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유산이요 선물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목 생활 중에도, 이집트 종살이 시절에도,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선물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감사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갔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적 부침을 겪으면서 땅을 잃기도 하고 다시 찾기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구약에서 땅은 그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언제나 땅을 향하였습니다.
이처럼 땅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삶의 풍요와 안정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역사와 신앙을 담고 있는 보이는 터전이었던 땅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머무시고 마련하여 주신 자리, 곧 하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땅은 사고팔지만, 하늘을 사고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땅은 더 차지하려고 욕심을 내지만, 하늘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 두려는 생각은 우리를 구약의 세계에 머물게 만듭니다. 아무도 욕심내지 않고, 아무도 사려 하지 않으며, 아무도 차지하려 하지 않는 하늘의 시민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내 마음이 머무는 곳,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 향하는 곳, 그곳은 땅이 아닌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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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포유동물 중에서 인간의 유아(乳兒)만큼 무기력한 동물은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모든 종류의 유용한 본능을 지니고 있지만, 유아만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유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기 욕구를 알리기 위해 큰 소리로 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던 기간을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뜻밖의 일로 부모에게 의존하지 못하는 유아의 시기를 보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같은 다른 어떤 존재에 분명히 의존했을 것입니다.
이 의존의 시간은 정말로 깁니다. 현대에는 그 기간이 더 길어져서 성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하는 사람도 많아 보입니다. 아무튼 의존의 기간이 길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계속해서 전적인 의존이 필요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요? 그러나 부모와 같은 보호자에게 평생 의존할 수는 없기에,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의존할 수 없을 때 유아는 불안을 느낍니다. 성인도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나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는 삶은 복음에 나오듯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현재의 풍요를 줄 수는 없지만, 영원한 삶을 취할 때의 풍요를 분명히 얻게 됩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행하는 주님의 일은 기도와 묵상, 봉사와 사랑의 삶, 기쁨과 평화의 일 등입니다. 이는 특별한 날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대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이나 귀금속 등을 하늘에 가져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이 귀할 리가 없고 그래서 보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가져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의 보물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보물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하는 우리의 사랑 실천으로 완성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바로 이 목표를 기억하면서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될 때, 바로 우리의 보물이 하늘에 차곡차곡 쌓여질 것입니다.


영혼의 화가라는 칭호를 받는 빈센트 반 고흐. 비록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딱 하나의 작품만 팔릴 정도로 관심이 없었지만, 사후에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 화가입니다. 그런 그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색은 ‘노란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색의 가장 높은 단계인 불타오르는 샛노랑을 위해 그는 당시에 유행했던 독주 압생트를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이 술을 마시면 영감이 떠오른다고 했거든요.
이 술은 그에게 알콜중독 뿐 아니라 황시증, 즉 세상을 노랗게 보게 하는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다 스스로 귀를 자르기까지 합니다.
예술을 위해,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선택한 술, 그 술이 그를 완전히 망가지게 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보면서,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스로의 의지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부작용 없는 성장을 해야 합니다.
지금도 돈이 있어야, 높은 지위에 올라야…. 자신이 성장 되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할 것 같은 이 모든 세상의 것이 오히려 내 영혼을 갉아먹을 때가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안의 빛이 빛인지 어둠인지 구분하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고 하시며,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라고도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빛이 어둠일 수 있을까요? 또 우리 안의 빛은 무엇을 말할까요?
빛은 바로 우리가 ‘바라는 마음’입니다. 바라는 마음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는 없습니다. 모기는 피를 바라고 사람은 재물을 바랍니다. 이 바라는 것은 ‘생존’과 관련되기에 살려면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것이 빛이 아니라 어둠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눈으로 드러납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것이 빛이 아니라 어둠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더 브레이브’(True Grit)는 14세 소녀 ‘매티’가 자신의 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한 무법자 ‘톰 채니’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젊은 시절 악명 높았던 연방 보안관 ‘카그먼’을 고용해 그의 뒤를 쫓는 이야기입니다.
매티는 어리지만 매우 똑똑하고 강한 의지와 정의감에 불타는 인물입니다. 매티는 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영화 내내 매티는 사람들과 거래하고 계약을 맺고 변호사와 다른 상인들과 이야기를 하며 항상 법적 공평함을 따집니다.
