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10. 9. 06:56

2021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가 11,27-28)

 

 Blessed is the womb that carried you
and the breasts at which you nursed.

He replied, Rather, blessed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ser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명연아! 인제 그만 놀고 밥 먹어라.” 옛날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의 이 목소리를 들으면 집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사실 다른 어머니들도 식사 때가 되면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더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이 부름에 하나둘 빠져나가면 당연히 함께 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이 호명되면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이 기억이 아직 제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많은 이가 이 세상 안에서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반드시 옵니다. 나만 부르는 것이라면 이 부르심을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부르심이 주어집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어머니께서 불러서 놀이는 끝이 났지만, 집에서 밥먹고 또 나름의 놀이 시간을 갖습니다. 이처럼 죽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끝나지만, 하늘 나라에서 새로운 일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가져다주지만, 분명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도 품게 됩니다.

“인제 그만 놀고 하늘 나라에 와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이 언제 주어질까요? 그날과 그때를 모르기에 우리는 매 순간 준비해야 합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 행복 선언이 옳음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여기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복되신 것은 예수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분의 말씀을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믿음을 통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완벽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지막 부르심의 순간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제1독서의 요엘 예언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요엘 4,13)

아직도 멀었다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다가는 커다란 후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할까요?

‘먼 훗날’이 아닌, ‘바로 지금’입니다. ‘여유가 되면’이 아닌, ‘바로 지금’입니다. ‘많은 것을 받은 다음’이 아닌, 많은 것이 부족해도 ‘바로 지금’입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으면서 지금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참 행복에 가까워집니다.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욱더 명료해질 것이다(H.D.소로).

목적과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식당 가는 것도 꺼려지는 요즘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부들을 만나기도 참 어렵습니다. 친한 신부들을 만나서 식사나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오던 저로서는 정말로 힘든 시기가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들을 제가 있는 성지로 초대하기 시작했습니다(물론 모임 인원 숫자를 방역 규칙에 맞춰서 했습니다). 초대받은 신부들도 남 눈치 보지 않아서 좋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초대하는 것은 솔직히 귀찮고 힘듭니다. 장도 봐야 하고 음식을 만드는 수고도 해야 합니다. 또 나중에 설거지와 정리 역시 제 몫입니다. 거의 이틀을 손님맞이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신부들을 위한 자리라는 생각에 기쁘게 준비하고 마지막 정리까지 기분 좋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나 자기가 믿는 어떤 목적이라면 많은 고통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고통과 시련은 일차적인 것이 아닌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찾지 않으면 고통의 무게는 더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찾아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양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나는 창조자가 아니라 관리자라는 고백

-전삼용신부-


당시 예수님께서 인기가 대단하셨나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아마 ‘나도 저런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행복론을 바로잡아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계명’입니다. 왜 어떤 것을 가지는 것보다 계명을 지키는 게 더 행복할까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한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관리자에게 맡길 때 꼭 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설계도와 운영 안내서’입니다. 그리고 운영자를 못 믿어서인지 그 매뉴얼 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관리자를 괴롭히는 시스템을 넣어놓는데 이것이 ‘안전 시스템’입니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는 이유는 항상 관리자가 창조자보다 그것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관리자가 창조자의 안내서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알람을 울려서 관리자가 창조자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제가 처음 영성관에 왔을 때 자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새벽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신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엄청난 사이렌 굉음과 함께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듯 뛰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화재가 발생한 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영성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무조건 ‘119’에 신고했습니다. 그분들은 정말 불이 난 것이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저는 사이렌이 울리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밖에 서서 소방차를 기다렸습니다. 

 

    새벽에 출동했던 소방대원들은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화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가다 소방 시스템이 오작동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울리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영성관 구석구석을 살피며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일단 알람을 해제하고 잠을 잡니다. 그러면 다음 날 소방점검 회사에서 와서 더 확인하고 시스템을 원래대로 해 놓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것 같습니다.

