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루가 11,29-32)
“This generation is an evil generation;
it seeks a sign, but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Ninevites,
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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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봄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만물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꽃이 피고 새순이 돋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봄에 피는 꽃은 겨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포가 우리나라의 개나리를 너무 좋아해서 고국 방문 때 개나리 몇 토막을 잘라다가 시드니 자기 집 정원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나리는 위로 자라기만 하지 몇 해를 두고서도 꽃을 피우지 않는 것입니다.
개나리꽃이 예쁜 것이지, 개나리의 줄기는 별 볼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는 식물학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시드니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춥고 황량한 겨울을 이겨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게 보입니다. 암을 극복하신 분이 더 열심히 사시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자기 삶이 다져져서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지금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후에야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
요나 예언자의 말 한마디로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했던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며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나 예언자는 이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민족을 지배하던 니네베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멸망은 곧 자기 민족의 구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까지 갔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몽땅 다 회개합니다.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말이지요.
바로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 모습이 때로는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했을 때,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이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과 표징을 찾아보세요. 고통과 시련 속에서 그 기적과 표징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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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대학에서 104명을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우선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제1그룹에는 지루함을 느꼈던 때를 주제로 짧은 에세이를 쓰게 했습니다. 제2그룹에는 인생이 불공평하거나 ‘타인에서 부당한 대우나 무시당했다’라고 느꼈을 때의 상황을 쓰도록 했습니다.
이 작업을 마친 사람들에게 혹시 연구진을 도와줄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부정적인 글을 쓰도록 했던 제2그룹이 제1그룹보다 26% 낮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2그룹은 계속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보였고, 실험 후 그들의 자리에는 쓰레기가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실험용 펜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삶 자체를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전달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으로 다른 이에게 좋은 영향이나 나쁜 영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세상을 전달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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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마음'은 자신 안의 뱀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악한 이유를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들이 표징을 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으면서 보기 원하면 악한 것입니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악한 세대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증거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신을 깰만한 화끈한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를 보여주면 의견을 바꿀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것으론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있다가 밖으로 나온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사흘 동안 땅속에 머물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울 수 없는 표징에도 악한 세대는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귀를 막고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부터 본인들은 마음이 굳게 닫혀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남방 여왕이 긴 여행을 했다는 것과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기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은 듣는 것 다음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 마음에 이미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합당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그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뀌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최강의 영향력』이란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증거가 우리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가?’
이 책에서 여러 실험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사형제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와 또 범죄율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객관적 증거를 준비하였습니다. 물론 객관적 정보이기는 하지만 둘 다 편향되게 만든 그럴싸한 허위 정보들입니다.
두 그룹에 각자 하나씩의 정보를 주었더니 사형을 반대하던 학생들은 사형이 범죄율 감소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증거에 대해서 잘못되고 조작된 정보라고 반기를 들었고, 사형을 찬성하던 학생들은 범죄율을 낮춘다는 증거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가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실험은 온실가스에 관련된 실험입니다. 처음 환경학자가 2100년까지 지구 온도가 3.4도 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의견에 수긍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과학자들이 정보를 재평가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절반에게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했고 다른 절반에게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바뀐 정보를 수용했을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4도 맞을 텐데?”
