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루가 13,10-17)
“Woman, you are set free of your infirmity.”
He laid his hands on her,
and she at once stood up straight
and glorified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육의 행실을 따라 살면 죽음이 오지만, 성령의 빛에 이끌려 살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인을 낫게 하시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함을 일깨워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6세기 중세 때 여성의 지위는 정말로 형편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9살의 어느 소녀가 강간 사건의 피해자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가해자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성범죄를 당한 여성이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서는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외칠 수 있어야 진정한 피해자라고 판사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문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부러뜨리는 고문이었습니다. 마취 없이 멀쩡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부러뜨리는 것이 괜찮았겠습니까? 이를 이겨내야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인정해줬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여성인 피해자는 몸도 마음도 망가지지만, 남자는 오랜 재판 끝에 가벼운 선고를 받고 이마저도 얼마 못 가서 사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중세 때에도 이러했으니 예수님 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여자를 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성에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지요. 이 안식일에 치유행위를 했다면서 회당장이 분개하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이 회당장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이유로 곧바로 치유될 수 있는 여자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이기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절대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안식일 법을 지키겠다고, 이날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해도 안 뜨고, 산소도 없어지고, 물도 없다면?
여성에 대한 폭력성으로 인해, 이 회당장은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폭력을 사람들에게 휘두른다면, 그 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기를 원한다면, 모든 폭력을 버리고 지금 즉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 옛날, 인도의 한 스승이 제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긴 여정에 대비해 짐을 맡아줄 짐꾼도 동행했는데, 이 짐꾼은 너무 무례하고 버릇이 없었습니다. 툭하면 화내고 욕이 늘 입에 붙어있는 짐꾼과 함께하는 이 순례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제자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이 짐꾼을 쫓아내자고 스승에게 모두 몰려와 말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저 짐꾼이 아니면 누가 내게 욕심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도록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 가르쳐주겠는가? 나는 저 일꾼에게 그런 수업을 받고 있다네.”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네. 만약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성지가 될 것이네.”
여러분의 자리는 어떠하십니까? 바로 내가 내 자리를 성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하늘을 보게 하는 사람인가, 땅을 보게 하는 사람인가?
-전삼용신부-

-조재형신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는 시간의 강에 떠밀리듯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간을 잡고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을 예술가, 혁명가, 혁신가, 영웅,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다른 이름이지만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았고,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같은 이름이기도 합니다. 배철현 교수의 ‘신의 위대한 질문’은 바로 이런 점을 전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2개의 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생명의 나무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었던 나무의 열매는 ‘지식의 나무’였다고 합니다. 지식의 나무에서 열매를 먹었던 아담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담에게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으니,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알고 있으니 지금 있는 곳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질문이면서, 모든 인간이 풀어야 할 대답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때 카인은 대답합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Am I keeper of my brother?)’ 하느님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미국의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버락 오바마대통령입니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케냐 출신입니다. 할아버지는 노예였습니다. 그런 오바마에게 존 케리 대통령 후보를 위한 지지연설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오바마는 연설 중에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지금 홀로된 노인이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다면 비록 나의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그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지금 아랍계 이민자가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부당한 처벌을 받는다면 비록 그가 나의 형제는 아닐지라도 그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지금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려서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비록 나의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형제를 지키는 사람입니다.(I am keeper of my brother.) 그해에 타임지는 표지모델로 오바마를 선정하면서 ‘버락 오바마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을 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바마 케어’가 탄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임에도 18년 동안이나 아팠던 여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카인이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여인은 공동체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예수님의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 여인을 가족으로 생각하였고, 그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질문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고 선언합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며, 우리의 가족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비극적인 일을 겪을 때, 누군가의 동반이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미얀마 양곤 대교구 교구장이신 챨스 마웅 보 추기경님의 모습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군부 독재자와 당당히 맞서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향기가 풍깁니다.
