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루가13,1-9)
If you do not repent,
you will all perish as they d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그들 안에 사시기만 하면, 그들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하시며,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린 소년 조니는 항상 학교 가는 길에 성당을 지나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성당 문을 살짝 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예요. 조니.”
그리고는 미소를 짓고는 문을 닫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이 소년은 나이가 들어서도 매일같이 성당 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예요. 조니.”
여름에 졸업여행을 가면서도 성당 문을 열고 하느님을 놀라게 하려는 듯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조니는 그만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 바로 직전 조니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조니, 나야. 하느님!”
사후세계를 믿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후세계를 다녀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인 세상에서 무조건 사후세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특히 주님께서는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임을, 그리고 우리가 모두 빠짐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 땅에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가 죽인 갈릴래아 사람들과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보다 죄가 크고 큰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삼 년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지요. 그다음 해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 버리라고 포도 재배인이 이야기합니다.
열매가 바로 회개입니다. 지금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회개가 일어나야 죽음 이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회개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커다란 후회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중요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어느 원로 시인의 에세이를 읽다가 자신이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여인으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이라고 적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눈에 반해 고백하고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여인에게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심한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힘든 마음을 시로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했고, 그 시가 당선되어 지금까지 시인으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그 여인이 자신을 받아주었다면 그런 시를 쓸 수 없었을 테고, 문예지 등단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좌절과 절망의 어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커다란 선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다면 반드시 선물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선물인지를 찾아보는 것, 지금의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회개’가 주제입니다. 회개는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까요? 우리가 지은 죄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 회개하려면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인 게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삼 년 동안 열심히 거름을 주며 가꾸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결국엔 잘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몸을 가린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은 믿음이 없음을 상징하고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나 자신을 믿는 삶에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회개해야 했던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뱀을 믿었다는 것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한 행동에서만 회개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삶이 아닙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영화과 ‘밀양’입니다.
영화 ‘밀양’은 회개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분명 전도연 씨는 믿음을 갖게 되어 용서해 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유괴 살인한 범죄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신도 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시골에 와서 돈 많다고 떠벌리고 다녀서 결국 아들을 유괴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찾아가보니 그 유괴범은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시 나가지 않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자기도 죄가 있었다고 회개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를 넘어서 ‘나’에게서 회개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만 회개하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있다는 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하느님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죽이는 봉헌이 되어야 회개이지 내가 한 행위에서 아무리 회개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부정’과 ‘하느님 인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의 믿음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게 회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살펴봅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다가 빌리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자신이 깨끗해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을 바친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치면서도 여전히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제물에는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못 박혀 그 피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니 그런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주님께 무슨 가치가 있어서 주님께서 그 제물 덕분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거나 무언가 나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제물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무엇을 바랍니까? 그냥 받은 것에 감사해서 앞으로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는 받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열여덟을 ‘여섯 + 여섯 + 여섯’으로 보고 있습니다. 666. 짐승의 숫자입니다. ‘세속-육신-마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탑은 ‘자아’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으로 씻기만 하면 깨끗해지는 실로암이 있는데도 자기를 믿었기에 그 자신에 깔려 죽게 될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은 주님 무상의 선물입니다. 실로암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믿거나 세속-육신-마귀를 탑처럼 세워놓고 은총을 받으려 한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앵그리스트맨’(2014)은 인생의 모든 게 불만인 헨리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춤을 배운다고 해서 연을 끊었고 아내와도 별거 중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인생을 비관하는 의사에게 뇌동맥류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언제든 뇌혈관이 터져 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열이 받은 주인공은 도대체 그러면 얼마나 사느냐고 묻습니다. 의사도 자신에게 다그치는 그 사람이 싫어서 그냥 ‘90분’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곧 터지니 정밀검사를 받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쳐나가 마지막 90분 동안 해야 할 일을 찾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첫 번째는 아내와 화해하는 것, 두 번째는 아들과 화해하는 것, 세 번째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갔더니 다른 남자와 있었고,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동창은 단 한 명 나왔는데 어렸을 때 여자친구를 뺏긴 것 때문에 이제 곧 죽을 주인공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터지든 말든 이젠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주치의가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를 구합니다. 그리고 지금 혈관이 새고 있으니 병원으로 가자고 말합니다.