매티는 사기당하는 것을 극히 두려워해 철저히 자신의 몫을 챙기고 정의가 어긋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반면 그녀로부터 돈을 받고 아버지 살인범 톰 채니를 찾아주겠다는 카그먼은 그녀의 성격과는 정반대입니다. 돈을 받고도 톰 채니를 추격하는 대신 매티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쪽지만 남기고 몰래 도망을 칩니다. 매티는 계약을 어긴 카그먼도 바로잡기 위해 그를 추격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상징적인 것이 나오는데 매티는 붉은 사과를 가방에 담고 검은 말을 타고 강을 건넙니다. 강은 삶의 어려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검은 말은 삶의 동력입니다. 문제는 검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빛이라고 여겼겠지만, 실상은 어둠으로 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선악과를 먹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매티는 결국 톰 채니를 마주하게 되고 무방비상태인 그를 엽총으로 쏴서 정의를 실현합니다. 그런데 총의 반동으로 그녀도 뒤로 자빠지고 구덩이에 빠집니다. 영화에서는 이를 그녀가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구로 여기까지 왔지만, 그것은 실상 빛이 아니고 어둠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해골들이 있고 뱀에 손까지 물립니다.
카그먼은 매티와는 다르게 굳이 해주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합니다. 총으로 뱀을 쏴 죽이며 뱀에 물려 구덩이에 빠진 매티를 구해주는 것입니다. 뱀이 물은 손등에 십자표로 상처를 내고 독을 빼내 줍니다.
이것은 계약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지만, 만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뱀에 물린 채 어두운 동굴에 갇혀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참조: ‘더 브레이브’, 유튜브 채널, ‘영화 보는 강신부’]
이 영화에서 매티와 카그먼의 빛은 서로 다릅니다. 매티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빛이었습니다. 빛은 삶을 살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매티의 빛은 실상 어둠이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한쪽 팔이 잘린 상태가 되는데 이는 자비가 없는 정의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카그먼은 겉보기에는 술주정뱅이에다 계약을 어기는 사람이지만 누구든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피는 피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의 어둠은 빛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이 없으면 살 의미를 잃습니다. 그렇게 나를 살게 만드는 힘이 ‘빛’입니다. 하지만 그 빛이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이라면 실제 그것은 ‘어둠’입니다. 그런 이의 눈빛은 어둡습니다.
하지만 참 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기 위해 오셨고 그 목적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어둠처럼 보이지만 그분의 빛이 참 빛이셨습니다.
우리가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나를 살게 하는 빛이 되겠지만 실제로는 어둠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에서 영원히 갇혀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는 말씀의 연속입니다. 내가 세상의 보물을 추구하면 마음도 세상에 머뭅니다. 하지만 천상의 보물을 추구하면 마음도 하늘에 머뭅니다.
참 빛은 남의 피를 흘리는 목적이 아니라 내 피를 이웃을 위해 흘리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양식이 되는 삶이고 그리스도가 되는 삶, 그리고 군고구마처럼 자신이 먹혀서 타인의 배를 불리는 삶입니다. 이럴 때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빛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여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내 피를 흘려 누군가를 살리는 삶을 사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었다면 우리는 하늘에 보화를 또 하나 쌓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아침에 텃밭에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물을 흠뻑 받은 채소들이 활짝 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매님 한분이 길을 가다가 제게 인사하였습니다. 저도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자매님이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이유는 저의 강복을 아들에게 전해 주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잠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매님과 아들을 위해서 강복을 드렸습니다. 자매님과 대화하면서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집에 있는 하인이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에게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게는 부하들이 있습니다. 부하들은 제가 명령하면 잘 따릅니다. 그러니 굳이 저희 집까지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마디만 하십시오. 그러면 저의 종이 곧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이 놀랍습니다. 나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인이 곧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간에 백인대장의 하인은 병은 치유되었습니다. 자매님의 간절함에 저의 강복이 더해져서 아들은 어려움을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간절함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간절함을 보셨고, 딸의 병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간절함을 보셨고, 병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귀하게 보셨고, 다른 이들의 봉헌보다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귀하게 보셨고, 하느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함을 아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산을 보면 산이 보이고, 구름을 보면 구름이 보입니다. 꽃을 보면 꽃이 보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보는 대로 보이기도 합니다. 탐욕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탐욕 덩어리입니다. 시기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시기 덩어리입니다. 분노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분노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희망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믿음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금, 다이아몬드, 고가의 미술품, 땅, 현금’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 결코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재물, 사라지지 않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늘나라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하느님의 능력은 인간의 약점 한 가운데서 가장 명확하고 완벽하게 드러납니다!
