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

Margaret K 2021. 6. 20. 07:48

2021 6 20일 연중 제12주일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마르코 4,39)


He woke up,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sea,

“Quiet! Be still!”
The wind ceased and there was great cal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삶의 여정에서 큰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예수님 때문에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어 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신앙으로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머리로는 성숙한 신앙인을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 몸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너무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돌풍을 마주한 순간,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한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하였습니까? 겁을 내며 우왕좌왕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해서, 눈앞에 펼쳐지는 돌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던 제자들도 어려움과 두려움이 생기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괜찮다고 하며 돌풍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그분께 기도하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복음서가 우리에게 위안을 전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희망적인 부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고 그분을 흔들어 깨우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눈앞의 돌풍을 향하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면서 우리의 일상을 다시 고요하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나아진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다가온 어려움 앞에서 무력하게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지상 여정이라는 배 안에서, 거센 돌풍은 물론 작은 파도에도 “나를 깨워라!” 하시며 기다리시는 예수님께서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믿음의 깊이

-키엣대주교-

 

구약의 아브라함은 믿음의 상징입니다. 그는 어떠한 순간에서도 하느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하느님의 떠나라는 부르심에 순명하며 떠났습니다. 나이 많은 사라는 아들을 얻었지만 하느님의 시험에 들어 유일한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받치려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까지도 일으키실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들을 죽이려하는 순간 하느님의 천사가 와서 그를 막았고 아들 대신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을 가져다 제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도록 완전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센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도 주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편히 쉬고계셨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난 파도와 태풍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연과 바다를 경험한 사람이 더 할 것입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에 배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지경이고 요동치는 배위에서 몸을 가눌 수 조차 없었습니다. 바로 옆에 수 많은 기적을 이루신 스승님이 계시건만 그분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편히 주무시고 계시는 스승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시련을 통해 믿음을 주시고자 주무시는 척하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도 그렇습니다. 마치 어린 자녀 몰래 숨어서 자신을 간절히 찾는 아이를 바라보며 자녀의 사랑을 확인하듯 주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내 옆에 계시다고 믿기에 사람들은 때대로 그분의 존재를 잊기도 하고 그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도 식어갑니다. 시련이 닥쳐야만 다시 주님을 찾고 주님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커다란 시련이 닥치면 그제서야 나약한 자신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자 베드로는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발자국을 떼지도 못하고 물에 빠졌습니다. 거센 파도에 익숙한 뱃사람들임에도 거센 파도와 풍랑에 두려웠습니다. 시련이 닥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시련을 극복할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십니다.

시련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깨닫고 온전한 믿음을 주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시련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단 어느 순간만 시련을 주십니다. 아직 당신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거친 풍랑이 두려워 주무시는 당신을 원망하는 제자들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금새 거센 파도를 잠재워주셨습니다. 파도가 잔잔해지자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더 굳건해졌습니다. 이제 주님의 사랑과 권위를 본 제자들은 더 이상 시련에 굴복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일수록 그 경험을 통해 강해지고 믿음 또한 굳건해질 것입니다.

시련은 꼭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시련이 닥치면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믿었는데 이렇게 벌을 주신다며 원망스러워합니다. 그러나 힘든 그 순간 나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합니다. 시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닥칠때일수록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는 진실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련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통한 체험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귀한 믿음의 자신이 될 것입니다. 시련과 도전들이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어떤 시련을 경험하였습니까?

2. 시련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은 누구입니까?

3. 주님께서 그 시련을 주신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03년 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KBS 라디오의 방송작가가 건 전화였습니다. 라디오 프로에 나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을 잘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교회에 누가 되는 말을 실수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님을 알리는 선교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허락했습니다.


방송 녹음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후 2시에 라디오 홀에서 녹음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생각만 하면 긴장되었습니다. 미리 방송국에 가서 대기하는데도 이 긴장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에 담당 피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믿음이 있으니까 처음으로 하는 방송이어도 떨지 않으시겠어요.”

아침부터 긴장하고 초조해하며 떨었는데…. 피디의 말을 들으면서 제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초조해하고 떨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저를 맡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함께하지 않으니 떨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그렇게 긴장하며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 긴장하게 될 때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새겨 봅니다. 주님만 믿는다면 긴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그토록 의연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친 이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께서 오히려 지치셨습니다. 그만큼 전교여행의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기에 지치시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쳐 주무시고 계시는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지요. 이때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바로 스승인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표징을 봐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겁을 내며 믿음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제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그마한 일에도 두려움을 갖고 얼마나 힘들어했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믿음 없는 모습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들의 방법을 우리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간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힘으로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말끔히 지워주실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사탕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쓰다(바론 리튼).