보 추기경님은 원래 미얀마 관구 소속 살레시오 회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주교, 추기경에 서임된 분이시라, 같은 수도회 소속 회원으로서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추기경님의 처지가 더욱 안타깝고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끝끝내 자신의 길만을 걷는 군부 독재자와 고통 받는 미얀마 국민들 사이에서 보 추기경님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거듭되는 군부 독재자의 협박과 폭력 앞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항상 민중 편에 서서, 민중과 동행하는 보 추기경님의 편지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음식도, 집도, 약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암흑 속에서 현존하신다는 것,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합니다. 몸에 난 상처에는 연고가 필요하지만 영혼에 난 상처에는 우리 목자들이 필요하고 희망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비극적인 일을 겪을 때, 누군가의 동반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출애굽 이야기는 매우 슬픈 사건입니다. 파라오에게서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은 사막의 척박함 속에서 굶주려야 했습니다. 지금 그와 똑같은 일이 우리 국민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이 체험한 것은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목자로서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현존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방식으로 엠마오에 가는 제자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절망스럽고, 두렵고, 상처받은 그들과 함께 걷고 빵을 나누셨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롸이코 교구에서는 수녀님들과 신부님들이 군부의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든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삶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산위에 자리 잡은 고을입니다.”
오늘 우리는 18년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린 여인,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는 여인에게 다가서셔서 치유하시고, 동반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역시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그런 사람들 만납니다. 너무 지치고 기력이 쇠해져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동반, 우리 교회의 동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 오랜 병고에 지친 사람들 앞에 안식일 규정이니, 먼 거리니 등등 이것저것 따지고 말고 할 게 아닙니다. 바로 일어나서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즉응성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복음 13장 16절)

사람이 희망이다
-반영억신부-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비딱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트집을 잡게 됩니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이나 행동을 갖다 붙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르침도 필요 없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기가 병에 걸렸으면 자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자기 병은 중하고 남의 병은 하찮게 여길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사실 안식일 법은 훌륭한 법입니다. 원래 안식일 제도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쉬게 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던 안식일 제도가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변해 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 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짐을 벗겨 주십니다. ‘자기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면서 일생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는 안식일이라 하여 풀어줄 수 없단 말이냐?’ 한마디로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그 법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한다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 되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낙태 반대운동을 하고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법이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든지 이웃 사랑을 규제 하려 한다면 그 법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드러내 놓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은 하느님의 법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인간의 전통에 집착하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 넘습니다. 잘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다른 사람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을 우선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계명들보다 위에 있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0-14)”
예수님께서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의 고통’만 보셨고,
또 그 여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만 생각하셨고,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날이 무슨 요일인지는 예수님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아니고,
요일과 상관없이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이 그의 눈을 가렸고 그의 마음을 닫았습니다.
회당장의 눈에도 그 여자의 고통이 보였겠지만, 그 고통은 ‘안식일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 또는 ‘신경 쓰면 안 되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남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는
참 편리한 계명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싫거나 하는 것이 귀찮을 때,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내세우면, 그 일들을 모두 ‘합법적으로’ 외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고 무시한 것에 대해서
마음의 불편함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도 없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색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신 일입니다.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은 요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말과 관련해서 요한복음 5장에 중요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6-18).”
여기서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도 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보다 위에 있다.
<마르코복음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보다 위에 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일은
단 한 순간도 멈출 수 없다.
(그 일은 요일과 상관없이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도 멈출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은 계명들과 율법들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기준을 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탈출 20,8-11) 십계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신명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2-15).”
쉬는 날 없이 일만 했던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기억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유와 해방을 주셨음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와 해방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쉬게 해 주는 날’입니다.
