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0일 연중 제28주일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17-27 )
“You are lacking in one thing.
Go, sell what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주님을 얻는 지혜
-키엣대주교-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그 믿음을 지킬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그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걸림돌이 되는 순간, 주님의 손을 놓고 세속의 가치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주님께 돌아가리라 다짐하지만 믿음보다 더 큰 즐거움에 현혹된 다음 권력과 명예, 유혹을 외면하는 것은 주님을 버리는 것 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명예, 권력을 가진 사람도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빈 손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더 많이 가지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갑니다. 어느 곳간에 쌓이는 재물이 나의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쌓여가고 있는 재물은 볼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습니다. 더 많은 재물을 갖기 위해서는 주님을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참 행복을 얻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고 주님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참 행복을 구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을 택하고,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기에 주님과 나 사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께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버릴 수 있다면 주님을 얻는 영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한 가치를 위해 눈 앞의 이익을 버릴 줄 압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지혜를 얻는 열쇠입니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 세상 어떤 것보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임을 알게 하여주소서. 아멘.

1. 하늘나라 나의 곳간에는 얼마나 많은 재물이 있습니까?
2.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혜는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3.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내가 가진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소유나 소득이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게 되면, 또 내가 원하는 지위나 상태에 오르게 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순간의 만족에 불과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90년대 중반,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컴퓨터의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이쪽 분야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어졌습니다. 286, 386, 486, 586 펜티엄으로 이어지는 발전에 저 역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최고 사양으로 업그레이드를 해도 부팅하는데 2~3초 빨라질 뿐이고, 다른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는데 조금 빨라진다는 것 외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몇 초 때문에 비싼 돈을 들여 업그레이드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업그레이드를 하고 난 뒤의 기쁨은 얼마나 갈까요?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시뿐인 기쁨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최선 스마트폰을 사면 그 순간은 너무 기분이 좋지만, 그 기분이 며칠 가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늘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를 외치면서, 자신은 욕심이 없다는 식의 합리화를 시킬 뿐입니다.
물질적 만족은 분명히 외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도 외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행복은 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얻겠다는 마음이라면, 내적 만족을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래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이런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주님께서는 발견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렇게 주님 말씀은 이 부자 청년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냈습니다(히브 4,12). 그렇다면 부자 청년은 어떻게 했을까요? 주님 말씀을 듣고서 마음의 생각을 바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복음은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즉, 그는 외적인 만족을 추구했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행복은 이런 외적인 만족이 아닌데도, 내적인 만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재물이라는 외적인 만족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만족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입으로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외적인 만족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행복은 내적인 만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수십 년 전 과학자들이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 ‘바이오스피어 2’라는 인공생태계를 건설하고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유리와 쇠로 된 거대한 돔 내부에 정화된 공기와 깨끗한 물, 영양가가 풍부한 토양, 다량의 자연 채광을 공급했습니다. 이렇게 내부의 동식물 군에 이상적인 생존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곳의 식물은 최적의 조건에 걸맞게 최고의 가치를 간직하면서 성장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곳의 나무는 일정 높이가 되면 자꾸 쓰러졌습니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이 제공되었는데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나무가 건강하기 위한 필수 조건 하나가 빠졌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람’이었습니다. 자연환경에서 나무는 바람에 의해 흔들거립니다. 이를 통해 줄기가 더 튼튼해지고 뿌리가 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안정적이고 훌륭한 존재로 성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상징하는 ‘바람’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또 육적으로 결코 튼튼해질 수 없습니다.

말씀을 실천할 것인가. 말씀과 동행할 것인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예수님께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계명은 다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버림과 가난을 전제합니다. 내가 가난해지려 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은 이웃사랑을 지향하는데 이웃이 굶고 있는데 본인만 부자로 산다면 그것은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을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스승은 ‘말’로 가르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스승은 ‘동행’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만약 하와가 하느님과 동행했다면 어땠을까요? 결코, 뱀의 말을 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뱀의 ‘설득’에 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뱀이 함께 눈에 보인다면 하느님 대신 뱀의 말을 듣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입니다. 기도에서는 묵상과 관상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음성만 들었다면 물 위를 걸을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2015)는 이런 줄거리가 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인기 코미디언 하페가 과로로 쓰러집니다. 의사는 최소 3개월을 쉬어야만 한다고 경고합니다. 하페는 잠시 일에서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순례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첫날부터 폭우와 허름한 숙소, 불면의 밤까지. 하페는 일단 걷는 것보다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긴 여정을 빨리 끝마치고 싶어 합니다. 잠은 고급 호텔에서 잡니다. 도장만 받는 게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힘이 듭니다. 호텔이 없는 곳에서 벌레에게 물려가며 잠을 한 번 자고는 포기하고 돌아가려 합니다.