[참조: ‘팩트를 제시해도 신념을 바꾸지 않는 진짜 이유’, 유튜브, ‘더 나은 삶 TV’]
이것은 지금 대선 주자들에 대한 인지도 평가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잘못된 일들을 아무리 쏟아내도 일단 한 번 지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일보, 2021년 10월 5일’ 자 신문에 ‘대선이 이상하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주자 빅2’로 불리는 두 사람에겐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고발 사주 의혹 같은 대형 악재를 맞아도, 실언·실책으로 자질 시비가 일어도 콘크리트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사와 윤 전 총장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겠지만, 이 같은 기현상엔 그늘도 있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똘똘 뭉쳐 격돌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 동시에, 대선에서 정책·인물 경쟁이 변별력을 발휘할 공간이 지극히 좁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선거를 할 때 나라를 위한 대통령을 뽑으려는 것보다는 내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증명하려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증거를 제시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나를 부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열린 마음’을 갖고 올바로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확증편향은 의견이 곧 자신이라 여기는 오류에서 시작함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부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서울 아파트 시세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32평 아파트를 보여주고 “10억 원이 넘을까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은 10억 원 아래다, 더 나간다는 두 쪽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이 같은 사람들이 몇 명씩인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으면 자신감이 생겨 자신이 배팅한 가격보다 더 내리거나 더 올렸습니다. 하지만 처음 정한 의견은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남더라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더 자신의 의견을 견고하게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듯 ‘자기가 부정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견이 틀릴 수 있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믿고 있었던 자신의 의견이 뱀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와는 뱀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뱀을 철저히 믿은 것입니다. 뱀의 의견이 바뀌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아가 뱀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에 귀를 막아버립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자아를 뱀이 아니라 천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버린 것만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지도 않을 것이면서 끊임없이 증거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명확한 증거를 눈으로 보더라도 자기 식대로 합리화해버립니다. 따라서 듣지 않고 보여달라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어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뱀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오류만 있음을 알기에 진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듣는 마음’을 청했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지혜는 듣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뱀이요, 오류요, 어둠이요, 악임을 인정할 때야만 듣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뱀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외부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책을 찾아서 읽고, 강의를 찾아서 듣고, 묵상하며 하느님 음성을 들으려 합니다. 고집불통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뱀임을 아는 것뿐입니다. 내가 뱀임을 알았다면 외부에서 진리를 습득하기 위해 남방 여왕처럼 진리를 찾는 노력을 반드시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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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두 가지 주제를 전해 줍니다. 하나는 가벼움입니다. 감각적인 삶, 육체의 만족,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려는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거움입니다. 이성적인 삶, 영적인 만족, 해야 할 일을 사랑하려는 삶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를 연결해 주는 단어가 있습니다. ‘키치’입니다. 키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밤 길 운전에 오두막을 봅니다. 오두막에 한 가족이 식사를 합니다. 그 가족이 참 행복하다고 보는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실제로 그 가족이 행복한지는 모릅니다. 독재정권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민주화된 나라의 생활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민주화된 사회에도 ‘희로애락’은 있기 마련입니다. 풍족하고,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험과 열정을 동경합니다. 투쟁의 현장으로 가보지만 모험과 열정 뒤에는 위험과 죽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은 육적으로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님입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은 영적으로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육적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보는 것입니다. 많은 표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감각적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죽으셨지만 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는 이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전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율법과 계명의 잣대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느님 아들의 죄명이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혁명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을 사람들은 직업과 가문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집안의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놀라운 표징을 보일 리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빌라도는 권력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하였지만 권력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많은 보물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어떤 이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성, 이성, 오성을 통해서 참된 진리의 길을 찾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면 잘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물은 잠시 멈추어서 바라모면 보일 것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큰 표징입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자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깊은 어둠을 체험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늘 새로운 부활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볼 때, 내가 만나는 이웃,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 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서로를 이용하려하고, 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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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표징은 일상생활 그 한가운데에서 숨어있기에, 매일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여기저기 황금빛 들판이 장관입니다. 점점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을 바라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저렇게 성숙되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더해가면서 점점 균형 잡히고 성숙한 신앙인, 영적이고 겸손한 신앙인으로 성장해나가면 좋겠습니다. 크신 주님 앞에 나란 존재가 얼마나 미소한 것인지를 잊지 않는 신앙인, 주님 떠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신앙인으로 익어가면 좋겠습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상승과 추락, 병고와 죽음, 그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기꺼이 수용하며 살아가는 넉넉한 신앙인, 지나가는 작은 것들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은 관대하고 너그러운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정반대의 길을 걷은 신앙인들이 수두룩합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나 모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정도를 벗어나 엉뚱한 길을 걷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앙은 너무나 미성숙하고 유아기적인 것이어서 또 놀랍니다. 눈만 뜨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현실성 떨어지는 끝도 없는 기적이요 치유요 표징입니다.
