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6. 17. 07:41

2021 6 17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7-15)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주님의 기도’가 오늘 복음 말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만나게 되는 가슴 뛰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고백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고백함으로써, 우리 서로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 주며, 우리는 형제 자매가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공동체로 모아 주시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친절하게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라는 가르침 안에서 분명해집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용서는 하느님만이 홀로 하실 수 있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창조하다’와 함께 하느님만의 능력을 나타내는 어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용서’라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도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큰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잠시,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며 우리에 속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떠올리기도 싫을 수 있습니다. 그냥 밉습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며 주신 특권, ‘용서’를 하느님 안에서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이며 도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계 역사 안에서 전쟁 패배의 상처는 매우 컸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일도 있지만, 책임자들이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패배로 인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그 나라가 다시 일어나기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 졌지만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 전쟁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남북전쟁입니다.


60만 명의 사망자를 내며 4년간 전개된 남북전쟁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북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전쟁 패배의 대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당시 북군의 총사령관은 ‘무자비한 학살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비 없는 처분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랜트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소. 반란군이 다시 우리 국민으로 돌아왔소.”

이 말을 하고는, 남군 장병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면서 식량도 제공했습니다.

이를 통해 남북의 분열을 막고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다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처벌과 배상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화해와 용서가 더 큰 가치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빈말만 되풀이하지 말고 제대로 기도하라며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되새기게 되는 말씀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제 잘못을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맞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자신은 나의 이웃을 향해 용서의 손길을 전혀 내밀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는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였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바치면서,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함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 용서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앞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주님 안에서 큰 가치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것은 문을 열어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우리 자신, 그리고 삶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마이클 J.로즈).

공생관계.

공생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류가 다른 생물이 같은 곳에 살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적 특성을 말합니다.

집게와 말미잘, 악어와 악어새, 충매화와 곤충, 개미와 진딧물, 코뿔소와 할미새 등이 있습니다. 이 공생관계는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꼭 1:1의 이익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불합리한 공생관계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합리한 관계를 맺지 않겠다며 서로 이별을 하게 되면 둘 다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 인간 역시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그런데 늘 내가 손해 보는 것만 같지 않습니까? 아주 적은 것을 받아도 충분합니다. 관계 맺음 자체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손해를 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이로 인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로버트 월딩어는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좋은 관계’를 자신의 75년 연구를 마치며 말했습니다.

행복의 99%는 ‘관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면 일어나는 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중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는 장면입니다.
산상설교는 진복팔단, 즉 ‘행복’으로 시작합니다. 영원한 생명, 혹은 하느님 나라와도 같은 이 행복은 오로지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당신을 믿어야 율법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고, 오늘 하느님의 자녀만이 바칠 수 있는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우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안다고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레너드 빅먼 연구팀은 쓰레기통이 놓인 한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경로를 따라 종잇조각을 구겨서 흩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길 건너편에서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들의 비율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전체 보행자 중 쓰레기를 주운 사람은 몇 퍼센트일까요? 2%였습니다.

    

    다음 단계로 연구팀은 쓰레기를 보고 그냥 지나친 보행자 수백 명을 멈추어 세우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시민들 모두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의무적으로 주워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청소부의 몫으로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여기서 쓰레기 줍기를 시민의 의무라고 답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10%? 40%? 60%? 놀랍게도 종잇조각을 그냥 지나친 보행자 중 94%가 시민의 의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작은 실험에서도 인간이 알고 있다고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 94%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2%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왜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또 다른 사례를 보겠습니다.

