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14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6. 14. 07:57

2021 6 14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마태오 5,38-42)


Offer no resistance to one who is evil.
When someone strike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one to him as well.
If anyone wants to go to law with you over your tunic,
hand him your cloak as wel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우리의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재판까지 걸어서 우리의 속옷을 가져가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는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같이 걷자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요입니다. 강제성을 지닌 상황이지요. 그러니 천 걸음을 같이 걷지 않으면 보복이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이 또한 우리와 사이가 좋은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우리와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도 우리의 오른뺨을 때리고 속옷까지 원하며, 천 걸음을 함께 가자고 한다면 우리의 기분은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와 좋지 않은 관계에 놓인 사람이 그런다면 어떨까요? 기분이 나쁩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하고 불편하고 불행하게 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지칭하십니다. 그리고 이 악인과 맞서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며칠 전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걱정하시며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난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줄 알았던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니 황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과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모습이 이렇듯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만들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악을 이겨 내는 길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십자가의 여정으로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 그것이 바로 악을 넘어서는 길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조선 시대 3대 성군이라 불리는 임금은 세종, 성종 그리고 정조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가장 포악하거나 무능한 모습으로 비쳤던 3대 임금은 누구일까요?


국법을 어기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임금보다 포악했다는 연산군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권력을 내주었던 무능한 순조를 뽑습니다.

이 두 부류를 잘 보면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바로 눈치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포악하고 무능한 왕의 아버지가 바로 세종, 성종, 정조로 조선의 3대 성군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종의 아들이 세조이고, 성종의 아들이 연산군이며, 정조의 아들이 순조입니다.

성군의 자식은 좋은 유전자를 받아서 마찬가지로 성군의 길을 갈 것이라 예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떤 지향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성군도 또 반대로 폭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지향을 두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살 수도 있고,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악인의 모습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맞서서 악을 이겨야 할 것 같은데 맞서지 말라고 하시니 고개가 갸웃거립니다. 그런데 악을 단순히 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악에게 맞서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악에 맞설 때 똑같은 악으로 맞서려고 합니다. 돈으로 손해 보면 돈을 통해 복수하려고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자기가 받은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려고 합니다. 이렇게 맞서는 방법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식은 사랑에 있습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렇게 하면 괜히 ‘바보’ 소리를 들을 것만 같습니다. 나만 손해 보는 삶을 사는 것만 같습니다. 억울해집니다. 하지만 이 길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며, 주님으로부터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안에서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나 하나쯤이야...

옛날 어느 부자가 자신의 하인들에게 금화 한 닢과 작은 술 단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고 말합니다.

“곧 큰 잔치를 여는데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포도주를 연회에서 내놓고 싶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준 금화로 각자 다른 포도주를 한 단지씩 사와 이 큰 항아리에 한데 섞어 두도록 해라. 여러 가지 좋은 포도주를 섞으면 어떤 맛이 날지 매우 궁금하구나.”

잔치가 열린 날, 부자는 포도주를 사러 보낸 하인들을 따로 모아 두고 말했습니다.

“오늘의 잔치는 그동안 고생한 너희를 위한 잔치니, 오늘 하루는 너희가 사 온 술을 맘껏 마시며 즐기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포도주는 어떤 맛이었을까요? 그냥 맹물이었습니다. 하인들은 금화만 챙기고, 큰 항아리에는 물을 부은 것이지요. 그들은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중종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볍게 행동하지 않나요? 그리고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잘못된 행동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안일한 생각이 이 세상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한때는 악인이었다