이때 스텔라를 만납니다. 그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딸을 잃었습니다. 딸은 암이었고 순례를 하다 죽고 싶다고 해서 엄마와 함께 순례하다 중간에 죽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딸을 잃은 아픔을 딸과 함께 마지막으로 걸었던 순례길을 되밟으며 달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페는 뭔지 모르는 목표의식이 발동합니다. 어머니를 잃고 돈과 성공에만 집중하며 달려왔던 길. 그리고 지금 서 있는 길은 고통과 외로움과 시간을 허비하는 듯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받아들입니다. 그분께서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걸어주셨음을 믿고 정말 오랜만에 그분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가 순례하는 동안 쓴 일기를 살짝 들여다볼까요?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 신앙이 확고한 적이 있었다면 다시 찾고 싶다…. 내 발이 길을 밟는 걸까, 아니면 길이 나의 발을 미는 걸까?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감정 표출도 감동도 없다. 자비로운 상태. 재미없지만 아픔도 없다.
가장 놀라운 건 이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이 길의 힘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대한 존재와 이 세상에 미치는 그의 놀라운 영향력을 철석같이 믿는다.신을 만나려면 먼저 그를 영접한다고 말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신을 올 수 없으니까.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누구든 신과 나름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자만이 지속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나와 너……. 나와 당신.”
그는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발견합니다. 눈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비로소 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를 만났다. 나머지는 오직 그와 나의 문제다.”
이제 그는 친구들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무례한 여자의 손을 잡아주고 딸을 잃은 스텔라의 손도 잡아줍니다. 그리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입성하여 향을 받습니다.
“난 물론 혼자 간다. 이제 알았다. 사실 지금 집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래야지? 순례의 길을 걸으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매일 신을 만났다는 거다.”
할머니는 하페에게 “묻지 말고 신께 의지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페는 신께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께 의지할 때 외로움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신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어릴 적 신앙에 관한 말씀은 하페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800킬로를 가는 여정 중에 하페는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말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구약으로 충분했습니다. 존재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자 비로소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욕심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은 존재에 대한 믿음만이 변화시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이가 어떻게 줄곧 게임만 할 수 있겠습니까? 존재가 곧 법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가 눈에 보인다면 행동과 생각만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여서 본성까지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믿고 그리스도를 보는 듯이 행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전례’만 하는 것과 ‘성찬의 전례’까지 하는 것이 이 차이입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것과 그분의 실존과 동행하는 것의 차이인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걷는 것, 이것이 관상입니다. 묵상에 머무는 사람은 배 위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 삶에서부터 관상이 시작되면 언젠가 그분은 진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분처럼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쓴 호메로스에 대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평가는 달랐다고 합니다.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었던 플라톤은 호메로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위협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분노, 방황, 전쟁, 열정, 혁명, 권위에 대한 도전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불온한 사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도덕적이어야 했고, 순수해야 했습니다. 법과 질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권위에 도전하고, 반항하고, 분노하는 이야기는 아이들을 사상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이 세상은 순수한 이상의 그림자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순수, 사랑, 나눔, 희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를 그리스 사람들이 꼭 배워야 할 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 있는 영웅들은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페르시아를 상대로 그리스는 제2의 트로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그리스인들은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를 침공하려는 페르시아를 물리쳐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지도자들에게 페르시아를 상대로 싸우자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그리스 사람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페르시아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리스를 통합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물리쳤고, 당시에 가장 넓은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문득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나라입니다. 기쁜 소식은 억눌린 이들이 자유를 얻고, 묶인 이들이 해방되고, 가난한 이들이 부유해지고, 아픈 이가 치유 되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고, 미천한 이들을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눈 먼 사람이 보게 되었습니다. 귀가 먼 사람은 듣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던 헤로데는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뜻을 따른다고 선동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고 선동했습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 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 기득권을 가진 사람,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 두려움에 빠진 사람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전하신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을까요?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던 성모님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입니다. 성모님은 시메온의 예언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였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하였습니다. 거리로 나가서 당당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 회개한 사람,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플라톤은 지혜는 궁극적인 진리와 원리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그러한 진리가 비쳐지는 허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상황을 극복하는 의견이라고 하였습니다. 상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황에 맞는 의견을 내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또 다른 지혜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기도를 통해서 자라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실천을 통해서 열매 맺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관대한 나눔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부자들을 향한 주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는 일억 원만 있어도 부자라고 어깨 피고 다녔는데, 요즘은 어디 가서 명함도 제대로 못 내밉니다.
