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8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 5,13-16)
Your light mus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성경 전체에서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은 단 네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에 등장하고(마태 5,14), 나머지 세 번은 모두 요한 복음에서 등장합니다(요한 8,12; 9,5; 11,9). 두 복음서의 차이는 ‘누가 세상의 빛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9,5). 반면에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복음서 모두 틀리거나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빛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준 세상의 빛으로 지칭된 “너희”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마태오 복음은 앞서 빛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여기서 빛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너희”는 바로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빛으로 체험한 사람들로, 그들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빛으로 체험한 사람들, 그들이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짙게 물든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때로 빛보다 어둠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어둠이 눈에 익어 빛이 필요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바라보았던 사람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체험하였기에 이미 빛을 보았습니다. 나를 둘러싼 어둠에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둠이 있기에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미사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시고 그 빛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빛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어둠에 있는 우리가 내 마음 깊은 곳의 어둠을 발견할 때, 더 밝고 환하게 빛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있고, 동시에 우리가 그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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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사랑하는 관계였는데, 그 관계가 틀어져 오히려 원수가 되는 경우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를 비교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는 무엇인가를 계속 주고 싶습니다.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믿음과 신뢰로 상대방을 대하고 있습니다.
미워할 때는 억울함에서 시작됩니다. 나만 주고 상대는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받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에게 나는 호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 남과의 비교도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남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됩니다.
사랑은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습니다. 내 사랑이 ‘1’이니, 상대방도 ‘1’의 사랑을 줘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의 크기를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도구는 세상에 없습니다. 주고 받는 사랑의 크기가 같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똑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인정해야 사랑에, 특히 주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랑이었고, 사도 바오로가 말한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자녀는 바로 주님처럼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소금과 빛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또 빛을 함지 속에 가둬 놓아서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을 내어 줄 수 있어야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을 수 있을까요? 아마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짠맛을 잃기도 합니다.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에는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려 습도가 올라가면 염분이 가시고 불순물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짠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주님 사랑이 뜨거워서 절대로 죄를 짓지 않으며 살아갈까요? 그렇지 않지요. 이스라엘의 사해 소금처럼 짠맛을 잃어 주님의 뜻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빛을 함지 속에 가둬 놓아서 밝게 빛나는 세상이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는 삶, 즉 사랑의 삶만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으며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어느 형제님이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 상담을 합니다.
“신부님, 아내가 갑자기 이혼하자고 합니다. 우리 부부는 이제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돈도 잘 벌어다 주고, 집안일도 잘해주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요?”
신부님께서는 “혹시 아내의 건강상 문제는 없나요?”라고 묻자, 형제님은 “제가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고, 외박 한번 해 본 적도 없는데 왜 이혼하자고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라고 말합니다.
다시 신부님은 “혹시 부인의 친정에 안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요?”라고 묻자, 형제님은 흥분하며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일까요? 맞아.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형제님을 향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아내의 말을 듣기만 하세요.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고도 문제가 있으면 다시 오십시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형제님은 다시 신부님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 이 형제님의 모습이 문제였던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소금과 빛은 공기와 물, 혹은 양식처럼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물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은 내어놓아야 합니다. 소금이 녹지 않고 불이 타지 않으면 누구도 살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합니다. 배우자를 위해, 자녀를 위해, 이웃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그러나 왜 잘 안 될까요?
이것에 대한 통찰을 그린 영화가 있습니다. ‘삼사라’(The Samsara: 2001)입니다. 삼사라란 의미는 영겁의 재생과 윤회가 벌어지는 세계를 뜻한다고 합니다. 윤회의 세상이 삼사라인 것입니다.
해발 3500m에 위치하는 라닥의 어느 수도원의 동굴에 한 승려가 고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타쉬’입니다. 3년째 명상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머리는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오고 손톱과 발톱은 마음껏 자라서 마치 동물의 그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때 고행 기간이 끝나 감에 따라 그의 스승과 동료 승려가 동굴에 도착합니다. 오랜 명상을 끝낸 타쉬의 손과 발과 온몸은 거의 굳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정성껏 씻겨 주고 손톱과 발톱도 잘라주며 머리까지 깎아줍니다.