    

    미국 국립 암연구소는 1980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500만 달러를 투자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대규모 흡연 예방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시애틀 지역에서 무작위로 선발된 4,000명의 흡연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캠페인의 성공률은 28%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돈과 노력이 투자된 이 그룹 외에도 또 다른 흡연그룹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그 그룹의 금연율도 조사하였더니 29%로 나타났습니다.
    담배를 피우면 건강에 나쁘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이 캠페인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번엔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에게 금연을 설득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지금 말하세요. 자녀들이 들을 겁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이들은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전형적인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캠페인은 오히려 담배를 ‘더’ 피우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라면 더 안 합니다.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에서 했던 ‘6년 금연, 자동차 구입’이라는 캠페인도 생각이 납니다. 담배꽁초 20만 개로 자동차를 만든 캠페인입니다. 이 과정에서 작업하던 30명 모두 면역 이상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중 15명의 흡연자는 꽁초만 많이 만져도 면역체계의 이상이 온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금연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100% 모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정보로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하고 싶어도 안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요?
사람은 머리로 아는 지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대로 행동합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라고 결심한 사람은 끊지 못합니다. 하지만 ‘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반복한 사람은 담배를 더 많이 끊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나는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나는 담배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은 ‘내가 그것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로 이어지고 삶은 그 믿음대로 흘러갑니다. 바라는 것을 바꿔주면 정체성도 바뀝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대로 사람도 변화됩니다.
    사람은 정체성대로 행동하는데 그 정체성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더 굳게 믿어집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졌더라도, 그것과 더불어 1달, 1년, 10년 금연한 사람과는 그 믿음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만큼 다시 담배를 피울 확률은 줄어듭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이불부터 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해도 매일 이불이 잘 정돈된 것을 보면 ‘나는 허물어질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겨서 다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승호 회장은 실패할 때마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가슴이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가슴이 펴지면 ‘나는 여기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정체성대로 나중에 성공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작은 말과 행동이 결국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던 피터슨의 ‘바닷가재’의 경우와 같습니다. 한 번 싸움에서 이긴 바닷가재는 더 강해지고 한 번 진 바닷가재는 더 소심해집니다. 이를 ‘승자효과’라고도 합니다. 모두 믿음과 정체성에 관련된 이론들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모두 주님의 기도에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확고해지고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어 세상에서 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자주 바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화 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믿었는데 물 위를 걷게 되었다는 섬나라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행위는 정체성에서 나오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 내가 청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자녀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들만 청합니다. 그러니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칩시다. 그 바치는 자신을 보며 더욱 주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신문사의 업무는 3부분으로 나누어서 운영됩니다첫 번째는 편집입니다본사에서 오는 기사와 미주지역에서 오는 기사를 지면에 맞도록 배치하는 것입니다특집기사세계교회미주지역 소식한국교회 소식연재기사를 선택하는 업무입니다회의를 통해서 편집계획이 확정되면 신문이 만들어집니다두 번째는 취재와 광고입니다본당 홈페이지와 주보를 통해서 미주지역의 소식을 파악하고기사를 제공 받습니다직접 찾아가서 취재를 합니다요셉의 해를 맞이해서 본당 사목회장님들과의 인터뷰를 갖기도 합니다미주지역 한국학교에 대한 기획취재도 준비합니다광고는 장기광고와 단기광고가 있습니다세 번째는 회계와 구독자 관리입니다신문사 전반의 회계업무를 담당합니다수입은 구독료후원금광고비가 있습니다작년에는 정부로부터 재난지권금도 받았습니다구독자들에게는 구독료를 낼 수 있도록 편지를 발송합니다배달이 지연되는 곳에는 따로 신문을 보냅니다.

 

