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1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더욱 공경하며 묵상하는 날이다. 성체성사와 연관되어 있기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낸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일반화되었고,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로마 전례력에 도입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95년부터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 오고 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은총을 베풀고 계십니다. 예수 성심의 깊은 사랑을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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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31-37)
One soldier thrust his lance into his side,
and immediately blood and water flowed ou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무서운 하느님을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그들에게 수시로 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십니다. 금송아지를 보고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느님이시다.’라고 외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도 하십니다(탈출 32,25-29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도 만드십니다(민수 21,4-9 참조).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시지만 질투하시는 하느님이기도 하셨습니다(탈출 20,5; 34,14 참조). 그리고 하느님 분노의 절정은 왕국의 멸망으로 구체화됩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분,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구약의 역사 안에서 자비와 분노의 감정을 모두 표현하셨습니다.
그럼 어떤 하느님의 모습이 진짜일까요? 하느님의 진짜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그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당신의 외아드님을 인간의 손에 맡기십니다. 아울러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그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면, 신약에서 분노와 심판은 사랑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그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을 바치시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쏟으십니다. 그분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언어로 담기에는 너무나도 크신 사랑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따뜻한 축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강론 원고를 프린트하려는데 인쇄가 되지 않습니다.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보기도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유를 찾다가 너무 간단한 이유를 찾았습니다. 잉크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 간단한 이유부터 점검했어야 했는데, 이 점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프린터나 컴퓨터 본체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원인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알았음에도 인쇄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여분의 잉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필요한 부품도 시간이 지나면 갈아줘야 합니다. 프린터만이 아닙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그 밖의 많은 가전제품이 그렇습니다. 아~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각자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단순히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종합검진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점검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면이 황폐해졌는지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황폐해질수록 주님과 함께 할 힘이 없어집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더욱 공경하며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 거룩한 마음은 바로 겸손과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겸손과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주님의 나라에 초대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제때 점검하지 못해서 황폐해진 내면으로 주님께 나아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이제 버리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주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 될 때,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인 오늘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사제 성화의 날’을 지냅니다. 사제 생활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을 정한 것입니다.
사제들의 인간적인 부족함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보셨으면 합니다. 이 사랑을 보게 될 때, 사제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또 사제들도 교우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힘찬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미 항공우주국에서 우주선에 탈 우주인을 위한 최고의 비행용 시트를 설치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수천 명의 체형을 연구해서 표준 시트를 만들었습니다. 수천 명의 체형을 연구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우주인에게 최고의 만족도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표준 항공 시트에 맞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이라는 말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연만 봐도 다양함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매년 같은 꽃이 피어나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모두 다 그렇다는 보편성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살아가는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마음: 다 주고도 미안한 마음
-전삼용신부-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기도 하고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는 내용입니다. 피와 물은 성사를 상징합니다. 아담의 갈비뼈와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듯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피와 물로 자녀인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나온 피와 물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부모님의 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튜브 동영상 ‘하늘 같은 든든함, 아버지’를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아버지들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어린 자녀들을 둔 아버지들에게 자녀에 대해 질문하는 설문지를 작성하게 합니다. 자녀의 사진은 얼마나 가지고 있고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이나 하고,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은 있느냐는 등의 질문입니다.
아버지들은 입에 미소를 머금고 설문지에 답합니다. 그러다 질문이 이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는 것으로 바뀝니다. 같은 질문인데 자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너무 무심했다는 미안함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미리 녹화해 놓았던 그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말씀하십니다.
“항상 미안하죠. 항상 미안해요. 잘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그게 부모 마음 아닐까요?”
“너에게 해 준 게 얼만데!”라는 마음은 분명 참사랑에서 나온 내어줌이 아닌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입니다.
