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 이다."
(마태5,17-19)
Whoever obeys and teaches these commandments
will be called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행보는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튀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상 거리를 두고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부정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리지 않으셨고(마태 8,1-4 참조),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2,1-14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목숨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율법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가, 율법의 폐지가 아닌 완성을 위한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참된 가르침과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떠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무엇인가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인상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의무를 강조하고 그것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율법주의적이라는 부정적 감정은 우리에게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무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이것을 죄라고 부르면서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고해소에서 듣게 되는 죄의 양상은 아주 단순합니다. 세상에 죄는 단 두 가지, ‘주일을 지키지 못한 죄’와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만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완성하고자 하셨던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일까요? 물론 아니겠지요. 주일의 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만을 우리가 죄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적 사고에 빠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을 ‘주일’로 완성하신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율법을 부과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저 의무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마련해 주신 그분의 가르침이기 때문임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님! 저처럼 힘든 삶을 살아온 사람도 없을 거예요.”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시며 전해 주신 이분의 삶은 정말로 힘든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분보다 힘든 사람이 없을까요? 또 더 힘들게 살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을까요?
20년 넘게 사제로 살면서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다른 이의 삶을 평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렇게 어떻게 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게 사는 것이 분명한데도, “너무 감사해요.”라면서 밝게 웃는 분이 있습니다. 또 별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것으로 치장하면서 세상에 자신보다 힘든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시며 펑펑 우시는 분도 계십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기준을 맞추고 있느냐에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불행하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살 수도 있습니다.
‘나’의 기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운 사람은 힘듦 안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행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불행의 이유만을 찾게 됩니다. 당연히 힘들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고 구속하는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율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단순히 계명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의 정신은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실천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주님께 가까운 삶을 사는 것으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까요? 아니면 큰 사람이라고 불릴까요?


미국의 지휘자 레오폴드가 베토벤의 서곡을 준비하면서 극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 트럼펫 연주자를 관중석에 앉아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휘봉으로 신호를 보내면 관중석에서 솔로로 연주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공연 당일,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이라이트인 트럼펫 연주 구간이 나와 지휘봉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관중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날 뿐 트럼펫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관리인들은 이 트럼펫 연주자를 공연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알고 제지했었던 것입니다.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멋진 공연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 아이디어는 묻히고 말았으며, 망친 공연이 되고 맙니다.
우리도 종종 좋은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루어내지 않은 아이디어는 최악의 생각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든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 어째서 폐지하러 오신 분처럼 보였을까요?
율법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이는, 그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나 사랑을 강요하는 이는 율법주의자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이는 세상에서 사랑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참사랑은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율법주의자로 남느냐로 결정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소년 시절의 너’입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주인공 ‘첸니엔’은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소녀입니다.
어머니는 첸니엔이 일류대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키기를 원하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작용이 심한 화장품을 팔고 다닙니다.
그런데 첸니엔의 유일한 말벗이었던 한 친구가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합니다. 첸니엔은 자신의 옷으로 그녀를 덮어줍니다. 이로써 친구를 괴롭히던 아이들의 다음 대상이 됩니다.
이때 첸니엔의 어머니가 남의 돈을 떼먹고 도망을 하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래도 첸니엔은 꾹 참고 그들의 괴롭힘을 참아냅니다.
그러다 돈도 많고 공부도 잘 하는 일진 웨이 라이가 첸니엔을 괴롭히다 정학을 맞습니다. 웨이 라이와 일진들이 복수하기 위해 첸니엔을 찾아옵니다. 그들에게 쫓기던 첸니엔은 쓰레기통에 숨어서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때 우연히 양아치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하는 샤오 베이를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신고하는 걸 들켜 양아치들에게 끌려가 함께 괴롭힘을 당합니다.