최근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얼마가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는 설문조사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40억이랍니다.
그러나 40억은 꿈같은 희망사항일 뿐이고, 대한민국 부자의 기준(재난지원금 계급표)에 따르면, 나름 부자라고 할 수 있는, 상위 12퍼센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연봉 5,000만 원정도가 되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부자에도 여러 유형의 부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까무러칠 정도의 막대한 은행 잔고를 보유한 부자가 있는가 하면, 그리 넉넉하지 않아도 언제나 마음이 풍요롭고 여유로운 영혼의 부자, 마음의 부자가 있습니다.
재물이라는 것, 참으로 묘한 것 같습니다. 우선 재물이란 것,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력을 지니고 있어야 가족들 앞에 얼굴도 서고, 적극적인 이웃 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품위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도구가 재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나친 바가 없지 않습니다. 눈만 뜨면 돈돈! 입니다. 입만 열면 돈돈!입니다. 돈 외에도 더 크고 의미 있는 가치들이 부지기수인데, 완전 무시합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엄청난 재물을 탑을 쌓아올립니다.
그렇게 발버둥 치던 어느 순간, 그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곧 떠나가게 되는데, 그토록 애써 쌓아올린 저 재물들은 어떡하지? 재물이라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별것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목숨 걸었을까? 왜 좀 더 나누지 못했을까?”
평생 돈이 최고라고 외치고 다녔기에,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돈을 최우선 가치로 여길 것입니다. 다들 유산 가운데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몫을 챙길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떠나가는 자신은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쇠락해가며 흐려져만 가는 자신을 내팽개쳐놓고 다들 떠나갈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오늘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애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코 복음 10장 24~25절)
부자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눌 줄 모르는 부자들입니다. 재물 좀 있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뻐기지만, 어려운 사람들과 단 한 푼 나눌 줄 모르는 수전노 같은 부자들을 향해 오늘 예수님께서 옐로우 카드를 내미신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서 축척한 부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유분에 대한 적극적이고 관대한 나눔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부자들을 향한 주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달랜트를 잘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달랜트 중에서 재화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성하신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며 십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보시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재물이 장해물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쓸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물을 버리고 따랐는데 이 청년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늘의 복을 차지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 구원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사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채우면 전체를 얻게 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모두를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재산에 끌려다니는 삶을 포기하지 못하면 근심할 수밖에 없고 또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6,24)고 하셨습니다.
오래 전(1988년)의 일입니다만 미국 조지아주의 자동차 수리공 ‘풀 쿠니’라는 청년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복권이 당첨되었는데 우리 돈으로 240억원의 당첨금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불행 끝’, ‘행복시작’이라며 부러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송 인터뷰에서 “저는 여전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하고 성실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돈은 쿠니를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1년 후 자신이 일하던 자동차 회사를 인수했고 아내가 일하는 도너츠 가게도 인수하여 사장이 되었습니다. 돈을 물 쓰듯이 하며 즐기다가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났고 부부는 이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빚을 지고 옛날보다 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쿠니 뿐만 아니라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90%이상이 실패한 삶을 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일확천금이 복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화를 몰고 왔습니다.