예수님 시대도 상황은 비슷했나 봅니다. 얼마나 한심스럽고 안타까웠으면, 예수님께서 장탄식을 터트리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복음 11장 29절)
그런 분들이 즐겨 찾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조금 밋밋하게 느껴지는 본당 공동체나 신앙 공동체는 뒷전입니다. 지극히 어색하고 볼썽 사나운 곳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거기 가면 그런 분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맞춤형 행사가 이어집니다.
입만 열면 성공이요 합격입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불치병의 치유나 기적이 설교의 거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신앙을 빙자한 사기꾼들입니다. 거기에 현혹되어 교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분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이 시대 표징은 우리들의 일상생활 그 한가운데에서 숨어있기에 매일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야말로 표징 중의 표징입니다. 매 미사 전 고백소 안에서는 수시로 기적이 거듭됩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 안에서 용서와 사랑, 헌신과 배려를 통한 기적과 표징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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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11,29-32: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조욱현신부-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나의 표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사람들은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이 표징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남방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도 주님께 왔고,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듯 교회도 그럴 것이다. 지나가고 마는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왔던 남방 여왕이 그 세대를 단죄한다면, 지혜 자체이신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어떻겠는가?
바로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즉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해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경 등 우리는 하고 싶어만 한다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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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한상우신부-
소중한 인격을
탄생시키시는
공감의
주님이시다.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신다.
삶의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할
주님이시다.
회개를 일깨우고
삶을 일깨우는
스승이시다.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에게
활짝 열어
보여주신다.
삶의 시작부터
삶의 끝까지
희망 자체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깊이만큼
깊어가는
우리들
믿음이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지를
다시 묻게된다.
하늘을 향하듯
가을 햇빛을
간절히 바라듯
주님을 향하는
우리들이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여
하느님 자녀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께서
누구이시며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하는
이것이 참된
은총이다.
신앙은
마음 깊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
이곳에 가장
필요한 것은
먼저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삶의 길
관계의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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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표징 이야기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11,29)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일갈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확실하고 더 많은 표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으려 하기보다, 표징을 일으켜 자기들이 믿게 해 보라고 예수님을 재촉하지요. 하지만 감각적인 표징에 집착하는 이들은 대개 사람이나 사건 안에서 의미를 캐내는데 게으릅니다. 표징은 저 심저에 있는데 말이지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보내진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굳이 예언자를 보내실 것도 없이 그냥 죄악이 만연한 도시 니네베를 단번에 싹 쓸어버리시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요나가 니네베의 타락과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곧 회개했고 하느님도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요나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끝까지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 죄인이 돌아서면 당신도 당장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느님 자비의 표징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하느님은 인류와 화해하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께서는 기꺼이 순명하시고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셨고 제단 위에 당신을 스스로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시고 하느님 자비의 표징이시니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로마 1,6)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가 로마의 모든 신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자체가 참 위험한 시대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죽기까지 따를 결단을 내린 이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지요.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분과 동반했던 사도들에게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로 확장됩니다. 이들은 각자 또는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삶의 길에 숨겨진 표징들을 따라가면서 영적 여정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그들 자신이 사도가 됩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로마 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이들은 자기가 있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표징이 됩니다. 그의 존재가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사도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표징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과 말과 사건에서 그 안에 심겨진 표징을 알아보고,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바로 그 표징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따라가다보면 언젠가 표징이 가리키는 분, 주님을 만나게 되지요.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이기적으로 돌아간다 해도,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고 사람들 안에는 여전히 선한 힘이 흐르지요. 게다가 더 멋진 사실은 우리 자신이 바로 선하고 자애로우신 주님의 표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각자 자신의 역사에서, 지금 머무르는 삶의 자리에서 주님 사랑의 표징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 사랑의 표징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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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연중 29주 월요일-기적적인 회개가 아니라 회개의 기적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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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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