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루가 11,47-54)
Woe to you, scholars of the law!
You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You yourselves did not enter
and you stopped those trying to ent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 6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한 이색 놀이터가 있다고 합니다. 이 놀이터는 잔디밭과 테니스코트와 볼링장, 어린이공원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다른 놀이터와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입구에 ‘젊은이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나이트브리지협회의 매들린 엘스던은 BBC 등과의 인터뷰에서 “공원마다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데 나이 든 이들을 위한 시설은 거의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며 반기는 사람도 있지만, 나이 든 티를 내고 싶지 않다면서 이용하지 않는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하긴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은 참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젊은이가 출입할 수 없는 60세 이상 노인의 놀이터도 생겨났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서로 분리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면서도 이 세상은 계속해서 분리해나갑니다.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이러한 분리 속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서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늘 나라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우리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어제 복음에 이어서 주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판단이 바로 하느님의 판단인 양 사람들을 단죄하고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자신의 판단으로 박해하였으며, 이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까지도 죽음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판단만이 최고인 듯한 생각으로 행동하면 결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자기만 맞고 남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는 데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판단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곳에는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보다는 거짓된 위선과 자기만 아는 이기심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할 수 없는 자리가 되고 맙니다.
사랑은 판단하지 않고 오랜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채워주려고 애쓰는 것, 그 마음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 안에서만이 우리 모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어 팔린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안젤루스, 삼종기도)입니다. 해가 저무는 저녁의 들판, 그 가운데서 하루 수확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리는 남녀에 많은 이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 작품에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밀레는 너무나 지독한 생활고에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의뢰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사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를 가엽게 여긴 수집가가 사들였지만, 이 작품을 계속 보면 시끄러운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이유로 다른 작품으로 교환해 갔다고 합니다.
밀레가 활동하는 19세기 초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화풍이 유행할 때였습니다. 신이나 귀족같이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을 소재로 삼아 화려하고 웅장하게 표현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밀레의 작품 모두는 비참한 현실을 묵묵하게 담아내는 진정성 있는 예술이기에 사랑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성은 결국 인정되어서 현재 많은 이가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지금 다른 이의 시선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사람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지금을 산다면 언젠가는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나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인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들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말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당신도 예언자이기에 그들이 당신도 똑같이 죽일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조상으로 삼지 말고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조상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조상이면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러면 조상이 한 그대로 살다가 조상이 저지른 모든 죄까지 벌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이 그들에게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을까요? 조상까지 나무라는 예수님을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후손임을 고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말은 곧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면 곧 하느님 백성일까요?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국 국적을 가지면 한국 사람일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진정한 한국인이 되려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세금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만 가지면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면 그는 더는 진정한 한국 사람이 되는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나의 목표가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미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인 혼혈인 ‘힘의 길’이란 유튜버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전자 검사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결과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가 섞였고 시베리안 피도 섞인 56.06%의 동아시아인, 그리고 동유럽과 핀란드인 피가 섞인 35.6%가 유럽인, 4.84%의 아메리카 원주민 피가 섞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왜 놀랐을까요? 자신은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말합니다. ‘시베리아인 피’가 섞여 있어서 보드카를 좋아하고 눈이 좋은 것 같다고. 이렇게 우리는 조상을 알면 그 조상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조상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한국말’밖에 못합니다. 만약 그가 아버지처럼 자신도 미국인이라 생각했다면 분명 영어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이란 생각이 강하기에 한국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미국인이지만 본인이 한국인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이미 완성된 것으로 규정해 놓고 그것으로 만족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힘의 길’ 씨 앞에 아버지가 계속 계셨다면 영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영어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좀처럼 용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생활이라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이미 유튜브에서 밝힌 사연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힘의 길 씨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미국에 가서 결혼하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처럼 한국말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발전은 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를 배우는 것에만 한정된 이야기이지 이분이 인성적으로나 세상의 측면에서 발전이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끊임없이 발전하려면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지만, 그 대상보다 내가 너무 못나서 벌레처럼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하기에 하느님 자녀가 되라는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람 앞에는 항상 자신을 아직 많이 부족하게 여기게 만드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처럼 분명히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대상이 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JTBC의 ‘말하는 대로’에 샤이니의 ‘키’(Key)가 나와 팬들과 소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26세였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나답게 사는 법’이었고 제목은 “닭이 닭답게 못 사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었습니다.