일행들이 그를 싣고 사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폐허가 된 사원을 지납니다. 그곳의 돌무더기에 쓰인 문구를 우연히 주인공은 보게 됩니다. 그 돌에는 티벳어로 다음과 같이 씌어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사원으로 돌아온 타쉬는 3년간 고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라마교 최고의 입문식에 참여하고 고위직까지 받게 됩니다. 그 행사날에 축제가 벌어지는 데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젊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광경입니다. 생전 처음 그런 장면을 목격한 타쉬는 그 이후로 매사가 의욕이 없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그의 도반 승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힙니다. 아마도 이후로 전개될 험난한 인생 여로가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화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원에서는 마을 축제에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마을 축제에서 운명적인 여인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보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지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런 현상을 눈치 챈 그의 스승이 타쉬를 어느 묵언 정진 중인 고명한 승려에게 보냅니다. 그 승려는 동굴 속에서 정진하고 있었는데 타쉬가 오자마자 알아채고 그림을 내밉니다. 그림 속에는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약간 기울어 보면 해골로 변하는 신기한 그림입니다. 모든 애욕이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로 된 액자도 보여줍니다. 그 액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이 글을 보고 타쉬는 부리나케 되돌아와 그의 스승에게 따지듯이 묻습니다. 부처님도 29세까지는 속세에서 사셨고, 깨우침도 속세의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5세 때부터 속세를 떠나 부처님같이 살아왔지만, 부처님 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행 후 온다던 자유와 금욕 후의 만족감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할 것도 있지만,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지요.”라고 말하면서 사원을 떠나게 됩니다. 환속하게 된 것입니다.
떠돌이로 나서면서 찾아간 곳이 전에 마을 축제할 때 눈이 마주쳤던 처녀의 집입니다. 추수할 때까지 일을 도와주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처녀와 결혼하게 되고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일이라는 것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곳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상 욕망에 물들어가는 타쉬는 수행자의 모습이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속세의 인물로 변하였습니다.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하여 일꾼을 줄이자고 말하는가 하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여자 일꾼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범부보다 더 못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도반이었던 친구 승려가 방문하였습니다. 스승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의 편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하게 됐구나. 우린 다시 꼭 만날 것이다. 우리가 재회하는 그날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겠지.”
스승의 편지를 받고 난 후 타쉬는 반성하게 됩니다.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아왔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욕망을 죽이고자 그렇게 수행했던 것이 다 허사였다는 옛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도 한 욕망을 정복하기 위해 수행을 다시 하기로 합니다.
타쉬는 아내와 아이가 잠든 사이에 집을 떠나게 됩니다. 마치 부처님이 야소다라 왕비와 아들 라훌라를 남겨두고 떠나듯이 새벽에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삭발하고 승복을 걸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참 길을 걷던 중 어느 무너진 오래된 사원 앞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야소다라 왕비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그 왕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질타합니다.
“당신이 불도를 사랑한 열정이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만 강했어도 당신은 지금 이 현세에서 부처가 됐을 거예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욕망을 이겨내지도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타쉬의 모습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타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염주가 든 단지를 남편에게 주고 가버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쉬는 절규하게 됩니다. 땅을 뒹굴며 절규하다 잠이 들게 되고 잠에서 깨어나자 눈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3년간 명상을 마치고 난 후 사원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바로 그 돌이었습니다.
