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6. 19. 07:03

2021 6 19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오 6,24-34)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you besid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원시 시대에는 그저 생명을 유지하려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위험에 노출된 신체를 보호하고자 옷을 입었습니다. 과연 오늘날에도 생명을 유지하려고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라는 질문이 아닌,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라고 질문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음식이 아닌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고자 하겠지요. 그럼 초대된 그 사람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초대해 준 자리에 아무 옷이나 입고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한 자리가 어떤 자리며, 어떤 복장을 해야 하는지 당연히 고민할 것입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옷을 입는 것은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을 고민하며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상의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위해서, 우리의 몸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맛집에서 맛난 음식을 먹었다고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연장해 주지 않습니다. 남들이 주목하는 멋진 옷 때문에 우리의 몸이 소중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느냐,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찰이 나를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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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미국의 어느 경매장에 하나의 작품이 올라왔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다는 예수님 초상화 ‘살바또르 문디(Salvator Mundi, 구원자)’ 였습니다. 이 경매에서 이 작품은 45파운드(한화 65,000원)에 팔렸습니다.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이 작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여러 번의 덧칠로 그림을 훼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2005년에 다시 경매장에 올라왔고, 이때에는 1만 달러에 거래되었습니다. 그 뒤, 6년 동안 전문가들의 복원과 감정을 거친 뒤에 2011년에 깜짝 놀랄만한 발표가 이루어졌습니다. 글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 런던 내셔넬 갤러리에 처음으로 전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2017년 뉴욕 경매에서 낙찰되었는데, 이제까지의 모든 미술품 경매 중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자그마치 5,000억입니다. 53년 만에 그 가치가 65,000원에서 5,000억으로 바뀐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치를 모르면 하찮은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으며, 할 수 없다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연결 아래에서 걱정을 떨쳐 버리고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걱정은 주님과 떨어졌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계속해서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만이 걱정 없이 지금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몫은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의 말씀처럼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보지 못하면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커다란 죄가 됩니다.

우리의 가치를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시하십니다. 할 수 없다는 말로써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면,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라. 거기에 황금 같은 기회가 있다(피터 드러커).


하기 싫은 일도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매달 ‘쓰담쓰담’이라는 묵상집을 발행합니다. 갑곶성지 후원자들을 위해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묵상글을 모아서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묵상집을 제때 발행하기 위해서는 두 달 전에 한 달 치 글을 모두 써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 쓰면 되지 뭐.’라면서 호기있게 시작했지만, 원고 마감일이 다가오면 늘 초조하고 불안해집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새로운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집중이 되지 않아서 책 한 권을 펼쳤습니다. 이 책은 재미없어서 또 저의 관심사도 아니어서 읽는 것을 계속 미뤄왔던 책입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는 이것 빼곤 뭐든 다 재미가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지만,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어떤 방송을 봐도 재미가 있더군요.

하기 싫은 일에 직면했을 때, 억지로 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다른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면서 전환점을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 그 뒤에 다시 하기 싫은 일로 돌아와 보면 어떨까요? 이 역시 재미있는 일이 됩니다. 이처럼 하기 싫은 일도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돈 걱정하며 성체 영한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입니다.
한 주인은 세상이고 다른 한 주인은 주님입니다. 세상을 섬긴다는 말은 세상에서의 생존을 걱정한다는 뜻이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늘에서의 생존을 걱정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하늘에선 죽을 것이고, 하늘에서 살려고 하면 세상에선 죽어야 합니다.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살려면 사랑의 법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따라서 나를 죽일 수 없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어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살려고 걱정하지 말고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세상 걱정은 모두 생존을 위한 것인데, 우리 수명은 우리 손에 달렸지 않습니다.

    

    조선 철종 때 경상도 상주 땅에 서씨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서 선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서 선달은 남의 땅을 빌려 겨우 입에 풀칠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봄이 왔어도 그해 농사를 지을 비용이 없을 정도로 곤궁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한 그는 부산 쌀가게에서 장부를 담당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습니다. 효자 아들은 주인께 통사정하여 6개월 치 월급을 임시로 받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서 선달은 1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고개를 넘던 중 그만 돈을 흘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반대쪽에서 고개를 넘어오던 한 양반이 이 돈 꾸러미를 발견했는데 세어보니 백 냥이나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한편 서 선달은 30리는 더 가서야 돈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고 전 재산을 잃어버렸으니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돈을 발견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횡재라고 좋아하는 하인에게 일러 말합니다.
    “잃은 사람은 반드시 찾아온다. 목숨같이 귀한 돈을 잃은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탈꼬!”