-전삼용신부-


 율법은 눈을 다치게 하면 눈으로 배상하고, 이를 다치게 하면 이로 배상해야 하는 동태복수법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한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개념을 더 확장해 악인에게 아예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속옷도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하는 자에게는 이천 걸음을 가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차라리 죽으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선 ‘악인’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악인은 자신이 준 것이 없으면서도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이 생기는 이유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으면 개중에는 선인으로 새로 태어날 이들이 존재합니다. 악인이 나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것은 선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런 악인에게 내 살과 피를 내어주지 못한다면 사실 나도 아직 악인일 뿐입니다. 나도 요구하는 수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준끼리 응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악인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요구하기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으로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지옥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오른뺨을 칠 때 왼뺨도 돌려대셨고 겉옷을 달라고 할 때 속옷도 주셨으며 천 걸음 가달라고 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옆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것에 감동하여 우리도 회개하고 타인에게 그런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요즘 들은 이야기를 각색하여 소개하겠습니다. 한 신부님이 본당의 주일학교 교사 면담을 하던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의 얼굴은 마치 지옥에 사는 사람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신부님이 농담조로 아직 젊은데 아이 하나 더 낳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정색하며 각방을 쓴 지 몇 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남편이 술만 마시면 폭력을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녀가 있어서 그냥 참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자매의 남편은 어른 복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매는 형제가 집에서는 그러면서도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심지어 제단에까지 올라가 봉사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에게 이와 같은 처방을 내렸습니다.

1. 매일 성체조배 1시간, 묵주기도 5단을 남편을 위해 할 것

2. 남편을 볼 때마다 항상 웃고 하루에 칭찬 1가지씩 해 줄 것

3.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을 위해 미사를 넣을 것

4. 하루에 한 번 남편과 가정을 위해 희생을 봉헌할 것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의 처방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남편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을 질타하는 것마냥 들렸습니다. 그러나 실천해 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을 때 신부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실천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매는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몇 달 동안 자매가 성당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미사가 끝나고 복사를 선 형제에게 요즘 아내가 왜 성당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형제는 아내가 지금 둘째를 가져 잠시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뒤 부부는 팔짱을 끼고 신부님께 인사를 왔습니다. 둘의 얼굴은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변해있었습니다.    

 

    우리가 조건 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도 악인일 때 누군가에게 한없는 자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인정한다면 내가 악인이라고 여기는 이에게도 조건 없는 사랑을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서 매우 힘들 때 나도 예수님께 그랬음을 기억합시다.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은 내가 예수님께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K 베드로’라는 분이 쓴 『내가 죽인 예수』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사형수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 이웃과 친지들, 자신에게 신앙을 준 이들에게 쓴 100통의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그 사형수는 사람을 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후 감옥 안에서 갈등과 방황과 혼란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시한부로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사형수들은 오늘내일하며 벽에 걸린 수의를 바라보면서 아침저녁으로 아니 온종일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사형수는 복음을 듣습니다. 예수를 믿고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았습니다. 모든 죄는 자기 탓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를 죽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 때문에 예수가 죽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죽음으로 자기가 살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기가 죽음으로 예수로 살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형수가 너무 변하자 교도관들은 그를 모범수로 대우하고 특별대우를 해 주려고 했으나, 그는 특혜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동료 죄수들을 날마다 섬기며 사형이 집행되는 날까지 은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모, 형제와 친구들, 피해자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에게 참회의 편지와 감사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통의 편지가 써졌고 『내가 죽인 예수』란 책이 출간된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 쓴 편지내용을 소개합니다.

 