샤오 베이는 자신에게 돈을 주면 첸니엔을 일진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말합니다. 웨이 라이 일당이 첸니엔에게 보복을 하려고 하자 첸니엔은 결국 샤오 베이를 찾아가 돈은 줄 수 없지만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샤오 베이는 지금 생활을 벗어나는 건 명문대 진학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듯한 첸니엔의 등하교를 같이 해주며 첸니엔을 지켜줍니다.
항상 싸우고 다쳐 돌아오는 샤오 베이와 엄마에게 버림받은 첸니엔 둘은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점점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웨이 라이는 더 많은 패거리를 끌고 와 이전에 자살한 아이에게 한 것처럼 첸니엔을 짓밟고 머리카락도 강제로 자르고 옷을 벗겨 영상을 찍습니다.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경고해서 이들의 괴롬힘은 끝나지만 첸니엔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샤오 베이에게 돌아와 분노한 샤오 베이를 붙잡고 첸니엔은 서럽게 웁니다. 샤오 베이는 아이들에게 머리가 잘린 첸니엔의 머리를 밀어주고 자기 머리도 밀어버립니다.
대입시험이 시작되고 여느 때처럼 샤오 베이는 멀리서 첸니엔을 지켜봅니다. 첸니엔이 시험을 보는 동안 공사장에서는 신원 불명의 시신이 발견되고,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는데 바로 첸니엔을 괴롭히던 웨이 라이입니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고 아이들이 찍었던 첸니엔의 동영상이 밝혀집니다.
첸니엔은 유력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추궁당하지만, 심증 외에 물증이 없자 경찰은 첸니엔을 따라다닙니다.
대입 시험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샤오 베이가 모든 것을 자신이 뒤입어쓰겠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첸니엔을 스토킹을 했고 웨이 라이도 강간을 하려다가 실수로 죽인 거로 하자면서 소리 지르라고 시킵니다. 샤오 베이는 의도적으로 증거까지 남겨놨습니다.
하지만 첸니엔은 자신이 한 일이니 자수를 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샤오 베이는 자기는 미성년자라서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거고 첸니엔이 대학 졸업을 할 때쯤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샤오 베이는 네가 이긴다면 나도 진 게 아니라며 어른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니 먼저 안전한 곳으로 가 있으라고 합니다.
샤오 베이는 결국 첸니엔의 옷을 찢고 키스를 하다가 경찰에 체포됩니다. 자신이 한 범행처럼 증거를 만들어 놓은 샤오 베이는 경찰의 심문을 받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웨이 라이가 첸니엔을 찾아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경찰에 신고하지만 말아 달라며 장난이었다면서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하지만 첸니엔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 너를 보고 싶지 않다면서 돌아섭니다.
웨이 라이는 첸니엔을 따라가면서 첸니엔의 신경을 긁는 말을 하고 결국 참지 못한 첸니엔이 웨이 라이를 밀쳐내자 계단에서 구른 웨이 라이는 죽게 된 것입니다.
형사는 첸니엔과 샤오 베이의 관계를 조사하다가 사실대로 말하면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샤오 베이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둘을 떠보기도 하고 압박도 하면서 진실을 털어놓도록 해보려고 하지만 둘은 서로를 모르는 사이라 잡아뗍니다.
결국 둘을 대면시킨 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틋하게 바라보지만 진실은 감춥니다.
그 후 첸니엔은 대입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북경대에 합격했습니다. 엄마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형사는 첸니엔을 찾아와 샤오 베이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첸니엔은 미성년자가 사형을 받은 것에 놀라 형사에게 미성년자가 아니냐 물으니 샤오 베이는 이미 성인이었다고 말해줍니다.
첸니엔은 샤오 베이의 면회를 하러 가고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첸니엔은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할 수 있겠냐 묻습니다.
첸니엔은 사실대로 말하고 자수하여 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과실치사가 인정되었지만 웨이 라이와 일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상해 입은 것이 정상참작되어 4년 형에 처해집니다.
시간이 흘러 첸니엔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주눅 들어있는 아이와 함께 걷습니다. 그 두 사람 뒤로 샤오 베이가 따라 걷습니다.