 

    그 양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몇 시간이고 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한참 후 서 선달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주운 돈을 서 선달에게 돌려주자 서 선달은 “어른께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라며 돈을 찾아준 은혜를 갚고 싶어 사례를 하려는데 그 양반은 “은혜랄게 뭐가 있소, 당연한 일인데.” 하고는 펄쩍 뛰며 사양을 했습니다. 그는 주운 돈 100냥을 서 선달에게 돌려준 뒤 가던 길을 갔습니다.

 

    서 선달도 다시 집을 향해서 갔고 이윽고 어느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한 소년이 물에 빠졌는데 구경꾼은 많아도 누구 하나 뛰어들어 구해 줄 생각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헤엄을 못 치는 서 선달이 보다 못 해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저 소년을 구해주면 100냥을 주겠소!”
    그러자 어느 장정이 뛰어들어 소년을 구해냈습니다. 죽다 살아난 도령이 선달에게 말하기를 “정말 고맙습니다. 어른이 아니었으면 저는 수중고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희 집은 안동에서 제일 큰 부자인데 함께 가시면 100냥을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서 선달은 무슨 사례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사정도 있는지라 같이 안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안동의 도령 집은 과연 고래 등 같은 부잣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친이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 선달의 돈을 찾아준 바로 그 양반이었습니다.

    “온 재산을 털어 제 아들을 구해주시다니 당신은 진정 의인이요 정말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댁의 아드님은 어르신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제가 돈을 잃었다면 무슨 수로 살렸겠습니까?”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7대 독자 외아들을 살려주신 은혜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안동 권 부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준 보답으로 돈 천 냥을 나귀에 실어 서 선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서 선달이 사는 상주 고을을 찾아와 백 섬지기 전답까지 사주고 돌아갔습니다. 이 일은 후에 조정에까지 알려져 안동과 상주 두 고을은 모두 조정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은 필시 나의 생존권을 포기하는 것과 맞물립니다. 세상 것을 섬기고 세상 것 때문에 걱정한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만약 서 선달이 자신이 내건 100냥의 돈이 1000냥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랑실천이 그리 어려웠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연히 우리가 사랑을 위해 버리는 생명을 몇천 배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러니 성체 성혈이 우리 사랑을 가능하게 만드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 것이나 세상 목숨을 아까워하는 것은 성체를 영하는 사람의 자세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한 고등학교를 찾아가 “청소년의 꿈을 스케치하다.”란 주제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첫 질문으로 아이들에게 꿈에 관해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 농사짓기, 만수르와 결혼하기, 내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롤스로이스 타기, 치킨 마음껏 먹기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살날이 1년밖에 안 남았다면, 여러분은 꿈을 이루는 것과 5억 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학생들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꿈이요.”

학생들은 5억 원보다 ‘내 꿈의 가치’를 높게 생각했습니다.

 

    이때 선생님은 질문을 멈추고 새로운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야기한 학생들 의 아버지들의 답변입니다. 아버지들의 꿈은 무엇일까요?
    아들과 배낭여행, 고향에 내려가서 가족과 함께 사는 것,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 자녀와 맥주 한 잔 마셔보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살날이 1년밖에 안 남았다면, 여러분은 꿈을 이루는 것과 5억 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무엇이라 대답했을까요?

    “당연히 5억을 선택해서 가족에게 주는 게 낫겠죠.”

모든 아버지는 아내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보다는 돈을 선택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아빠고, 가장이니까요!”

