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12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Margaret K 2021. 6. 12. 06:41

2021 6 12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에게서 비롯되었다. 이는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성모 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 기념일이었는데, 1996년부터는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41-51)


“Why were you look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to them.
He went down with them and came to Nazareth,
and was obedient to them;
and his mother kept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위해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을 잉태하실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십니다. 어머니의 모범적 모습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소리 없이 협력하심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차지하는 어머니의 큰 역할에 비하여, 복음서에 어머니의 말씀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순간에 어머니께서는 ‘곰곰이 생각하시고’(루카 1,29 참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셨다’(루카 2,19; 2,51 참조)고 하십니다. 이렇듯 성모님께서는 좋은 일이든, 섭섭한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신 성모님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품어 내신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라 부르고 기억합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바라보며, ‘천주의 성모님’, ‘하늘의 여왕’,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등 영광스러운 호칭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움을 가능하게 하셨던 성모님의 밑바탕에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시고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의 육화는 이러한 성모님의 마음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 신앙의 모범으로 삼고 공경합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공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어머니께서 지니셨던 ‘곰곰이 생각하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마음을 닮고자 노력한다면, 티 없이 깨끗하신 어머니의 마음을 기념하는 좋은 길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많은 전문가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사랑한다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을 토닥이면서 “괜찮아. 잘 될 거야. 힘내!”라면 될까요? 사랑하는데 필요한 구체적 재료들을 제공하지 않으면 가냘픈 정신 승리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무언가가 되어야 나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더라도 노력해서 성과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노력의 기억이 모이고 모여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고, 이것이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작은 성취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실제로 이 작은 성취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상벨에 맞춰서 벌떡 일어나기, 계획대로 하루 살기, 운동하기, 나의 발전을 위한 공부하기,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도와 묵상에 집중하기…. 이렇게 따지고 보면 삶 자체가 자기 성취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나를 사랑할 이유가 자기 주변에 너무 많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사랑은 분명히 가능합니다. 나의 자존감은 누구보다도 높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에 관련된 기념일이 참 많지요. 또 5월 성모의 달, 10월 로사리오 성월. 이렇게 1년 중에 두 달이나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성모님께 높은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 하나만의 이유를 꼽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하고, 예수님을 낳자마자 산후조리도 하지 못하고 이집트로 피신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고생해서 겨우 아들을 찾았지만, 아들로부터 ‘왜 자기를 찾느냐’는 무정한 말도 듣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자, 미쳤다는 소식도 듣게 되고요.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아들의 모습을 보셔야만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일상 안에서 작은 성취를 이뤄나가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처럼 희망을 간직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기쁨으로 바꿔야 합니다.
신중하되 천천히 하라. 빨리 뛰는 것이야말로 넘어지는 것이다(셰익스피어).

감사하는 마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글입니다. ‘감사’할 이유를 찾아보세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모든 삶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얼굴이 못생겼다고 속상해하지만, 누군가는 몸이 아파서 병실에 누워있다.

내가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기회조차 없이 고통을 받기도 한다.

내가 돈이 없다고 한탄하지만, 누군가는 하루살이처럼 힘들게 살아간다.

내가 부모가 밉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부모조차 모르며 외롭게 살아간다.

내가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누군가는 몸이 아파서 한시도 자지 못하고 살아간다.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속상해하지만, 누군가의 아이는 교통사고나 자살로 영영 이별을 하기도 한다.

나에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것과, 먹을 수 있는 입이 있다는 것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다는 것과, 움직일 수 있는 두 다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늘 감사하는 마음의 힘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가도록 도와준다. 

 성모신심: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

-전삼용신부-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면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사제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다 내어주시고도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시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분명 봉헌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제 아버지의 소유임을 잠깐은 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밑에서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시며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봉헌하지 못하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하시며 어머니로서의 아주 미소한 집착을 내비치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를 고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과부라 하며,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홀아비라 하는데, 자녀를 잃은 부모는 너무 슬퍼서 부르는 이름조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잃어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맡기셨던 것을 다시 찾아가시는 것에 불과한 일이 그런 고통을 가지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더 못 줘서 미안하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더 못 돌려드려서 죄송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녀님께서 감사하게도 당신이 수녀가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신지 짐작이 갈 것 같은 내용은 조금 수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 봉헌하면서도 죄송하고, 그래서 행복한 성모님의 마음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심하게 자아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그래서 대학교를 철학과로 들어갔는데 3학년 때 또다시 제 영혼이 ‘삶이란 무엇인가?’의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였어요.
    그러던 중 형이상학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저에게 철학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고 저의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셨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교수님은 어떤 신부님과 친구셔서 신부님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하셨어요. 그때 성당에서 하는 미사라는 것에 처음 참석했죠.