주님을 바라보세요.

2021년 지난 봄에 갑곶성지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산수유, 목련을 시작으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복숭아꽃 등 각종 꽃으로 화려한 아름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 작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 작년에도 갑곶성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꽃을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작년 4월 15일. 제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병 중에 계실 때, 그리고 돌아가신 뒤에도 제 마음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이 만발했어도 전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꽃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민 수용소에서 배고픔으로 힘든 난민에게 음식이 제일 중요할 것 같지만, 가장 먼저 꽃밭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음의 안정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부재로 힘들어했을 때, 주님께서는 분명 아름다운 꽃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지 않고 있었던 저였습니다.

고통과 시련만을 주시는 주님일까요? 이길 힘도 분명히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지 않기에 고통과 시련만 보였던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사는 유일한 방법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 주제는 ‘믿음과 두려움의 관계’입니다. 당연히 믿음과 두려움은 반대입니다. 두려우면 믿을 수 없고 믿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은 두려워했기에 자신들과 함께 있었던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두려움이 인다면 어쨌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생존’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나를 생존시키기 위해 나와 동일시한 모든 것입니다. 나 자신과 나의 육체, 그리고 그것을 생존시킬 수 있는 재물과 명성, 그리고 자녀, 인간관계나 내가 속한 공동체입니다. 내가 나와 동일시하는 것들을 잃는 것은 곧 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요? 세상 가장 큰 부자도 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면 두렵지 않을까요? 그도 분명 죽을 것입니다. 생존문제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벗어나려 할수록 더 두렵게 합니다.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뿐입니다. 죽지 않는 이상 죽음의 문제는 영원히 나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림자를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도시에 있어도 건물의 그림자가 있고 숲으로 가니 나무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사막으로 가니 자신의 그림자가 쫓아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 사막을 걷다 걷다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포기하듯 나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죽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살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나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사랑이란 죽어가는 것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니다.    

 

    2017년 5월 22일 영국 맨체스터 경기장에서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이 테러로 23명의 목숨이 희생되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경기장 인근에 있던 노숙자 스티브 존스는 폭죽놀이인 줄 알았던 굉음에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자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친구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과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존스와 친구들은 몸에 못이 박힌 채 울고 있는 부상자들을 부축하고 지혈을 도우며 보살폈습니다.

     

    존스의 위대한 선행에 대해 사람들이 칭송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우려는 본능이 있고 그것이 우리가 한 행동입니다. 만약 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티브 존스는 하루하루 구걸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장 내일 생존할 걱정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차 테러가 있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부상자들을 떠나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편안하고 살 걱정이 없는 상황에서는 모두 죽음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러다가도 막상 죽음의 공포 속으로 들어오면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기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존스는 그것을 ‘본능’, 곧 ‘양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 배 위에서 제자들이 찾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분을 깨우지 않으면 죽는 것이 그리도 겁이 납니다.

     

    두려우면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존을 단축하거나 심지어 생존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죽음 방법은 ‘아사’(餓死)였습니다. 굶어 죽는 것입니다.

만약 콜베 신부가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살려면 죽음보다 소중한 가치인 사랑을 일깨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지옥 불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옥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본성을 깨워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는 내 안에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본성을 일깨울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만이 살려고 하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만이 두려움 없이 사는 유일한 길이고 참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1983년의 기억입니다신학생 때입니다본당의 여름행사를 마치고성당 주일학교 교사들의 여름모임에 함께 했습니다당시에는 여름행사가 많았습니다고등부는 지리산으로 산행을 갔었고중등부는 용문청소년 수련장에서 다른 본당과 함께 수련회를 하였습니다초등부는 성당에서 놀이마당을 했습니다교안을 만들고물품을 준비하고율동을 연습하면서 여름을 보냈습니다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수고했던 교사들 30여명이 안면도로 34일 여행을 갔습니다민박집에 머물면서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고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여름젊음바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제가 1983년의 여름 안면도를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잊지 못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랜턴의 건전지가 떨어져서 몇몇 여교사들과 건전지를 사러 바닷가의 가게로 갔습니다.