그 돌에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돌리자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이 글을 보고 타쉬는 짙푸른 창공을 쳐다보게 됩니다. 창공에는 독수리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출처: ‘영화이야기-삼사라’, 다음 카페, ‘따밥사모’]
타쉬는 수행을 하여 욕망을 가라앉히면 열반에 이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죽이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내려가 참사랑을 실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욕망이 살아있는 한 그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또 이웃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할 뿐임을 알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불교 교리의 한계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구도의 한계를 느끼고, 욕망을 죽이고 참 빛과 소금이 될 에너지원인 신의 존재에 우리 몸을 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나의 사랑이 마르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자신이 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욕망도 사라지고 마르지 않는 물을 내어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복음은 진복팔단 바로 뒤에 나옵니다. 진복팔단은 먼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자신을 채워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박해도 받겠지만 가장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비워지고 주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내가 주는 한 방울의 물은 금방 말라버립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욕망이 사라지고 참 만족을 느끼기 전에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내 물이 마르면 다른 물을 빨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 동화책에서 ‘우렁각시’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가난한 총각이 밖에서 고된 일을 하고 돌아오면 누군가 집을 청소해주고,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총각은 누군지 궁금해서 살펴보니 우렁각시가 청소도 해주고,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뒤로 이웃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숨은 곳에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우렁각시’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캠핑을 가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텐트를 치는 일, 음식을 만드는 일, 쓰레기를 치우는 일, 장작을 피우는 일, 설거지, 장을 보는 일이 있습니다. 새벽에 전날 먹었던 음식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혼자 남아서 음식을 준비하는 분이 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새롭게 쓰레기봉투를 내어 놓은 분이 있습니다. 캠핑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렁각시처럼 솔선수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렁각시’가 될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할 때면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기억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렸던 베로니카를 기억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숨은 곳에서 봉사하는 ‘우렁각시’를 보았습니다. 장대같은 비가 내리는 여름날이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성당으로 오셔서 열린 창문을 닫았습니다. 하수구에서 오물을 꺼냈습니다. 성모 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성당에 오셔서 본당 신부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눈이 오면 마당의 눈을 치웠습니다. 차량 봉사를 하였습니다. 설날이나 추석 때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떡을 나눠주던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신자들이 함께 나눌 음식을 장만하는 자매님도 있었습니다. 예쁜 꽃을 심어서 성당을 환하게 꾸며주는 자매님도 있었습니다. 성당에 다닌다는 이유로 잘못한 이웃을 용서해 주었던 형제님도 있었습니다. 우렁각시가 많은 본당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인류를 구원할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고, 사업에 성공해서 큰 재물을 얻는 것일 수도 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남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합니다. 들에 핀 작은 꽃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도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고, 주어진 일에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그 또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최 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두메 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해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그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오늘 내가 걸어온 길이 신앙인으로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걸어온 그 길로 다른 사람들도 기쁜 마음으로 따라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빛나는 얼굴을 보고,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며, 아버지를 찬양하고 있습니까?
-양승국신부-
저희 살레시오회 총회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강조하는 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삶을 통한 증거’입니다.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의 일상적 삶, 언행, 영적 생활, 일거수일투족에서 돈보스코를 드러내십시오. 그리하여 청소년들이 살레시안들의 얼굴에서 돈보스코의 얼굴을 발견하게 만드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14~16절)
오늘 우리의 얼굴을 어떤 상태입니까? 우리의 얼굴은 찬란한 예수님의 얼굴을 반영해서 광채가 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빛나는 얼굴을 보고,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며, 아버지를 찬양하고 있습니까?
한번씩 새벽에 세수를 하다가 화들짝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수도자로서 충만한 영성생활의 결과 빛나는 얼굴이 거울 속에 들어있어야 마땅한데, 때로 무시무시한 좀비 영화 주인공 같은 얼굴을 대면할 때가 많습니다.
가끔씩 빛나는 얼굴로 빛나는 삶을 살며 빛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가 발산하는 빛에 사람들은 눈부셔하며 기뻐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 안에 깃든 어둠에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그가 빛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툼한 24K 금목걸이를 차고 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어서일까요? 그도 아니면 매일 아침 깨끗이 씻고 닦고, 최고급 피부샵에서 지극정성의 관리를 받아서일까요?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는 외적인 빛도 필요하지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은 내적인 빛, 다시 말해서 진리의 빛,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정한 빛남은 외적인 측면을 뛰어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한 가운데 자리하시기에 그분의 현존으로 인해 광채를 발하는 그런 빛남, 주님의 성령께서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계시기에 세상 그 무엇도 아쉽지 않은 그런 빛남, 매일 생명의 빵인 성체를 정성껏 받아 모심으로 인해 또 다른 거룩한 성전이 됨으로 인한 빛남이겠지요.