주인공은 뛰어내릴 때 이미 자존심까지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 춤 연습하는 곳으로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아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용서를 청합니다. 어렸을 때 아들과 함께 췄던 춤을 춥니다. 주인공은 수술을 하고 8일을 더 삽니다. 그러면서 아내와도 친구와도 화해합니다.
봉헌은 바로 헨리가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는 것이 아닌 주님께 맡기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더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만 표현됩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끝내 나를 믿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믿을 때 가장 먼저 믿게 되는 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봉헌은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결심입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봉헌되어야 했습니다. 선악과의 봉헌은 더는 뱀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표현입니다. 그 때문에 회개는 봉헌과 직결됩니다.
이 선악과가 구약에서는 십일조가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내라고 말씀하셨으며 미사 때 빵과 포도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끝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무서운 결말을 제시하시며 참된 회개의 표징을 봉헌으로 표현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내 피를 제물에 섞어 봉헌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사에 위탁하겠다고 내 자아의 탑을 무너뜨려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봉헌에 내 피를 섞고 그래서 내 힘을 빼고 교회의 성사에 위탁합시다. 이것이 회개의 표징입니다.

-조재형신부-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의 저자인 배철현 교수의 강의 ‘나는 누구인가?’를 들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쉬운 것 같지만 어렵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나는 주어진 삶을 극복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열정과 용기를 가지고 주어진 상황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영웅은 큰 업적을 이룩한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웅은 용기를 가지고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다신교를 믿던 인류에게 일신교를 이야기했던 사람이 있는데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과 히브리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있다고 합니다. 아크나톤의 신은 태양신이며 태양이 모든 곳을 비추듯이 그 신은 풍성하게 해 주는 신이었다고 합니다. 유일신을 이야기했던 아크나톤은 그러나 이집트의 역사에서 기억되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모세의 신은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을 알고 있는 신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을 아픔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신이라고 합니다. 유일신은 다른 신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신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알아주고, 치유해 주는 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고,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하는 신은 유일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신의 속성은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거룩함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다름’입니다. 우리와 다른 특별함 때문에 그 앞에서면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매력입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기에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름, 신비, 매력’은 신의 거룩함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모세는 신에게 묻습니다. ‘내 백성에게 신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알려야 합니까?’ 신은 모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나로 있는 나다.” 모세의 신은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이사악과 함께 했던, 야곱과 함께 했던 신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도 하느님을 모세와 비슷한 방식으로 체험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지진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천둥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길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주 작은 떨림과 같은 바람 속에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침묵의 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나 자신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때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느꼈던 하느님, 엘리야가 느꼈던 그 하느님을 월트 휘트먼은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서 이야기합니다. 휘트먼은 시를 통해 각자의 활동이 그 차이를 초월해 하나의 본질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하나의 본질 속으로 융합되는 신비로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본질은 바로 시인의 자아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인류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 당신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내 안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시오.”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할 줄 아는 신앙생활은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어도, 어느 시간에 있어도 신앙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신앙의 꽃은 기쁨, 평화, 감사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의 꽃을 힘들고 지친 이웃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직분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지금 하느님의 편에 있는지, 아니면 악의 그늘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회개를 통해서 나는 좀 더 겸손해 질 수 있고, 주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 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예수님은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주님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올봄에 심은 무화과 묘목들을 돌봐주다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밭에 심은 무화과나무 한그루 비유가 현장감 있게 다가옵니다.
과일 나무를 심는 밭주인 입장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요? 너무도 당연하겠습니다. 묘목이 빨리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성장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는 것이겠지요.