2년 전부터 미주지역에 레지오 수첩을 공급하고 있습니다미주지역 각 본당으로부터 레지오 수첩을 신청 받아서 한국에 주문하고한국에서 수첩이 오면 각 본당으로 보내주는 업무입니다지금 일하는 직원들은 전에 있던 신부님께 이 모든 업무를 배웠다고 합니다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전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고미국에서도 언론에 대한 공부를 하였습니다한국에서 평화방송에서 사목을 하였고미주지역가톨릭평화신문에서도 사목을 하였습니다지금 일하는 직원들은 업무를 가르쳐 주었던 신부님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처음에 배울 때는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신문 만드는 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신부님은 때로는 엄하게때로는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저의 업무는 신문사를 대표하는 일입니다미주지역을 다니면서 신문을 홍보하는 일입니다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이 넘게 홍보를 다니지 못하였습니다사도들이 각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듯이저도 각 지역을 다니면서 신문을 홍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어두운 밤을 비추는 등대와 같았습니다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였고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라를 이야기합니다성공명예권력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조직제도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하느님의 뜻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은 우리 또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 전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파도가 밀려오고 밀려 나가듯이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만나기 마련입니다그럴 때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유혹에 빠지지 말며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입니다이 기도문 안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의 기도에는 주 예수님이 담겨 있고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곧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이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이 기도는 자신이 아니라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초청하는 것이요하느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해 드리는 기도입니다그래서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그리하여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우리의 눈이 바뀌어 가고삶이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이처럼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무슨 일에서나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아멘

 열매를 맺는 기도

 -반영억신부-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청원이 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기도하기보다 입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말은 적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떠들어 대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의 시끄러움, 허영의 시끄러움입니다.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기도해 주겠다.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간절함으로 청하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며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원의를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무엇이 주어지든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의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신데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앞에서 재롱을 떨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요?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담을 그릇은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전지전능하신 이도 양보하시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전능하신 아버지가 그 자녀들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 주 하느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작자미상)입니다.

 

혹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고 지나가는 소리로 청했다면 진지하게 갈망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맞은 삶으로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기도는 분명 하늘의 열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남미 우루과이의 작은 성당 벽에 써있는 기도문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 하지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말아라.

내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도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완덕의 길’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마음을 다해 자주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복음: 마태 6,7-1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 마음에서 우러난 믿음의 기도를 바치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며,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고 계시다. 그러니 기도는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을 내려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바라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나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 우리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 안에 세워지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즉 의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듯이,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죄인들도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청원은 하느님의 정의가 마침내 행사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나날이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 양식을 받아 모시며 우리는 거룩한 신성에 참여한다. 이 일용할 양식은 하루에 충분한 만큼만 주어지며 내일을 위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며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양식이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 청원은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을 소홀히 할 때 앞서 한 모든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가 용서되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철저히 거부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하신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청원은 우리가 사탄에게 끌려가도록 두지 마십사는 의미이며 현재와 미래에 항상 악으로부터 보호해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나라가 오게 하시며,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세 가지 청원은 영원한 삶과 관련된 것이다.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되기를 바라는 뒤의 네 가지 청원은 현세의 삶과 관련한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잘 묵상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며, 우리의 삶으로 이 기도를 살아야 한다. 이 주님의 기도를 삶으로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좋은 방법으로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한상우신부-


삶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다.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가르쳐주신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삶이다.

삶을
도와주시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시다.

삶의 중심과
삶의 우선 순위를
아버지 하느님께
두어야 함을
잘 가르쳐주신다.

기도는
기도하며
살아가는
우리자신을
바꾸어놓는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사랑이다.

기도의 변화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신뢰하게
되는 삶의
모든 나눔이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안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잘 알게해주는
사랑의 기도이다.

돌보아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 곳에
삶이 있고
기도가 있다.

주님의 기도가
있는 이곳이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이다.

마음을 품고
나누는 곳에
우리가 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기도의 나라이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되는
참된 감사의
기도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자녀들에게는
아버지의 뜻을
내려주소서!