사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빛’과 같은 존재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포함해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또 다른 ‘세상의 빛’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신원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선언하십니다. 곧 우리가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주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아들로서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느냐는 문제라기보다 어떻게,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행하느냐? 문제입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녹이고 자신을 태우는 일이요, 세상이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의 사명이나 역할 의 본질이 우리의 신원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신원을 깨우쳐주고 밝혀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이는 우리의 신원이 세상을 향해 있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곧 우리를 세상 위에서 비추는 빛이고, 세상 안에서 녹는 소금이라 하십니다. 곧 세상 안에서 자신을 ‘녹여’ ‘세상’의 부패와 불의를 막고 세상의 맛을 내는 ‘소금’이라 하시고, 자신을 ‘태워’ ‘세상’을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안에 살되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에 살되 세속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명은 단지 어둠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막는 데 있고, 빛을 비추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빛으로 이끌어 가는 데 있습니다. 곧 단지 자신의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랑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세상을 비출 수 빛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로서 그 사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Lumen Gentium)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비추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결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과 타인’을 향하여 있는 존재요,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신원이요 사명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반영억신부-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빛을 내어 밝게 비추지 못한다면 이미 빛이 아닙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찾아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영광을 감사하며 그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는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소금이요, 빛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맛을 내고, 비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을 내지 못하고 빛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음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끔은 스스로 ‘정신차려 이 사람아!’ 하고 꾸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금의 중요한 역할은 부패를 막는 것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과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곧 생활화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한 행실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제자들의 소명이나 오늘 우리의 소명은 결국 빛나는 삶의 행실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모범으로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을 행하되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장하여 들어내려고 애를 쓰지만 믿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하여 그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하여 탐구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성 골롬바노). 그리고 “이 세상의 선한 행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하느님께로 귀결”(십자가의 성요한)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 맛을 잃지 않고 빛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언제나 교회를 증명해준다. 비참함에 짓눌린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지체들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 시키려고 노력해 왔다"(가톨릭 교리서 2448항). "교회는 언제나 잘못과 실수를 범해 왔지만, 가난한 이들과 자비의 활동을 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랐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
-송영진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않거나 아예 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에게도 쓸모가 없고,
이웃의 구원에도, 또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힌다는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을 선고받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의 ‘밖으로’ 쫓겨난다는 뜻입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씀은 심판이 끝난 뒤의 상황에 대한
말씀이고, 회개해도 소용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처럼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너무 늦기 전에,
즉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에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쓸모없는 소금’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알곡’과 ‘쭉정이’에 관한 세례자 요한의 말과 비슷합니다.
“......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알곡’은 겉으로나 속으로나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입니다.
‘쭉정이’는 ‘제 맛을 잃은 소금’처럼
겉으로만 신앙인이고 실제로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구원받을 ‘알곡’인지, 쓸모없는 ‘쭉정이’인지는
심판 날이 되어야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 자신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알곡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알곡입니다.
즉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알곡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하거나,
이미 알곡이 되었다고 자만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즉 구원받는 것에 관심도 없거나 자기는 틀림없이 구원받는다고 자만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바오로 사도는 “나는 구원받는다.” 라고 자만하지 않았고,
자신도 실격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한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도 그렇게 스스로 경계하면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고 모범이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이고,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는
“너희의 등불을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이고,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는 “모든 사람을 비추어라.”입니다.
(앞의 소금에 관한 말씀도 명령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피난처’를 뜻합니다.