이 영화에서 첸니엔을 사랑하는 사람은 딱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샤오 베이입니다. 어머니는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와 같습니다. 첸니엔을 사랑하지만 그를 경쟁으로 내몹니다. 어머니는 첸니엔을 사랑했지만 첸니엔이 사랑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사랑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반면 샤오 베이는 첸니엔이 자신을 위해 자수하여 감옥살이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샤오 베이는 동네 양아치였지만 첸니엔이 사랑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참사랑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더 가까운 인물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첸니엔의 어머니가 첸니엔을 더 사랑하고 양아치는 양아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각으로는 사랑의 율법을 완성한 인물은 샤오 베이입니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내가 의로워지려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까지 의로워지게 만듭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복음의 결론 부분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듭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유다 지도자들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조재형신부-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지내면서 교황님께서는 두 가지를 제안하셨습니다. 하나는 성모성월을 지내면서 30일 동안 전 세계 30곳의 성모성지에서 돌아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남양성모성지도 30일 묵주기도의 장소로 선정되었습니다. 30년 동안 성지를 담당하는 신부님은 교황청으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혼인잔치에 떨어진 포도주를 알았고, 예수님께 포도주를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교황님은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자고 하였고, 30일 동안 전 세계의 성모성지에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팬데믹 상황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팬데믹의 종식을 위해서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들 또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백신의 나눔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황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전국의 모든 교구가 백신 나눔에 동참하였습니다. 성금을 보아서 교황청으로 보냈습니다. 제가 아는 미국의 한인 성당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교황님의 백신 나눔을 전하였고,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을 외면했던 사제와 레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까지 데려가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이 집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백신의 접종은 우리의 건강을 위한 것이지만, 백신의 나눔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번째 겸손은 대죄를 피하기 위해서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운전으로 비유하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준법운전과 같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준법운전만으로도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겸손은 대죄는 물론 소죄까지도 피하기 위해서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양심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운전으로 비유하면 준법운전과 더불어 안전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운전 전날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합니다. 앞에 가는 차와 뒤에 오는 차까지도 살피면서 운전합니다. 세 번째 겸손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함도, 아픔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입니다. 운전으로 비유하면 안전운전과 더불어 양보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모셔다 드리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신앙생활을 위한 많은 법과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과 규칙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들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영근신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강조하는 문자적 의미의 율법준수를 종종 거부하시곤 하셨습니다. 곧 안식일 법, 정결례 법, 단식 법 등을 지키지 않으시고, 또한 율법을 모세의 이름이 아닌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가르치시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파괴자’라는 낙인이 찍히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폐지나 단절이 아닌, ‘율법의 완성’으로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는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라 3,34)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이었습니다.”(로마 3,20)
결국, 당신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는 율법의 단절이 아니라 영속성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이 보충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율법을 ‘먼저’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타인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성취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그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소서.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반영억신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주변하나 정리 못하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의 행복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율법
-송영진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서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산상설교는 ‘율법 실천의 완성’에 관한,
또는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안 죽이기만 하면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분노와 증오심을 없애야
제대로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 5,21-22).
또 “간음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마음속의 음욕부터 없애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 5,27-28).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율법 실천과 사랑 실천을
완전하게 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마태 5,43-48).
6장에 있는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에 관한 가르침은,
신심 행위를 완전하게 실천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마태 6,1-8.16-18).
7장 12절에 있는 ‘황금률’은 ‘율법 실천의 완성’에 관한 가르침의 결론과 같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마태 22,37-40).
따라서 황금률은 사실상 ‘사랑의 계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로마 13,1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8-19).”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율법 준수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율법주의가 아니라, 신앙생활은 ‘사랑’으로 ‘정성’을 다 쏟아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율법주의는 속마음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율법만 잘 지키면 된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사랑도 없고 정성도 없는 위선자들입니다.)
