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10. 13. 08:30

2021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루가 11,42-46)


Woe to you!
You are like unseen graves over

which people unknowingly wal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남 탓을 많이 하며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그 마을의 현자라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현자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창고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은 먼지로 가득했고, 여기저기 거미줄이 처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사람의 방문이 없었던 곳임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를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거울 위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현자는 자기 소맷자락으로 거울을 쓱쓱 문질렀습니다. 먼지가 가득 날리면서 현자와 이 사람은 눈이 따갑고 목이 칼칼해지면서 기침을 했습니다. 그 뒤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님은 지금 먼지가 덮인 이 거울과 같습니다. 불평불만의 먼지가 가득해서 형제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먼지를 닦아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분명 쉽지 않고 유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을 마쳐야 진짜 내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 세상만을 바라보면 끊임없는 불평불만과 잘못된 판단으로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먼지가 쌓여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십일조는 열심히 지키지만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또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면서 정작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정작 자신의 옳지 못함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가지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하느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이태백).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피에타상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가게 앞을 지나다가 아주 볼품없는 커다란 대리석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대리석의 가격을 물으니, “그냥 가져가세요. 지난 10년간 이것을 팔려고 했지만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쓸모없이 큰 돌이 공간만 차지해서 귀찮았는데 잘 되었네요.”라고 주인이 말합니다.

일 년 뒤,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으로 피에타상을 만들어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며, “아니, 볼품없는 대리석으로 이런 훌륭한 작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리석을 보았을 때, 단지 불필요한 부분만을 쪼아낸다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볼품없는 대리석이라며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은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훌륭한 모습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부분만 제거하면, 하느님의 멋진 창조물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제거할 것은 무엇일까요?

욕심, 이기심, 미움, 부정적 마음 등…. 너무 많습니다.

 십일조보다 사랑실천인가, 십일조 통해서 사랑실천인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십니다. 특별히 그들은 십일조는잘 지키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실천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이웃사랑입니다. 하느님께 자비를 받았으니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는 내면서 사랑실천은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십일조’는 바리사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나는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라는 명목으로 지키는 대표적인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십일조를 지키는 것보다 차라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더 중요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십일조를 통해서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나라 말의 번역은 약간 십일조와 사랑실천이 별개인 것처럼 해석되어 있습니다.그러나 원어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십일조와 사랑실천을 별개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서로 죄짓게 만들고 서로를 심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랑하지 않고 자기가 주체가 되어 사랑하면 그 사랑은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바치는 것은 십일조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다는 뜻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하느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행위를 저버리면 이웃사랑도 당연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해석은 “너희들이 꼭 지키는 십일조보다는 사랑실천을 해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의 십일조가 사랑실천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뜻이 됩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일까요? 당연합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형제끼리 잘 지내게 될까요?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형제끼리 잘 지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이 부모가 하느님이 된다면 그것은 감사의 십일조가 될 것입니다. 

 

    유튜브에는 부모를 피해 집을 나와 혼자 평생을 산속이나 다리 밑에서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34년째 길 위에서 사는 남자의 사연’이 있습니다.

    한 번 가졌던 부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며 혼자 집을 나간 장남. 그러나 하는 일마다 잘 안 되어 34년 동안 형제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다리 밑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많이 잘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부모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면 형제에 대한 애정과 책임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을 모아서 부모님의 생신 때 선물을 해 드립니다. 그렇게 되는 가족이라면 형제들 간의 우애도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인공 기훈은 착하지만, 돈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누구도 이 게임에 강제로 참여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습니다. 모두가 큰 빚을 지고 있기에 여섯 개의 게임을 잘 통과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서로를 배신하고 죽이고 죽습니다. 이는 돈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 마치 오징어 게임 안에 있는 것과 같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착한 사람 기훈은 정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는 누구도 짝이 되려 하지 않는 1번 할아버지 일남과 짝을 맺습니다. 그런 짝과 게임을 하면 질 게 뻔합니다. 그러나 게임은 둘이 구슬 따먹기를 해서 다 잃는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게임의 달인이기 때문에 이정재의 구슬을 거의 다 땁니다. 할아버지는 말기 암 환자로 몇 달밖에 살 수 없습니다. 이정재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것으로 단정하고 할아버지를 속입니다. 홀이라고 했는데 짝이라고 했다고 하고 짝이라고 했는데 홀이라고 바꿉니다. 그렇게 죄책감이 들기는 하지만 일남 할아버지를 속여서 구슬을 다시 빼앗습니다.

 

이때의 짧은 대화가 뇌리에 남습니다. 일남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구슬이 다 없어졌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구슬이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구슬이 하나 더 있었네?”

    “우리 다 걸고 한 판 할까?”

    “그 구슬 하나랑 이걸 다 걸라고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기훈은 화를 버럭 내며 소리칩니다. 이때 일남이 차분하게 말합니다.

    “내 구슬 가져간 건 말이 되고?” 