  

    알람 시스템은 정말 귀찮습니다.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민감해서 훈련을 시키듯 울려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알람 시스템은 그만큼 이 건물을 운용하는 사람이 긴장해서 매뉴얼 대로 건물을 사용해야 건물이 안전할 수 있게 해 주는 꼭 필요한 장치입니다. 매뉴얼은 그 건물을 만든 이가 처음부터 만들어 놓은 설계도와 운영세칙입니다. 관리자는 안전 시스템의 알람이 울릴 때마다 매뉴얼을 공부하고 창조자의 본래 의도대로 그것을 관리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알람 시스템이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요즘은 자동차에 아기가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자동차에 아기가 있다면 경고음이 울리는 시스템이 장착되어 나오는 차가 많다고 합니다. 아기들이 부모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가 자기 생명을 책임져 줄 창조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마트폰이 인간에게서 멀어져 원숭이 손에 들어가면 그것의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도 인간을 만드시고 그것을 운영할 인간에게 당신의 창조 의도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알람이 울리게 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양심’이라 합니다. 양심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 울려주어 우리가 하느님 뜻에서 멀어졌음을 경고합니다. 이 느낌을 ‘불안’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참 행복은 무언가를 소유하여 단순한 걱정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 말씀이라는 매뉴얼을 따르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거짓말 탐지기’와 같은 것도 사용하면서 양심의 존재는 무시합니다. 양심은 그저 진화론적으로 생겨난 무엇이거나 교육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맡아 운영하는 운영자일 뿐입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서 나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안전 시스템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나 자신을 운행하면 망가지는 게 순서입니다.

  

    소방 시스템을 무시한 건물 관리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나는지 우리는 어렵지 않고 보아오고 있습니다.

    1986년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원전 사고가 있었습니다. 원전 담당자는 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까지 원전이 폭발한 것이 아니라 냉각기가 폭발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자신만큼 발전소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모든 사태에 직면한 정부 또한 이 심각성을 인지 못 하고 일단 감추려는 데 전념했습니다. 체르노빌을 봉쇄하고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전화선도 끊었습니다. 그리고 사태를 악화시킬 일만 했습니다. 결국, 피신하지 못한 모든 사람이 방사능에 노출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은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낙진을 맞으며 즐거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2~3일 후 바람을 타고 날아간 방사성 물질들이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까지 감지되었고 미국 인공위성이 이것을 찍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시간을 그들은 알람 시스템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창조자처럼 완전히 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사고는 터빈의 관성력으로만 얼마만큼의 발전이 가능한지에 관한 실험을 하기 위해 안전 시스템을 해제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양심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신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알람 시스템을 끄고 실험을 하다 사고가 발생했고 그는 자신이 그런 실수를 했을 것으로 인정하지 않아 자신은 물론이요 수많은 사람이 죽게 했습니다. 정부 또한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이 일을 은폐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의 피해를 늘렸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들에는 안전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음을 믿지 않으면 우리 개인들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가정도 그렇게 나라도 그렇게 세상도 그렇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 창조자의 매뉴얼대로 운영해야 한다는 겸손을 되찾아야 합니다.

    주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하며 양심의 알람이 울리는데도 ‘그럴 리가 없다.’라며 그 불안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거나 그 불안을 잊으려고 더 큰 죄에 물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멸망시킵니다. 세상도 그렇게 멸망의 길로 갑니다.

  

    우리가 겸손을 회복했다는 증거는 바로 ‘양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양심이 알람을 울리지 않도록 운영세칙인 하느님의 말씀을 순간마다 찾는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존재와 가장 가까운 말은 ‘뜻’입니다. 엄마 품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드님을 가져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시기에 행복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 양심이 있다면 분명 누군가가 나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매뉴얼대로 작동하고 양심과 매뉴얼이 있다면 나를 만드신 분이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뜻대로 삶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주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소유해서가 아니라 주님 뜻에서 멀어질 때 느끼는 불안을 먼저 해소하려고 합시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창조된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의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에서는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한국에는 원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발순대곱창닭 한 마리막국수냉면갈비와 같은 음식점에서 원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서울 장충동에는 원조 족발집이 있고 주변에 비슷한 이름의 족발집이 있습니다맨 처음 문을 연 식당이 있었고손님이 많아지면서 주변에 비슷한 식당들이 들어서면서 더 많은 손님들이 찾게 됩니다물론 원조 식당에 손님이 많기 마련입니다색다른 맛과분위기를 찾아서 근처의 다른 식당을 찾기도 합니다프랑스의 소설가 레몽 크노는 모든 위대한 문학 작품은 일리아드 이거나 오디세이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습니다서양 문학의 원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최강 1교시라는 강연에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일리아드는 분노에서 시작됩니다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도망가면서 전쟁이 시작됩니다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입니다사랑하는 친구가 전쟁터에서 죽으면서 또 다른 분노가 생겼습니다친구를 죽인 상대방을 죽이고 모욕을 주었습니다이는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잃어버린 트로이 사람들의 분노가 되었습니다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친구를 잃어버린 영웅이 아무런 무장 없이 늦은 밤에 만납니다그리고 모든 분노를 풀어버리고 자기가 죽인 트로이의 영웅을 돌려보냅니다분노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만들기 마련입니다죽음은 선한 사람도악한 사람도 모두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악을 악으로 되갚는 것보다는 악을 선으로 갚을 때 분노는 녹고 용서와 사랑이 꽃피게 됩니다.

