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6. 10. 07:09

2021년 6월 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오 5,22 -26) 

 

wh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Raqa,' will be answerable to the Sanhedrin,
and whoever says, ‘You fool,' will be liable to fiery Gehenna.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비교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들은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착실하게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좌절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의로움은 계명 그 자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이 커지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단순하게 살인하면 안 된다는 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성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물 봉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물을 봉헌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이웃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의로움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지키면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을 향해서 욕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성당에서 예물과 우리의 마음을 봉헌하면서도 원한 품은 사람들과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한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늘 나라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일까요?
지금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우리의 시선을 계명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주변의 형제들에게 두어야 한다는 사실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혹시 동물원에서 기린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기린의 키는 클까요? 아니면 작을까요? 아마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 “크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기린의 키는 자그마치 3.5~4.8m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게도 550~1,930kg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까. 기린은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작다고 말해야 할까요?


인간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프리카코끼리가 보기에는 너무 작게 보일 것입니다. 이 코끼리는 6.5~7.6m, 무게는 6t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동물도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흰긴수염고래입니다. 몸길이가 23~27m, 체중은 80~150t입니다. 아파트 8~9층의 높이입니다. 이 고래가 기린을 보면 너무 작은 미니어처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누가 보느냐에 따라 크다 작다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대단한 존재일까요? 별것 아닌 존재일까요?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면 크게 웃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부족함과 나약함이 가득하지요. 그래서 항상 겸손한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을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즉, 계명을 확장시키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은 화도 내지 말고, 욕도 하지 말고, 원망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확장됩니다. 사실 사람들은 율법에서 규정하는 그 정도만 지키고 그 이상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이 정한 선에서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 모습을 따라야 할까요? 따르지 않아도 될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이만하면 됐다며 선을 그어 놓고 사는 것을 반대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는 노력을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겸손하게 주님 말씀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옥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나폴레옹).


모범 남성.

한 여성단체에서 ‘모범 남성’을 선정하겠다고 홍보했습니다. 이에 수만 통의 추천서가 접수되었지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천한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야말로 최고 모범 남성이 분명하다면서 심사의원 모두 이견 없이 동의했습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술이나 담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음식의 정량 외엔 절대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운동 시간을 정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성이나 아이들을 절대 구타하지 않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몸에 익혀서 질서 정연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비디오로 시간을 축내는 법이 없습니다. 규칙적인 삶을 위해 휴대폰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일요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합니다. 이런 생활을 7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더니, 상대방의 전화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교도소입니다!”

완벽한 생활 리듬을 유지하는 사람은 통제당하는 사람일뿐일까요? 아무튼 어쩔 수 없는 통제를 따르는 사람은 ‘최고의 남성’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잘 통제하십니까?

 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살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2페니(약 20원)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출근해서 바로 차를 한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값이 2페니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머니에 있던 2페니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내는 자신을 도둑으로 모느냐며 크게 화를 냈습니다. 이에 남편도 화를 냈고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고 심지어 상대의 집안을 들먹이며 싸움은 더 크게 번졌습니다.

 

    결국,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20원 때문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댐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집니다. 남편이 화를 참았거나 아내가 화를 참았다면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차피 얼굴에 화가 난 것이 다 드러나는데 뭐하러 참느냐 할 것입니다. 혹은 내가 지금 화를 내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볼 것이라고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위선이 아니냐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화를 내야 화가 풀리는 게 아니냐고 합니다. 화를 참고만 있다가는 화병이 걸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을 내는” 사람이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밖으로 표출되면 재판을 받는 것입니다.
    화를 표출하거나 어디다 분출해버린다면 정말 화가 가라앉을까요? 그렇다고 말한 학자가 프로이트입니다.
    프로이트는 화라고 하는 감정을 마치 터지기 직전의 댐으로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씩 자꾸 흘려보내 주어야 댐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분노를 베개를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밟아서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분출하면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제임스라고 하는 미국의 심리학자는 프로이트의 접근방식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화를 내면 더 화가 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방식은 오히려 더 화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의견이 더 맞는 것 같습니까?

   

    1970년대 초 사회학자 머레이 스트라우스는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부부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한 그룹의 부부에게는 자신들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라고 했고 다른 부부들에게는 그런 감정을 삭이라고 했습니다. 부부의 폭력성은 감정을 드러낸 부부들이 더 심했습니다. 말이 점차 격해지며 몸싸움까지 갔던 것입니다.
즉, ‘프로이트 : 제임스 = 0 : 1’이 되었습니다.