 

[출처: ‘남은 시간 1년. 꿈과 5억 원 중 당신의 선택은?’, 유튜브 채널, ‘석균’]

 

    우리가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통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였습니다. 양식엔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엔 자녀들의 꿈을 자신들의 생명보다 크게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녀가 먹고살 걱정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를 믿는다면 부모가 줄 수 있는 것 안에서는 걱정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양식을 주십니다. 그 양식이 당신의 생명까지 주시겠다는 보증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의 가장 소중한 아드님의 살과 피로 내어주십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분은 우리 생명을 위해 당신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생존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을 걱정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둘이 병존할 수 없습니다. 죽음 걱정이 없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섬기지 맙시다. 이 세상 것들 때문에 걱정하지 맙시다. 성체에 대한 예의는 단순히 깊은 절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어 하느님께서 알아서 주실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조재형신부-


신문사로 자매님 두 분이 오셨습니다. 12년 전에 교통사고가 있었고남편이 많이 다쳤다고 합니다늘 신앙 안에서 살았던 부부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습니다아파서 누워있는 남편의 고통도 컸고사랑하는 남편을 돌보는 아내의 아픔도 컸습니다팬데믹으로 지난 1년 동안 주님을 모시지 못하였다고 합니다언제고 시간이 되면 성체를 모시고 싶다고 하였습니다저는 지금 갈까요?’라고 말하였습니다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였던 사람은 필리포스를 만났습니다성경의 이야기를 들었고지금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필리포스는 곧 바로 세례를 주었습니다성당에서 성체를 모시고형제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12년 동안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형제님의 표정은 무척 밝았습니다누굴 원망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아내에게 감사하다고 말하였습니다오히려 신문사의 운영에 대해서 걱정해 주셨습니다위로해 드리려고 갔는데 위로를 받았습니다아들은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6년 후에는 수도사제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딸은 2년 동안 가난한 나라에 봉사활동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자매님에게는 든든한 친구가 있었습니다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였습니다친구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울면 함께 울어 주었습니다친구는 주일 미사가 끝나면 자매님과 함께 가까운 산으로 갔습니다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친구는 신문사에도 함께 왔습니다남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함께 아파해야 했던 자매님은 친구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고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에도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입니다제게도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부르클린 교구의 한인 신부님들이 있습니다팬데믹의 어려운 상황에서 함께 기도하였고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백신을 맞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미주가톨릭평화신문서부지국의 일을 맡아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뜻하지 않는 후원금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휠체어에서 지내야만 하는 형제님의 고통을 생각합니다사랑하는 남편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아픔을 생각합니다다행히 오른 손의 힘이 돌아와서 이제는 혼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며 웃으시는 형제님을 생각합니다간병인이 오기 때문에 시간을 내서 미사참례를 갈 수 있다는 자매님을 생각합니다비록 몸은 고통 중에 있지만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며 감사드리는 형제님과 자매님께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완벽한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하루 종일 기도 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유혹 중에 있어도 주님께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인생은 늘 밝고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런 인생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시련의 때에는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입니다힘이 있을 때는 그 힘을 더불어 사는 이웃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시골에 와서 살아보니 참 좋은 일이 많습니다. 눈호강을 많이 하게 됩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이, 각양각색의 예쁜 꽃들이 수시로 교대하며 피고지고를 거듭합니다. 이맘때 쯤 저희 마을 주변에는 샛노란 금계국이며 어여쁜 달맞이꽃이며 키다리 접시꽃이 한창입니다.

  

한두 송이라면 별볼일 없을텐데, 수백수천 송이들이 일제히 환하게 웃으며 활짝 피어있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우리 인간 각자를 보시는 하느님 시선도 마찬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만 홀로 활짝 충만하고 찬란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려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훨씬 더 행복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 특별히 돌보아주지 않아도, 극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해가 바뀌고 계절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사하고 청초한 얼굴을 내미는 예쁜 친구들을 바라보며 오늘 나리꽃과 관련된 예수님 말씀이 저절로 수긍이 갑니다.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오 복음 6장 28~29절) 

 

세상 미소한 존재들, 우리 눈에 하찮아 보이는 지극히 작은 존재들도 눈여겨보시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 창조하신 존재 가운데 가장 으뜸이요 큰 기쁨인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얼마나 크고 각별한 것인가 생각하니, 마음이 참으로 훈훈해집니다.

  

세상 안에 작은 존재들을 총애하시는 하느님, 약하고 부족한 존재를 각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파악한 바오로 사도였기에, 오늘 첫번째 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 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토 12장 9~10절) 

 

“왜 옷 걱정을 하느냐?”는 예수님 말씀에 백배 공감이 갔습니다. 저희 공동체 옷방에 가면, 각종 옷들이 수두룩합니다. 선교사로 떠난 형제들, 유학 떠난 형제들, 돌아가신 형제들, 다른 곳으로 소임 받고 떠난 형제들이 두고 간 옷들입니다. 