 

오디세이는 귀향입니다. 10년간의 전쟁도, 10년간의 모험도 결국은 고향으로 가려는 마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죽음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모든 것이 풍족한 낙원 같은 섬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예전에 노란 손수건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본인의 실수로 감옥에 가게 된 남편이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아직도 나를 기다린다면 마을 입구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달라고 하였습니다아내와 자녀들은 나무에 100개가 넘는 노란 손수건을 걸어놓았습니다남편은 나 집으로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오디세이의 아내는 아무런 연락도 없는 남편을 20년 동안 기다렸습니다전쟁도모험도이별도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전쟁도모험도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막지 못했습니다.

 

230년 만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복자 윤지충 바로오의 동생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도 220년 만에 발견되었습니다저는 이분들이 한국 천주교 신앙의 원조라고 생각합니다이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전주교구 김선태 주교님은 유해 발견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를 밑거름 삼아 성장해 온 우리 교회가 그 순교 역사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들의 유해를 비로소 찾았습니다유해 발견은 놀라운 사건이며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신앙 선조들은 참된 신앙을 다시 한 번 전하고 순교 신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230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비록 이 세상이라는 여정에서는 참혹하게 죽었을지라도많은 고난과 박해가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이라는 희망을 찾아 하느님께로 가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피난처가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신다유다에는 영원히예루살렘에는 대대로 사람들이 살리라나는 그들의 피를 되갚아 주고 어떤 죄도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위로해 주시고슬픔은 기쁨으로 바꿔주신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렇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의인들아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혈연을 통한 가족도 중요하지만, 주님과 말씀을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 가족 역시 중요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율법 교사들이나 종교 지도자들과는 가르침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선했고 흥미로웠습니다. 고리타분한 설교에 식상해하고 있던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크게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어떤 예수님 말씀은 너무나 심오했던 나머지 이해의 폭이 좁았던 군중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건네신 말씀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복음 11장 27절) 라고 외친 한 여인의 탄성 앞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답변을 꺼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을 극찬하는 여인의 발언 앞에,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답변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희 어머님, 정말 참 신앙인 중의 신앙인이십니다. 저를 낳으셨고 양육하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계셨기에 오늘 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듣고 있던 군중의 오해를 살 여지가 충분한 말씀이었습니다. 어쩌면 스캔들이 될 만한 발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십계명 중에서도 중요한 계명인데...저 정도면 불효자가 아닌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성모님을 극구 칭송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킨 분은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니 성모님이 가장 행복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의 진의(眞意)는 어머니 성모님을 폄하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평생토록 하느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셨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천하신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인 동시에...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그리스도교의 개방성, 확장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혈연을 통한 가족도 중요하지만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 가족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해야 하겠습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켰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말씀대로 순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한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정오만 되면 성당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인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말했습니다. “나요, 기도하러 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저 12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요. 나예요’하고 인사만 하고 가는 겁니다.”얼마 후에 그 노인이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병실에서 밝고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간호사가 그 비결을 여쭤봤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건 매일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오.” 간호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할아버지는 가족도 친지도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매일 오는 사람이 있지.” “그 방문객은 언제 오시나요?”“매일 열두시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오시지.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방긋이 웃으면서 한 말씀하고 바로 돌아가셔.”“뭐라고 하시는데요?”“간단해. ‘여보게, 날세. 나, 예수네!” 라고 하지.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감격에 찬 말을 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성장하였을 때, 으레 받을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찬사다. 이 부인의 찬사는 우선은 예수님을 두고 한 것으로, 바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께 대한 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하신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모두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혈연관계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복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복되시다는 뜻이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을 통해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뵐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다른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였다(참조: 마르 3,35).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한상우신부-

행복의 시작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삶이 있는 곳에
말씀이 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

말씀으로
우리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말씀과의 만남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말씀이
우리를
돌보고 있다.