 

건전지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동네 청년들이 우리를 불렀습니다제게 말을 걸었는데 저는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두려웠습니다캄캄한 밤이었고청년들이 몇 명인지도 몰랐습니다그러던 중에 중등부 교사인 홍 데레사가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동네 청년들은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초등부 교사인 강 막달레나는 조용히 빠져나와서 민박집으로 갔습니다저는 무서워서 떨고 있었는데 한명은 묵주기도를 하였고다른 한명은 어둔 밤을 헤치고 민박집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다행히 민박집 주인과 교사들이 왔고모든 일은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두려움은 캄캄한 어둠과 같습니다작은 불빛은 어둠을 밝혀 줍니다믿음의 불빛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보았습니다두려움은 조심해야 하지만 무서워 할 것은 아닙니다행동은 두려움을 벗어나는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1년 넘게 코로나 팬데믹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코로나 팬데믹은 결핍의 시간이었지만동시에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미사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시간영성체가 얼마나 은혜로운 선물인지를 절절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또한사제들은 신자 없는 미사를 지내면서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얼마나 풍요롭고 은혜로운 것인지를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일상을 잃어버리고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제게도 지난 1년은 결핍의 시간이었습니다성지순례도 취소되었습니다어렵게 약속을 잡았던 신문홍보도 취소되었습니다사순특강도 취소되었습니다매달 결산을 하면서 늘어나는 손실에 마음을 졸였습니다그러나 동료사제들과 정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텃밭을 가꾸면서 결실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줌으로 강의를 시작하였고회의도 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분명 불편한 시간이었습니다그러나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수녀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명단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넣으면서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나의 이름을 기억하심을 믿습니다또한체온을 측정하면서내 마음 안에 사랑의 온도는 얼마나 될지 헤아려 봅니다손 소독제로 손을 닦으면서 하느님 앞에는 깨끗한 손빈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마스크를 착용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필요 없는 말을 많이 했는지과식 과음했는지를 반성하면서 말을 줄이고덜 먹고 덜 마시기를 다짐해봅니다성당에 들어가서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서 하느님이 내게 정해주신 자리를 찾았는지 성찰해봅니다사회적 거리를 두기 위해 띄엄띄엄 앉으면서내 이웃 사람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해주었는지 반성해봅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 줍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풀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억울함을 서로 풀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 시켜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화해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교황님께서는 백신은 공공재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특히 가난하고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한국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교회가 교황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미국과 한국의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였습니다미국에서 개발한 백신을 한국에서 생산한다고 합니다그렇게 생산된 백신이 공공재로서 모두에게 나누어지면 좋겠습니다코로나 팬데믹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닙니다우리가 조심하면서가진 것을 나눈다면 곧 일상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새것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사도들 역시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다는 것, 오늘 우리들처럼 한없이 부족했고, 틈만 나면 흔들리며 우왕좌왕했다는 것이 많이 웃기기도 하면서 큰 위안거리로 다가옵니다. 크게 흔들리고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오늘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코 복음 4장 37~38절)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우리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늘 우리 한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의 능력보다 우리 자신의 능력만 신뢰할 때,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그 어떤 풍파와 시련이 거듭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큰 풍랑 앞에 허둥대는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코믹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제자들 입장에서는 심각했겠지요. 생명의 위협 앞에 제자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간 받아온 특별 제자교육도, 예수님을 향한 신뢰도, 위신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주무시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참 삶의 길잡이이신 스승님과 한 배에 타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지만, 살짝 들이 닥친 위기 상황 앞에 갈팡질팡하며 심하게 흔들립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등 뒤에서, 내 오른편에서, 내 왼편에서 나를 꽉 붙잡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손길 안에 푹 잠겨있으면서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며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의 충만한 위로와 사랑을 시시각각으로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설 때 마다, 하느님의 침묵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들 때 마다, 예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마음이 들 때 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에 항상 동행하는 분이십니다. 잠시라도 우리와 떨어지면 불안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며 우리를 드넓고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영근신부-

 

오늘은 연중 제12 주일입니다. 불볕더위가 찾아오나 봅니다. 활활 타는 사랑의 불가마에서 단단히 정련되고 단련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바로 고통과 위기 속에서, 주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요청합니다.