저희도 매실나무 밭에 무화과나무 열 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름 여기 저기 묘목 심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물도 듬뿍듬뿍 주고 거름도 넉넉하게 주며 어서 빨리 묘목이 자리 잡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두 그루만 남기고 나머지 8그루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남아있는 두 그루에 지극정성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양질의 퇴비도 추가로 뿌려주었습니다. 무성해진 잡초도 제거해주었습니다. 정성 탓이었는지,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잎도 무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심어놓으신 한 그루 무화과나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는 밭주인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깊이 뿌리를 내리고, 웬만한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튼실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겠지요. 잎만 무성한 나무가 아니라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실속 있는 무화과나무로 성장하는 것일 것입니다. 겉은 멀쩡한데, 결실이 없는 나무가 부지기수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결실 없는 나무 중에 한 그루입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재배인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복음 13장 7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언제나 우리 편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한번만 선처해주실 것을 신신 당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변호하고 감싸 안아주실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 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복음 13장 8~9절)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와 죄인인 우리 인간 사이에 서셔서, 배은망덕과 고집불통의 명수인 우리를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까 고민하고 노심초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예수님이십니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마라
-반영억시부-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다.’,‘마음이 흔들비쭉이다.’,‘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가13,5).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4,8)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가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요, 땀입니다. 그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루카 13,1-9: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조욱현신부-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항상 회개하는 삶으로 그에 맞갖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주인은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7절).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을 만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앴지,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는 이 나무는 남으로부터 받기만 하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 무엇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 생활 속에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어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루카 13,2)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3,4)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질병이나 사고, 장애나 죽음을 하느님의 징벌로 여겨온 이스라엘 백성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시려는 겁니다.
급작스레 닥친 사고나 병고를 추스를 틈도 없이 죄인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한꺼풀만 들추고 들어가면 우리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데, 누구는 모두 알 수 있게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누구는 성인군자인 양 입을 싹 씻고 산다면, 과연 이기적이고 어설픈 우리의 죄에 대한 판단이 올바른 걸까요?
"회개하지 않으면"(루카 13,3.5)
그렇다고 복음 속 두 사건의 피해자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그런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에게 닥친 변고의 원인은 우리 영역 밖의 일이라는 걸 겸허히 인정하고 다만 하느님께 맡겨 드릴 일이지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사실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는 인간의 실존을 깨달은 이는 타인의 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심판자의 자리에 자신을 함부로 앉히지 않지요.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로마 8,6)이지 가십이나 뒷담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신이 억장 무너질 일을 겪어도 곧 심판자이신 하느님께 넘겨 드립니다. 무지하고 편협한 자신의 심판이 스스로마저 멸망시킬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결과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이 겪은 비극적 사고와 억울한 죽음이 이 세상에서 당장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회개하지 않는 이에게는 언젠가 닥칠 하느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어쩌면 우리에게도 "잘라 버리라"는 사형 선고가 진즉에 내려졌을지도 모릅니다만, 인내심 많고 자애로운 포도 재배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 덕에 지금 심판을 유예 받고 특별 관리를 받고 있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전투에 승리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로마 8,9)
회개는 육의 법에 끌려가는 존재를 돌려 세워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려 애쓰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지속적 회개지요. 그래서 그의 영혼은 선과 악, 영과 육의 전투가 크고 작게 벌어지는 치열한 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영께서 현존하시기에, 타인이 겪는 사건과 사고, 질병과 고통이 가십거리가 되기보다 연민을 자아내고 자신의 그것 또한 하느님을 만나는 지점으로 승화됩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9)
성찰에 무디고 회개에 더딘 우리에게 주님은 이 관대한 유예의 시간이 그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흘려만 들을 수 없는 경고지요. 특별히 거름이 주어지는 지금 여기서, 회개를 위한 발걸음을 시작하라는 촉구로 들립니다.
우리가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향해 방향을 돌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상태여도 열매를 맺으리라는 주님의 기대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용기를 내도 좋습니다. 어던 처지에서든 회개의 여정을 멈추지 않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9주 토요일-'갑자기'가 아니도록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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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도 하느님을 모세와 비슷한 방식으로 체험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지진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천둥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길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주 작은 떨림과 같은 바람 속에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침묵의 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나 자신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때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느꼈던 하느님, 엘리야가 느꼈던 그 하느님을 월트 휘트먼은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서 이야기합니다. 휘트먼은 시를 통해 각자의 활동이 그 차이를 초월해 하나의 본질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하나의 본질 속으로 융합되는 신비로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본질은 바로 시인의 자아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인류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 당신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내 안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직분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지금 하느님의 편에 있는지, 아니면 악의 그늘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회개를 통해서 나는 좀 더 겸손해 질 수 있고, 주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 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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