나 저를 감동시켰고 든든히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복잡다단한 직무 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만남 속으로 빨려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의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하나 그분의 모든 것을 벗기셨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것처럼, 바위로 남아 계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6년 5개월이란 긴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총 104회, 129개국을 방문하셔서 역사상 가장 여행을 많이 하신 세계 지도자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지구를 서른 바퀴 도는 것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기록적인 순례를 거듭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갈라진 이 세상에 보다 많은 다리를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리는 다름 아닌 평화의 다리, 반전(反戰)의 다리, 사랑의 다리, 화해의 다리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겹겹이 둘러쳐져 있던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 부자와 빈자 사리의 수많은 벽을 허물기 위해 평생토록 동분서주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 정의의 실천, 가난한 이웃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블랙리스트’에 오른 국가라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행 위험 지역이라며 측근들이 만류할 때조차도 사랑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한 평생은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중단 없는 긴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나는 아니야
-반영억신부-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를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에페4,26)권고 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송영진신부-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4-56)”
이 말씀은, 자연현상을 풀이하는 일은 잘하면서
그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은 왜 모르느냐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 시대’는 ‘메시아 시대’와 ‘종말’을 뜻하고,
동시에 ‘회개해야 할 때’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 시대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과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안다고 잘난 체 하면서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외면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정말로 실천해야 할 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지혜 13,1).”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8-9)”
실제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성서학과 신학을 잘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성서학과 신학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학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으로 그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성서학과 신학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앞의 10장에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5ㄴ-28)”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네가 알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실천’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과 율법과 신학과 이스라엘 역사 등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영원한 생명과는 아무 상관없는 ‘죽은 지식’이 될 뿐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7-59).”
여기서 ‘올바른 일’은 ‘회개’를 뜻하고, ‘판단’은 ‘실천’을 뜻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라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능동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고소한 자’는 하느님으로 해석됩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재판관이신 분이시고, 동시에 죄인들을 기소하는 검사이신 분입니다.)
‘고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5-46).”
이 말씀에서 ‘모세’는 모세가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앞의 ‘고소한 자’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죄 지은 사람 자신의 ‘양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소한 자와 ‘합의’를 본다는 말은 회개를 뜻합니다.
‘도중에’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기 전에’입니다.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 여행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고소당해서 재판관에게 끌려가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거나 의식하지도 않으면서 살겠지만......)
어떻든 회개는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행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지금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죄인의 멸망을 바라시지 않고 회개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회개해서 살 기회를 주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보속을 완전히 마칠 때까지 연옥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연옥도 지옥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무서운 곳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끝난 곳, 보속을 할 수도 없는 곳,
희망이 전혀 없는 곳, 완전한 절망과 후회만 있는 곳입니다.)

복음: 루카 12,54-59: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조욱현신부-
오랜 경험으로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안다. 언제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지 예측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이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신부를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아가 2,10-12) 여기서 신부는 교회이며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봄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준 징조들을 통해 이 시대의 본질을 알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도 또한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결국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 재판관은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모두 치르기 전에는 결코 나올 수 없고, 옥리도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 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 57)
-한상우신부-
스스로와
저절로
사이에서
가을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다.
신앙의 기초는
올바른 일을
스스로
하는 데 있다.
올바른
일을 위해
그릇된 것을
우리가
버리는 것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키고
고칠 것은
고치는
실천이다.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마음을 고치는
데 있다.
마음을
고치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이다.
화해는
마음을 쓰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법이다.
우리시대는
참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바뀌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뿐이다.
삶이 더러운
것은 마음이
더러운 것이다.
복음은
마음의
회복이다.
삶이
어지러울수록
마음과 마음의
화해가 중요하다.
마음의
화해를 위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거기에
우리마음이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지를
다시 자신에게
묻는다.
올바를 일이란
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보며
자기모순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변화하고
싶은 마음과
변화하려는
실천이다.
마음도
먹어야 산다.
마음은 결심을
먹고 산다.
순간순간
돌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우리들 마음이다.
단풍은 우리
마음을
물들이듯
마지막 한 닢까지
허공과 어우러진다.
처음도
마지막도
마음이다.
힘 써야 할
올바른
마음이다.
올바른 일의
시작에는
올바른 마음이
있다.
올바른 마음은
매일매일
복음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갈 것이다.
복음의 힘은
마음의 힘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돌아보도록 이끄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를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
예수님의 한탄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연과 세상 일에 대해서 짐짓 아는 체하면서 막상 지금 어느 "때"가 도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이 세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성령의 빛으로 자기네 역사를 통찰하면 예언자들이 남긴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에 이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이방 민족들의 연이은 점령과 흥망성쇠, 유배와 귀환, 동방 박사와 세례자 요한의 출현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거쳐 이제 이스라엘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백성들을 생명의 나무 아래로 모으고 계심을 눈앞에서 보는 중입니다.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환경이나 능력 탓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무지는 죄가 되지 않지만,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는 완고함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이들은 올바른 일을 판단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하는 것이지요.