교회는(신앙인은) ‘주님의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세상 사람들을 도와주는
피난처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추어질 수 없다.”는 “감추지 마라.”입니다.
피난처는 누구나 그곳이 피난처라는 것을 알고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피난처라는 것을 감추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은
사람들을 멸망의 위험 속에 방치하는 일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라는
말씀은, “신앙인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한다.
그 ‘빛’은 바로 너희의 ‘착한 행실’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선행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선행을 포함해서 ‘신앙인의 충실한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이고(마태 7,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에(마태 18,14),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신앙인의 중요한 본분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이 되려면 그 전에 먼저 신앙인 자신이
‘주님의 빛’ 속을 잘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여기서 ‘빛’은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주님의 빛’입니다.
그 빛을 외면하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자기가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쪽으로 간다.”인데, 뜻으로는 “멸망을 향해서 간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려면
인도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주님의 빛’의 인도를 잘 받아야 하고,
그래서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어야 합니다.
즉 신앙인답게 잘 살아야 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복음: 마태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조욱현신부-
소금은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음식을 맛나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방부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자신이 지닌 참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타락하여 썩어 버린 창조계의 질서를 원래의 신선한 상태로 회복시키도록 불림을 받았다. 거룩한 지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악마의 배반에 넘어가 맛을 잃지 않도록 한결같이 굳건해야 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소금은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으로 가득 찬, 참된 지혜로 가득한 마음을 의미한다. 그 소금이 우리 마음에 뿌려지면 지혜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이런 마음을 소금에 비유하는 것은 소금의 좋은 맛과 신선함 때문이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을 썩지 않게 맛나게도 못하는 것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건강하지 못하고 활기가 없으며 하느님 보시기에도 아름답지 못하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13절) 우리가 믿음과 지혜를 버린다면, 우리는 당장에 이단에 빠지거나 믿지 않는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악의 세력에 넘어가 제맛을 잃고 믿음의 은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한때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맛들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빛”(14절)이라고 하는 것은 참되고 영원하신 분으로부터 비추어져 그들도 어둠 속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태양이시고 이제 빛줄기 같은 제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당신 지혜의 빛을 쏟아 주셨다. 우리 신앙인들은 진리의 빛을 보여줌으로써 오류의 어둠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달아나게 해야 한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그 등불, 빛은 교회 안에 머무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신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15절) 이 등불은 아버지와 아들이 켜고, 그 등불은 말씀이다. 말씀의 등불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길을 알려주도록 빛을 내는 것이다. 여기서 등경은 생명의 말씀을 지닌 교회이며,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닌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함지”라는 것은 악덕으로 “등불”이라는 덕을 감추는 것인데, 빛을 피해 어둠으로 숨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한다.
예수님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즉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남이 보더라도,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행이 알려지도록 두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착한 행실을 삶을 보도록, 빛나고 그들을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 14)
-한상우신부-
빛과 소금을
가로막는
최고의 걸림돌은
고집센
우리자신이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우리들 삶이다.
빛은 소금처럼
썩지 않는다.
세상의 빛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빛은
그래서
살아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길을
당신 삶으로
몸소
보여주셨다.
사람의 길은
하느님이
중심이 되시는
생명의 빛이다.
생명의 빛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육화의 빛이다.
생명의 빛은
서로에게
빛이 되는
참된 사랑을
실천한다.
또한 사랑은
회개를 통해
맑은 빛이 된다.
가면을 벗는
빛과 소금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은
우리자신부터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새로운 변화이다.
빛과 소금은
예수님과
함께하기에
사람을
살린다.
선한 이웃이
되는 삶이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 되는
삶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대상은 너가 아닌
바로 우리자신이다.
소금과 빛은
우리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여
십자가의 삶에
동참하게 한다.