 

계절이 바뀌고, 옷이 궁할 때 마다, 너나할것 없이 들어가, 필요한 옷을 챙깁니다. 때로 재수 좋으면 제대로 된 메이커에 딱 맞는 옷도 있지만, 조금 헐렁하다든지, 꽉 낀다든지, 유행이 지나 좀 촌스럽다 해도 별 상관없이 입고 다닙니다. 그런 형제들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멋져보입니다. 

 

예수님 말씀 따라 더 이상 옷 걱정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이상 ‘명품’에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존재 자체로 명품이 되어야겠습니다. 품격있는 행동거지, 품위있는 언어구사, 기품있는 신앙생활로 명품 영혼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점차 먹고 입고 즐기는 것으로부터 초월해나가야겠습니다. 대신 내 안에 하느님 나라, 복음, 이웃 사랑의 실천,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보물들의 영역이 확장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드러나는 외적인 것에만 신경쓴다 할지라도, 우리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영근신부-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우리는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를 기억합니다.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1열왕 18,21)

 

결국바알의 예언자 사백 오십 명은 다 죽었습니다그리고 나중에 호렙산에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은 칠천 명을 모두 남겨두었다.”(1열왕 19,18)

 

과연 우리는 그 남은 자들’ 안에 들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렇습니다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거나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그러니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요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사실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곧 주님께 속하며주님을 믿고 따르는가아니면다른 피조물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며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르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걱정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주님을 믿는 이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주님이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그렇습니다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혹 내가 지금 물질이나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다면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또 자신의 입을 것이나 먹을 것 등 자신의 처지나 형편만을 탓하고 걱정하고 있다면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믿고 따르며 섬겨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재물을 섬기느라, 저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 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물로 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주님!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저의 주인이십니다.

재물과 제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사된 당신의 나라와 주님이신 당신의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아멘

 온전히 의탁하라

 -반영억신부-


일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남모르는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실 모두가 근심 걱정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엇을 걱정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음은 그만둬야 하겠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랍니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시편저자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4-5).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이는 주님께 의탁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근심을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믿고 맡기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는 주님의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아무리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는 걱정거리에 매이면 걱정거리만 커집니다. 눈을 돌려 “야훼이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에로 한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에 보면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주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위치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 않을 것이요, 또 괜한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위한 음식과 몸을 보호하기위한 의복의 걱정에 앞서서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주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공중의 새나 들판의 꽃들조차도 하느님의 안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뢰하며 모든 근심걱정을 송두리째 맡겨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이러한 물음은 인간적인 걱정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여정에 우선적인 선택이 주님이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의탁하고 섭리에 맡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에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 뽑아주신 좋으신 분께 대한 응답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영원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송영진신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 말씀은 "재물을 하느님처럼 섬기지 마라."입니다.
재물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하느님처럼 섬기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만'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물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재물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주님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이 우리 인생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은 우리 인생을 재물의 지배 아래 두는 일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이 말씀에서 "걱정하지 마라."는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먹이고 입히는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된다고
자녀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신앙인이 가장 먼저 걱정해야 할 일은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 6,26)"

이 말씀은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를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노동'이나 '저축'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실하게 노동해야 하고, 저축도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일을 하지 않고 얻어먹기만 하면서
이웃에게 폐를 끼치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훈계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먹이기 위해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 때에도
그것을 거두어들여서 음식으로 만드는 일은 사람들이 직접 했습니다(탈출 16장).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마태 6,31-32ㄱ)."

'다른 민족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만 걱정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호를 믿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고(마태 14,14),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셨고(마태 15,32),
그리고 사람들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마음도 믿어야 하고,
그렇다면 우리의 딱한 사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걱정하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함께 나누어 먹는 일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오천 명에게 빵 다섯 개를 주어도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나누어 먹을 것입니다.
(서로 양보를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러나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다면,
다섯 명에게 빵 오천 개를 주어도 부족하다고 불평할 것이고,
서로 자기 혼자 먹겠다고 다툴 것입니다.
자기만 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 먹고,
남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 먹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2ㄴ-33)."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시기 때문에
사람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는 말은
그것들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처럼 직접 주실 수도 있고,
교회를 통해서, 또는 천사나 마음 착한 사람을 통해서 주실 수도 있고...)