    “.... 오래지 않아 제 목이 밧줄에 걸리겠으나 지금 제 마음이 이렇게 행복감으로 충만한 것은 경이로운 믿음과 부활로 엉킨 단 하나의 소망이 아니겠는지요! 예수님처럼 나무 십자가 위에 달리는 극도의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파렴치한 사형수가 죽음을 앞두고 주님의 죽으심을 좀 더 가깝게 피부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신이 악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아직 참 신앙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내가 악인들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롭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만큼 내어주려는 마음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도 한때 악인이었음을 생각합시다. 그러면 내가 악인이라고 믿는 그 사람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보게 될 것이고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은총과 일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마음에 닿았던 내용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은총을 추앙하면서 일은 혐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들의 삶에는 경건의 모양만 있을 따름입니다반대로 안달복달전전긍긍 좇기면서 온갖 일을 직시하지만은총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은 행동의 함정에 빠지지 쉽습니다은총과 일의 상호 작용 가운데서만 믿음과 사랑이 성장합니다우리가 약속된 것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를 극복하고 주어진 일을 할 때우리는 매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은총은 결코 일을 대신 해 줄 수 없습니다우리는 은총을 믿으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성실히 일해야 합니다일은 삶의 내용이며은총은 삶의 힘입니다은총과 일이 균형을 이룰 때 삶이 아름다워집니다빛은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지닙니다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은총과 일이 함께 할 때 삶이 빛납니다삶의 힘과 삶의 내용 사이의 긴장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됩니다하느님은 주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요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어려움이 없는 삶만을 복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믿음의 난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곧 많이 견디어 내고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하느님께 은총을 받은 만큼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하느님께 은총을 받은 만큼 권력을 얻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하느님께 은총을 얻는 만큼 재물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하느님께 은총을 받은 만큼 고통을 참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하느님께 은총을 받은 만큼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한 사람을 만나는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라고 하였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성공명예권력이라는 바벨탑에서 내려왔습니다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랐습니다그 길만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일을 두려워하거나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하느님께서 너무 힘들면 일을 덜어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때로는 사람을 보내 주시기도 하셨고때로는 시간을 바꿔주시기도 하셨습니다작년 8월부터 부르클린 한인성당 미사를 다니고 있습니다다행히 신문사 근처에 사시는 형제님이 10개월 동안 차량봉사를 해 주셨습니다길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혼자 운전해서 가고 있습니다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설립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와 퀸즈 한인성당의 미사를 하는 상황인데 볼리비아에서 손님 신부님이 오셔서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낮에는 뉴튼 수도원에 모임이 있었고저녁에는 성경공부 봉사자 모임이 있었습니다시간이 빠듯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하느님께서는 저의 건강을 허락하셔서 뉴튼 수도원 모임을 일주일 연기해 주셨습니다백신접종이 이루어지고일상의 삶으로 돌아오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 질 것입니다홍보를 다녀야 하고서부지국의 일로 LA도 방문해야 합니다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해야 합니다하느님께서는 은총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그러기에 해야 할 일은 기쁘게 하고하지 못할 일은 멈출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합니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잘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양승국신부-

 

유다인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준수되어온 동태복수법은 말 마디 그대로 공격 받은 그대로 고스란히 복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피해입은 그대로 똑같이 응징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오른뺨을 한대 쳤다면 나도 똑같이 그의 오른 뺨을 한대 갈기는 것입니다. 그가 내 집에 불을 질렀다면 나도 그의 집을 찾아가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저쪽에서 나를 고소했으면 나도 그를 맞고소하는 것입니다. 이웃나라에서 우리나라를 향해 포를 쏜다면 우리도 그들을 향해 포를 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라도 동태복수법에 따르고픈 충동과 유혹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마태오 복음 5장 39~41절)

  

오늘 내 발밑을 한번 돌아봅니다. 아직도 수십년 전 받은 상처에 연연해하고 있습니다. 진작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냈어야 할 사건을 부여잡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되갚아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주님은 참으로 요구가 많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역시 절대로 녹록한 삶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보천치 같은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과 맥을 달리 하는 것을 넘어 완전 반대 노선을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잘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억울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해의 폭도 점점 확장시켜나가야겠습니다. 고전적인 율법 정신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그저 물리치고 배척하고 이겨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통용되고 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나를 박해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의 이 자기중심적이고 편협된 사랑이 보다 더 큰 사랑, 보다 더 보편적인 사랑, 보다 더 이타적으로 신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킬 것을 당부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만약 그렇다면그것은 도피요자기기만이요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수 입니다그런다고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하듯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그러니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것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길이 됩니다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0-42)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다른 쪽 뺌을 돌려 대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당신께서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사랑할 권한을 주신 까닭입니다아멘.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든데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주님께서 가르치는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으나 우리의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야 한다.>

 -송영진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앙갚음’ 하지 말고,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는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의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일 것입니다.

(지키기 어려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는 지키기 싫은 계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해도,

‘권선징악, 인과응보’ 같은 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정의와 선의 실현’은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하느님은 ‘선’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악’은 하느님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반대쪽에 서는 것이고,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선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악의 힘보다 강합니다.

현실적으로 악의 힘이 선의 힘보다 더 강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고,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하느님의 힘보다 강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것을 믿는 사람이고, 믿는 대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인용한 잠언 구절의 원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잠언 25,21-22).”

