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5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So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신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장 잘 지켜야 하는 계명이지만, 동시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냥 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네요. 참 어렵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사랑과 관련된 구절만 살펴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네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는 ‘스토르게’입니다.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품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사랑은 이웃에게도, 원수에게도, 곧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전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지요. 그럼 우리 함께 하늘의 태양을 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태양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하느님께서 무조건 베푸시는 사랑임을 기억해 봅시다. 태양을 보면서,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원수에게까지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전에 혼자 개인 여행을 갔다가 있었던 황당한 일이 생각납니다. 빨리 화장실에 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저는 얼른 근처 카페로 들어가서 차를 주문하고는 곧바로 화장실로 갔습니다. 급한 일을 모두 마치고 세면대에 가서 손을 씻는데 난처한 상황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쎄 남자 소변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화장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화장실 안에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뻔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밖으로 나왔는데, 문 앞에서 어떤 자매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 자매님이 깜짝 놀라면서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그리고 제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을까요?
저를 혼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아! 죄송합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옆의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셨습니다. 남자가 나오니 그곳은 남자 화장실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차마 “자매님, 여기가 여자 화장실이에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이렇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할까요? 당연히 좋은 행동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더 밝고 행복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모범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런데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원수같이 말도 잘 듣지 않는 나를 그리고 당신 뜻에 정반대로 행동하는 나였습니다. 그런 나를 용서해주시고 또 당신의 큰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을 떠올려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주님 말씀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당신의 모범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이 은총과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를 위해서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영향이 계속되어야 하므로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과일가게가 세 군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가게 중 어디가 제일 장사가 잘될까요?
1) 그냥 오시는 손님을 맞이하고 파는 곳.
2) 멋진 실내장식이 되어 있는 곳.
3) 과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곳.
3번의 과일가게가 제일 장사가 잘되는 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 사장님께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과일에 관해 설명할 때와 설명하지 않을 때 매출액이 2배 차이가 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과일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답니다. 알면 알수록 전달해 줄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단순히 땅끝으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금의 자리를 포함해서 모든 곳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새로운 교우가 오면 왔나보다 하는 수동적인 교회.
2) 아름다운 성전 만들기에만 힘을 쏟는 교회.
3) 새로운 교우가 오면 자세히 설명해 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는 교회. 당연히 3) 번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법: 먼저 생존을 보장 받아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전작업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심판하게 되면 분별심이 생기고 그러면 선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대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 판단이 일지 않아야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일단 판단하여 분별심이 생기면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왜 생기는 것일까요?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이 친구인지 적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내가 ‘정글’ 속에서 살고 있음을 증명해줍니다. 정글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글은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고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으면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이 더해지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 부인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자신과 아기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 있습니다.
그녀에게 세상은 정글입니다. 내가 아니면 나와 아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모든 사람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생기는 이유는 상대방이 무언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나를 정글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용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정글은 정글입니다. 정글에서 원수가 생기지 않으려면 정글보다 강하게 나의 생존을 보존해 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원수가 생기지 않고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아프리카에 간 어떤 사람이 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머리를 숙여라. 무릎을 꿇어라. 기어서 아빠에게 오너라. 이제 일어서라. 잘했다 아들아.”
그렇게 한 이유를 보니 아들이 오던 길 위의 나무에 독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그대로 따릅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지금 정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아들은 무엇이 위험한지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믿으면 독사는 그냥 독사일 뿐 원수가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이유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완성됩니다.