내가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을 쉬게 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쉬게 해 준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유와 해방과 안식을 선물한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바로 그런 것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물론 그 일은 평소에도 꾸준히 해야 하는 일인데,
안식일에는 특히 더 많이, 더 잘 실천해야 합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5-16)”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는 일은 요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안식일에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요일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일지라도’ 라는 말은 ‘안식일과는 상관없이’로 해석됩니다.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모두
안식일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만을 안식일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랑 실천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식일을 ‘아무것도 아닌 날’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주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자비와 사랑 실천이 곧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방법입니다.>

복음: 루카 13,10-17: 안식일의 치유로 인한 논쟁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18년 동안이나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2-13절) 굽은 것은 그 여인의 영혼이었다. 그 영혼은 땅을 향해 굽어 있어서 하늘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영혼은 다시 숨을 쉬게 되었고,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모든 사람이 이 여인처럼 땅을 향해 등이 굽어 있었다. 시편에 “그들이 제 걸음마다 그물을 쳐 놓아 제 영혼이 꺾였습니다.”(57,7)라고 울부짖고 있다.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땅으로 굽게 했다. 사람들이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 것들에 몰두하여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콜로 3,1 참조) 이 등이 굽은 여인을 치유하셨는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
그런데 부당하게도 사람들은 특히 회당장은 여인을 치유하신 주님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이야말로 땅을 향해 등이 굽은 자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세우신 뜻(탈출 20,8-11 참조)을 알지 못하고, 땅에 묶인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왔다. 문자적으로나 물질로는 안식일을 지켰지만, 안식일의 근본적인 의미는 깨닫지 못했다.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의 표상이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멈추는 날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 회당장은 안식일에는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회당장의 말을 들으시고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15절) 그런데 그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니 짐승보다 더 귀한 존재가 아니냐 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안식일에 그 여인을 고쳐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치유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같이 칭송받는 것 때문에 그렇게 흥분하여 분노하고 질투에 눈이 먼 것이다. 그들은 속마음을 숨기고 다른 구실을 대고 있다. 거짓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정확히 집어내셨다. 위선자라는 말은 그들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사악한 주장을 펴던 자들이 망신을 당하고,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져 부서진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그러진 그릇들을 펴시는데, 그들은 슬기로운 옹기장이에 맞섰고 의사에게 대들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만다. 주님은 그들의 오만한 입을 틀어막으셨다. 반면에 기적의 은총을 나누어 받은 군중은 크게 기뻐하였다. 진정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서 사람을 위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하겠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 12)
-한상우신부-
삶의 한복판에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기에
하느님을
만나야한다.
병든 생각과
아픈 마음을
치유하시는
안식일의
주님이시다.
일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나가야한다.
참된 믿음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선물에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소중한 당신의
자녀를
치유하신다.
치유는
내어맡기는
신뢰에서
비롯된다.
하느님께
내어맡길 때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안식일은
치유의 날이며
용서의 날이다.
안식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알게 된다.
창조와 안식은
하느님 사랑의
풍요로운
전개방식이다.
창조의
연결선상에
있는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는
기쁨의 날이다.
안식일의 거울은
우리의 인격을
비추어준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고있는지를
묻게된다.
사람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안식일의 삶이
하느님 자녀의
삶이다.
하느님의
현존안에
안식일의
사랑이 있듯
안식에 이르는
길이 충만한
구속의 길이다.
하느님으로
하느님과 함께
사람들속에서
믿음으로
기뻐하는 날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종살이의 영에서 하느님의 영으로 전환하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이 열여덟 해나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을 고쳐 주시자 회당장이 분개하며 말합니다.허리가 굽어 몸을 펼 수조차 없는 그녀의 모습을 하도 오랫동안 보아와서일까요? 연민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입니다.
타인의 불행이나 불편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자기 처지가 아니라서, 워낙 자주 봐 무뎌져서, 당사자가 힘든 내색을 안 해서,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 여겨서 등등...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고통과 갈망을 단박에 알아차리십니다. 그날이 안식일이건, 장소가 회당이건 전혀 개의치 않으시지요.