    에브 에베덴 연구팀은 한 회사가 조만간 대량 해고를 할 것을 알고, 3년 계약을 하고 들어갔는데 1년 만에 해고를 당해야 하는 이들을 면담했습니다.
    한 그룹에게는 불만을 마음껏 표출하게 하는 질문을 하였고 다른 그룹에는 그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정도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대한 적대감을 조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분노를 표출한 집단이 회사에 대한 더 큰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프로이트 : 제임스 = 0 : 2’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포츠 분야에서도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제프리 골드스타인은 축구와 농구, 풋볼과 같은 경쟁하는 스포츠를 보며 마음껏 소리를 지른 사람들과 체조경기와 같은 소리지를 필요가 없는 경기를 본 두 그룹의 공격성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선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장면을 본 이들의 공격성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저도 로마에 있을 때 축구경기가 끝나고 관객들이 서로 싸워 심지어 사망사고가 잇따르는 것을 본지라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표출해도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증가합니다. 결과는 ‘프로이트 : 제임스 = 0 : 3’입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리처드 와이즈먼, 웅진 지식하우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은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냐는 믿음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내가 아무리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운동을 꾸준히 하면 그 사람은 다시 자존감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믿는 대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나가더라도 몸이 망가지면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믿어버려 잘나가던 사업도 실패합니다.
    미국의 한 해병대 장군은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거든 이불부터 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동은 곧 나의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화를 내면 나는 화를 잘 내는 폭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버린 이상 폭력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꾹 참더라도 화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이 화를 안 내는 사람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조금 덜 화가 납니다. 
    그러니 화는 내는 것보다 삭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이기에 화내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을 덧붙이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화를 내면 찌푸려지게 되어 있는 부부에 보톡스를 했더니 화가 덜 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습니다. 화를 내니까 더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표현하는 것이 곧 내가 됩니다. 그러니 좋은 것은 표현하고 나쁜 것은 감춥시다. 화가 났다고 말하면 되지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좋은 감정은 드러나게 하고 나쁜 감정은 삭입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믿읍시다. 그러면 화가 나야 할 때도 화가 안 나고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십시오. 결국,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 나를 만듭니다.

 -조재형신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씨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제대로 공부 못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대본을 성경처럼 읽고 연습했습니다.” 윤여정씨를 아는 분들은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언젠가 큰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자신만의 연기를 보여 주는 배우였습니다.” 연기생활 55년 만에, 75세의 나이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자신만의 연기를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수려한 외모뛰어난 재능주위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배우들이 많았습니다그러나 그 배우들이 모두 정상에 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정상에 오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기 때문입니다곳곳에 암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자만과 교만이라는 암초가 있습니다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암초가 있습니다현실에 안주하려는 암초가 있습니다.

 

일전에 한 형제님의 글을 읽었습니다형제님은 정년퇴임을 하고나서 매일 성경을 입력했다고 합니다성경을 모두 입력했을 때입니다주변에서 아직 건강하니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고 합니다새로운 곳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면접관이 원하는 것은 타이핑의 속도였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성경을 입력하면서 타이핑 실력이 늘었고다행히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일을 하기 위해서 성경을 입력한 것은 아닌데하느님께서 그렇게 기회를 주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였습니다매일 묵주기도를 하는데 한 자매님이 묵주의 9일기도를 권했다고 합니다가족을 위해서건강을 위해서평화를 위해서 묵주의 9일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기도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고병원에 가서도 잘 고쳐지지 않았던 병들이 조금씩 좋아졌다고 합니다지금은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니었는데기도하면서 몸이 좋아진 것을 체험했다고 합니다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지낸다고 합니다.

 

팬데믹 시대를 지내면서 두 가지를 시작했습니다하나는 피아노입니다모종을 심고 매일 물을 주면 어느덧 줄기가 자라고꽃이 피는 것을 봅니다자연은 시간이 지나면 생명이 결실을 맺도록 해 줍니다. 1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처음에는 눈으로 악보를 보고다음에 손이 움직였습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손이 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습니다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전문가들이 능숙하고자유롭게 건반을 움직이는 것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다른 하나는 자전거입니다처음에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좁은 길에서는 겁이 났습니다조금만 달리면 숨이 차고 힘이 들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3번 쉬었다 가던 거리를 한 번에 갈 수 있었습니다신호등의 흐름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속도를 조절하면서 파란 불이 되는 시간에 교차로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뺨을 스치는 바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주변을 보니 팬데믹 시대를 지혜롭게 지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인공위성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정말 지혜로운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는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갈 수 없습니다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신앙인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누며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양승국신부-

 

혈기왕성하던 초보 사제 시절의 부끄러운 일이 생각납니다. 양육하고 있던 아이의 보호자와 통화하던 중에, 그쪽의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에 욱하는 성격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제쪽에서 포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졌고, 막말을 주고 받다다, 결국 건너지 말아야 할 강까지 건너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고나서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에 도통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 미사를 봉헌하러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하필 복음을 봉독하는데, 글쎄 내용이 기가 막혔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오 복음 5장 23~24절) 