    교수님께서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 제게 하신 말씀은 “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였습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읽어 보라고 하셨죠(‘천국의 열쇠’는 헌신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종교의 굴레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살았던 치셤 신부와 고위 성직자가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안셀름 주교의 두 삶이 대비되며 하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내용입니다).

    

    교수님의 죽음으로 저는 또 길을 잃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가득했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휩싸여 캠퍼스를 돌며 도서관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제시하는 해답을 읽으면서 방황했어요.『천국의 열쇠』 책을 사러 가톨릭 서점을 다니면서 신학과 신앙 책을 읽게 되었고 제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아주는 말씀이 저를 교회로 이끌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세례를 받기로 했어요. 하지만 교리 반을 다니면서도 자살 충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심했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했던 대학원 진학도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성모님 기적 메달, 묵주, 성수 등에 매달리며 예비자 때도 매일 성당에 갔어요. 성체만 영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세례받기만을 기다렸죠.

    그리고 길이 없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진리를 찾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 죽음으로 가득한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셨어요. 세례받고 제가 엄청나게 밝아졌어요. 자연스럽게 신앙 서적과 성경을 읽으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수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만나니 나에게서 철학은 끝났다고 정리했어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저 자신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수녀원 입회 전에 가톨릭 장애인 시설에서 숙식하면서 일했는데 매일 매우 피곤했음에도 성당에 가서 밤에 2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했어요. 그때 예수님 환시 체험을 했어요. 십자가에 계시는 예수님이 살아서 몸을 비틀거리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이런 환시는 수많은 날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2시간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성당에서 졸기도, 잠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예수님께 “예수님 죄송해요. 저 너무 피곤해서 갈게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살아 움직이며 몸을 비틀면서 못 박힌 손과 발, 계속 힘들어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나와야 했어요.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성당에서 나오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어요. 이 환시 체험은 계속되다가 종신서원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시설에 신학생 2명이 파견받아 봉사하고 있었는데 두 명 모두 저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저는 밤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수녀원에 갈 것이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어요. 저를 사랑하기에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저 자신을 바치는 것도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그 멋진 신학생들에게도 마음이 갈 수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정말 행복하고 예수님 성체를 매일 모시면서 너무 흡족하고 바랄 것이 없는데, 성당에서 조배하고 예수님과 함께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족스러운데, 천국에 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아멘."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제가 버리고 온 것에 비해 주님께서 저에게 왜 더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로 오히려 죄송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이렇듯 주님께 당신 자신을 다 봉헌하여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셨음에도 주님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미안하셨을 것입니다. 수녀님이 삶의 길과 참 진리와 생명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에 비해 당신은 그분의 곁을 떠나있는 것에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진 것,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바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와 당신의 아드님을 바치시고도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미안함과 인간의 이 미안한 마음이 합쳐질 때 둘은 하나가 됩니다.