 

일남은 치매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자기를 선택해 준 기훈에게 베풀고 싶었을 뿐입니다. 일남은 남은 구슬을 기훈에게 넘겨주며 말합니다.

    “그동안 고마웠네.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일남은 죽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임을 만든 건 일남이기 때문입니다. 

 

    일남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재밌게 게임을 하다가 죽고 싶은 마음에 이 게임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게임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단 한 사람이 일남입니다. 언제든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착하게만 보였던 기훈이 아니라 일남만이 이 안에서 사랑할 준비가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혼자 힘으로 이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하려 해도 안 된다는 것이 이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이 게임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거의 모두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빚쟁이들이었습니다. 빚을 지게 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기훈이 막일이라도 했다면 수백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을까요? 그는 일하는 대신 경마 도박을 했습니다. 빚이 없다면 돈에 대한 욕심도 없게 되고 그러면 오징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세상을 벗어난 사람만 게임을 즐기며 사는 것처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기도 한 하느님을 먼저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믿음을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 선악과를 준비해 두셨고 구약에서는 그것이 계속 같은 의미로 십일조 계명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내는 것은 일남 할아버지처럼 세상을 즐기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반면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는 하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목적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의 의미를 바로잡아 주려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도구로 십일조가 사용될 때야만 하느님 사랑을 통해 이웃사랑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놀이입니다. 이 놀이에서 유일하게 동심을 유지하며 즐긴 단 한 사람은 일남 할아버지 하나였습니다. 재산도 많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서 잃을 게 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도 이처럼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일조는 안 내도 되고 사랑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오늘 복음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십일조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 더 강할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을 아버지로 믿을 수 있어야 일남 할아버지처럼 이 세상을 즐기면서도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US OPEN 남자 테니스 결승전을 다녀왔습니다숨 막히는 경기였습니다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랜드 슬램을 코앞에 둔 세계 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는 아쉽게도 다니엘 메디베데프에게 우승의 영광을 내주었습니다경기를 마치면서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하였습니다승자는 패자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였습니다제가 사는 곳에서 경기장은 지하철로 1정거장이기 때문에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예전에 주일학교 유치부에서 율동으로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제목은 텔레비전입니다가사는 이렇습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정말 좋겠네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정말 좋겠네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율동을 가르치면 아이들은 신나게 따라했었습니다본당에 있을 때입니다매년 송년의 밤이면 1년 동안 있었던 행사 사진을 모아서 보여드렸습니다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좋아하였습니다.

 

경기 중간 쉬는 시간에 대형 전광판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나오면 무척 즐거워하였습니다마치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기도 하고대부분은 환하게 웃었습니다전광판은 선수의 아내도 보여주었고유명한 스포츠 스타도 보여주었습니다배우와 가수의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모두들 잔치에 참석한 하객처럼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제가 있는 자리도 스치듯이 보여주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등불은 켜서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낮에 당당하게 말했습니다그런데 왜 밤에 나를 잡으러 왔습니까?”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경기의 결과에 따라서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듯이우리의 행실에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판단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꾸준히 선행을 쌓고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하느님의 판단은 민족과 능력과 업적을 가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하느님께서는 공평하시다고 이야기합니다전광판에 얼굴이 나오는 것이 두려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수배중인 범죄자라면 진한 안경과 모자를 썼을 것입니다떳떳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전광판에 얼굴이 보이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식과 위선으로 살아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나무라십니다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그런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하느님 나라의 전광판에 얼굴이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오늘 나의 모습이 하느님 나라의 전광판에 나온다면 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 좋겠습니다경기장에의 전광판에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는 관객처럼 좋아하면 좋겠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히 선행을 쌓고나누어야 합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꾸중을 감당하라  

 -반영억신부-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위선, 교만>

 -송영진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42).”

 

십일조 규정은 신명기 14장에 있습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머무르게 하시려고 선택하시는

곳에서, 너희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분의 일을, 그리고 너희의 소와

양의 맏배를 그분 앞에서 먹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언제나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신명 14,23).”

“또한 너희 성안에 사는 레위인들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는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 해마다 끝에, 그해에 난 소출의 십분의 일을 모두 가져다가 너희

성안에 저장해 두어라.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7-29).”

십일조의 주목적은, 또는 원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것은, 그들이 십일조의 목적을

무시하고,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려고 십일조를 내기 때문입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대단히 열성적인 신앙인인 척 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바치는 십일조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그게 표시가 나지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어떤 의도로(어떤 지향으로) 바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1) 눈에 보이는 일만 열심히 하고,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볼 때에만 열심히 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고 혼자 있을 때에는)

하지 않는 것도 위선입니다.

2) 쉬운 일만 열심히 하고, 어려운 일은 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3) 사람들에게 생색내기 좋은 일만 열심히 하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4)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열심히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내는 일 자체는 긍정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 실천’이 더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도 ‘사랑으로’ 내야 하지만, 십일조를 받는 교회도

그것을 ‘사랑 실천’에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가 십일조를 받아서 ‘사랑 실천’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이 말씀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낮추는 ‘교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에는 좋아한다는 뜻 외에도

‘요구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가 권하기도 전에 먼저 윗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자기들에게 인사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다.”가 일반적인 설명인데,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곧 겸손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수산나의 재판’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수산나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하느님의 영이 소년 다니엘에게 내렸습니다.