미안해하는 부모님에게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에 대한 또 미안함을 느끼는 자녀.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과 교회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다 주면서도 미안해할까요? 그 이유는 그들도 당신들의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받지 못한다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도 많이 받은 것에 대해 덜 내어준 것 같아서 미안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님 마음, 예수님 마음은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예수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거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예수님 마음을 닮은 사제,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OBS TV’의 ‘멜로다큐 가족’, ‘미안하다, 보고 싶구나’에서 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딸 둘과 늦둥이 쌍둥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만 한 아들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조그마한 카센터를 운영하는데 출근 전 새벽 4시에 일어나 평택에서 매일 새벽 충주에 있는 아들의 산소에 음식을 싸서 옵니다. 음식을 차려놓고 “그때 잘 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라며 웁니다. 그러며 그는 말합니다.
“아들 묘가 없었다면 못 살았을 겁니다.”
남은 한 명의 아들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숨었다고 합니다. 워낙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서웠던 아버지가 사실은 다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런 사랑 가득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왜 그리 아들에게 다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할까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본인도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그의 부모로부터 받았던 것에 비해 자신은 덜 주고 있다는 죄송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사제로서 예수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도 너희를 굶긴 적은 없었다.”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다면 이 말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김치도 없이 맨밥을 물 말아 먹은 적도 있고 며칠 동안 계속 라면만 먹어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우리 앞에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하게 마음이 편한 말씀이신 것이고 평생 이것을 위해 살아오셨음을 느끼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언제나 미안해하시기도 합니다.
만약 제가 매일 강론을 쓰며 신자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저는 자녀를 잃어 더는 무언가 줄 수 없는 위 아버지처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플 것입니다. 어쩌면 저는 그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매일 강론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적어도 어머니께서 하신 이 말은 하고 싶습니다. 그런 말도 할 수 없다면 매우 후회될 것입니다.
전에 ‘판타스틱 듀오 2’에서 가수 ‘바다’ 씨는 인순이 씨와 함께 아버지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두 가톨릭 신자입니다.
특별히 바다 씨는 S.E.S.로 데뷔해서도 1년은 추워도 찬물로만 샤워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힘들게 키운 부모님께 대한 죄송함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해야 했던 아버지, 학비가 없어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던 어머니가 아직도 찬물로 샤워하는데 자신만 따듯한 물로 샤워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 따듯한 물이 나오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리고서야 자신도 따듯한 물로 샤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받은 것만큼 다 주지 않으면 편안할 수 없는 마음, 사랑을 받은 사람의 마음은 이런 것 같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만큼 내가 내어주지 못하면 후회막급일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으로부터 아드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들이야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을 이웃에게 내어주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도 그래도 받은 것에 비해 너무 조금 내어놓은 것에 대한 미안함. 이것이 예수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재형신부-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교구에서는 ‘사제성화의 날’이면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강의를 듣고, 함께 기도하고,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교구장님과 함께 미사로 피정을 마쳤습니다. 20년 전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저에게 ‘사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하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본당신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선배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제가 생각하는 사목에 대해서 발표하였습니다. 오늘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면서 20년 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사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산보를 하고 있지만 20년 전에도 산보는 제게 유일한 운동이었습니다. 산보 중에 있었던 기억입니다. 점심을 먹고 산보를 가려고 사제관을 나서는데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서는데 초등학교 2학년인 진성이가 성당으로 왔습니다. 진성이는 성당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어린이인데 달리기를 아주 잘합니다. "진성아! 산보갈래!"하니까 진성이는 가방을 교육관에 벗어놓고 곧 저를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큰 찻길을 건너, 비가 온 뒤에 물이 많아진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을 지나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장날이 아니라서 시장은 한산했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진성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다시 큰길을 건너 진성이가 다니는 학교엘 갔습니다. 진성이가 우산을 교실에 놓고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개울을 건너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가, 성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평소보다 길게 산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진성이가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산보는 어디에 있어요?" 저는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시 산보를 가자는 말인가! 