 

미사 내내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정말이지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리는 미사는 솔직히 미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리 자주, 강력하게 용서나 화해를 강조하셨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사후 저는 큰 용기를 내서 어제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퍼부었던 말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부끄럽고 미성숙한 언행에 대해서만 정말 죄송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순간 기적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분께 용서를 비는 순간,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 형에 처해진 예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억울한 마음도, 격렬했던 감정도 눈녹듯히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와 일상생활 속의 형제애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금의 봉헌금을 하느님 대전에 바친다 할지라도 이웃과 불목하고 다투고 있다면 그 예물 봉헌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대한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하면서 드리는 제사나 예물 역시 하느님께서 즐겨 받지 않으실 것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예배를 핑계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틈만 나면 다투고, 수시로 불목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는데 혈안이 된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한 공동체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는 울리는 징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예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바치는 예배와 봉헌이 보다 가치 있고 합당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화해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또 다시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백번이고 천 번이고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이영근신부-


우리는 여전히 산상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어제 <복음>에 이어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의로움’은 산상설교의 핵심주제로산상 설교의 중심에서 또 다시 거듭 말씀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그러나 그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의로움을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의 “살인하지 말라”는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곧 자기 형제에게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도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한편사도 바오로는 “그(아브라함)가 하느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갈라 3,6)되었음을 말하면서옛 율법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갈라 3,11)

 

이제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그 본질을 꿰찔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합니다곧 용서와 형제애우애가 이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또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를 소중하게 여기셨는지를 말해줍니다곧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우애와 사랑을 중요시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이처럼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입니다그러기에오늘 하느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우리에게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소서.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당신께 바치는 합당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반영억신부-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먼저 용서를 청하여라.

 -송영진신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ㄴ).”

 

이 말씀의 뜻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입니다.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위선자들의 위선’은, 즉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는 거짓 신앙생활은,

자기 스스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들어가려고 해서 못 들어갑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이 말씀은, ‘율법의 완성’에 관한,

또는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마태 5,17).

위선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속의 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사람의 마음속도 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분노, 증오, 모욕은 살인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이웃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즉 마음속의 미움을 없애야 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는 일과 이웃을 모욕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와 ‘모욕’에 관해서 유다서의 다음 구절들이 연상됩니다.

“미카엘 대천사도 모세의 주검을 놓고 악마와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모독적인 판결을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 하고 말하였을 뿐입니다(유다 9).”

<미카엘 대천사는 싸움의 상대방이 악마인데도 불구하고

모독적인 말(욕설)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모욕과 욕설 자체가 죄입니다.>

“보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당신의 거룩한 이들과 함께 오시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저마다 불경스럽게 저지른 모든 행실에 따라,

불경한 죄인들이 당신을 거슬러 지껄인 모든 무엄한 말에 따라

각자에게 벌을 내리신다(유다 14-15).”

<심판 때에는 ‘행실’뿐만 아니라 ‘말’도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생각으로 지은 죄’도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형제에게 용서를 청할 일이 있으면

너무 늦기 전에 그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를 용서하여라.”가 아니라, “그에게 용서를 청하여라.”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마태 18,21-22).

그런데 우리는 흔히 용서할 일만 생각하고

용서 청할 일은 생각 못할 때가 많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만 생각하고, 내가 형제에게 잘못한 일은

생각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가 나에게 화를 내고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은 그의 속이 좁아서 그런 것이다.” 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또는 “그가 괜히 오해를 해서 그런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속이 좁아서 그러든지, 그가 오해를 해서 그러든지 간에, 그를 탓하지 말고,

어떻든 먼저 그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 실천도, 용서도, 화해도, ‘나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형제와 화해한 다음에 예물을 바쳐라.” 라는

말씀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로(이웃과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은 ‘위선’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 예물을 거절하시면서

“먼저 형제에게 가라.”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있는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을,

“생각이 안 나면 어쩔 수 없고...”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하느님 앞에 나서기 전에 먼저,

형제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는지 없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라.”입니다.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께서는 ‘계명’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함을 느끼셨는지

‘명령’으로 표현을 바꿔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 말씀에서 ‘서로’ 라는 말은 ‘동시에’가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할 때, ‘서로’ 사랑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나를 원망하고 있는 형제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하는 일도,

또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도, 모두 다 사랑 실천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를 ‘지금 당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는 일과 하느님과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적당한 때에 하겠다고 미루는 것은 사실상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복음: 마태 5,20-26: 살인하지 말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탈출 20,13과 신명 5,17의 ‘살인하지 못한다.’라는 계명을 들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야고 3,8)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 준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 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 “너의 사랑이 계속되도록, 나에게 예물을 바치는 일을 잠시 멈추어라. 네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나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너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신부-


화해는
절박함에서
시작된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화해의 참된
길이다.