때때로, 질병이나 고통이 우리의 삶을 비참한 상태로 몰아가고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자연 재해, 물질적 상실, 가정이나 공동체의 분열, 온갖 종류의 근심걱정, 시련과 박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이나 무죄한 이들이 불합당한 처사를 당해 신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원망하기도 하고, 억울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신앙을 흔드는 거센 풍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믿음이 시험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 1 독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의인 욥이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침묵하시는지?’ 따지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욥을 깨우치고자 하느님은 ‘누가 진정 하느님인지?’를 되물으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

                       “도도한 파도를 멈추게 하는 이는 누구이냐?”(욥 38,11).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물음에 대답을 해줍니다. 곧 거센 바람을 꾸짖으시고 풍랑을 잠재우시는 바로 그분이 누구신지를 밝혀줍니다. 이를 대치되는 극한 상황을 통해 잘 드러내줍니다. 곧 바람과 풍랑에 겁먹고 두려워하며 죽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바람과 풍랑에도 편안하게 잠들어 계시며 권능으로 죽음과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 모습의 대치를 통해서 드러내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때는 저녁이 되었고 어둠이 닥쳐오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임을 알려줍니다.

호수 건너 저편, 생명의 뭍으로 가는 여행, 예수님께서 바로 이 여행을 이끌고 계시며,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 바로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입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도 주무신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내줍니다. 시편작가는 말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기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풍랑은 잠재우고,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곧 풍랑을 향해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며,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시편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능하시고 진실에 쌓여 계시오니,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의 생명으로 깨우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들어주시지 않으신다고 투정부릴 때, 곧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라고 투덜댈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입니다. 아니, 바로 그 때가 불신에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시며, 제자들을 불신의 어둔 잠에서 깨우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제2 독서>는 바로 이러한 그분의 사랑을 전해줍니다. 곧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평화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우리에게 거센 풍랑 속에서도 평화를 줄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께서 함께 계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왜 겁을 내느냐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아멘.

 온전히 의탁하라

 -반영억신부-

 

일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남모르는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실 모두가 근심 걱정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엇을 걱정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음은 그만둬야 하겠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랍니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시편저자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4-5).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이는 주님께 의탁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근심을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믿고 맡기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는 주님의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아무리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는 걱정거리에 매이면 걱정거리만 커집니다. 눈을 돌려 “야훼이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에로 한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에 보면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주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위치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 않을 것이요, 또 괜한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위한 음식과 몸을 보호하기위한 의복의 걱정에 앞서서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주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공중의 새나 들판의 꽃들조차도 하느님의 안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뢰하며 모든 근심걱정을 송두리째 맡겨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이러한 물음은 인간적인 걱정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여정에 우선적인 선택이 주님이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의탁하고 섭리에 맡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에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 뽑아주신 좋으신 분께 대한 응답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영원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만물의 주님이신 분>

 -송영진신부-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7-41)”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를 깨워라.”가 아니라,

“나를 믿어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 사정을 모르신 채로 주무시고 계셔서

주님을 깨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무시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다른 일로 몹시 바쁘신 것처럼 생각되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 사정을 잘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 모든 관심을 쏟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자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우는 것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에게서 바로 그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 12,5-7).”

날이 밝으면 베드로 사도의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헤로데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밤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는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 전체가 그를 위해서 끊임없이(밤을 새워서) 기도하고 있는데,

당사자는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났을 때 그의 옆구리를 두드려서 깨운 것을 보면,

그는 아주 깊이 잠들었던 것 같습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 하나 없이 그렇게 깊이 잠들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서

다음 구절이 연상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겁에 질려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었던 베드로 사도의 모습과

감옥에서 태평스럽게 잠들어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그것은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긴 모습이고,

예수님께서 바라신 대로 완전한 믿음의 단계에 도달한 모습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1)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제자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노련한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셔도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 헤쳐 나갈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믿는 것을 함께 믿는 것, 그것도 믿음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보면,

하느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은 그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도 믿어야 합니다.>

 

2)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했던 말,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사실상 거의 안 믿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도와달라고(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말이 아니라,

왜 주무시기만 하느냐고 항의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것, 그것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것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3)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겉으로는 바람과 파도를 무서워한 것을 꾸짖으신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왜 나를 깨웠느냐?” 라고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바람과 파도 때문에

당신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고, 또 제자들이 그 바람과 파도 때문에 죽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무 걱정도 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서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을 제자들도 알고 있었어야 했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말이 될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기 전에 “그런 일로 너희가 죽지는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4)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는 제자들의

질문의 답은 “예수님은 자연계도 지배하시는 만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에 연결됩니다.