의인은 ‘선’이라는 씨를 뿌려서 ‘하느님의 보상’이라는 열매를 얻게 되지만,

‘악행’이라는 씨를 뿌리는 악인은, 회개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하느님의 벌’이라는 열매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복수는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숯불을 머리에 놓는다.’는 말은 숨을 끊는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악의 힘’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서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선’은 악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힘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율법은(탈출 21,24)

원래는 ‘과잉 처벌’을 막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의 뜻을 잊어버리고,

사적인 복수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 규정으로 악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7).

‘앙갚음 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율법을 완성하라는, 또는 율법 실천을 완전하게 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죄인에게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일에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돌아온 작은아들을 처벌하지 않고 잔치를 벌인

아버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의 권한으로 잔치를 벌인다고 해도

처벌을 먼저 한 다음에 벌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큰아들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죄인을 처벌하기 전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고,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회개하기도 전에 용서를 하시는 분입니다.

회개는 이미 주신 ‘용서의 은혜’를 받기 위한 일입니다.

용서받으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악인에게 악으로 맞서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은, “악에 맞서지 마라.”가 아니라, “선으로 악에 맞서라.”입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치고 정의와 선을 실현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악에 맞서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선’이어야 합니다.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겉옷까지 내주어라.”,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라는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물리쳐라.”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악한 군부 세력’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서 학살하는

끔찍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 대책 없이 죽어야 하는가?

의인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야 그 악인들이 회개를 할까?

우리나라의 독립투쟁 역사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1 운동은 순수하게 비폭력 만세 시위였습니다.

그때 죄인들이 회개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더욱 악한 쪽으로 갔기 때문에 무장 독립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는 사적인 앙갚음이 아니라,

정의와 선을 실현하기 위한 거룩한 희생입니다.

(우리 교회는 정당방위를 인정합니다.

정당방위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없는 개인의 경우에는

‘공동체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 윤리적 특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역시 구약성경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한 행실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율법은 사악한 자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 율법 때문에 선한 이들을 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한상우신부-


맞서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다.

베푸는 것이
바르게
나가는 길이다.

싸우고 맞서는
우리의
의지로는
악(惡)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악은 또 다른
악을 만들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악을
멈추게한다.

악한 힘은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사랑을
이길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사랑의 관계가
믿음의 관계가
참된 복음이다.

악의 극복과
악인과의
화해와 용서는
사랑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까지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영적 성장이
필요한 때이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성장시키시는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이며

몸과 피가
되어오시는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 서로를
구원하는 길임을
믿는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정체성에 맞갖는 생활 태도를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적잖이 도전이 되는 말씀들이지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38)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지켜온 규범을 언급하십니다. 이는 타인에게 해를 끼친 것과 동일한 방식, 동일한 정도로 벌을 주는,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공동체적 징벌 방식입니다.(탈출 21,24-25 참조)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39)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익숙한 체벌 방식에 도전장을 던지심으로써, 당한 만큼 갚아주어야 공평하고 정의롭다는 의식에 균열을 일으키십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과 대립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의"에 "용서"를 입히고 "희생"을 더해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강화하자는 격려입니다.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 겉옷까지 내주어라. ...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 주고 ... 물리치지 마라."(마태 5,39-42)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지향은 참 근사하고 멋지긴 한데, 제자들이나 우리 입장에서는 갈수록 태산처럼 무겁습니다. 완전히 바보로 전락하라는 뜻일까요? 안 그래도 호시탐탐 발목을 잡으려 노리는 세상의 올가미에 그냥 호구가 되라는 뜻일까요?

하지만 원래 그리스도인은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은 4세기 초 이전까지 신앙은 박해와 죽음의 전주곡이었지요.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믿는다는 것'은 스승 예수님이 그러셨듯 목숨까지 내놓는 투신이었습니다. 실제로 무수한 이들이 순교로 신앙을 증언하였지요.