한국에는 ‘졸부’가 많다고 합니다. 졸지에 부자 된 사람들입니다.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가 보상을 받은 사람,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그야말로 횡재한 사람들이 있는 데 결국은 가정파탄이 일어나고 하나같이 끝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없던 돈이 생겼으면 더 행복해야 하는데 더 불행해 졌습니다. 그것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부자간, 부부간, 친지, 이웃 간의 관계를 다 잃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으로 물질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잠시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물질에 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 돈이 있다고 말하지만 돈을 위해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물질적으로 갖지 못한 것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고향에는 두개의 큰 호수가 있는데 북쪽에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남쪽에는 사해가 있습니다. 두 호수는 요르단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계속 요르단강 쪽으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따라서 물이 항상 맑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사해는 계속 받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나누어 줄 때 새로운 축복이 밀려들어 오는 것입니다. 요즘 사해 물이 핏빛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비롭게도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주는 만큼 부유해
집니다. 그러나 쌓아 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똥은 뿌려지면 거름이 되지만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은 쌓아놓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먼저 많이 받고 그 다음 주겠다고 생각하면 평생 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아홉을 가지고 있어도 부족하고 열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6,38).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 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이 세상에 부자로 사는 사람에게 명령하시오. 교만해 지지 말며 믿을 수 없는 부귀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이르시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셔서 즐기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1티모6,7-10.17)라고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시고 인간이 그것을 부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실히 일해서 부유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 부자 되시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다만 미련한 부자는 되지 마십시오. 루가 복음 12장 13절 이하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많은 소출을 얻어 창고에 잔뜩 쌓아놓고는 말합니다. “내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눔, 베품에 익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영국 런던의 한 신문사에서 '돈은 무엇인가?' 에 대해 현상공모를 했는데 신문 파는 소년이 당선되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돈은 천국 외에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세계적인 여행권입니다. 또 돈은 복을 제외한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공급자 입니다”. 돈으로 천국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은총을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르10,21)하신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재물은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잡아두는 것, 우리의 집착일 수도 있고 권력이나 명예, 취미나 활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주님께 나아가는 데 장해물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부족한 한 가지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부자가 되데, 현명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부를 소유하는 자가 되지 말고 관리하는 사람이 되시고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시는 현명한 부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현명한 부자가 받게 되는 상급입니다. 재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 여자들이 보는 남자랍니다
1.착하고 돈 없는 남자는 ; 불쌍하데요.
성질머리 더럽고 돈 많은 남자는 ; 사업가 기질이 있군!
2.똑똑하고 돈 없는 남자는 ; 재수 없대요. 짜증난답니다.
머리가 나쁜데 돈이 많은 남자는 ; 역시 돈 버는 머리는 따로 있어!
3.검소하고 돈 없는 남자는 ; 멍청하다
허영 덩어리고 돈 많은 남자는 ; 허영에 동참해야지!
돈에 눈멀지 마십시오! 재물에 지배당하지 말고 재물을 부리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마르 10,17).”
여기서 ‘어떤 사람’은 부자이고(마르 10,22), ‘권력가’이고(루카 18,18),
‘젊은 사람’이고(마태 19,22),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경건한 신앙인입니다(마르 10,20-21).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그의 질문은,
그가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생각하면,
‘쉽고 빠른 길’을 찾은 것은 아니고, 일상적인 신앙생활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일’(특별한 극기 고행 같은 것)을 물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신앙인의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은 것은,
그 목표를 잊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고,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승님’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생님’입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학자나 교사로 존경하기는 하는데,
메시아이신 분으로, 또는 주님이신 분으로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고, ‘주님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냥 떠났습니다(22절).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19절).
이 말씀은, ‘특별한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계명들을 제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고 자비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께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런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일’이 아니고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잘 받으려면 ‘삶’ 전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십계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마태 19,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0-22).”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것은,
그가 십계명을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라는 말씀은, 십계명에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십계명 실천’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부족한 점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십계명을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하긴 하는데, 마음의 일부가 항상
재물 쪽에 가 있어서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라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마음의 일부가 재물 쪽에 가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온 마음을 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착심 자체가 무슨 ‘큰 죄’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크게 방해하는(사실상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걸림돌을 치우기를 거부한다면 그때부터는 죄가 됩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방법을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대로 실천한다면,
부족한 점을 채워서 신앙생활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1)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사도들을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생각하면,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제자가 되어라.”로 해석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라는 말과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도들과 같은 급의 제자로
삼고 싶어 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나를 믿어라.”로 생각하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평생 실천해야 할 과제가 됩니다.
