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6. 21. 09:13

2021 6 21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 7,1-5)

 

For as you judge, 
so will you be judged,
and the measure with which you measure 
will be measured out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아브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듣게 됩니다. 그 말씀 안에서 “가거라.”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아주 단순하게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서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이 끝난 뒤에 이어지는 아브람의 행동을 성경은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라고 단순하게 알려 줍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왜요?”라고 반문하거나,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지 않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움직입니다.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 말씀에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면서, 곧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이 원하거나 이해한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야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가거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그는 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됩니다. 복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하느님 축복의 통로요, 믿음의 조상이 되고자 보여 준 행동은 자신의 의지나 뜻이 아닌,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아브람의 모습과 비교하여 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냄비 속의 개구리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깜짝 놀라서 곧바로 튀어나오지만, 개구리를 찬물이 든 냄비에 넣고 천천히 수온을 높이면 밖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결국 익어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어느 학자가 의문을 품었습니다. 개구리는 매우 감각적이어서 조그마한 소리에도 도망을 치지요. 따라서 물이 뜨거워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실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았을까요? 잘못된 앎이었습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에 넣으면 냄비에서 탈출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심하게 화상을 입어서 탈출하지 못해 죽었습니다. 반면 천천히 데워지는 냄비에서는 온도가 어느 정도까지 오르게 되면 개구리가 곧바로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있는 물이 뜨거워서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 모든 개구리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잘못된 앎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잘못된 앎이 진실인 줄 알고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도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앎이 모두 진리일 리가 없습니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셨지요. 하느님이시지만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것 그 자체가 겸손의 모범입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잘못된 판단이 자기 자신의 심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들보와 티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에 나무로 대들보를 만드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들보는 집을 지을 때 세우는 대들보를 말하는 것으로 매우 굵고 큰 나무 둥치를 뜻합니다. 반면에 티는 나뭇가루를 말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들보는 큰 잘못, 티는 작은 잘못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큰 잘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작은 잘못 가진 사람에게 더 뭐라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기억하면서 남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 안에 있는 들보나 티를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어떤 선행도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선행은 또 다른 선행으로 이어진다(아멜리아 이어하트).


연결과 성취감 그리고 자주성

겨울옷을 세탁하려고 꺼내서 주머니를 살피다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찾았습니다. 이 돈을 어디에 써야 제일 행복할까요?

1) 점심 식사를 업그레이드한다.

2) 간식을 사 먹는다.

3) 식당 계산대 옆의 결식아동 돕기 모금함에 넣는다. 컬럼비아 대학교 던 교수에 따르면, 63%가 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아닌 남을 위해 쓰는 편이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남을 위해 돈을 쓰면 행복할까요? 그 이유를 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연결입니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가 두터울수록 행복감은 커집니다.

둘째, 성취감입니다. 일상이나 학습이나 일등 다양한 방면에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분입니다. 이 기분을 남을 위해 사용했을 때도 똑같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주성’입니다. 탐욕은 행복을 오래 끌지 못합니다. 그런데 탐욕을 떨치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다는 자주성이 생기면 행복해지게 됩니다.

연결과 성취감 그리고 자주성을 잊지 마세요.

 내 안에서 이웃에 관한 판단이 멈추지 않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산상설교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집약체입니다.

    처음엔 ‘하늘 나라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행복에 이르려면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당신께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심판하지 않게 될까요? 먼저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율법이든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질 수 없습니다.

 

    영화 ‘세븐’(1995)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임신한 당신의 아내를 질투라는 이름으로 죽인 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당신은 그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살인범은 ‘칠죄종’의 순서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세상에 죄가 만연해 있음을 경고하려 합니다. 돈만 아는 변호사를 죽이고, 게으르고 교만하고 먹기만 하는 사람도 죽입니다. 그리고 범인은 형사와 그의 아내의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분노’를 느끼는 사람에게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범인은 그의 아내의 머리만을 박스에 넣어 보내 형사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아기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형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법을 어기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판단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판단하며 미워하며 살고 싶겠습니까? 판단을 멈추는 것이 안 되고 용서하는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렇다면 남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에서의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바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인 들보에 피를 발라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출입문 들보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집 안에서 먹던 파스카 예식을 떠오르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서를 넘어서 판단 자체가 되지 않게 하려면 판단을 하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판단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죽어 봉헌돼야 합니다.