바람과 호수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한 일은, 예수님의 주권은

그 어떤 것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연계도 예수님의 주권에 복종할 정도라면,

우리가 그 주권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로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처음에는 바람과 파도를 무서워했던 제자들은, 그 바람과 파도를

말씀만으로 제압하시는 권능을 보고서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 두려움도 참된 믿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 마르 4,35-41: 왜 그리 겁이 많으냐?

 -조욱현신부-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바다가 배경이 되고 있고, 그 바다는 하느님만이 다스릴 수 있으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대상이며, 오직 하느님만이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이제 하느님 앞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알아야 한다. 물질만능주의와 과학의 발달은 하느님을 제쳐놓고 그분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모든 것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앞에 얼마나 무능력한가? 인간은 광대무변하고 찬란히 빛나는 삼라만상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알게 된다.

 

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티베리아 호수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었던 사도들이 호수의 일시적인 현상을 "죽음"의 위험으로 보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사도들이 갖게 되는 놀라움과 두려움은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기적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표지들이다. 또한 마르코는 예수님 자신의 신비를 발견하고 베드로 사도와 같이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도록 천천히 이끌어 간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우주만물에 대한 권위 자체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광풍을 잠재우시는 분이시지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의 모습과는 달리 온종일 군중들을 가르치신 뒤 너무 지친 나머지 파도 소리나 제자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깊은 잠에 떨어진 분, 그래서 억지로 깨웠어야 했던 분, 그러나 잠깐 사이에 모든 것을 다스리신 분이시다. 이런 나약성과 잇달아 드러나는 권위 있는 행동이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사도들은 감명을 받아 스승이 가지고 있는 '신비'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정말 그분은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주님과 같은 권위로써 다만 손짓 하나만으로도 바다의 물결을 잠재우실 수 있는 분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을 항상 우리는 갖게 된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사도들이 마지막 순간에만 배 안에 함께 타고 계신 예수님을 기억한다는 사실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위험한 순간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와 행동에 항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는 신앙인의 마음에 항상 현존하시게 될 것이며, 신앙인은 하느님을 항상 자신을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으로 발견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주무시고 계신 것 같이 보이지만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분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초대교회는 이미 박해를 겪고 있었고, 신앙의 시련을 겪고 있었다. 이때 교회의 믿음을 더 강화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이 낡고 지쳐 빠진 것이라 해도 그리스도를 세속적인 표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바오로는 두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는 신앙의 올바른 차원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신앙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람이었으며, 모든 이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큰 희생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채찍질을 가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고 있는 그 "새로운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손이 닿는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는 그 새로운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고 또한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것은 더는 아무도 단순히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고(2코린 5,16 참조), 성령의 빛과 능력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온 마음 다해 따르며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복음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하며, 하느님께 언제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왜 겁을 내느냐?"(마르 4, 40)

-한상우신부-


어디로
가고있는지를
다시 묻는다.

어중간한
우리 삶을
아프게
반성한다.

마음이
깨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매달려야
할 분은
찾아야 할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믿음으로
가는 길을
당신 믿음으로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두려운
순간이 가장
뜨거운 믿음을
체험하는
은총의
순간이다.

믿음이란
두려움을 딛고
주님을 향하는
새로운 기쁨이다.

우리는 지금
믿음이 필요한
믿음의 자리에
살고있다.

믿음은 상처와
실패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막혔던
주님과의
관계가
다시 열린다.

복음의 사람은
다름아닌
믿음의 사람이다.

주님이 없다면
믿음도 없다.

믿음으로
삶의 새로운
기쁨을 만난다.

믿음을 깨우는
은총의 주일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새로운 건너감으로 초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예수님이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비유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 뒤 제자들에게 제안하십니다. "건너감"은 성경에서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물을 건너는 매우 상징적인 체험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거센 돌풍으로 배에 물이 들어차는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태평스럽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니 다급해진 제자들이 스승을 깨우며 외치지요. 물일을 했던 제자들은 물이 생명이면서 동시에, 동전의 양면처럼 죽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본능과 체험으로 알 터이니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도 그랬습니다. 갈대 바다와 마주치자, 앞으로는 검푸른 바닷물이,  뒤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을 해오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탈출 14,10)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이집트 탈출 때 모세가 주님의 분부대로 지팡이를 뻗자 바다에 길이 납니다.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바람을 꾸짖고 호수에 침묵을 명하시지요. 그분 말씀에 곧바로 순종한 바람과 물결을 보며 제자들은 얼이 빠집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고 주권자이심을 본 것이지요.