-양승국신부-
자화자찬(自畵自讚)이란 조금은 낯뜨거운 말이 있습니다. 뭐 대단한 그림도 아닌데, 그림 한장 그려놓고, 스스로 감탄하고 칭찬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의 업적이나 장점을 자랑하니, 듣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속으로 얼마나 웃을까 생각하니, 제가 그간 해왔던 수많은 자화자찬들이 떠올라, 쥐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화자찬이 일상인 사람들 참 많습니다.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충돌하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도 자화자찬은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주변 모든 것들이 자화자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혈통은 가장 큰 자랑꺼리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히브리 사람이란 표현은 이방인들과는 철저하게 구분되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혈통의 사람들이란 의미였습니다. 유다인들이 그토록 아끼고 애지중지 보존해온 민족적 순수성과 순수 혈통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느님께서 직접 야곱 성조에게 하사하신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선택받은 백성의 후예가 된다는 확실성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과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동시에 위대한 메시아적 언약을 전해주는 전달자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예가 된다는 것은 미래에 메시아의 축복이 보장되는다는 것에 대한 확증이었습니다.
지금 바오로 사도와 맞서고 있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다이즘을 쉽게 놓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에 엄청 목숨을 걸고 있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속된 기준으로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2코린토 11장 18절, 22~23절, 30절)
바오로 사도는 절실한 깨달음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분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 앞에 혈통이나 신분, 민족이나 국가 등, 외적인 것들이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새로운 포도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제 그런 것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고 부질없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구원 사업에는 해롭기까지 한 세속적인 특전들이 되고 만것입니다.
이윽고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자화자찬을 시작합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자화자찬이 유다인들의 자화자찬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자화자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받은 갖가지 고통과 시련에 대한 자화자찬이었습니다. 결국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기 위한 자화자찬,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자화자찬이었습니다.
결국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능력은 인간의 약점 한 가운데서 가장 명확하고 완벽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마라.”(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 받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한편, 우리 주님의 마음은 분명, 여기 저희 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볼 것”(마태 5,8)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유경환 시인의 “호수”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호수가 산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안을 수 있는 것은 가슴이 넓어서가 아니라 영혼이 맑아서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만약,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입니다.” 여기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21)
주님!
제게는 당신이 보물이오니, 제 마음, 당신께 사로잡히게 하소서.
항상 당신을 첫 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당신 사랑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 눈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고,
제 마음이 당신께 다다라 있게 하소서.
제 마음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멘.

나의 보물 1호
-반영억신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은 곧 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 안에 빛이 있어야 하고, 그 빛은 '눈'의 상태에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관대한 사람이요, 성하지 못한 눈을 가진 사람은 질투심 많은 인색한 사람입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질 때 몸 안이 빛으로 가득 차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고, 인색한 마음을 가질 때 어둠 속에 있게 됩니다. 이기적인 보물에 집착하는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청합니다.
나의 보물 1호는 무엇인가요? 그 보물을 이 지상의 삶이 끝났을 때 가져갈 수 있나요? 장례 행렬 뒤를 따라가는 이삿짐 트럭을 본적이 없답니다. 천상을 그리워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고정되어있는 것은 아닌지요? 보물1호가 무엇인지 중요합니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예수님으로 족합니까? 감히 '예'라고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예수님으로 족하다면 그분께서 남겨주신 공덕을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베푼 것, 곧 사랑, 애덕, 섬김, 인내, 양선함, 다정함.....이것들이 얼마나 큰 보물인지요!
이 시간 맑은 눈을 가진 관대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배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믿는 이의 삶은 당연히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 해도 꿰어야 보배인데 바보처럼 결심만 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 부디 맑은 눈으로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한 점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요,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볼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문은 여기 삶의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큼 인색함으로 세상에 매이지 말고 마음이 늘 하늘의 보물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석처럼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리석은 집착>
-송영진신부-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이 말씀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려라.
영원한 생명만을 희망하고 추구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는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땅’과 ‘하늘’을 대립시킨 말씀이 아니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욕심내고 집착하는 ‘어리석음’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지혜’를 대립시킨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경제활동을 부정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기심과 탐욕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땅’을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은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 라는 말은 뜻으로는 ‘자신만을 위하여’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고, 사랑 실천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 재물을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훔쳐 간다는 말씀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쌓아 두기만 하는 재물은 모두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재물이든지, 또는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은 모두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루카복음 12장에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눔’을 실천하지 않고 독점하려고 한 것,
영혼 구원에는 관심 없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한 것은 ‘악한 일’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하느님 말씀은,
“너는 그 재물을 차지하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는 좀도 녹도 도둑도 없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 안식, 평화, 생명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한다는 말은, 좀과 녹이 있지만 재물을 망가뜨리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좀과 녹 자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는 말은, 도둑들이 도둑질을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둑들이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에는, 이 ‘땅’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땅’을 버리고 ‘하늘’만 바라보라는 뜻이 아니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라는 말씀은,
각 개인의 인생이 허무하게 끝날지 영원히 계속될지는
그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들만 움켜쥐고 있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사람은
그 생명을 얻어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23)”
이 말씀에서 ‘눈’은 인생을 바라보는 눈(가치관)과
인생을 인도하는 신앙으로 해석되고, ‘몸’은 인생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라는 말씀은, “올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올바른 방향으로 갈 것이고”로 해석됩니다.