보지 않으려는 눈, 듣지 않으려는 귀, 열지 않으려는 마음은 그 앞에서 아무리 진리를 외친들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자기 영광과 이익에 털끝만큼이라도 손실이 될 것 같으면 모르쇠가 되어 버리기 일쑤지요. 예수님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은 걸핏하면 예수님께 율법과 관습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분의 정당성을 폄훼시키려 애썼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부르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 실존 안에 깊이 배어 있는 죄성을 들려 줍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8-19)
진지하게 영성 생활에 들어선 이들이라면 깊이 공감하는 내용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고자 용기를 내보지만 그보다 자신 안에 스멀대는 욕정과 탐욕, 자기애와 이기심, 자기 영광의 유혹과 타협하는 게 더 쉬울 때가 많지요.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로마 7,22)
하지만 원래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고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영혼에 스며든 "죄의 법" 곧 "죽음의 법"이 더 손쉽고 가까우며 자극적이기까지 한 건 사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거짓 속에서 진리를 향하려고 고개를 드는 용기는 더욱 가치있고 귀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하는 것, 두려움 속에서 믿음을 붙잡는 것, 절망 속에서 희망하는 것, 우리 육 안에 자리한 죄와 죽음의 법에 절연을 선언하고 선과 생명의 손을 잡는 결단은 참으로 거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자연의 징조 못지 않게 주님의 "때"를 깨닫고 생명의 나무인 그분 십자가 아래로 모여든 이들입니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가 세상적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죄의 법이 아닌 주님의 법을 선택했기에 주님 곁자리를 떠나지 않는 충실한 벗들이지요.
나약한 죄인인 우리가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은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죄의 짐을 직시하고 벗어버리면서 지치지 않고 주님께 돌아서는 것뿐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욕정과 탐욕, 자기 영광의 죄성을 완전히 탈피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끈질기게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는 있으니까요.
각자 자신의 영혼 안에서 거룩함의 영역을 넓혀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죄에 떨어지는 회수보다 한 번 더 주님을 선택하고 또 그게 거듭거듭 쌓이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흐르는 주님의 섭리에 따라 영의 생명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두 개의 나, 내 안의 나
-김찬선신부-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을 요즘 말로 요약하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또는 두 개의 내가 있다는 말이고,
그래서 자아의 분열은 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저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고,
우리의 의지에는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두 개의 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내 안에는 지금까지 형성된 나와 되고 싶은 내가 있는데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내가 마음먹었다고 바로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없기에 형성된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분열이 있게 됩니다.
사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는 우리 속담처럼
어렸을 때 형성된 것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1987년 제가 일본에 처음 갔을 때 교또에는 코리안 센터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일간의 왕래가 많지 않았기에 그때 미사는 오래간만에
한국에서 온 신부가 교포들에게 우리말로 드리는 미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강론을 하는데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 강론이 감동적이서가 아니라 한국말 강론이었기 때문이지요.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미사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는데
일본말은 잘하시지만 우리말은 잘못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안 해서 우리말을 잘하지 못하지만
알아듣는 것은 좀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마음에 와닿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그런 분들이 치매에 걸리면
어떤 분은 일본말을 싹 잊어버리고 잘 못하는 우리말만 해서
아파 병원에 가면 통역이 필요하다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 배운 말과 엄마가 해준 음식이 우리 안에 깊이 박혀 있고,
그렇게 형성된 습관과 기호와 인식과 의식이 나를 형성하고 있기에
그런 나는 쉽게 바뀌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거지요.
게다가 제가 그저께 우리 안에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있고
감성이 상선을 쫓지 않으면 욕망이 하선을 따르게 된다고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아무리 이성이 진리를 따라야 한다고 하고
의지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욕망을 따라 산 사람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이성의 법을 따르기 쉽지 않은 건 당연하지요.
그러니 그저께 이미 말씀드렸듯이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프란치스코처럼 체험하기 전에는 그리고 시편 말씀처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기 전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두 개의 내가 싸울 수밖에 없고 하느님 체험을 했다 해도
그 좋으심에 깊이 맛들이기 전에는 두 개의 내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두 개의 내가 있는 것 때문에
자신이 비참한 인간이라고 하면서도 결론처럼 이렇게 얘기하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인성 면이나 성덕 면에서 바오로 사도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한 두 개의 내가 싸우는 것은 피할 수 없는데
이 싸움을 포기하겠습니까, 구원자 주님의 도움으로 계속하시겠습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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