-조재형신부-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업무상 ‘비밀취급인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서류에는 ‘대외비, 3급 비밀, 2급 비밀, 1급 비밀’이 있습니다. 서류를 인수하면서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3급 비밀까지 취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2급 비밀과 1급 비밀은 더 많은 보안이 필요했기에 비밀취급인가의 등급이 높은 사람만이 볼 수 있었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입니다. 저는 교구청의 여러 모임에 위원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참석하는 모임의 서류나 공문을 열어 볼 수 있도록 제게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주교평의회나 참사회의의 서류나 공문은 제가 볼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밀을 취급하는 사람은 알게 된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알게 된 정보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공익을 위해서, 긴급한 재난의 상황에서 비밀을 해제하거나 공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의 지적재산권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공개된 정보를 활용해서 더 많은 백신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사회 정의를 위해서 비밀문서를 공개하기도 합니다. 당시의 정책이 국민을 위한 것이었는지,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투명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업체의 재무제표도 공개됩니다. 그래야 신뢰하고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다양한 웹들도 무료로 공개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료로 공개된 웹을 통해서 생활에 편리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유에서 존재로 넘어가는 삶의 모습을 ‘공유경제’ 모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사무실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각종 사무기기를 함께 사용하기에 비용이 절감됩니다.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기에 임대료도 절약 됩니다. 옷을 함께 사용하기도 합니다. 면접을 가거나, 모임에 참석할 때 굳이 비싼 옷을 사지 않고,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옷을 입고 반납하면 됩니다. 휴가를 갈 때 좁고 비싼 호텔을 이용하기 보다는 넓고 저렴한 빈집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집을 소유한 사람과 숙소를 원하는 사람을 연결해 주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까지 안전하게 이용하는 차량도 있습니다. 차량이 필요한 사람과 차를 이용해서 수익을 원하는 사람을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정부의 자원을 회의실과 강의실, 강당과 다목적 실, 주차장, 체육시설, 숙박시설과 같은 자원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한다고 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국가의 자원을 국민을 위해서 돌려주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저도 사제관 지하에 자전거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다른 신부님들도 자전거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필요한 신부님들은 언제든지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뉴욕으로 여행 온 신부님들이 사제관에 있는 자전거를 이용하였습니다. 소유하는 것보다 공유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소유의 삶이 아닌 공유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진 것을 교회에 봉헌하였습니다.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도, 궁핍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도, 과부도, 노약자도 따뜻하게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소유하는 삶에서 존재하는 삶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혼자만 멀찌감치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고, 같이 먹고, 더불어 살아가는 ‘함께 영성’(Sinodality)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양승국신부-
초대교회 시절은 성령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은총 충만한 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메시아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직제자들의 감동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혹독한 박해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당당했습니다.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역경 속에서도 늘 기뻐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동행하지 않으셨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와 초기 교회 시대는 기적으로 충만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과 그분의 부활 목격 증인들은 마치 스승님처럼 놀라운 기적을 행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불치병 환자를 치유시켰으며, 이미 목숨이 끊이진 사람들까지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자신들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가진 바를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초기 교회 교우들의 모습이 첫번째 독서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2코린토 8장 2절)
이토록 놀라운 기적의 원동력이자 배경은 스승이자 길잡이이신 예수님이었고, 그분이 공생활 기간 내내 취하셨더 고유한 노선이었습니다. 그 노선은 다름 아닌 하향성(下向性)의 노선, 아래로의 영성, 육화강생의 노선, 자기 낮춤의 길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1코린토 8장 9절)
오늘 우리나라를 바라보니 참으로 대단한 나라, 대단한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급격한 경제성장를 초단기간에 이뤄냈습니다. 불과 5~60년전만 해도 너나할 것 없이 쫄쫄 굶고 다니던 최빈국이었는데, 이제 G7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참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압축 경제 성장 이면의 어두운 그늘,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로 인해 차별받는 이웃들, 소외되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초대교회 신자들이 목숨걸고 추구했던 공유 의식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높은 벽을 허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혼자만 멀찌감치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고, 같이 먹고, 더불어 살아가는 ‘함께 영성’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과거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의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식사 시간때 누군가가 갑자기 찾아와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환대했습니다. 자리를 좁혀 그를 식탁에 앉게 하고, 초스피드로 수저를 놓아주며 그를 끼워주었습니다.