말씀의 일상이
말씀의 행복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와
함께하는
말씀이다.

아름다운 삶을
낳는 말씀이다.

말씀 안에
참된 관계가
있다.

말씀이 삶을
바꾸어 놓는다.

행복의 길은
말씀의 길이다.

오히려 행복한
더 없이 행복한
말씀의 삶을
성모님은 사셨다.

삶을 행복하게
하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행복한가를
묻게된다.

말씀으로
우리의 행복을
새롭게 할 때이다.

말씀이
물들여가고
말씀이
열매 맺는
말씀의 신비이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는
말씀의 행복한
자녀들이길
바라시는
하느님이시다.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외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한껏 고무되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던 듯합니다. 누군가를 칭찬할 때 그 가족의 영광을 언급하는 일은 흔하지요. 세상의 당연한 시각이긴 한데, 행복의 조건을 너무 인간적으로만 규정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에 예수님께서 간결히 응답하십니다. 그녀의 말을 부정하시려는 게 아니라 행복의 조건을 확장하시는 겁니다. 이로써 성자의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 몸에 예수님을 잉태하여 품은 육적인 이유로도 행복하시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평생 그 말씀을 지키신 영적 이유로 "가장 복된 여인"이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의 날의 두 모습이 선포됩니다.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요엘 4,18)
주님의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분을 경외하면, 불충하고 완고한 옛 하느님 백성의 멸망과 함께 궁극적인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주님의 현존인 성령, 샘물은 야훼 하느님의 표상이니, 이스라엘이 다시 주인이신 하느님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집트는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량한 광야가 되리라."(요엘 4,19)
반면 하느님 백성을 폭행하고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이들의 거처는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재물과 권력, 문화를 자랑하며 풍요와 번영으로 콧대를 세웠던 이들이 그런 시절이 언제 있었냐는 듯 벌거벗겨져 심판의 낫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날,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오셔서 당신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날에는, 긴긴 세월 동안 세상이 규정했던 행복의 인간적 척도가 바뀔 것입니다. 행복으로 여겼던 재물과 권력이 검불처럼 가벼워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의 기쁨이 진정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는 과연 어떤 행복을 좇고 있는지 되짚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물질주의-자본주의 세상은 외모 관리, 육체 관리, 재산 관리, 인맥 관리가 최고의 행복인 양 착시를 조장하지만, 정작 우리의 행복은 '영혼 관리'에서 시작되지요. 더 깊고 진실된 참 행복을 찾아 성모님처럼 늘 주님 앞에 머물러 말씀을 듣고 행하는 벗님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

 -김찬선신부-


이미 몇 번인가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피정 때 어머니들께 질문을 드리지요.

천국에 가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면 어떤 관계를 맺겠습니까?

 

우선 지금의 남편과 꼭 다시 부부의 연을 이어가겠습니까?

대다수가 싫다거나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을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 아들과 어떻습니까?

관계를 끊겠습니까? 이어가겠습니까?

 

백이면 백 아들 관계는 끊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생 망썽꾸러기에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렇겠냐고 

물으면 그래도 지금의 아들이 계속 당신들의 아들이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서 저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용서도

이런 것이구나!' 아니, '이보다 더 큰 사랑과 용서이구나!'하고 이해합니다.

 

이제 한 걸을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지금 말썽쟁이 아들과 예수님 중에서 누구의 어머니가 되고 싶습니까?

 

더러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대개는 예수님보다는 지금 아들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들 하십니다.

그런데 보통의 엄마들이 이러한데 오늘 복음의 여인은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참으로 행복하다며 부러워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도 자기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고,

말썽쟁이 아들 때문에 불행해서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에서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것일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0월 12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