     

    진정으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을 버리고 싶다면 그리스도께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5-16)

     

    요한은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예수님의 마음은 구원하는 마음이시지 심판하는 마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성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에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들보에 피가 발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자신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자기 마음을 지키려는 자에게 주면 돼지 목의 진주처럼 성체를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누구를 미워해 본 적이 없는 어떤 마음 착한 분이 자신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한 자매에 대해 미운 마음이 생겼을 때 도저히 용서가 안 되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매일 미사에 나가면 계속 용서하라는 복음만 나와서 더 미칠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하루는 성체를 영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용서하기 싫어요. 예수님이 아무리 저한테 용서하라고 해도 전 죽어도 용서 안 할 거니까 저의 이 마음 드릴게요. 예수님께서 제 마음 받으시고 예수님이 용서하세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 자매와 마주쳤는데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화도 안 나고 분노도 안 생기고 ‘용서해야 하는데’ 하는 분심도 안 생기고 그냥 평화롭고 그 자매가 싫지도 않고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용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거구나!’

  

    예수님 마음은 심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용서하려고 한다는 말은 이미 심판했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판을 내려놓고 무슨 용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지니고 심판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뱀이 무슨 용서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게 만듭니다. 나의 본래 마음은 하느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성상 심판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분의 마음을 장착하지 않는 한 내가 용서하려고 하는 노력은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심장을 찾아 나선 양철나무꾼이 저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항상 저의 차가운 마음을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철나무꾼은 오즈에게 이미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사랑의 심장이 이미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피로 우리 마음을 죽이시고 성체로 들어오시어 우리 마음이 되십니다.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판단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하고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따듯한 마음을 장착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하십니다.

 -조재형신부-


2018년 안식년을 지내고 있을 때입니다주교님께서 교구청으로 오면 좋겠다고 전화하셨습니다주교님께서는 뉴욕에 있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을 해 보면 어떠냐고 말씀하셨습니다미국에 오려면 비자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미리 말씀하셨습니다안식년을 지내면서 서울 가톨릭평화신문 직원으로 등록하였습니다. 2019년 5월 언론인 비자가 나왔고, 8월 21일에 뉴욕으로 왔습니다전임 신부님들이 자리를 잘 잡았고직원들도 잘 도와주어서 뉴욕에서 신문사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2020년 본격적으로 신문 홍보를 다니려고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고아직까지 홍보는 시작 못하고 있습니다다행히 뉴욕 퀸즈의 정하상 바오로 성당 주임신부님이 홍보의 기회를 주셨고, 8월부터 홍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 제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너에게 복을 내리며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보다는 지금 있는 곳에서 여생을 마무리할 나이였습니다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떠나기보다는 고향에서 친족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살 나이였습니다그러나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아브람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하느님께서는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아브람은 아무런 원망도 없이불평도 없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로 하였습니다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실천이며 생활입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아브람보다는 모든 면에서 여건이 좋았습니다나이도 아브람보다 20살이나 더 젊었습니다저를 환영해 줄 직원들이 있었습니다제가 머물 수 있는 숙소도 있었습니다전임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재정상태도 안정적이었습니다뉴욕은 미지의 두렵고 떨리는 곳이 아닙니다아름다운 센트럴 파크가 있는 곳입니다멋진 뮤지컬을 볼 수 있는 문화의 도시입니다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들이 멈추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건강을 주셨고백신도 맞을 수 있었습니다텃밭을 가꿀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부르클린 교구의 한인 사제들과 캠핑을 다니면서 친목을 나누었습니다원망하면 원망할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저를 이곳 뉴욕으로 보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책임을 묻고 다시는 그런 실수가 재발하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잘못한 것을 지적하고판단하고평가하는 일도 필요합니다언론과 방송은 그런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그래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기업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그래야 기업은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책임을 묻는 것이 미래를 향한 일이라면 지금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위로하는 것은 현재의 일입니다격리된 사람들의 생계를 보살피고환자들을 보듬어 주는 것은 현재의 일입니다예수님께서는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지를 보라고 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너시는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는 말씀입니다그리고 더 강력하지만 활자화 되어 있지 않는 세 번째 말씀이 있습니다곧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라는 말씀으로, <루가복음>의 병행구절에 나옵니다.

사실우리가 심판하는 데는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이 있기 마련입니다그런데 그것이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면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그것은 우리 눈에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곧 우리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그것은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나를 비추는 빛으로 상대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곧 호의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그를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곧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단지 심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행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심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

 

이는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곧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입니다결국심판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고 말뿐입니다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2,3)

 