그리스도인은 가난했고 힘도 권력도 없었으며 공격으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모함을 받아 변두리로 밀려나고 숨어서 신앙을 지켰지요. 예수님께서 그러셨기에 그분을 흠모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모든 멸시와 가난, 모욕과 무시를 견디고 하느님 나라를 꿈꾸면서 지금 여기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 애쓴 이들이 바로 우리 신앙의 뿌리지요.

제1독서에 등장하는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이 바로 그런 처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2코린 6,1)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2코린 6,4)
사도 바오로는 자신과 일행을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이라 칭합니다. 멋진 호칭이고 매력적인 정체성이지요. 이 신원은 스스로 지어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셔서 인정하셔야 하고, 그 자신도 뼛속까지 수용하고 투신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환난, 재난, 역경, 매질, 옥살이, 폭동, 수고, 밤샘, 단식"(2코린 6,4-5)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이 겪는 일상은 이렇습니다. 듣기에도 불편한 이 현실이 그들과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고 몸소 실현하신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영광과 모욕, 중상과 칭찬이 매한가지입니다.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
당시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들, 그리고 용기 내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나옵니다. 그들은 사실, 세상 눈에는 모든 걸 빼앗기고 아무것도 남은 것 없는 비참한 신세처럼 보이나 모든 것을 소유한 이들이지요. 이 말씀은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라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를 떠올려 줍니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이에게는 사람 사이에서 바보가 되건 호구가 되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해서 따지고 경계하고 방어하려 든다면 받아들이기 참 어려운 상황이지만, 사랑의 길을 가는 중에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면 감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토당토 불편하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서 너무 멀어진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정받고 대접받는 데 익숙하다면, 더 많은 걸 탐하고 누리고 있다면, 가난한 형제들이 불편해서 피하고 싶다면, 타인 위에 군림하고 멸시하는 우월감이 습관이 되어버렸다면 아무래도 더 많이 불편할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그리스도인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으라고 우리를 흔드십니다.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섬기며 나눔과 희생으로 스승의 뒤를 따르고 있다면 자신이 받은 세례가 적어도 인생의 장식품이 아니라는 증거일 겁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 하는 사람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족하나마 우리의 진실한 선택과 겸손한 헌신이 우리가 누구인지 증언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증거할 겁니다.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질서와 균형을 추구하며 주님을 따라 그분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불행 망각과 행복 착각>

 -김찬선신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코린토서의 말씀은 '--하지만 실은 --하다'의 구조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대로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슬퍼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기뻐하고,

가난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부유하며,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참 좋을 것이고 그것이 참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겉으로는 기쁘게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속마음에 슬픔이 가득하고,

부유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만 실은 빈 털털이이며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실은 속이 허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행복하지 않거나 오히려 불행할 수 있지요.

 

만일 그 반대라면 그러니까 우리가 실은 불행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도록,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와 구원의 날이 되도록 회개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이 바로 은헤로운 때와 구원이 날이 되도록

회개하지 않는데 그것은 제 생각에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미루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실은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미루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고,

싫은 이유는, 실은 불행하지만 현재의 삶이 달콤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교의 우화에서 뱀이 득실거리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동아줄에

간신히 매달려 있고, 생쥐가 그 동아줄을 갉아 먹는데도 마침 위에서 

떨어지는 꿀물을 먹느라 빨리 구덩이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이는 당장의 달콤함으로 자기가 처한 불행을 잊으려는 것일 뿐이고,

당장의 달콤함 때문에 생각하며 영원을 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 못지 않은 어리석음이 자기의 실제 상황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처한 불행을 망각하는 것 못지 않게 어리석은 것이

자기의 실제 상황을 착각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착각은 근본적은 행복 착각입니다.

불행하지 않은 것 쯤으로 행복하다고 착각하거나

심지어 불행한데도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행복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는 순간 불행해지고,

불행한 것을 인정하는 순간 더 불행해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착각하는 것인데 이는 살기 위한 무의식적 작용이요,

뒤집어 얘기하면 죽지 않기 위한 무의식적 자기 보호 내지는 방어입니다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너무 불행할 뿐 아니라

그 불행이 영원할 것 같으면 자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나는 행복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행복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하고,

불행한데도 행복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은 행복하지 않다고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지금이 회개의 시간이 되고

그래서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때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