우리는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하느님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쪽에서도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
또 하느님의 의로움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은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한가? 썩어 없어질 육신의 생명이 더 중요한가?)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우리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힘으로 하면 되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하늘만 쳐다보는 것은 게으른 것이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까지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복음: 마태 6,24-34: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재물을 주인이라고 하시는데, 그 재물이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용되는 용도가 사악하여 인류에게 너무나 많은 불행을 가져오게 하는 주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재물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떠나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24절) 하신다. 이 재물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마력을 발휘하거나 역신(逆臣)으로 둔갑하여 인간을 온통 지배한다. 이 마몬은 인간이 섬겨야 할 상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려야 할 종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재물에 압도되어 종이 될까 봐 제자들에게 포기하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걱정하지 마라.”(25절) 하신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손해 때문이다. 우리가 입을 수 있는 해는 재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재물 때문에 그 재물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리 던져버려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 그 재물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그 재물을 잘 사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새와 들에 핀 나리꽃들과 들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30절) 하신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도 그렇게 보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고, 육신을 지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창조계의 모든 것을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율법을 주셨고, 표현할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을 이루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주셨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 이는 우리의 궁극적인 선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어떤 일을 하던 이것을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이르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필요한 것이 충족되어야 하므로 곁들여 받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4절)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의 선행이 완전한 행위가 될 때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알맞을 때 얻게 된다. 열심히 선행하자.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 완전히 신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 34)

-한상우신부-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우리의
오늘이다.

하지만
걱정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임을
믿기에 걱정을
봉헌한다.

걱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걱정을
치유하여 주는
믿음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시간과
이 믿음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신다.

부족함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평화이다.

부분에
묶여있는 삶이
아니라 전체를
통해 만나게되는
주님의 사랑이다.

삶의 중심을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것은 하느님의
힘이다.

새로운
선물의
오늘이다.

새로움으로
나가기 위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걱정과
가까워지는
삶이 아니라

오늘을 주시는
하느님과
가까와지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과 재물
믿음과 걱정은
함께 갈 수 없다.

걱정이 아닌
믿음을 선택한다.

오늘도 내일도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주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오늘을
사랑하고
감사한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來日)을
맡겨드린다.

지금 이순간의
하느님이시다.

이 아침을
새롭게 느낀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세우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선택은 대개 어렵습니다.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 질문을 받던 아기 때의 난처한 기억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해 왔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놓고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가 거의 점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에는 달랐을까요? 부에 대한 욕망에는 별반 차이가 없겠지만, 현대사회의 물질에 대한 몰입과 추구는 훨씬 더 노골적이고 천박해지는 양상이 보이지요. 순수 학문이나 정신 세계, 철학과 휴머니즘, 신앙의 약화가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고요.

신앙인이어도 불확실한 미래를 떠안고 살아가는 인간인지라 하느님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비현실적일까요? 

"섬기다"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데, 재물을 섬긴다는 표현은 좀 불편하지요.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창조받은 목적을 충만히 누리며 하느님의 뜻을 살라고 주시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충실히 섬기고 재물은 잘 활용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물질에 얽매여 재물을 섬기는 이는 근심, 걱정, 의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탐욕은 끝을 모르니까요. 게다가 욕망은 제가 정한 만큼에 도달하지 못하면 잃어버린 거라고 착각하게 만드니, 탐욕이 커갈수록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버립니다. 무시하고 착취하며 제 배를 채우면서도 가책도 느끼지 않지요. 목적과 도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이는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이에게도, 신앙과 물질 사이에서 어중간히 양다리를 걸치고 서서 주님께 죄의식을 안고 사는 이에게도, 신앙을 우선하지만 마음의 불안을 어찌할 수 없는 이에게도 특효약 처방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분의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면 물질에 집착할 일도, 물질을 뒷배로 갑질 할 일도 없어지겠지요. 마찬가지로 재물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모든 사람을 위해 두루 공평히 잘 쓰여져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제물이 된다면 이로써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과 재물 중 어느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라는 요구를 넘어서,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과 재물의 제자리, 질서를 찾으라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자랑"이 계속됩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라면 내가 자랑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2코린 12,5)
사도는 자신의 영적 신비 체험을 마치 타인의 일처럼 말합니다. 이런 체험이 분명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도의 정통성을 입증하는데 그다지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에 풍자하듯 전달하지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오히려 사도는 자신의 약함에 주목합니다. 그가 자기에게서 떼어내고 싶어했던 "가시"가 무엇인지 성서는 명확히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 아마도 사도로서의 가르침과 활동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약점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바오로는 그 약함을 치워주십사 청했지만, 하느님은 그 약함이  당신께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약함"을 쓰십니다. 그 약함은 그를 "자만하지 않도록"(2코린 12,7) 만드는 하느님의 선물이 되었지요. 교회 안에서 사도 바오로의 가치는 그의 지식과 체험, 가르침, 신앙, 열정과 더불어 그를 사도다운 인내와 겸손으로 이끈 "약점"에도 있습니다.