이것이 제1독서에서 주님이 욥에게 물으신 질문의 답입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욥 38,8)
고통과 억울함에 차서 주님과 시비를 가리려는 욥에게 주님께서 물으시지요. 온 세상 만물과 자연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께서 마치 모든 걸 아는 듯 결백을 주장하며 따지는 욥을 새로이 깨우쳐 주시려는 겁니다.

"여기까지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욥 38,11)
주님께서 자연에 이렇게 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건널 때의 주님의 생각이고,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풍랑에게 던지신 일갈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하느님 자리에라도 있는 듯 불행과 고통에 분개하는 피조물 욥에게 선을 그어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외부적 파도와 돌풍 못지않게 요동치는 제자들의 내면을 두드리십니다. 죽을 것 같았던 두려움과 공포가 지나간 뒤 예수님께서 "믿음"을 확인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건너감입니다. 물을 건너면서 죄로 물든 옛 사람이 죽고, 믿음으로 거듭 난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것이 세례지요.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건너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듯, 풍랑으로 죽을 위기를 넘긴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요구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죽음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이스라엘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고, 제자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정립해야 하듯,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 역시 새로운 피조물로써 그분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삶이 그다지 녹록치 않지요? 좋고 행복하고 기쁠 때도 분명히 있지만 내맘 같지 않은 혼돈과 불안, 어둠과 고통이 곳곳에서 요동을 치는 게 인생이니까요.

막막한 인생의 바다를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건너는 우리가 그 파도와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이 물에서 죽음을 건너 생명을 얻은 존재라고 굳게 믿는 것, 둘째, 매일 그 믿음을 갱신시켜 주시는 말씀을 꼭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다시 힘을 얻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미 죽음을 건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O, Felix Culpa, O, Felix Timor>

 -김찬선신부-

 

오늘 연중 제12주일의 주제는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처럼 <하느님과 바다>입니다.

 

독서 욥기가 바다와 파도를 하느님께서 가두심을 얘기하고,

복음은 주님께서 바다의 풍랑을 복종시키심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중 제12주일은 우선 "깊고 깊은 땅속도 당신 수중에 높고 높은 

산들도 당신 것이네. 당신이 만드셨으니 바다도 당신의 것, 마른 땅도

당신이 손수 만드시었네."라는 시편 말씀처럼 바다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하느님 것이기에 하느님 손안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것처럼 그 바다를 항해하는 인간도

하느님 손안의 존재로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손안에 우리도 있고 바다도 있다는 것은

하느님 품 안에 있다는 뜻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 손바닥 안에 있는 우리는 하느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존재지만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당신 품 안에 품어주시는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우리를 내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부정하시는 것이요 

자기 부정이기 때문에 우리를 내치실 리가 없고 품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바다 위에서 우리와 한배를 타신 것이 아니라

바다와 우리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 손안에 있거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람 때문에 바다에 풍랑이 일고 바닷물이 배에 들이치니 

제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풍랑에 겁에 질려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제야 주님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주무시다가 일어나시어

풍랑을 잠재우시고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제자들을 나무라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도 주님처럼 고물을 베고 잤어야 했습니까?

잘 수는 있었겠습니까?

 

믿음으로 주님처럼 잘 수 있어야 하지만 두려움으로 잘 수 없습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두려움이 없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주님께 대한 큰 믿음이 아니라

풍랑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바다와 풍랑에 대한 큰 두려움이 이런 두려움 체험을 통해

주님께 대한 큰 두려움으로 바뀌어야 하고 또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맺음을 합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큰 두려움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큰 두려움도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믿지도 않을 것이며 큰 믿음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길에 우리가 풍랑을 만날 때 갖게 되는 인간적인 큰 두려움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영적인 큰 두려움과 큰 믿음의 마중물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길에 아무런 풍랑도 없으면 좋겠지만, 그런 인생은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려움이 없기에 하느님을 찾지도

믿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니 두려움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큰 믿음을 지닌 우리는 우리의 죄가 하느님 은총을 만나게

하기에 '오 복된 탓이여/O Felix Culpa'라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두려움을 '오 복된 두려움이여/O Felix Timor'라고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09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