율법들과 계명들을 실천하는 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요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 5,3).”
하느님을 사랑해서, 사랑으로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사람은,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서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킵니다.
(사랑과 정성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 열심히 지키는 척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무시해버립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마태 7,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고,
또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은 ‘구원’과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 라는 말은,
실제로 가장 작은 계명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가장 작은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고,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의 뜻은, ‘가장 작은 계명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가 아니라,
‘가장 작은 계명이란 없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부딪친 일이 많은데,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했고(요한 9,16),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5-16)”
바리사이들은(대부분의 유대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레위 19,18)
안식일에는 무시했습니다.
이웃 사랑 계명을 ‘안식일 계명보다는 작은 계명’으로,
안식일 계명을 ‘아주 큰 계명’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더 중요한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핑계로 내세워서
다른 계명을 무시한 것인데, 그런 사고방식과 행동은 위선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오늘날에도 주일을 지키라는 계명과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이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느라고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변명하거나,
반대로 주일을 지키느라고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변명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글자 그대로 변명이고 핑계일 뿐입니다.
혹시라도 “부모가 신자가 아닌 경우에는 두 계명을 동시에 다 잘 지키는 것은
실제로 어렵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는 일을 주일미사 참례로만 생각하고,
효도를 겉으로 보이는 어떤 행동으로만 생각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 5,17-19: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조욱현신부-
율법과 예언서를 만드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고 하심으로써 모두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미 파스카 식사의 신비를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셨을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잘 보존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은 것들도 하늘나라라는 위대한 미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율법과 예언서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때, 그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가르침이 얼마나 참되며 거룩한지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신데 어떻게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지키셨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계명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반대되는 법을 만들어 낸 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법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 약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선의 것은 아니다. 법은 어떤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을 어기게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 법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법의 한계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기에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매여,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에 나의 이웃을 대입시키고 판단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하느님의 눈으로 성서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율법주의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한상우신부-
여름에도
나뭇잎이
떨어진다.
아픔 없는
완성은 없다.
미완성과
완성 사이에
우리가 있다.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사랑의 계명은
완성되어 나간다.
매 순간이
사랑이 필요한
은총의
순간이다.
완성의 배경에는
은총의 배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
갈 수 밖에 없는
완성의 길이다.
마지막까지
사랑에
충실하신
예수님이시다.
사랑은
혼자가 아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죄악과 위선을
맑은 당신
사랑으로
깨끗이
정화하신다.
모든 것은
한때다.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삶을
완성할 때이다.
삶을
완성시키시는
예수님이시다.
율법의 안쪽에는
사람이 있고
삶이 있었다.
구원을 멈추지
않으시는
완성의
주님이시다.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삶을 완성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나무또한
완성되어
나간다.
아픔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로
삶을 완성하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하여 율법이 완성됨을 보여 주십니다.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 유명한 산상 수훈 대목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 초기에 이루어진 가르침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키기 전일 터인데, 예수님은 앞으로 당신에 대해 일어날 경계와 의혹을 미리 내다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으셨지요.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느님 말씀의 완성이시니까요.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율법을 몸소 말씀과 실천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생애가 곧 사랑의 완성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하늘 나라의 도래는 이스라엘의 희망입니다. 처참했던 유배의 기억과 식민지 현실이 메시아와 함께 이루어질 하늘 나라를 꿈꾸게 했지요. 예수님은 그런 구약 백성의 꿈과 당신의 꿈이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 말씀을 경외하여 지키며 전하는 이는 하늘 나라에 속한, 하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에서 성령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
돌판에 문자로 새겨진 율법이 이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영혼에 새겨집니다. 새 계약은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지지요.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뜨거운 사랑의 새 포도주, 곧 성령이십니다.