3)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하고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이 수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으로 갈 때에는, 지금 애지중지하며 아끼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빈 손’으로 가야 합니다.
그 부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특별한 일’(실천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자기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는데, 그래도 나중에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퍼하기만 하고, 끝까지 자신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재물이라는 걸림돌에 막혀서 영원한 생명의 반대쪽으로 갔을 것입니다.>

연중 제28주일 : 나해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참으로 부자가 되려면 주님께서 우리를 신앙의 선물을 통하여 부르시는 그 영광 안에서 추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솔로몬은 지혜를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낫게 여기고 주님께 그것을 청한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지혜 7,8.11).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지혜 7,7).
복음: 마르 10,17-30: 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오늘 복음에서도 참된 부는 이 세상의 재물을 포기할 줄 알고 또 끊어버릴 마음을 갖는 데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복음을 보면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그 주제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끊어버림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첫째 부분에서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처음과 마지막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20절) 하는데, 예수께서도 감탄하시고 대견해하셨다(21절) 한다. 그런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하였을 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이 극적인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재산 때문에 나오는 위험이다. 그 청년은 용기 있게 결심하고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참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처음에 당신이 선하다고 하는 것(18절)을 거절하시면서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유일한 선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선(善)들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은 제1계명에 의해 생기를 얻고 조명되지 않으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실질적으로 버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오는 결과이지 다른 요구가 아니다.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보다는 자기의 재산에 대한 집착이 컸으므로 하느님이신 주님을 따를 수 없었다.
둘째 장면은 예수께서 재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시대의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에 하시는 권고의 말씀이다(23-27절 참조). 여기서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24절) 하신다. 두 번째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상징적인 표현을 덧붙이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이 표현은 너무 강해서 좀 부드럽게 해석하려고 하지만, “눈 속에 들보”(마태 7,3)라는 표현을 생각한다면, 청년처럼 재산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26절) 수군거린다.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는데, 장애물로 말씀하셨고, 또 그 청년이 구원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낙담한 사람처럼 떠나갔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이 어렵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이 그 은총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부자 청년과 정반대되는 태도를 보인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그 보상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결실이며 그 은총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29-30절).
여기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끊어버리는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끊어버리는 행위가 그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29절) 끊어버리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가치를 소유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자신을 더욱 충만한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즉 그 보상은 보편적 사랑과 형제애를 체험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은(30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의 풍요함으로 자신이 부유해짐을 느낄 때 그것을 완성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박해도 받게 된다고 하신다.
그 박해까지도 믿는 이에게는 영광과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그 박해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 믿음에 대한 보상의 한 형태라고 한다. 히브리서는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들으라고 권고한다(참조: 히브 4,12). 그러기에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또 복음을 위해 집착을 끊어버리고 있는지 볼 수 있게끔 그 말씀을 통하여 철저히 자신이 드러나도록 내맡기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재물이나 세상의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오늘 독서의 말씀에 따라, 참된 부, 참된 지혜를 차지할 수 있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 더욱 풍요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더 일치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
-한상우신부-
연민과 존중의
마음에서
사람은
사람다워진다.
사람을
귀하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이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하느님께서
매순간 주시는
행복이다.
참된 행복은
자유로
우리를
이끈다.
하느님의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가장
자유로울 때이다.
자유는
나눔을
전제로 한다.
나눔이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
참된 나눔이
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묶인 것도
많다.
하느님께서는
대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난이 있고
나눔이 있다.
복음은
나눔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욕심으로
사랑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의 길은
나눔의 길이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으로
오셨다.
건강한 삶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나누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신다.
생명은
나눔으로
공동체가 된다.
구원의 공동체는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공동체이다.
행복은 나눔이고
나눔은 진정한
자유이다.
무엇을
나눌 것인가!
모든 삶을
가난하신
하느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나눔의 날이며
새로운
열림의 날이다.