진성이는 "산보"라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았나 봅니다. 문득, 하느님 앞에 저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진성이처럼 하느님은 어디계시냐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고,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고,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목이라는 것도, 어쩌면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미 사제가 되었으면 어떤 사목자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사목자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꼭 많은 이야길 해야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꼭 먼가를 가르쳐야만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천하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둘째, 사목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들어서 죄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규정을 따져서 죄를 범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잘못을 비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도록,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가라지의 삶이었을지라도 밀이 되는 것입니다.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은 밀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가라지가 되는 것입니다. 양자역학은 밀과 가라지의 경계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옳고 그름을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목이란 용서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셋째, 사목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분들과 인사도 나누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는데 건회와 진성이가 성당 문으로 뛰어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왜 뛰어올까 생각하면서 물어 보았습니다. 두 친구는 집에서 성당까지 뛰어왔답니다. 두 아이의 집은 장현리이고, 장현리는 차로도 15분은 가야되는 거리입니다. 아이들은 성당 버스를 놓쳤고, 그래서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3시간 30분을 뛰어서 성당에 도착한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찡해집니다. 뛰다 넘어지고, 그리고 또 뛰고 그렇게 성당엘 온 아이들을 생각하니,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을 내는 저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졌습니다. 건회는 현지라는 동생이 있고, 진성이는 민정이라는 누나가 있습니다. 현지와 민정이는 뛸 수가 없어서 장현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건회와 진성이와 성당차로 장현리 건회의 집으로 갔습니다. 두 아이들을 이 저를 보고 너무 반가워합니다. 우리는 함께 성당으로 왔고, 아이들은 2시 30분 군종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그렇게 저에게 감동을 줍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에, 두 아이가 성지 주일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어느덧 주님께 모욕을 주고, 어느덧 주님을 모른 체하고, 어느덧,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목이란 한 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목이란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이 모를 심었다고 농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 그리고 반성을 통해서 결실을 맺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오늘도 저는 상처입은 치유자이자 부족한 사목자로서, 가슴을 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러운 사제로 살아오면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을 돌아봅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이 들게 하던 꽃잎같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유난히 혹독한 십자가와 깊은 상처로 힘겹게 살아가던 형제자매들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좀 더 따뜻하고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것, 좀 더 격려하고 좀 더 위로해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면 인생 자체가 고역이요 슬픔인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내는 그들을 바라보면, 한없이 부족한 저지만, 제 마음 역시 깊은 슬픔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그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는 ‘상황전이’ 현상으로 제 마음도 괴롭습니다.
한낱 인간의 마음도 이럴진데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하느님의 마음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그분의 마음은 한 인간 존재의 고통과 슬픔을 못견뎌 하는 마음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그저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죄와 방황과 타락 앞에 탄식하고 눈물 흘리시는 마음입니다.
이런 측은지심과 연민의 하느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끔찍이 여기시는 하느님, 우리를 향한 불타는 사랑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사랑의 하느님께 깊이 감사하는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그 큰 사랑에 작은 보답이라도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 앞에, 그리고 양떼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한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얼마나 걱정되었으면 따로 ‘사제 성화의 날’까지 제정했을까? 하는 마음에 크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 가톨릭 교회의 현실을 진단할 때, 지금 수많은 도전과 기로 앞에 서 있는 우리 교회가 쇄신되고 성장하는가? 아니면 퇴보와 쇠락의 길을 걷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70퍼센트의 답은 사제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사제들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언제나 자신의 양떼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며, 노심초사하고 결국 목숨까지 바치는 노력을 통해, 우리 교회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드라마틱한 나날이 매일 펼쳐지는 세상 안에서 고생하며 살아가시는 평신도들, 그리고 나와 너무나 다른 그, 그리고 공동체와 더불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수도자들의 삶도 힘겹지만, 사제들의 삶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강론대 위에서의 모습과 강론대 밑 내 모습 사이의 큰 괴리감에 늘 괴로워합니다. 사제들 역시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라, 때로 작은 파도 앞에서도 무기력하게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는 언제나 주님과 교우들로부터 사랑받는 멋진 사제로 살고 싶은 마음 가득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면 예의바르고 균형잡힌 사제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본인도 이해하기 힘든 부끄러운 모습으로 전락합니다.