키의 이름은 김기범입니다. 그는 왜 자신을 닭이라 여겼을까요? 처음엔 샤이니 모든 멤버들이 ‘백조’란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백조로 태어나서 금수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키는 몇 번의 오디션에 떨어지고 간신히 붙은 경우입니다. 그리고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5위였습니다. 멤버가 다섯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는 사람은 부모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음을 압니다. 처음부터 백조였다는 말은 사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오히려 가수 키는 다른 멤버들은 ‘백조’이고 나의 출신은 ‘닭’이니 닭답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자기답게 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분명히 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을 믿어야만 이렇게 겸손해집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을 통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신 앞에서 자신은 닭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샤이니 멤버 중 점점 인지도가 향상하는 가수는 키라고 합니다. 요즘 개인 앨범도 내고 많은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발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닭’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분명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하느님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닭이니까 백조보다 더 열심히 살고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말자는 결심입니다. 그는 주근깨도 찢어진 눈썹도 가리지 않고 방송에 출연합니다. 자신은 닭이니까. 그래서 어려운 연예계에서 무탈하며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려면 내가 될 수 있는 최대치의 대상을 내 앞에 두십시오. 마치 아기가 부모를 앞에 두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목적이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대상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이 완성되면 거기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멈추지 않고 발전하려면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셔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베드로처럼 물 위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세례받는 것, 혹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국어시간에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글을 쓸 때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왜’와 ‘어떻게’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과학의 분야에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의문 나는 부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도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원인을 알면 판단을 내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은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에 늦게 출근한 것은 왜의 문제입니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있을 수 있고, 마라톤 대회가 있어서 길을 막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라는 말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면을 끓이는 것은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스프를 먼저 넣고 끓이기도 하고, 계란을 넣고 끓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왜’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자주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고, 우리도 단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안식일에는 쉬어야 하는데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줍니까?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인데 밀 이삭을 따서 먹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단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가 끝나면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당신들도 안식일에 소나 양에게 물을 먹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답변이 궁색해진 적이 많았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왜? 라는 질문을 받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싶으면서도 반항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저도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을 드러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왜 동생 아벨을 죽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나중에는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벌하시지 않겠는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 10명을 보아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왜라는 차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라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율법학자는 대답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사제와 레위인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에 데려다 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자비를 베풀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왜’ 나를 배반하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왜라는 말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라는 말은 공동체를 갈라놓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살면서 왜라는 질문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떻게라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강력한 한방은 신속한 회심을 촉구하는 주님 편의 신호입니다!
-양승국신부-
지금까지 이 세상 살아오시면서 혹시라도 누군가로부터 공개석상에서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인 있는가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야! 빨리 그 가면을 벗어라!” 라든지 “인생을 그 따위로 살지 마라!” 라는 식의 충격적인 말.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가슴이 부들부들 떨릴 것입니다. 복수심에 이를 갈 것입니다. 어떻게라도 반격하고 되갚아주기 위해 골몰할 것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쌍날칼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복음 11장 52절)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눈에 제일 먼저 포착된 볼썽 사나운 광경이 있었으니,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거짓 목자들, 오직 자기 배, 자기 주머니 채우는데 혈안이 된 지도자들의 타락과 횡포였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함께 가던 유다 문화 안에서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은 고스란히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으로 슬픔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종교의 권위를 등에 업은 지도자들의 횡포 앞에, 착취와 희생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 한 군데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가 있었으니, 자신들뿐만 아니라 아무 잘못 없는 백성들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죄입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예수님께서는 큰 껄끄러움과 부담을 무릅쓰고 거짓 지도자들의 회심을 촉구하는 강력한 펀치를 날리고 계신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에게도 강력한 펀치가 날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신속한 회심을 촉구하는 주님 편의 신호라고 보면 거의 정답입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강력한 한방이 날아올 때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 삶의 뿌리를 한번 돌아볼 일입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성찰해볼 일입니다.
결국 그 강력한 한방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어서 빨리 당신께로 돌아서라는 자비의 마음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트집을 잡는 사람
-반영억신부-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냐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 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시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가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앙생활>
-송영진신부-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이 말씀은, “너희는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예언자들을 존경하는 척
하지만, 너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도 예언자들을 박해하면서
죽이고 있으니, 너희는 너희 조상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49-51).”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시는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 21장에 있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와 같습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3-40)”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 소작인들은 하느님의 백성, 주인 몫의 소출은
충실한 신앙생활, 종들은 예언자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하려고 ‘소작인들’로 표현하셨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소작인들이 아니라 자녀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시는 것은
우리의 회개와 신앙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 반역하는 것이고,
스스로 자녀의 자격을 버리고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한 일이라고, 또는 하느님께 충성하기 위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느님께 반역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박해자들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바오로 사도가 ‘박해자 사울’로 살았던 때에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일이었고, 대부분의 박해자들은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 눈이 멀어서,
또 회개하는 것이 싫어서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자기들의 죄를 감추려고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봉사(충성)한다는 그들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입장을 바꿔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론이나 설교를 들을 때 ‘복’을 잘 받는 방법에 관한 말은 좋아하고,
회개하라는 말은 싫어한다면, 그것은 박해자들 쪽에 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기가 많고 유명한 강사들을 보면, “어떻게 하면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말만 하고,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고,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 예언자들’의 공통점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여기서 ‘열쇠’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뜻합니다.