나누는 것이
자아가 열리는
해방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각자의 부유함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기본 계명을 성실히 준수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모범적 일원으로서 더욱 완전한 삶을 살고 싶는 듯 보이지요. 예수님도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거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라고 권유하십니다. 그를 매우 기특하게 보셨기 때문에 알려 주신 숨은 비책이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그런데 이 말씀이 부유한 그에게는 좌절로 가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슬퍼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요. 무엇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재물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는 재물이 자기 재산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일 수 있고, 능력이나 가족, 타이틀, 우월감, 인맥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번듯이 구축해 놓은 자기 이미지가 반드시 지키고픈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포기하기 정말 어려운 자신만의 무엇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일화는 자기 삶에서 어떤 것도 내려놓지 않은 채, 구원까지 덤으로 얹어 보려는 안일한 욕망에 도전장을 던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액세서리나 스페어 부품이 아니라 전 존재를 거는 결단이고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 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03)
자신을 나름 빛나게 해주는 각자의 재물을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내려 놓을 때,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버림과 따름의 동기가 반드시 예수님과 그분 말씀 때문이어야 하지요.
제1독서는 다른 무엇보다 지혜를 추구한 이의 고백을 들려줍니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지혜 7,11)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 권력, 명예, 성공, 겉꾸밈을 추구하며 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선택합니다. 그분을 청하면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받는다고 지혜를 얻은 이가 말하지요.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소유한 이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 말씀이 어떤 분이신지 들려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말씀의 본성에 대한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 같지만, 실은 말씀께서 다가오셔서 우리를 듣고 빚어가고 계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 오늘 슬퍼하며 떠난 복음 속 어떤 사람에게서처럼, 말씀 앞에서는 신앙 고백의 옥석이 가려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각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또 그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예수님 시선 앞에 더 진실되게 더 뜨겁게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버릴 줄 알고 떠날 줄 아는 지혜
-김찬선신부-
가장 대표적인 깨달음의 종교가 불교라고 합니다.
왜냐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 또는 붓다가 바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고,
석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면
부처가 된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궁극적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이 깨달음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거지요.
그리고 진리란 도리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에의 길입니다.
그러니 지혜란 진리를 통해 행복에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고,
그러니 행복의 길을 모르고 불행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며,
그러니 행복의 길을 모르는 무지가 어리석음이고,
불행의 길을 행복의 길로 잘못 아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 지혜서 말씀처럼
지혜가 무엇보다 소중함을 또한 알고 있기에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고,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비교할 때 한 줌의 모래처럼 여깁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부자 청년이 아니라 어리석은 청년입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에 지혜의 눈 곧 혜안慧眼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은 혜안이 있다고도 하고,
반대로 돈에 눈이 멀고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욕심에 눈이 멀어 돈이 이웃보다 가치있음을 보지 못하고,
돈에 집착하여 사랑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이 세상에 안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상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이 세상 행복에 안주한 그였는데
이 세상에서 행복할 때 그 행복과 그 안정을 깨고 싶지 않고,
또 그 행복과 안정이 영원히 갈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너무 고통스러운 사람이 이 세상 삶을 빨리 끝내고 싶고,
이 세상에서 너무 불행한 사람이 천국 행복을 더 바라지요.
그러나 이 청년의 어리석음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몰랐기에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몰랐고,
그래서 참행복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이신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예수님께 온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지요.
복음은 그 첫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성을 보입니다.
느릿느릿 걸어온 것이 아니라 달려왔고,
길 떠나시는 주님을 붙잡아 세웠으며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과 얻고자 하는 열성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참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몰랐던 것이고,
또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으며
그래서 다 버리고 떠나고 싶지도 주님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지혜는 얻기 위해 버릴 줄 아는 것이요.
따라 가기 위해 떠날 줄 아는 것입니다.
더 풀이하자면
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덜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며,
주님을 따라 가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날 줄 아는 것임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 10,1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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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전례’만 하는 것과 ‘성찬의 전례’까지 하는 것이 이 차이입니다. 말씀과 동행하는 것과 그분의 실존과 동행하는 것의 차이인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걷는 것, 이것이 관상입니다. 묵상에 머무는 사람은 배 위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 삶에서부터 관상이 시작되면 언젠가 그분은 진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그분처럼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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