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27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4. 27. 06:38

2021 4 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2-30)


My sheep hear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I give them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12월 중순, 겨울에 거행되는 성전 봉헌 축제는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인들을 몰아낸 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새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축제 기간 내내 촛불을 켜 놓고 압제의 어둠에 시달리던 그들이 자유의 빛을 되찾은 기쁨을 기념하였습니다.
기원후 1세기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이 성전 봉헌 축제를 더 장엄하게 지내며 하느님께서 메시아, 곧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구세주를 보내 주시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다그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들은 마카베오가 시리아 왕국을 물리쳐 승리한 것처럼,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당신 스스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도록 하여 예수님을 반역죄로 죽일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시고, 다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메시아요?” 하는 질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내가 한 일을 보아라.”(요한 10,38 참조)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과 당신의 신성이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오로지 내어 주는 사랑만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온 생애가 양을 위하여 언제나 함께하고, 목숨까지 내놓는 삶이었음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나서듯이 우리에게 당신의 삶을 보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그분의 양이 될지, 다른 메시아를 찾아 나서는 ‘다른 양’이 될지 선택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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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의 산림은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런데 1982년에 세계식량농업기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산림 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로 우리나라를 뽑은 것입니다.


UN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를 ‘희생 불가’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는 아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민둥산이 된 우리나라였습니다. 겨울에 난방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풀뿌리까지 긁어모아 불을 때야 했던 우리나라였습니다. 당연히 나무가 남아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4번째로 산림 비율이 높은 나라가 되었고, 영국, 독일, 뉴질랜드와 함께 세계 4대 조림 성공국가로 이름이 등록되었습니다.

UN에서도 희생 불가라고 했던 나라였지만, 우리나라는 커다란 반전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할아버지 대의 노력이 지금을 만든 것입니다. 그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사람의 비판이 많습니다. 꼰대짓을 한다면서 인터넷 안에 많은 비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했던 큰 노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비판이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기적을 목격했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무조건 부정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대답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를 충분히 말씀하셨고, 행동으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것은 들으려고만 하는 것만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과연 주님의 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르면서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생활을 하고 있나요?

주님의 양은 비판보다는 굳은 믿음으로 함께 사는데 필요한 것을 먼저 합니다. 서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해주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이 모습을 성실하게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내 양이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성실하고 충실한 종이 될 수 있도록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은 열려 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김진영).


사랑을 두 배로 늘립니다.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자신의 책에 한 의사와의 대화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의사가 된 지 3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처방했습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약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월트 휘트먼은 크게 공감했지만, 문득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랑이란 약이 잘 안 들을 땐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투약을 2배로 늘립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다 보니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입니다. 자신이 사랑을 주었음에도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사랑을 멈추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쏟아붓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더 필요한 것은 내 사랑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는 이유: 집은 주인과 하나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그렇다고 말했는데 믿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은 ‘성전’으로 표상되고 있고 그 성전이 ‘양의 우리’로 상징됩니다. 성전 안에 있는 양들만이 성전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0장 전체를 훑어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처음엔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목자’, 이제는 ‘양 우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문’은 ‘길’과 같습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갈 수 없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없습니다.

​    또 ‘목자’는 ‘진리’와 같습니다. 그분의 이끄심이 아니면 오류로 빠집니다.

​    이제는 양의 ‘우리’라고 말씀하시며, 마치 성전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성전 주인이신 하느님에 의해 ‘생명’을 보장받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는 집이기에 누구도 당신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제가 있는 곳은 죽산 성지입니다. 죽산 성지는 ‘이진터’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 때 몽골인들이 진을 쳤기 때문에 오랑캐들의 진터라고 불린 것입니다. 이전까지 고려는 몽고인들에게 전투에서 제대로 승리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 이진터만 빼놓고는 말입니다. 이곳에는 ‘죽주산성’을 지키고 있었던 송문주 장군이 있었습니다.
 