(인생이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과 생명을 향해서 간다는 뜻입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잘못된 가치관과 잘못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는 말은, 멸망을 향해서 간다는 뜻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라는 말씀은,
자신의 가치관과 믿음이 ‘빛’이 아니라 어둠인데도,
즉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고 멸망으로 이끌고 있는데도,
그것을 빛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면, 즉 자기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르다고
착각하고 있으면, 더욱 쉽게 멸망으로 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재물이든지 권력이든지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데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면,
그것들에서 빠져나오기가 더욱 어렵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면 사탄이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세속에서 누리는 물질적인 복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예수님을 비웃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6,14-15).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복을 누리면서 잘난 체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혐오스러워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 마태 6,19-23: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19절) 하신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이 진흙 속에서 뒹군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깨끗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다면 그 마음은 깨끗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모두 깨끗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끝까지 지킬 수 없는 것은 사실이며, 결국 남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다. 이것에 마음을 쓰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 가 있게 되면 마음이 재물에 사로잡혀 어두워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우상 숭배자가 된다. 하느님보다 그 재물이 우선하고 그 재물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할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생활을 위해 노력하라고 하시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20절) 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은 “하늘은 주님의 하늘”(시편 115,16)에 나오는 하늘이다. 우리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 영원히 계속되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보물로 삼아야 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영적인 하늘이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묵시 21,1)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모노바즈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 그의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의 형제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두 흩어 버렸도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았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없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다.”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이 일시적으로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우리가 관리하는 것임을 알고,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재능이나 사상 관념까지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나에게 허락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떠날 때는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고 가는 우리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흠숭 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자리에 재물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 우상이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22절) 라고 하신다. 눈은 우리의 정신을 가리킨다. 눈이 어두워지면 다른 지체들도 기능이 약해지듯이, 정신이 타락하면 우리의 삶은 악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건강하게 지키려 하듯이 늘 건전한 정신을 지키려 해야 한다. 우리의 분별력이 무너지면 모든 행위가 뒤죽박죽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23절) 하신다. 모든 것을 올바로 보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보물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마태 6,19)
사람은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걸 보물로 여깁니다. 일반 사람이라면 재산이 보물일 수도 있고 화려한 인맥을 보물로 여기는 이도 있을 겁니다. 또 누구는 외모나 자기를 과시할 치장품을 제일 소중한 보물로 여기지요.
그런 이들은 보물을 자랑하고 싶어 못 견딥니다. 그들의 대화는 '기,승,전,자랑'으로 끝을 맺지요. 그의 시선이 온통 세상 것에 박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분명 달라지게 될 구태들이니, 예수님은 제자들이 탐욕과 허영, 우월감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마음은 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성소입니다. 그의 존재의 혼이고 영이 깃드는 자리이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지성소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이 이토록 귀한 "마음"을 한낱 세상 것에 붙잡아두지 않도록 권고하십니다. 마음이 무엇을 향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결정되니까요.
재물이나 인맥, 외모, 명품에 온 신경이 가 있는 사람은 마음이 그것들로 꽉 차서 이웃도 하느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모자라는 물질의 속성, 탐욕의 원리가 그를 더 여유 없고 조급하게 만드니까요. 자신이 보물로 여기는 것이 잃거나 망가지기 쉽고, 게다가 자신을 점점 더 얄팍하고 피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조차 알려고도 하지 않기에 그는 자기 마음을 차지한 보물바라기로 시선이 땅에 박힌 채 성장이 멈추고 영은 퇴보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마태 6,22)
영의 가치를 알아보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와, 세상 물질을 보물로 섬기는 이의 차이는 시력이 아닐까 합니다. 몸의 등불인 눈이 맑고 밝아 영의 사정을 볼 수 있다면 그의 마음은 자기 보물이 쌓인 하늘에 있을 것이고, 온통 세상 것만 보이는 이는 마음을 저아래에 둘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된 기준으로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2코린 11,18)
코린토 신자들이 속된 기준으로 자기 자랑을 일삼으며 다가오는 이들에게 너무 쉽게 혹해서 넘어가자, 사도는 통탄하며 그들처럼 어리석게 되는 걸 무릅쓰고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처럼 자신도 히브리 사람이고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요.