식사 시간에 맞춰 깡통과 대문을 두드리는 걸인들을 위해 어머니들은 넉넉히 밥을 준비했습니다.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짖고 계시는 시노달리니(sinodality) 운동, 즉 ‘함께 걷기’ 운동이 점점 더 큰 메아리가 되어 전 세계에 울려퍼졌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혹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사랑! 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 이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송영진신부-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이 말씀은, “편 가르기를 하지 마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따라서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이웃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그래도 살다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생기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생긴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미움부터 없애려는 노력을 왜 하지 않는가?”
“혹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이 어렵다는 말만 하는 것은 아닌가?”
내 안에 있는 ‘이웃에 대한 미움’을 없애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 안에 있는 ‘나에 대한 미움’을 없애려면 그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야 합니다(마태 5,23-24).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원수를 좋아하여라.” 라는 계명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과 좋아하는 감정은 양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실천이고, 선의 실현이기 때문에,
감정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미워하고 싫어해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감정과 사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만 사랑이 아니라, 타이르고, 꾸짖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짖으신 일은(마태 16,23),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비판하신 것도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위선을 싫어하셨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대표적인 예는
루카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으로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원수 사이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이 원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라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셨는데(루카 10,36), 이 말씀은 “누가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먼저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원수가 될 것인가?
또는 그 이웃을 원수로 삼을 것인가?”
이것은 각자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할 일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여라.”로 해석할 수 있는 율법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우리가 구약시대를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한 시대” 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들어 있는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율법을 인용한 말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리킨 말로 해석됩니다.
구약성경에는 그런 율법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사랑의 궁극 목표는 회개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신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뜻인데,
그 사랑은 그들도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를 묵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세리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말은,
세속 범죄자들이 자기들끼리 ‘의리’ 라고 부르는,
‘패거리 의식’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욱현신부-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겪었던 바오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코린 4,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이 주신 계명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새로이 태어남으로써 자녀들이 되며, 그분의 새로운 창조물이요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녀의 권한을 받는다. 우리는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가 되는 권한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뜻하며,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한상우신부-
모든 사랑의
바탕에는
하느님 사랑이
있다.
하느님 사랑을
통해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된다.
사랑은
부족한 서로를
채워주는
하느님의
뜻이다.
사랑이
우리를
구원(救援)한다.
구원으로
가는 길을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신다.
참된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다.
참된 사랑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괴롭고
힘든 것이
우리의
인간관계이다.
우리의
현실을
알기에
건강하고
평화로운
관계는
부대끼며
길을 찾는 것이다.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기에
하느님께
의탁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미움의
지옥에 있는
우리자신을
먼저
보게 하신다.
미움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 순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 삶에
참된 사랑을
부어주신다.
참된
사랑이다.
사랑을
잃지 않는 것이
복음이며
참된 생명이다.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생명의 시간이다.
사랑이
사랑을
치유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를 닮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 본능이나 감정만으로는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원수에 대한 복수나 박해자에 대한 저주가 율법이나 관습으로 용인 내지는 묵인되어 왔으니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상당히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6)
아버지는 선인도 악인도, 의인도 불의한 이도 가리지 않고 해와 비를 보여 주십니다. 그분께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지요. 그분의 사랑이 반응의 일환이거나 대가성 응답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분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순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완전함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에서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지요. 모든 사랑은 아버지의 이 완전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 부르면서 그 사랑을 닮지 않았다면 자기 욕정의 만족을 위한 거래일 공산이 큽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독려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2코린 8,3)
사도는 마케도니아 교회에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환난과 시련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언가를 많이 받고 누리는 부유함보다, 오히려 베풀고 나눌 수 있는 비움의 덕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난을 떠안으시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모든 불의를 떠안으시면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신 교환의 신비가 가장 큰 구원의 선물, 곧 은총이지요.
죄인일 수 없는 분이 죄인이 되시고 의로울 수 없는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가난하실 수 없는 분이 가난하게 되시고 부유할 수 없는 우리가 부유하게 된 신비가 바로 은총입니다.
이 은총은 "우리"라는 울타리, "형제"의 경계를 넓히게 해 줍니다. 우리의 부유함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대가이니 그분 마음이 아파하시는 이들과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은총으로 받은 모든 것은 원래 주님의 것이었으니까요.