그때 소년 다니엘을 ‘원로’로 인정하면서 다니엘에게 수산나의 재판을 맡긴

사람들은(다니 13,50)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바로 알아보고 믿었고,

자신들을 하느님 앞에서 다니엘보다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4).”

 

무덤에 몸이 닿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민수 19,16).

그리고 부정하게 된 사람이 ‘정화 예식’을 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잘려 나가야 한다는 율법도 있었습니다(민수 19,20).

‘드러나지 않는 무덤’, 즉 무덤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것이 무덤인 줄 모르는 무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덤인 줄 몰랐으니까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나중에라도 알게 되었다면 곧바로 ‘정화 예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드러나지 않는 무덤’은, 겉으로는 위선자로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위선자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속’을 감추고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위선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이 사람들을 죄짓게 하고, 구원의 반대쪽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경우에 위선자들의 죄는

‘위선’이라는 죄와 ‘남을 죄짓게 하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아주 엄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루카 17,1-3).

 

그러면 위선자들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위선자들 때문에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면서도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몰라서 당한 일이니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알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도 잘못입니다.

(위선자들에게 속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겠지만,

무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 루카 11,42-46: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조욱현신부-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42절)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자기들에게 편한 것만 찾아 지켰으니 나머지 계명들은 지키지 않은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 하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 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러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역겨운 것이다. 위선자는 겉모습과 말로 자기를 감춘다. 좋은 평판을 듣는 행위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찬미하고 칭송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만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 위선은 오래 감출 수 없다. 잠깐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난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사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루카 11, 42)

-한상우신부-

복음은
실천의
재발견이다.

실천은
나와 너를
돌보는 참된
행복이다.

실천하는
우리의
행동이
이기심을
치유한다.

진정한
신앙인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건강한 믿음이
건강한 행복이다.

무엇을 위한
행복인가!

올바른
실천을 위한
우리의
행복이다.

요란한 삶을
치유하는 것은
올바른
실천이다.

실천해
나가는 것이
거듭 새로워지는
우리의
성장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실천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을
일깨워주신다.

행복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제대로
보는 것이
실천의
시작이다.

행복은
실천을
가까이에
두는 것이다.

깨끗한 실천이
우리의
맑은 행복이다.

오늘 이하루는
아는 것을
실천하는
행복의 멋진
새날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속뜻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 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 11,46)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종교 지도자 계급이고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이며 아비규환의 장터 너머 거룩함의 영역에 속한 그들이 과연 그동안 이런 비난을 공개적으로 들어나 봤을까 싶네요. 아마도 감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처음이시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신랄한 목소리를 복음사가가 그대로 복음서에 남긴 건, 성경을 읽는 우리가 비난에 동조해서 함께 그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라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귀중한 묵상기도 시간을 그렇게 단죄와 자책으로 보내기는 좀 아깝지요.자주 언급하는 바지만, 꾸짖음에 귀를 잘 기울여 보면 그 안에는 주님께서 대상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기도를 통해 바로 그걸 포착하면 됩니다.

"윗자리 ... 인사받기 ... 드러나지 않는 무덤 ... 짐을 지우고 외면하기"
예수님은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겉과 속이 다르며 그저 말 뿐인 행실들을 멈추길 바라십니다. 그건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에 골몰하는 모습이니까요. 주님은 당신의 사람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며, 위선을 버리고, 타인에게 더 관대한 사람이길 바라시지요.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루카 11,42)
십일조와 예물 봉헌, 외적인 예식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하느님은 그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마음을 보는 분이시니까요.

마음을 다해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이는 누가 보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제도와 신분, 문자와 형식을 초월해 진리와 영으로 하느님을 섬기지요. 예수님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 내적으로 꽉꽉 채워진 진정한 주님의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받았으면서도 완고한 마음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로마 2,7)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대가와 보상을 바라지 않고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자기 영광과 명예가 아닌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는 이는 삶의 어느 경로를 관통하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여정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11)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부자나 가난한 이나, 어느 신분의 사람이건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높낮이와 수량, 타이틀과 직책을 보지 않으시는 그분은, 그 대신 어쩌면 온도를 감지하지 않으실까 싶네요... 당신을 향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피조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이에게 하느님 마음이 한없이 끌리실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소박하고 조촐하나마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의 제사로 주님의 마음을 얻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비록 우리의 미소는 마스크 안에 가려져 있지만, 타인의 어려움을 감지하여 베푸는 소소한 친절과 작은 선행이 이웃의 마음을 녹이고 빗장을 풀어 이 세상에 평화의 시공간을 한 평 더 넓히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드릴 것입니다. 힘들고 고된 세상살이 중에서도 나날이 사랑의 발자국을 쌓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8주 수요일-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