언제나 내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그 나를 통제하고 다스려가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버거운지 모릅니다. 사제 역시 교회 안에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한 가엾는 죄인이요 상처투성이의 어린이지만, 그 상처를 꼭 부여안고, 오늘도 상처입은 치유자이자 부족한 사목자로서, 가슴을 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께서 당신의 한없이 너그럽고 뜨거운 사랑으로 매일 사제들을 따뜻히 품어 안아주시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입니다. 곧 사랑의 대축일입니다.
이는 마치 물줄기를 찾아 올라가, 산꼭대기의 높은 곳에 있는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맑은 샘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곧 우리가 마시고 있는 사랑의 강줄기의 발원지인 그 원천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화답송>입니다. <화답송>에서 이사야는 바로 이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그렇다면, 그 사랑의 발원지인 구원의 샘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심장, 곧 예수님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열쇠는 “심장”(마음), 곧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응석받이 아기에 비유하여, 간장을 태우는 어머니의 절실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전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들은 이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고, 끊임없이 배신하게 됩니다. 그거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밝혀지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주게 하셨습니다.”(에페 3,9)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러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최상의 증거를 십자가에서, 곧 당신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늑방과 심장에서 흐르는 물과 피’! 이는 ‘가나안의 혼인잔치’(요한 2,1-12 참조)를 반향해 줍니다. 곧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던, 정결례에 쓰던 여섯 개의 항아리는 마침내 예수님의 몸인 일곱 번째 항아리에서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로 이 갈바리아의 혼인잔치에서 신부인 교회와, 죄를 씻어내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늑방과 심장에서 흐르는 물과 피’는 여인이 깨트린 옥함(요한 12,1-8 참조)을 반향해 줍니다. 값진 옥함을 부수고 남김없이 쏟아 부은 향료가 온 집안으로 번지듯, 감춰진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그리스도의 부서진 몸에서 흘러나온 사랑이 온 세상을 기름칠하고 번져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휘장을 찢고(루카 23,45 참조),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담은 성전을 부수고(요한 2,19 참조), 온 세상에 아버지의 사랑을 내어주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은 축성되고 새롭게 탄생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이 찔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는 바로 아버지의 심장이었고, 마음이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부어주신 피와 물로 우리를 씻으십니다. 그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있습니다. 결코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 말입니다. 바로 오늘이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 마음”이 우리에게 선사되는 은혜로운 날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주님!
당신께서는 휘장을 찢고 가로막힌 모든 것을 치우셨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물과 피로 우리의 영혼을 씻으셨습니다.
온 누리를 새로 지어시고 아버지의 향기를 가득 채우셨습니다.
사랑의 옥함인 당신 몸을 부수어 사랑의 향유로 온 세상을 기름칠하셨습니다.
오늘,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 사랑에 제 영혼이 뛰놀며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멘.

거룩하신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반영억신부-
오늘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생각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그 사실을 확인하느라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피는 심장에서 나온 것이고, 물은 늑막에 있던 림프샘의 액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흘러넘치도록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이며, 그래서 세례성사를, 그리고 흘러나온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하는 성체성사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두를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샘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성사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예언된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이냐시오에 의하면 사랑의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말보다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둘째, 사랑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당신 목숨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것 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앞서 그분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냐가 소중합니다. 우리는 분명“주님 앞에”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 8).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한 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 진실로 주님을 닮고자 원한다면 모든 것의 모범인 거룩하신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알퐁소 성인은 “예수님의 성심은 당신의 사랑을 애원하는 사람들에게 청하는 바 무엇이든 틀림없이 채워주신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말가리다 성녀도 “예수님의 성심을 열심히 공경하고 의탁하는 영혼은 구원의 항구로 안전하게 도착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성심 안에 모든 바람을 이루시고 또한 구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오! 저는 그분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분이 저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제가 그분 마음에 들고 그분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비르지니수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예수님의 마음은 >
-송영진신부-
1) ‘예수님의 마음’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2-13).”