그러기에 남에게 처신하기를 자신에게 하듯이 하라는 말씀입니다아니하느님께 하듯이 하라는 말씀입니다같은 맥락에서병행구절인 <루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단지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차원을 너머서오히려 남에게 선을 베풀라는 적극적인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심판을 넘어서는 바로 이 용서야말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위선자야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아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반영억신부-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입니다. 남의 보기 싫은 모습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럭저럭 살아갈 때가 이 꼴, 저 꼴 안 보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차라리 옛날처럼 살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언제쯤‘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마음에서 자유로 울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남을 되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야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지라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곤 합니다. 자신은 완벽하고, 다른 사람은 허물투성이처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이러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로부터 그렇게 심판을 받는다면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나에게 부드러운 만큼 타인에게도 부드럽기를 희망합니다. 남에게 엄격하기에 앞서 나에게 엄격하고 절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기성찰을 한다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자신을 살펴본 후에야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 남보다 내가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누구를 돕는다면 받는 사람은 고마움보다는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충고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삶의 모범 없이 강요하는 가르침이라면 상처만 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성찰을 한 후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은 기꺼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 말씀도 “자기 몸을 닦은 뒤에 집안을 거느리고, 자기 집안 거느린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身修而后家濟, 家濟而后國治 -대학- 고 했습니다. 자기성찰이 모든 행위의 처음과 나중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자기성찰에 충실한 열심과 정열이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잘못된 열심은 영혼을 상처 나게 합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이 더할수록 하느님 앞에 나를 비추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최고보다는 최선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조욱현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1-2절)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경우에 보면 다른 사람을 잘 알기 때문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입견이나 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인간관계 안에 장벽이 쌓이게 되고 사람까지 잃는 경우가 많다.

 

사도 바오로는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라고 했다. 우리는 그 행위가 어떤 의도에서 이루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이라는 것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는 고유권한이다. 우리가 그 판단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권능을 침해하는 것이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 네 눈에 있는 들보”(3-5절)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선자야”(5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야 한다는 판단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깔보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가까운 이들을 흠잡고 비난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야말로 들보를 가진 모습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는 들보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써 이웃들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뜻만을 고집하기도 한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5절) 다른 사람의 작을 잘못까지 볼만큼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그렇게 보고 있는가?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고 하신다. 다른 이들과 관련된 문제는 그다음에 바로 잡아도 된다. 인간은 자기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또 작은 잘못 보다는 큰 잘못을 더 쉽게 알아본다. 우리는 그 관심을 먼저 우리 자신에게 보여야 한다. 자신을 철저히 성찰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도록 먼저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꾸짖거나 판단을 할 때는, 우선 그와 같은 잘못을 나 자신은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는지, 또 나는 그런 잘못을 이겨냈는지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또한, 그런 잘못이 없더라도 우리는 인간이므로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고 지금은 완전히 끊었다면 자비의 마음으로 바로잡고 충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한 것이 많으므로 잘못하여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형제를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도 부족하지만 나도 죄인이지만 공동체를 위하여 그를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충고일 것이다. 우리 자신의 들보도 꺼내도록 노력하고 이웃의 티끌도 꺼내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리라 믿는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의 올바른 자세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 1)

-한상우신부-


우리의 관계란
아프게도
심판의 연속이다.

실수와
심판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심판은 우리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고유한
영역이다.

심판을
멈추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심판을 치유하는
섬김의 마음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뜨겁게
심장 뛰는 새날
새아침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을
배워나가는
사랑의
여정이다.

심판으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

심판안에
도사리고 있는
우리의 거짓과
모순을 보게된다.

심판은
봉헌이 아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사랑은
숨길 수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심판이
아닌 사랑을
먹고 자라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기워 갚으신다.

이와같이
사랑받는
사람들이다.

심판의
악순환이 아닌
사랑을 가르키는
십자가로
사랑은 새로워진다.

그리스도인들의
여정이란
심판이 아닌
사랑의 여정이다.

다시 사랑을
향하는 삶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순명의 유연성을 가르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예수님께서 자기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이에게 먼저 자신을 살피라고 이르십니다. 들보는 집의 지붕틀을 받치기 위하여 기둥이나 벽체 위에 수평으로 걸친 구조물로서 굵고 단단한 재료를 사용하지요.

눈에 이런 들보가 걸쳐져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다른 게 제대로 보일 리 없겠지요. 자기 생각과 가치관, 의견을 떠받치는 거대한 들보는 시야를 가릴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스스로 의식하기 전까지는 답답한 줄도 모르지요.

예수님은 자기 식대로의 심판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하시려고 내 눈의 "들보"와 형제 눈의 "티"를 대조적으로 비유하십니다. "들보"와 "티"는 비교 대상조차 되기 어려운 크기니까요.

사람은 자기 존재 안에 걸쳐지는 들보를 과감히 치우는 부단하고 반복적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살면서 우리 내면에 철학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자신을 지탱하는 단단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상황도 변하는데 한 번 설치한 들보에만 계속 집착하고 의존한다면 우리 시각과 사고와 관계는 경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심판은 어불성설이지요. 물론 그 자신은 의식 못하겠지만요. 그 작업이 바로 기도일 겁니다.