이는 건강, 힘, 재물, 능력만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여기는 미숙한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초대일 겁니다. 자기 안에 있는 부족함, 결핍, 약함, 가난이 자신을 더욱 하느님 사람답게 만드는 은총임을 알게 되면, 물질주의와 성과주의가 쌓아올린 두터운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겁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우선이어도 죽지 않습니다. 세상 힘을 조금 빼고 재물 걱정을 덜하고 탐욕을 덜어낸다고 직무유기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과시와 허세의 부끄러운 탈을 벗고 진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지요. 그때 비로소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2코린 12,10)는 사도의 역설적 단언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 걱정하지 마라."(마태 6,30-31)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으면 나머지는 그분께서 채워주십니다. 걱정은 그분께 큰 실례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을 지탱하는 모든 자원과 능력에 더해 약함까지도 은총으로 주시는 하느님만 믿고 나아갑시다. 우리와 온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하며 협력하다 보면 필요한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재물을 잘 다스리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김찬선신부-

바오로 사도는 오늘 약점을 자랑하고 약함도 달갑게 여기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함을 싫어하고 더 나아가 부끄러워 약점을 감추려고

하는데 왜 약점을 자랑하고 왜 약함을 달갑게 여기려고 합니까?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을 놓고 볼 때

강해지려는 이유가 두 가지인 것처럼 여겨질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내게 머무르도록 약점을 자랑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에 자랑하겠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지기 때문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힘을 추구하고 힘을 숭배하는 것과 결국 마찬가지가 아니냐,

힘 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이지 않느냐는 오해의 소지지요.

 

실로 세속적인 힘 숭배는 권력 욕구와 추구만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분야에서 권력을 쥘 수 있는 사람 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힘이 없는 사람들 중에, 특히 남자들 중에는

소위 '몸짱'이라고 불리며 몸의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다른 힘이 없다면 육체적인 힘이라도 있어야겠다는 거겠지요.

 

그런데 힘이 있는 것과 건강한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힘은 있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힘은 있지만 마음이나 정신이나 영혼이 건강하지 않은,

곧 병들어 있는 사람이 많고 이내 육신 건강마저 잃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러니 건강하지 않고 힘이 많은 것 다시 말해서 건강하지 않은 힘은

우리가 추구하지 말아야 하고 숭배하지는 더더욱 말아야 하며

그러기에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도

이런 힘 숭배와는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고 자신도 지니려고 하는 힘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힘 또는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힘을 빼야지 들어오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는 종종 농담반진담반으로 어깨의 힘을 빼라고 하는데

이는 세속적으로도 자기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잘못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고 제 경험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탁구마저 안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인간적인 자기 힘이 약할 때 오히려 하느님의 힘이 강해진다는 말이며,

이런 뜻이라면 앞의 하느님의 힘이 내 안에 머루르도록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겠다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언제나 우리가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겠지만, 특히 나이 먹어 병들고 힘이 없어져 갈 때 더더욱

우리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병들고 힘이 없어지는 것을 보며

초조하고 분노하거나 의기소침하더라도 신앙을 가진 우리는

나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 삼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저의 얘기이기도 하고, 이글을 읽는 많은 분의 얘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6월 22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