자아를
내려놓는
십자가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소금과 빛이
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입니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며 인체 내 전해질 농도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빛은 에너지를 생성하고 어둠을 몰아내어 활동 영역을 확대해 주지요. 소금과 빛은 인간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 요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것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는 격려인 동시에,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목표를 설정해 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은 홀로 자족하는 외딴섬이 아니라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 불리움 받았으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우리가) 소금처럼 "제맛"을 간직하기를, 빛처럼 모든 사람을 비추기를 바라십니다. 번쩍이는 금도 아니고 명품도 아니지만 세상 어디서나 꼭 필요한 소금이기를, 세상 곳곳을 묵묵히 비추는 빛이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우리가) 소금이고 빛이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소금 자체, 빛 자체가 주목받고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으로 세상에 주님께서 드러나시는 거지요. 소금과 빛 역할을 하는 이들은 진리 자체이시고 빛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명료히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 '아멘!' 합니다."(2코린 1,20)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우리의 응답은 순종입니다. 겉과 속이 같은 "예!"지요. 사도가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2코린 1,19)라고 하듯, 이 순종의 모범은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린 "예!"는 맹목적인 굴종이나 무성의한 방관의 태도에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이해에서 흘러나옵니다. 온전한 진리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온전한 아름다움이신 아버지의 의지와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자신을 던지는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코린 1,22)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인장과 성령은 우리 영혼이 "소금기"과 "밝기"를 간직하게 해 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다움을 유지시켜 주는 필수 요소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이 "소금기"와 "밝기"를 지켜나가길 원하시는 아버지의 부르심에 "예!" "아멘!" 하고 응답합니다.
세상의 소금인 제자(우리)로 인해 부정부패와 억압, 소외와 무관심으로 풍겨나는 악취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뒤바뀝니다. 세상의 빛인 제자(우리)로 인해 어둠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절망에 빛이 스며듭니다. 단번에 온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속한 세상 한 구석,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에 단 한 영혼이라도 일으켜세울 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로 인해 찬양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예!" "아멘!"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우리의 소금기와 밝기는 겸손하고 결연한 "예!" "아멘!"의 고백으로 지켜지고 확장될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의 요구에 무조건 "예" 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Yes Man 예스 맨
-김찬선신부-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 코린토서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는 '예'만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스 맨Yes Man'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예스 맨'을 그리 좋은 뜻으로 쓰지 않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무조건 '예'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아니'라고 하지 못하고 '예'하는,
비겁함의 뜻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코린토서에서 얘기하는 그리스도의 '예스 맨'은
당연히 이런 뜻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은
거부하지 않고 다 '예'하고 한다는 뜻이며 주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입으로만 '예'하고 실천치 않는 그런 '예'가 아닌, 진정한 실천의 '예'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께는 '예'가 된다고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Yes Man'이시기에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약속하신 것들에 '예' 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간의 약속과도 같습니다.
아버지가 하라고 한 것을 어기지 않고 다하면 아들이 원하는 것을
다해주기로 아들과 약속했는데 아들이 아버지가 하라고 한 것을
다 '예'하고 하면 아버지도 약속대로 하는 것과 같은 뜻이지요.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착한 행실이 아니고,
설사 우리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일지라도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면 착한 행실이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는 좋은 일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의 좋은 일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케 해야 착한 일입니다.
우리말에서 좋은 사람과 착한 사람은 같으면서도 차이가 있지요.
어린아이에게 누가 잘해주면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을 잘들으면 착하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착하다는 말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말을 듣고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의미가 있는데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여 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될 때
그 일을 시키신 하느님은 찬양받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이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은 찬양받으시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많은 사람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이어야 하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하는 '예스 맨', 착한 사람이어야 하며
그렇게 한 것이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되고 사랑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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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나의 사랑이 마르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자신이 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욕망도 사라지고 마르지 않는 물을 내어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복음은 진복팔단 바로 뒤에 나옵니다. 진복팔단은 먼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자신을 채워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박해도 받겠지만 가장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비워지고 주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내가 주는 한 방울의 물은 금방 말라버립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욕망이 사라지고 참 만족을 느끼기 전에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내 물이 마르면 다른 물을 빨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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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언제나 교회를 증명해준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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