 -조재형신부-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 + Story'로 나누어서 '그의 이야기’ 남자들의 이야기로 말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역사의 본뜻은 진실을 탐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historia’입니다그 어근인 ‘histor’는 '증인혹은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라는 뜻과 관련됩니다. ‘Diet'라는 말도 우리는 체중조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곤 합니다그러나 본 뜻은 식단식이요법입니다성서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입니다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모세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아브라함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하셨습니다모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습니다사무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약속하셨습니다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역사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여성들이 있습니다이방인이었던 롯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정성껏 섬겼습니다하느님께서는 효성이 지극했던 롯을 사랑하셔서 축복을 주셨습니다롯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였습니다수산나는 정결한 여인이었습니다욕망의 빠진 노인들의 덫에 걸린 수산나는 수치를 당하는 대신에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는 수산나의 정결함을 다니엘을 통해서 지켜주셨습니다에스테르는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셔서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였고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기를 원하셨을 까요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 3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를 원하셨을까요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기를 원하셨을까요제자들도 다 도망가고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셨을 까요아니면 평범하게 직장을 구하고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을까요손자손녀들의 재롱을 보면서 살기를 원하셨을까요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요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좋은 대학교에 입학을 했고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할 수 있던 친구들입니다그런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데모를 했고데모를 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학생들은 수배자가 되었고감옥에도 가게 되었고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좋은 직장은 구할 수 없게 되었고그들이 그렇게 바랐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학생들은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의 건강성공출세결혼을 바랄 것입니다그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하지만 어떤 아들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일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을 합니다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였던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억울하게 비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으신 마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천주의 성모님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고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복되시고 영화로우신 동정녀여!’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 가장 합당한 장소였습니다!

 -양승국신부-

 

어제 예수성심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과거 왕가에서는 왕의 부인이나 왕자의 부인을 간택할 때, 엄청난 숫자의 후보 규수들을 점지해놓고, 그 가운데서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평판이 좋은 가문의 여인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들, 가장 깨끗하고 흠없는 여인들 가운데서 심사숙고해서 선발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지적이며, 흠없는 왕손을 얻기 위해 그 어머니 역시 건강하고 흠없는 여인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왕의 어머니가 될 여인도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시키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분을 아무런 준비없이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사숙고 끝에 당신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고르셨는데, 가장 잘 준비된 분, 아무런 흠도 티도 오점도 없는 순결하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였습니다. 

 

평소 머릿칼보다 많은 일상의 죄 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다보니, 티없이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좀 덜짓는다면, 우리가 좀 더 자주 고백소에 들어가면, 좀 더 순결하게 살아간다면, 티없이 깨끗함이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자주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좀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좀 더 하느님과 일치하며, 좀 더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깨끗하게 살아갈 희망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음 주에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친히 우리 본당이나 우리 공동체를 찾아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어디에다 모실 것입니까? 

 

그 특별한 손님을 아무 방에나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제일 전망이 좋은 특실, 가장 넓고 쾌적한 방에 모실 것입니다. 물론 몇 사람이 며칠간 달라붙어 침실이며 화장실이며, 번쩍번쩍 광채가 날 정도로 깨끗히 청소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특별한 손님에 대한 합당한 예우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을 바라보니 조금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인간을 위한 거처 마련에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시는 과정에서 그분의 거처는 너무나도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 가장 합당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티없이 깨끗하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자 구원계획의 성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것입니다.

 티 없으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영근신부-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특히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습니다.’

 

이처럼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 나셨습니다언제나 야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당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오늘 <복음>에서처럼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 51)

이토록믿음을 품으셨습니다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참으로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리하여믿음의 피아트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니성모님의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오늘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고통과 슬픔 속에서도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 나기를 바랍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믿음으로 보게 하소서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아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조욱현신부-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 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했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했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 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 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 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배 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 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ᄂ)라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라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한상우신부-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우리가 있기까지
어머니의 마음이
계셨다.

우리가 기쁘면
어머니께서도
기쁘시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시간이다.

마음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이란
끊임없는 사랑의
연속이다.

절절한
어머니의
삶이며
마음이시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마음을 지켜내는
일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살피고

마음이 마음을
씻어준다.

마음은 실천을
먹으며 살아간다.

티 없이 깨끗하신
기도의 삶이 있다.

어머니의
마음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다.

깨끗하신 마음은
깨끗한 실천을
낳으신다.

마음은 말씀을
실천할 때
거룩한 마음이
된다.

말씀으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티 없이 깨끗한
어머니의 아침이다.

너와 나의
관계안에
애타게 찾는
마음이 있었다.

마음자리는
말씀의
자리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마리아의 모범을 통해 알려 두십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요셉과 마리아가 소년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으셨다가 찾은 일은 의미심장합니다. 구원자의 잉태부터 소년 시기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아오며 마음에 차곡차곡 품어온 신비를 예수님 입으로 직접, 명확하게 듣는 순간을 비로소 맞이한 겁니다. 