"빼내어라."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박힌 들보를 빼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당장 그걸 빼내면 집(자신)이 무너질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자기 생각과 행동양식까지 지배하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는 아브람이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길을 떠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2,4)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명해 고향을 등진 해는 그의 나이  일흔 다섯 살 때입니다. 삶에서 많은 것이 안정되고 견고해졌을 시기일 겁니다.

"그는 그곳을 떠나"(창세 12,8)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자세히 읽다 보면 그의 떠남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심이 일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상 순례 여정 중에 있는 우리는 천상 본향으로의 회귀라는 결정적 부르심이 주어지기 전까지 끊임없이 듣고, 응답하고, 떠나야 합니다. 

이러한 주님과 아브람의 관계 맺음은 기도의 역동성을 보여 줍니다. 먼저 기도는 들음이지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여 듣는 것입니다. 귀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온 존재로 실현하지요. 들은 이는 부르심에 순명해 자신을 던집니다. 주님의 말씀만 믿고 떠나 길 위에 들어섭니다.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창세 12,7.8)
듣고 떠난 이는 결국 어딘가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그곳까지 자신을 부르신 주님을 위해 재단을 쌓고 그분을 경배하지요. 제단은 자신이 흘러온  모든 여정이 주님의 부르심이었음을 확인해 주고 그분과의 관계성을 증명합니다. 스스로도 이 부르심의 여정에서 벗어나지 않겠지만, 자기를 이곳까지 부르신 주님도 이 여정에서 떠나시지 않으셔야 한다는 확증입니다.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창세 12,9)
그러고도 아브람은 또 떠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여정에 멈춤이란 없습니다. 영적 여정에서 고착과 정지는 퇴보를 의미하지요. 기도하는 이, 듣고 순명하는 이는 주님의 뜻에 이처럼 유연히 반응합니다. 한 번 들었다고 귀를 꽉 막고 버티어서는 안 되지요. 꼭 물리적인 이동만이 아닌 이 떠남은 천상 본향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주님과의 그침없는 동행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한때 나를 지탱하고 도움이 되었던 들보를 빼내고 새로이 떠나라고 부르십니다. 한때 그 들보가 자신의 삶을 흔들리지 않게 북돋워주고 향상시켜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들보만 믿고 어느 결엔가부터 깊은 사랑과 연민의 숙고 없이 형제와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면 이제는 그 들보와 이별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이 들보에 의지해 끊임없이 형제를 잣대질하고 심판한다면 언젠가는 자신이 그 심판을 고스란히 떠안게 될 테니까요.

누군가의 티가 거슬린다면 내 눈에 들보가 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럴 땐 용기를 내어 자기 들보를 훌훌 내려놓고 홀가분히 떠날 수 있으면 좋겠지요. 주님을 따라 떠나고 또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아브람처럼 들보에 안주하고 싶을 때마다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며, 사랑의 부르심과 유연한 순명의 역동적 여정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 길 위에 들어선 여러분을 축복하며 성 알로이시오의 전구를 청합니다.

성 알로이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어떻게 행복하시겠습니까?>

 -김찬선신부-


우리말에 복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말을 자주 썼지만 요즘은 왠지 이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이 아이는 우리집의 복덩이라고 하곤 하였는데

자신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집안이 잘되어 집안에 복을 가져다 주는 존재라는 거지요.

 

오늘 창세기의 아브람이 바로 복덩이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복덩이는 보통 어린애라는 느낌이 있는데

오늘 아브람은 75세 할아버지입니다.

말하자면 늙은 복덩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얼핏 생각에 아브람이 복덩이입니까?

가족과 재산을 모두 두고 떠나는 것이 복이냐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 아브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덩이와는 많이 다른 복덩이입니다.

 

사실 아브람의 복은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복을

다 포기하고 얻는 복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여기서 행복론이 근본적으로 갈리는 것입니다.

무신론적인 행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얻는 행복이기에

하느님이 자기 행복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신앙인의 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지니는 행복이기에

그 행복이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에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의 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복을 받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행복을 주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이는 어린애의 행복입니다.

어머니 없는 행복이 어린애에겐 있을 수 없고,

어머니가 주는 대로 받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이는 또 프란치스코의 행복입니다.

앞서 봤듯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얻는 가난한 행복이고,

자기가 있던 곳 곧 고향을 떠나고 도달하는 순례자의 행복입니다.

 

오늘 아브람은 복을 받기 전에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행복이 장소적으로는 자기 고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곳에 있으며

인격적으로는 자기 친족과 부모가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부자 청년을 떠올립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원한 생명은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에 있지 않았고,

자기의 온 재산과 사랑하는 자기 가족이 있는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재산과 가족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히 소유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봤듯이 부자 청년이 생각하고 원한 행복과

주님께서 제시하신 행복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행복과

하느님께서 제시하시고 주시겠다는 행복 중에서

우리는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복하시겠습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