우리는 ‘되찾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잃은 양’을
‘그들’이나 ‘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잃은 양’은 ‘그들’이나 ‘그’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딴 생각을 하거나 한눈을 팔면서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있으면,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보다 세속의 일에 더 정신을 쏟고 있으면,
나는 ‘잃은 양’입니다.
그러다가 회개하고(정신을 차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면
‘되찾은 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슬퍼하실 때도 많을 것이고,
나 때문에 기뻐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예수님께 슬픔만 드리고 있는가?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혹시라도 “나는 ‘잃은 양’이었던 적이 없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을까?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 7,18-20).”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ㄱ).”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가 “나는 비참한 인간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소리치는 자만심은 아주 위험합니다.
2) ‘예수님의 마음’은 자녀들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애쓰고,
자녀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져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때까지,
정녕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3,37-39).”
이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오늘날의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에 관한 말씀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언제나 항상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전쟁, 전염병, 대재난 등을 겪어도 회개하지 않고
변화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오늘날의 인간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마음은 곧 어머니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곧 사랑입니다.
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조금 상황이 호전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거나,
또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그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경고 말씀이 연상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여기서 예수님께서 묘사하신 사람들의 모습은 죄를 짓는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의 모습입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롯 때의 소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일상생활에만 몰두하다가 모두 멸망했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지만,
신앙인들은 ‘회개로써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의 마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하는 바로 그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여기서 “그가(작은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라는 말은,
아버지가 날마다 ‘먼 곳’만 바라보면서 작은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작은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은,
굶주리고 헐벗은 작은아들의 모습을 가엾게 여겼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죄를 짓고서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린 아들을 불쌍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일이고,
회개하는 것은 그 생명력을 다시 얻어서 되살아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곧 ‘재생’입니다.)
작은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벌인 잔치는(루카 15,24)
굶주리다가 돌아온 작은아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잔치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자신의 기쁨을 나타내는 잔치입니다.
(작은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에, 아마도 아버지는 몹시 슬퍼하면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데(루카 15,28),
아버지는 “함께 기뻐하자.”고 큰아들을 타이릅니다(루카 15,3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요한 13,34).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우리가 모두 함께 회개해서,
함께 기뻐하기를(함께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곡한 호소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 나해
-조욱현신부-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예수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자 확산하면서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모든 신자가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매일미사에서).
복음: 요한 19,31-37: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로서였다. 예수성심은 예수의 심장만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참조: 마태 11,29).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 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로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원의와 인식,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로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공경과 성심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에서 돌아가신 후에 그 죽음을 확인하려고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것을 전하고 있다. 그 군인의 행위는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사도 요한은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장면을 통하여 요한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교회의 탄생을 읽고 있다. 피는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성체성사와 당신의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물은 성령의 상징으로써 세례의 표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으로 교회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교부들은 말하고 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는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심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영성체송)