문자에만 집착하다 보면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지요. 숙고 없는 형식주의는 하느님의 말씀을 메뉴얼로 둔갑시켜 영혼이 결여된 의무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율법의 본질인 사랑의 정신이 오히려 불편해지지요. 이미 형식이 제도와 톱니처럼 맞물려 잘 굴러가니 굳이 정신까지 되짚어 소환할 필요성을 못 느끼니까요.
하지만 성령은 끊임없이 신앙의 정수를 건드리시고 일깨우십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지향으로 하는지 묻고 또 물으시지요. 어떤 계명을 준수하기에 앞서 그 안에 사랑을 담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자격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2코린 3,5-6)
이제 성령께서 율법의 조항을 넘어 하느님 나라를 누리고 선포하는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어떤 신분이건 성령께서 거하시는 영혼이 새 계약의 일꾼이지요. 그는 문자로 새겨진 메뉴얼을 따르기보다 영혼 깊이 각인된 사랑의 인장을 따라 움직입니다. 사랑이 새 일꾼의 표징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계명을 무력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셨지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이 계명과 별개일 수 없으니까요. 이 말씀이 아버지의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율법을 경시하거나 폐지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세워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느새 우리 몸에 배여 좋은 습관이 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하나하나 깨어서 의식하며, 그 안에 더 따뜻하고 더 정성어린 사랑을 담뿍 담아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계명은 문자적 메뉴얼이 아니라 사랑의 지침이니, 우리의 작고 소박한 사랑 안에서도 주님의 계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함께 사랑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거룩한 문자의 영
-김찬선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권고 7번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합니다.
"사도가 말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사람들 중에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또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줄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다만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문자의 영을 따르기를 원치 않고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를 열망하는 수도자들은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알고 있는 문자나 알고 싶어 하는
모든 문자를 육신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말과 모범으로 돌려드리는 사람들은
거룩한 문자의 영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문자와 거룩한 문자를 구분하고,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사람과 생명을 얻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거룩한 문자의 영을
따르지 않기에 거룩하게 하는 영이 빠진 말마디만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만이 온갖 거룩함의 원천이시기에
모든 것은 하느님을 모셔야지만 거룩하게 되고 거룩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성가란 하느님을 노래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고,
성전이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듯
거룩한 문자도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거야겠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유행가가 만족은 주지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이에 비하여 성가는 영적 만족을 줄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생명을 주는데
그것은 생명이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렇다는 것이지
성가는 재미없고 유행가만 좋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데
유행가란 것이 일시적 만족을 주지만 말그대로 유행따라 가버리는 것이기에
우린 여기서 성가를 부를 것인지 유행가를 부를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때 유행가를 따라 부르지 않고 성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 거룩함의 영인데
문자의 경우도 거룩한 문자의 영을 따르면 우리는 문자 안에서 나도
하느님을 만나고 남도 하느님을 만나게 하여 모두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거룩한 문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길바닥에 떨어져있는 그래서 쓰레기에 불과한 종이쪼가리에서도
하느님 '하'자를 발견하고 거기서 생명을 얻는 데 비해
거룩한 문자의 영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 말씀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인정이나 받고 지식을 이용해 돈벌이 하기 위해
문자를 배우고 지식을 쌓고 지식을 팔아 먹기에 문자로 인해 죽임 당하지요.
또 거룩한 문자의 영이 없을 경우 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자처럼 문자로 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무릇 모든 법은, 그것이 올바른 법이라면,
공동선과 공동의 생명의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이고 그것이 법의 정신인데
정신은 빠져있고 법만 있는 율법주의는 문자에 얽매여 법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법조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분으로 김홍섭 판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사도 법관이라고도 불렸고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셨는데
이분이 법관으로서 어쩔수없이 사형을 선고하였지만 그후
그 죄수를 매일 같이 찾아가 그 죄수가 세례를 받고 죽게 하였지요.
법의 정신과 거룩함의 영을 잃지 않음으로써 율법주의를 초월한 분이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 이다." (마태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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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의 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만을 우리가 죄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적 사고에 빠지는 것입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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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듭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유다 지도자들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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