‘지식’은 하느님의 구원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식의 열쇠’는 ‘구원을 받는 방법’,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뜻합니다.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는(막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성경과 율법을 가르쳐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율법학자들의 임무인데, 율법학자들 자신들이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지 못하고,
사실상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도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면,
전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복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내가 복음대로 사는 것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도와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복음대로 살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큰 죄’가 됩니다.>

복음: 루카 11,47-54: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조상들을 단죄했지만, 비슷한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조상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신다.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은 것이 죄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조상들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그들의 악함을 씻을 수는 없다.
하느님을 폭행하는 것보다 더 악한 죄는 없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라고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마태 23,35)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안에서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례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록 피는 흘리지 않는다고 해도 힘없고 약한 이웃을 헐뜯거나 정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비아냥거리며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지나 않은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 50)
-한상우신부-
아름다운
가을 하늘을
맘껏 볼 수 있는
요즈음이다.
더 나은 발전은
과거를 뼈저리게
반성하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무한한 책임감으로
바뀌어야 한다.
책임을 지는
삶이 건강한
우리들의
참된 희망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피 흘린
수 많은
예언자들을
기억한다.
올바른
정신의 진전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피흘림을
기억하며 우리의
내면에서 생활로
이어지는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일관된 노력과
단호한 변화의
의지가 필요한
우리들 세대이다.
변화와 변질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참된
변화이다.
창조적인 만남은
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성숙함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창조와
재창조 사이에
십자가가 있다.
상호연결
되어있는
우리들 삶이다.
과거의 십자가가
현재의 십자가이며
미래의 십자가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로
새로운 시도를
하신다.
한 사람의 변화가
세상을 정화하는
치유의 변화가
되었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가을의
색채이다.
십자가에
동참하는
변화가
참된 변화이듯
우리들의
가야 할
책임있는
삶이다.
책임의 정신으로
돌아갈 때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자신또한
역사의 죄인
공동체의
죄인이라는
각성이
새로워지는
진정한
변화임을
믿는다.
대자연은
결코 새로운
변화를 방해하지
않는다.
단풍이
곱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앞의 진정한 의로움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율법 학자들에 대한 불행 선언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에겐 경외와 믿음,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으로 축소되어 버린 듯 보입니다. 사실 그게 더 쉬우니까요. 그들에게 구원은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여 얻는 은총이 아니라,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정확히 실행하는 데 대한 보상 정도로 축소된 듯 보입니다.
인간이 깨우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지식은 '하느님을 앎'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제도가 부여한 권한으로 율법에 담긴 사랑의 깊은 샘을 덮어 버리고 그 언저리만 맴돌면서 다른 이들의 접근조차 방해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원래 율법은 하느님과 더 깊이 사랑을 나누라고 주어진 선물이지만, 편협하고 게으른 안내자를 통해 자칫 선량하고 단순한 이들이 율법은 물론 하느님마저 거북하고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 소지가 있습니다. 소위 율법과 종교 전문가들이 하느님 사랑의 정수로 이어지는 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기득권 유지와 백성의 통제에 더 도움이 되긴 합니다만...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의로움을 획득하여 구원받는 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로마 3,21-22)
기존 유다인들에게 사도 바오로의 이 가르침은 가히 폭탄 선언과도 같았을 겁니다. 율법이 구원에 별 의미가 없다니요! 예수님을 적대하고 앙심을 품었던 종교 기득권자들이 사도 바오로에게도 같은 칼날을 겨눈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율법의 정신을 사는 것과 믿음은 별개의 길이 아니지만, 율법의 문자를 수호하는 것과 믿음은 다른 문제가 됩니다. 눈에 보이는 문자를 고수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지요. 문자 적용에는 마음까지 쏟아부울 필요가 없고 또 존재적 회개와 사랑까지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구원자시라는 믿음은 세상 시류에 역행하는 어렵고 모험적인 길이긴 하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존재적 방향 전환과 뜨거운 사랑, 벼랑 끝에서 존재를 던지는 믿음이 곧 구원의 상태니까요.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되는 길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민족이나 제도, 신분이나 타이틀에 의거해 의롭다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 주님과 깊고 친밀하게 엮인 사랑이 그분과 하나 되는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길에서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라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더욱 겸손하고 선하고 충실한 믿음의 안내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8주 목요일-불행 선언 2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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