"수고, 옥살이, 매질, 죽을 고비, 채찍, 돌질, 파선, 표류, 위험, 고생, 밤샘, 굶주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 헐벗음"
그런데 잘 나가다가 방향이 바뀝니다. 사도의 자랑거리는 속된 기준으로 자랑하여 코린토 신도들의 시선을 빼앗는 거짓 사도들의 자랑과 완전히 결을 달리하고 있지요. 그들과 달리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고난과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으니까요. 땅에 보물을 쌓는 이라면 '저것도 자랑일까' 싶게 혹독히 가난하고 불행해 보이는 고난의 여정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믿고 따르는 이에게는 훈장과 같은 자랑거리 맞습니다!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1,30)
사실 맑고 밝은 눈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이는 세상 자랑을 일삼는 이와 대화할 때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나열하는 '기,승,전,세속적 자랑'에 표현은 못해도 속으로 부끄러워 어쩔줄 모르지요. 반면 영의 눈으로 자신을 실체를 깨달아가는 이들의 자랑은 자신의 약함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이니 그의 가난하고 소박한 고백은 더욱 더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화답송)
맑고 밝은 영의 눈으로 자신의 가난을 깨달은 이라면 이 세상에서 찬미 받으실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압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아는 가난한 우리의 자랑은 그분의 자비와 사랑, 영광과 권능이어야 하지요. 그리고 그 자랑을 듣는 이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마땅히 영광 받으실 분께 영광이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이는 세속적 자랑거리가 될 일들을 초개같이 여겨, 애먼 데 힘을 쓰지 않고, 진정한 본질을 차지하려 달리고 또 달립니다. 그의 지향과 조준과 투신의 방향은 명확합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요. 그러니 이미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보물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는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지상에서 겪는 우리의 고통과 눈물, 실패조차 하늘에서 보물로 쌓일 것이니, 가난한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의 보물이 오직 주님이시고, 그래서 우리의 자랑이 '기,승,전,하느님 자랑'이면 참 좋겠습니다. 하느님 자랑 마음껏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제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힘센 이는 제 힘을 자랑하지 말며
부유한 이는 제 부를 자랑하지 마라.
자랑하려는 이는 이런 일을,
곧 나를 이해하고 알아모시는 일을 자랑하여라."
(예레 9,22-23)

내 맘에 어둠이 있다면
-김찬선신부-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 끝부분에서 우리 안의 어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내 맘에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왜?'로 주제를 잡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보물과 마음의 관계를 얘기하신 다음에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시며 우리 마음 안에 빛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 안에 어둠이 있다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을지 염려의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선 나의 보물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너의 보물'이라고 하신 것은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보물이거나 객관적인 보물이 아니라
사람마다 각기 다른 보물로서 내가 보물로 여기는 보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사람마다 보물로 여기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국보 1호가 있듯이 사람마다 보물 1호가 있고,
예를 들어 요셉의 보물 1호, 마리아의 보물 1호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금반지가 될 수도 있고 카메라가 될 수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재물이 될 수도 있고 손주나 애인처럼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우리가 보물로 여기는 것에 마음이 가 있는데 오늘 주님 말씀은
어떤 보물, 땅에 쌓는 보물은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어둡게 하지만
어떤 보물, 하늘에 쌓는 보물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땅에 쌓는 보물이라면 이 세상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서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 세상 것들에 눈이 멀면 하늘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흔히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라거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느냐?'라고 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손바닥으로도 하늘을 충분히 가릴 수 있지요.
물론 손바닥이 눈에서 멀리 떨어져있으면 하늘을 가릴 수 없지만
손바닥을 눈에 바짝 대면 손바닥으로 하늘 전체를 가릴 수 있잖습니까?
재물도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면 우리는 재물 앞으로 바짝 다가갈 것이고,
더 집착을 하면 할수록 몸이 아니라 눈을 바짝 대고 볼 것이며
그래서 재물이 하늘을 가리고 마음까지 그것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재물이 하늘의 태양을 가리고 마음까지 그것으로 가득 찰 때
우리 마음에는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들어설 것입니다.
근심 걱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돈 걱정 재물 걱정으로 가득 차면 마음이 어둡고 기도도 안 되지만
재물이 보물이 되지 않으면 재물이 사랑이 될 수도 제물이 될 수도 있지요.
재물을 이웃을 위해 쓰면 사랑이요, 하느님께 봉헌하면 제물이 되잖습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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