그분이 곧 생명의 물이십니다.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우리 인간의 실존을 예수님 친히 겪으셨고 또 친히 살아내셨지요. 우리의 갈증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복음은 우리를 예수님 죽음의 슬픈 장면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미 숨을 거두신 그분께서 한 번 더 날카로운 창으로 헤집어지는 처참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상처로 벌어진 그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복음사가가 증언합니다. 세상을 향해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는 주님의 또 다른 입술입니다. 예수님의 실제 입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발설되었다면, 이제 옆구리의 열린 입(상처)에서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발설됩니다. 피와 물은 교회를 지탱하는 성령과 교회의 지향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애끓는 뜨거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4)
사랑의 예언서인 호세아서의 이 대목은 아버지요 신랑이신 주님의 모습을 모성적인 사랑의 행위들로 표현합니다. 창조 때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입맞춤하셨던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에게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애정을 퍼붓듯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내내 인간을 향해온 그분의 입맞춤은 연민의 사랑이 응축된 그분 심장에서 흘러나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신도들이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닫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3,18-19)
세상의 눈에 예수님은 실패자에 불과합니다. 설교와 기적으로 반짝하고 사라진 이상주의자나 망상가로 보일 수도 있지요. 당신 상처로(입으로) 피와 물을 다 쏟아내시어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한 사랑을 깨닫는 은총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의 중심인 심장, 사랑으로 펄펄 끓는 그분 심장을 열렬히 갈망하며 지치지 않고 달아드는 이에게 그분은 당신 상처(입)을 활짝 열어젖히십니다. 그리고 피와 물의 근원인 심장을 드러내 주시지요. 그분 심장에 가닿으려면 그 아프고 슬픈 상처를 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화답송)
그럼에도 우리는 기뻐하며 주님의 심장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은 우리의 의혹과 불안과 두려움의 갈증을 씻어줄 구원의 샘입니다. 예수님 심장인 구원의 샘에는 하느님의 신비의 계획이 감추어져 있습니다.(에페 3,9 참조) 우리는 거기서 그 사랑의 신비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삼아 살아가라고 불리웠습니다.(에페 3,17 참조)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에서 당신 존재를 활짝 열어 불결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신 예수님께 다가가 사랑으로 친구합시다. 그분 심장에 머물러 그분께 위로를 드리고, 우리를 향해 펄떡이며 끓어 오르는 열렬하고 애틋한 사랑을 들여마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시다. 아울러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저를 포함해 모든 사제들이 거룩함의 여정에 지치지 않고 충실하기를 함께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랑의 불가마이신 예수 성심,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분노와 연민에 대하여
-김찬선신부-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오늘 호세아서는 분노와 연민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 호세아 말씀을 독서로 뽑은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이 호세아서가 얘기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분노와 연민에 대해 성찰코자 하는데
우리는 보통 언제 분노를 하게 되는지 먼저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분노라고 하지만 분노는 의노와 분노로 나뉘지요.
주님의 성전 정화의 경우처럼 의노가 불의에 대한 분노라면
분노는 정의에 어긋나기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에 어긋나기에 분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내게 상처를 주거나
내 맘에 들지 않거나 할 때 생기는 자기중심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죄지은 사람에 대한 분노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의 죄를 보고 분노하지 않습니까?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죄를 짓건 말건 무관심할 수도 있는 것인데
분노한다는 것은 그래도 관심 있는 표시이니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죄를 보고 분노한다는 것은 실제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 인류 사랑의 발로, 곧
같은 인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보편적 인류 사랑의 발로일 겁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죄에 대한 분노는
사랑일 뿐 아니라 인류의 공통적인 적인 죄에 대한 의노일 것입니다.
인류 공동체를 깨는, 특히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깨는 죄에 대해 공분하게 되는데 그런 공분과 의노 말입니다.
그러니 이 죄에 대한 공분과 의노에는 내가 빠지지 않습니다.
나도 같은 죄를 지을 수 있고, 짓고 있다는 겸손의 분노여야 하고
그래야 공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이라면
바리사이처럼 교만하고 위선적인 분노일 뿐이고 공분이 아니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11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는 아무것도 못마땅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죄를 짓든 하느님의 종이 이 때문에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한다면, 스스로 과오를 쌓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말미암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이 진정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죄에 대해서는 공분해야 하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연민해야 한다고 하고,
특히 나에 대해 죄를 지었을 때 가슴 아파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지요.
나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나에 대해 겸손하고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너에 대해 관대하다면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이 사랑에서 연민은 나오는 것이며,
사랑이 크면 클수록 연민을 넘어서 가슴이 아플 거이고,
이 사랑보다 더 커지면 예수 성심처럼 가슴이 상처를 입을 것이고
십자가 주님의 가슴에서 피와 물이 나오듯이 피눈물이 나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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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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