화해와 회개는
길을 바로잡아
주는 공통점이
있다.

성찰과 반성은
그래서 화해의
참된 본질이 된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화해가 치유로
영글기 위해서는
상처와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물이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빈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참된 봉헌이다.

우리모두
부족한
사람들임을
인정한다.

먼저 이해와
화해, 기도와
용서가 필요한
우리자신이다.

화해의
첫발걸음은
우리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자신을
만날 수 없다면
형제도 제대로
만날 수 없고
하느님께로
나갈 수도 없다.

화해는
우리 마음에
눈을 뜨는 것이다.

마음을 만나야
살아난다.

마음을
살리시는
주님께서
먼저 화해를 위해
우리마음을
어루만져 주신다.

화해는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의 길이며

마음으로
다시 만나는
관계회복의
은총이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해라는
새로운 변화이다.

화해의 기쁨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참기쁨이다.

화해가
살아있는
평화이다.

 -오상선신부-


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을 만난 이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이야기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 준수로 자동 획득된다고 여겨온 의로움을 넘어서라고 이르십니다. 이는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대충 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 이상을 살라는 뜻이지요. 율법을 무시하고 마구 살아제끼는 삶이 아니라, 문자로 새겨진 율법 없이도 충실히, 하느님 뜻을 새긴 영혼과 심장으로 살라는 촉구이십니다.

"형제 존중, 화해, 양보"

예수님께서 율법 준수 이상의 삶이 어떤 것인지 세 가지 경우를 들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그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준수한 것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음을, 그리고 다른 계명들도 마찬가지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 믿음은 율법을 포용하는 동시에 율법을 초월하는 투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자취를 닮아가다 결국은 사랑으로 변모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율법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2코린 3,15-16)

구약의 백성 중에 하느님을 마주하고 그분 마음과 접촉하도록 허락된 이들은 성조들, 모세, 다윗, 그밖의 참 예언자들 등 일부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들이 살아갈 지침으로 율법이 주어졌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감지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마치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드리워진 너울과 같아, 간절히 하느님 마음에 파고들기를 열망하는 이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율법 너머로 시선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율법 준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이들은 굳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까지 이르려 애쓰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아도 율법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5)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빛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고백합니다. 그 빛 덕분에 우리 앞에서 너울이 치워지고,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앞에서 이제 율법의 너울이 벗겨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관상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사랑을 관상하는 이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가 바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는 이에게 율법은 최소한의 지침일 뿐입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이를 선동하고 불붙이고 끌어당겨 사랑에 합류시키고 결국 사랑이 되어가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율법 너머로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라고 초대된 이들입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이 곧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우리에게 맡겨주신 형제와 이웃들을 더 섬세히, 따뜻하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서툴고 미숙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도 주님은 큰 영광을 받으신답니다. 사랑을 통해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의로움에 대한 성찰

 -김찬선신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언급하시며

제자들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만

제자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별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의로움이면 의로움이지 율법 학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이고

제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인지 오늘은 뜯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절대적인 의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의로움이 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옛날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의 사회 구현을 정권 탈취의 명분으로 내세웠고

삼청 교육대를 운영하면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면서

죄 없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도 마구 잡아들였었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정의 구현 사제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도 정의 구현 사제단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들먹이는 거잖아요?

 

이로 인해 정의라는 말이 많이 오염되고 타락되었으며

많은 국민이 정의가 무엇인지 많이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정의와 의로움의 주관성을 많이 보았고

정의와 의로움의 주관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지요.

실로 많은 것이 주관적인 정의이고 주장되는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어떤 것이고 그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는 제자들의 의로움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비판하시고 바오로 사도도 비판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말할 것도 없이 율법주의적인 의로움이지요.

 

그런데 어제 주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오늘 주님 말씀은 어제 말씀과 이어지는 말씀이고,

율법을 기준으로 하는 그들의 의로움은 불완전하니

제자들은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고

무엇이 율법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복음에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율법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인데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고 사랑이 최고의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 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나도 율법 학자들처럼 사랑 없이 시비지심으로 정의를 논하지 않는지.

다시 말해서 옳고 그름만을 따지다가 싸움만 하고 사랑은 놓치지 않는지.

 

사랑 없이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싸우다가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고 하거나 형제에게 분노하지는 않는지.

그런데도 화해하지 않고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성당에는 가지는 않는지.

 

아무튼,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지 반성하며

사랑으로 의로움을 완성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6월 13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마태오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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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표현하는 것이 곧 내가 됩니다. 그러니 좋은 것은 표현하고 나쁜 것은 감춥시다. 화가 났다고 말하면 되지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좋은 감정은 드러나게 하고 나쁜 감정은 삭입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믿읍시다. 그러면 화가 나야 할 때도 화가 안 나고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십시오. 결국,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 나를 만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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