"제 아버지의 집"
어린 예수의 표현은 명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심점인 성전이 바로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니, 그곳이 곧 성자의 거처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50)
복음사가는 요셉과 마리아의 상태를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는 알아듣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지요. 여기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들의 무지는 부끄러움이나 약점이 아니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에 협력한 신앙을 증거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마리아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구원 역사가 모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마음속 크기와 깊이, 넓이와 길이를 누구도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지요. 그 놀라운 구원경륜의 신비가 모두 들어차 들어있으니 말입니다.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경청하고 품고 믿고 따르는 겸손하고 충실한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1독서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의 원형이 되는 이사야서의 한 대목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구원자를 반기는 이 환성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개인과 민족에게 이루어짐을 환호하듯 들려주고 있지요.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이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훗날 마리아의 목소리로 복음에  새겨집니다.

"주님 안에서 ... 하느님 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에 관한 신비를 모두 마음 속에 간직한 동시에 그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 안에 존재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감정이나 기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영의 기쁨과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이의 영적 기쁨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마니피캇(루카 1,46-55)과 오늘 미사 독서의 화답송에도 잘 드러나 있으니 함께 머무르시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이는 아무리 세상이 할퀴고 짓누르고 무시해도 주저앉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으로 인해 겪은 "칼에 꿰찔리는 고통"(루카 2,35 참조)도 이 기쁨과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하였지요.

사랑하는 벗님, 지금 현실에 기쁘고 즐거운 일이 많으십니까?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삶이 힘겹고 버거우십니까? 주님 안에 머물러, 세상 것에 좌우되지 않는 영의 기쁨과 즐거움을 그분께 청하십시오. 어느 것도 구원받은 이로서 주님과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을 수 없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시련과 고난의 길 한복판에 있더라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마음에 기대어, 그분처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에서 고개를 돌려 기쁨을 선택한 순간, 성모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또 말씀의 벗인 우리 모두 함께 서로를 응원하며 기도할 것이니 힘 내십시오. 화답송이 노래하듯 모든 것은 주님 손에 달려 있답니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간직

 -김찬선신부-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 성심 축일을 저는 오늘

<간직 축일>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늘 복음 끝에 성전에서 있었던

일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말에서 비롯된 거지요.

 

그렇습니다.

어제 예수님 마음에 이어 오늘 성모님 마음을 기리는 우리가

주님 마음에서는 무엇을 본받고 성모님 마음에서는 무엇을 본받아야 할지

우리는 성찰해야 하는데 간직하는 마음을 우리도 본받으면 좋을 것입니다.

 

'간직하다'는 말은 '품다'거나 '지니다'는 말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다른 뜻이 있는데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고,

가지거나 품거나 지니는 것은 욕심으로 그럴 수 있는 데 비해

간직하는 것은 욕심이 배제된 사랑으로 간직하는 거 같습니다.

 

실로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간직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간직한다는 말에는 보통 '소중히'라는 말이 앞에 붙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무엇을 간직한다면 그것이 그에게 소중하기에 간직하는 것인데

그러나 무엇을 소중히 간직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수집한 수석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여행지의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선물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존경하는 분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간직한다는 것은 소중히 간직할 뿐 아니라 고이 간직합니다.

무엇이 소중하다면 그것을 당연히 고이 간직하려고 할 터인데

고이 간직한다는 것은 손상되지 않게 잘 간직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소중하다면 오래 간직할 것입니다.

사실 무엇이 소중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오래 간직할 것이고,

영원히 간직한다면 영원히 간직할 만큼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이겠지요?

 

이렇듯이 간직하는 것에는 무엇을 소중히, 사랑으로, 고이, 오래

간직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인데 간직함의 모범인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말씀과 주님 말씀을 태중에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하신 분이시고

그래서 성모 영보 축일과 함께 오늘 성모 성심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마리아처럼 성심을 지닐 수 있습니다.

성모 성심뿐 아니라 안나 성심이니 레오나르도 성심도 있다는 말입니다.

 

단 마음속에 다른 것을 지니지 않고 주님 말씀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도 성모님 마음처럼 성심이 되고

욕심으로 이것저것 소유하지 않고 사랑으로 주님 말씀만 간직해야

성모님 마음처럼 티 없이 깨끗한 성심이 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6월 20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