가난으로 고통받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어려움 중에서도 팔을 걷어부치고 손을 내밀게 만드는 사랑은 나와 너, 우리와 너희, 형제와 원수, 이웃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이 완전하신 아버지의 한 자녀이고 한 형제라는 의식에서 출발된 사랑은 차츰 확장되어 원수에게까지, 박해자에게까지 가닿을 수 있습니다. 원수, 박해자에게서 시작하려면 한없이 어렵지만, 모두가 "우리"라는 의식에서 시작하면 사랑도 가능하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특정인일 수도 있고 어떤 부류의 소수자나 집단일 수도 있지요. 내가 형제와 이웃의 담정 밖으로 밀어낸 이들, "우리" 안에 끼워주길 꺼리는 이들은 철천지 원수부터 나와 다른 이들까지 다양할 겁니다.
혹 그런 이들이 떠오른다면, 아주 조금씩 마음의 울타리를 넓히려는 결심부터 시작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노력이 내가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이고, 그러다보면 원수도 박해자도 제외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아가려 오늘도 서툴고 미숙한 사랑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바친 인내와 희생이 은총의 열매로 영롱히 맺힐 것이니, 힘내십시오.

나의 필요가 아니라 너의 필요를
-김찬선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현명한 사람과 현명한 사랑은
나의 죄와 악이 나의 사랑을 이기지 못하게 하고,
너의 죄와 악도 나의 사랑을 이기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죄를 짓고 난 다음 악에 지배를 당하여
죄지은 나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며 숨기고,
어떤 때는 자포자기 상태로 죄악의 구덩이에 뒹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악마적입니다.
악마는 작은 죄로 큰 죄를 짓게 하고, 한번의 죄로 많은 죄를 짓게 하는데
죄지은 자신에 실망케 하는 큰 죄, 사랑을 포기케 하는 큰 죄,
무엇보다 죄책감 때문에 하느님 은총을 못 보게 하는 큰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명하다면 더 이상 죄가 더 크고 많은 죄를 낳지
못하도록 죄와 사랑 중에서 사랑을 볼 것이고,
하느님 사랑과 은총 앞에 나의 죄와 악을 놓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죄와 악보다 훨씬 크시기에
우리의 죄와 악이 그분의 사랑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이 오히려 우리의 죄와 악을 씻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필요와 요구보다 훨씬 크시기에
한벌을 달라고 하면 두벌의 옷을 주시고,
십 리를 같이 가 달라고 하면 이십 리를 같이 가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죄와 악보다 월등히 크시기에 우리가 큰 죄를 당신께 지어도
우리를 원수 삼지 않으시고, 수없이 지어도 당신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누가 나의 원수가 되는 것은 그의 큰 죄악 때문이 아니라
나의 작은 사랑에 때문이기 때문인데
하느님의 사랑은 워낙 크시기에 원수도 없고 포기도 없으시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은 크실 뿐 아니라 결핍도 없으시기에
결핍을 채우기 위해 누구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결핍이 없을 뿐 아니라 넘치시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치 않으시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필요하기에 사랑을 요청하는 사람과
필요한데도 요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 그것도 하느님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은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데도 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청하는 사람은 사랑이 필요한 줄 아는 데 비해
청치 않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사랑 밖에 내놓거나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악한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 실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짐짓 사랑 따윈 나 모른다며 일부로 막가는 사람이거나
나같은 사람은 사랑에서 제외되었을 거라고
지레 사랑을 포기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악인과 불의한 이가 당신 사람이 더 필요하다며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은 나의 필요를 더 생각하지만
사랑은 너의 필요를 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더더욱 그러하여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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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완성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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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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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실천이고, 선의 실현이기 때문에,
감정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미워하고 싫어해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감정과 사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만 사랑이 아니라, 타이르고, 꾸짖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짖으신 일은(마태 16,23),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비판하신 것도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대표적인 예는
루카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으로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원수 사이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이 원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라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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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가 되는 권한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진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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