아멘!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가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복음 환호송)
기도는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께서 아버지와 주고받으시는 사랑의 호흡이고 내용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지요. 성령 덕분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된 우리는 성령과 하나의 호흡, 하나의 숨, 하나의 바람으로 아버지와 연결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우리를 지으시고 눈길조차 떼지 않고 돌보시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기쁨과 행복, 눈물과 절망, 갈망과 욕망뿐 아니라 어둠과 죄악까지 그분께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요. 이런 구체적 실존들을 내용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허공을 붙잡으려 빈말로 허우적 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격앙된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2코린 11,11)
사도 바오로는 열정을 다해 섬긴 코린토 교회 신도들이 다른 예수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에 쉽게 넘어가는 것을 통탄하며 조목조목 따지다가 결국 모든 안타까움을 실어 이렇게 외칩니다. 결코 자신을 자랑하려거나 생색 내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지향과 노력과 사랑은 하느님께서 다 아시니 그저 그분께 맡길 뿐이지요.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마태 6,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바치는 이 기도 안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깊이 머물러 한 구절 한 구절 진심을 다해 바치다 보면, 이 기도 말고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지 새삼 의문이 들 정도지요.

아버지의 이름,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이 세상을 채우면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사 21,3-4) 하는 새 하늘 새 땅의 모습이 펼쳐질 것입니다.

"용서하면 ...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과 악에서의 보호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뒤, "용서"를 콕 짚어 다시 한 번 언급하시지요.

사실 주님의 기도 안의 청원들은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행사하실 영역이지요. 그런데 "용서"는 우리에게도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주도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만큼 사람 사이에도 절실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확실히 하느님을 닮게 해 주는 속성 월반 코스일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과 우리의 '이인삼각' 동반 달리기랑 비슷할 것 같기도 하네요. 그분과 한 호흡으로 그분 전공인 용서의 보폭에 맞추어 뛰다 보면 우리도 어느새 용서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정성을 다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그 안에 깃든 아버지의 마음을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 기도밖에 우리가 더 바랄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도 반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통해 꿈꾸는 세상이 어서 완성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너희가 기도할 때에"

 -김찬선신부-

 

어제 주님께서는 "자선을 할 때에" 대해 가름침을 주셨는데

오늘은 "기도할 때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며

괜히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줄로 알지 말라고 하시고,

기도의 모범답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얼마 전에 한분을 만나 그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관련하여

면담을 하던 중에 어려움 때문에 집중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하느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매님이 응답을 해야 하는데 자매님이 응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자매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과의 우리 대화가

종종 쌍방이 아닌 일방적이라는 점을 깨닫지도 의식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줄창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는 말만 하고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사실 기도를 들어달라는 기도는 하느님께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기도는 하지 않아도 우리가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가 뭘 필요로 하는지 얘기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필요를 알려드리기 위한 기도는 할 필요 없고,

잘 설명해야만 알아들으실 거라는 생각에 길게 기도할 필요는 더욱 없지요.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듣는 기도가 주가 되어야 하고,

말씀을 올리는 기도를 한다면 찬미와 감사와 흠숭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혹여 청하는 기도를 하더라도 오늘 주님의 기도처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정 '나의 아버지'가 되어 그분께 기도드린다면

이미 우리는 인격적인 기도를 시작한 것이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한다면 이미 개인 기도를 넘어 공동체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니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원하신 기도입니다.

 

더 기도를 한다면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뜻"이 주어가 되게 기도하면 됩니다.

 

이것은 '나의 나라', '나의 이름', '나의 뜻'이 주어가 아닐 뿐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와 이름과 뜻이 나와 우리 안에서 실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요, 앞에서 얘기한 것과 연관시키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나와 우리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데

우리는 오늘 필요한 양식만 청하면 되지

내일과 모레 필요한 양식까지 청할 필요가 없으며

일용할 양식이라고만 하면 되지

필요한 것의 품목을 일일이 다 나열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 빚, 하느님과 이웃에게 진 빚을 갚게 해달라고,

용서를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용서를 청하는 건데

관계 회복을 위해 내가 용서를 하고 받는 주체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유혹과 악에서의 구원을 청하는데

구원을 청하면서 내 앞에 유혹과 악이 없기를,

그러니까 내 앞에서 유혹과 악을 아예 치워달라고 청하지 않고

유혹과 악이 내 인생길에 있더라도 거기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가르침을 받은 우리 새롭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도록 하십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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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그리하여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우리의 눈이 바뀌어 가고삶이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이처럼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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