사실 안식일은 생명을 위한 날이니 생명을 회복시키기에 더더욱 좋은 날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회당은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여야 하니 더더욱 치유에 적합하지요. 율법의 문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통해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6)
"안식일에는" 하면서 안식일의 의미를 축소하고 한정한 회당장과 달리, 예수님은 "안식일일지라도" 하시면서 허용과 확장의 표현으로 바꾸셨습니다. 율법 규정과 전통 관습을 대하는 예수님의 유연하고 관대한 자유가 읽히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육에 따라 사는 삶과 영에 따라 사는 삶을 대비시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로마 8,15)
율법 아래 자신을 묶은 이는 그 문자에 집착하여 종살이의 멍에를 스스로 멥니다. 어쩌면 내용보다 형식을, 의미보다 글자를 추구하는 게 더 쉽기 때문일 겁니다. 육을 따르는 삶은 마음의 소리와 영의 진동을 섬세히 살피거나 식별에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래서 메뉴얼대로만 고집하는 삶은 자칫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종살이의 영은 금지와 한정의 표현으로 무장하고 어떤 여지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남이 그러는 게 귀찮아서이기도 하지요. 사안들을 고려해 적용하는 일에 괜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이유는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누군가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진실에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까닭입니다. 종살이의 영을 고수하는 한 그는 아직 외딴섬입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예수님은 그 책임도 함께 지실 것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니까요.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하고 부르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사고하고 결단하라고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루카 13,17)
군중이 느끼는 기쁨에 함께 젖어들어가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적의와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가련한 여인에게 해 주신 일을 자기 일처럼 느끼기에 기쁘고 감사하며 희망에 일렁이고 있습니다. 이 순간 기쁠 수 있는 건 그들이 그 여인의 오랜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연민했기 때문이고, 그 자신 역시 희망을 가져도 좋다는 걸 감지했기 때문일 겁니다. 서로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단순하고 소박한 군중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게지요.
사랑을 제한하고 헌신마저 규격화하는 종살이의 멍에를 벗고, 거룩한 사랑의 영을 따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령 덕분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리스도의 형제요 공동 상속자인 우리는 행복합니다.

죄가 아니 고통을 보는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십팔 년을 병마에 시달린 여인을 고쳐주시며
안식일에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회당장을 아주 신랄하게 꾸짖으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주님 말씀처럼 이 얼마나 큰 위선입니까?
동물은 안식일이어도 먹이면서 인간에게는 어찌 사랑에 인색합니까?
그러니 실은 동물도 사랑하기 때문에 먹인 것이 아니라
죽으면 자기에게 큰 손실이기 때문에 먹인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없을 때 인간은 크게 두 가지로 인간이나 사물을 대합니다.
하나는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대하고,
다른 하나는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대합니다.
그러니 오늘 회당장이나 율법주의자들은 사랑이 없기에
동물에게는 이익의 관점에서 먹인 것이고,
인간에게는 율법의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얘기한 겁니다.
그리고 오늘 회당장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이 없으면
한 인간 안에서 고통을 보지 못합니다.
회당장이 병의 치유는 안식일이 아닌 날 해도 된다고,
안식일이 아닌 날이 엿새나 되고 그런 날이 더 많다고 하지만
더 많은 날이 있어도 고쳐 줄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을 겁니다.
회당장은 엿새가 아니라 열여덟 해가 있어도 고쳐줄 마음이 없었을 텐데
그것은 그가 여인의 열여덟 해의 고통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열여덟 해를 앓는 고통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은 단 하루를 봐도,
아니, 한 순간에도 그 여인의 길고도 큰 고통을 보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고통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순간에 보이는 죄스러운 단면만 보고 일생을 보지 못하는데
사랑이 있으면 그 순간의 죄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생의 고통을 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인간이 하느님의 귀한 자녀라는 것을,
그러니까 자신도 남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며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영의 인도를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서로 안에서 죄보다는 고통을 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0) | 2021.10.27 |
---|---|
2021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0) | 2021.10.26 |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0) | 2021.10.24 |
2021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0) | 2021.10.23 |
2021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0) | 2021.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