    송문주 장군은 몽골인들과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공격해 올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성은 쉽게 함락되었지만, 송문주 장군이 지키는 성은 그래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들은 어떻게 그들의 전술을 다 알고 있느냐며 장군을 ‘신명(神明)’이라 불렀고 15일간의 전투 끝에 몽골족은 대패하고 도망을 갑니다. 그 이후 승기를 잡은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3번째 침략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성은 그 성을 지키는 이와 하나이고 그 안에 있는 이들은 그 지키는 이에 따라 생사가 갈립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지키시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참 성전인 그리스도의 품에 머문다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이 가장 강하신 하느님의 성이요, 성전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봉헌 축제’일이고 성전을 봉헌했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누카라고 하는 이 축제는 이방인들에게 더럽혀졌던 성전을 마카베오가 다시 봉헌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때 메노라, 즉 불을 밝히며 축제를 벌이는데 예수님은 이 시기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면 빛 안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벗어나면 어둠이요, 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 봉헌된 참된 성전이라 하시며 당신을 허물어도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봉헌된 참된 성전이고 그 안에 머무르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우리도 참 성전이 됩니다. 하지만 성전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빛 안에 머묾으로 증명됩니다.
    빛은 죄에서 벗어나 그분의 계명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 요한복음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으로 자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의 성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하나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대등하다고 말씀하십니다.우리도 그리스도의 참 성전이 되었음은 내가 하느님과 하나 되고 곧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음으로서 증명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것을 부정하고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성서상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우리 자신을 하느님으로 여겨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는 것이 중요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야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이 되려는 것은 어둠이고 죄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시도’에 의해 시작됩니다. 우리 자아인 뱀은 우리가 하느님의 것까지 우리의 것으로 여기게 하고, 우리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 육체적 쾌락을 즐기게 하고, 이웃을 심판하여 하느님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자아를 섬겨서 하느님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는 돈에 대한 욕구나, 쾌락, 혹은 교만이 자신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기 때문에 더 가질 필요가 없고, 하느님이기 때문에 피를 흘려 창조사업에 동참할 수 있으며, 하느님인데 그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그 누구도 심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려주시기 위해 끝까지 하느님과 대등하다고 주장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야 하고, 예수님이 알려주신 진리를 믿어야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립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성전으로서 하느님임을 믿고 여러분 안에 들어온 이들을 구원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셨기에 우리도 하느님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집과 주인은 하나입니다. 우리 각자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재형신부-


성지순례를 다닐 때입니다여러 명이 같이 다니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곤 합니다소지품을 분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다른 것은 몰라도 여권을 분실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아침에 차에 탑승하면 기도하기 전에 여권을 확인하라고 이야기합니다아픈 사람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여행자 보험은 들었지만 아픈 사람도 힘들고의료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가장 힘든 것은 순례 중에 한 사람이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광장이나 시장에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예루살렘 성전에도 사람이 많습니다앞과 뒤에서 신경을 쓰지만 간혹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예상해서 꼭 들려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계세요.” 당황해서 이동을 하면 더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그 자리에 있으면 인솔자가 가서 모셔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몇 번 길을 잃어버린 분이 있었지만 모두 무사히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 DC로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워싱턴 DC의 유니온 역에서 내려서 워싱턴 대성당도 가고링컨 기념관도 가고백악관도 가고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기차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자전거가 아직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늘 뒤에서 따라갔습니다돌아오는 길에 순간 일행을 놓치고 말았습니다링컨 기념관에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그 자리에 있거나일행에게 전화를 하면 좋았는데 당황해서인지 다른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그 사이에 일행들이 전화를 하였고저는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다행히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도착해서 뉴욕으로 잘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성지순례 중에 길을 잃어버린 분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차분하게 기다려 준 신부님들이 고마웠습니다그렇습니다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잠시 멈추어서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메시아이심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하였다고 하십니다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 주었다고 하십니다예수님께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말씀을 보고 믿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75년 전입니다관리들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고 물었습니다천주교인이라고 인정하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힐 수 있었습니다가족들까지 모진 고생을 할 수 있었습니다순교할 수 있었습니다그럼에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렇소나는 천주교인이요.” 조선의 첫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천주교인이라고 말하였고사제생활 1년 만에 순교하였습니다당시 신부님의 나이는 25살이었습니다천주교인이라고 이야기하였던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는 비록 짧은 삶을 사셨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말과 행동으로 천주교인임을 보여 주었습니다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우리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천주교인으로서 말과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논쟁을 들려줍니다주제는 여전히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입니다“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는 표현은 그들 유다인들의 마음이 춥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그들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하고 예수님께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요한 10,25)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그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렇습니다믿음이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게 합니다또한 깨달은 바를 믿음으로 따르게 합니다그러면 비로소 주님의 양이 됩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는‘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동사가 연이어 나옵니다사실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목소리들이 혼탁하게 들려옵니다제 안에서도 요란스런 생각들의 소리가 흘러 다닙니다그리고 우리는 그 많은 소리들의 홍수 속에 휩쓸려 살아갑니다그 속에 주님의 목소리 들려도 듣지를 못하며 살아갑니다진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주님의 목소리인가? 대체, 나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습니다우리는 아무 목소리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당연히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분명 그 많은 목소리들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고 듣는 일입니다.

“듣다”라는 말의 뜻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알아듣는 것곧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곧 더 깊이’ 마음으로 깨달아 알아듣는 것을 말함입니다그것은 내면적인 것이고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받아들임을 뜻합니다.

“알다”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로 옆에 혹은 근처에 있다는 표현합니다곧 옆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결국이 세 동사는 모두가 깊은 관계성을 말해줍니다그렇습니다진정한 관계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그리고 그것은 믿음에서 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이에게“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당신의 손에서 아무도 당신의 양들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의 손은 권능을 드러냅니다. ‘아무도 우리를 당신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곧 아무도 우리를 당신의 손에서 빼내 갈수는 없지만자칫 스스로가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다시 말하면유대인들처럼스스로 완고함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6)라고 말씀하십니다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

주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숨지 않고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나서서 주님임을 알고

당신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아멘.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송영진신부-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5-27).”

 

1)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들었던 율법학자들의 설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위’를 느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힘’을 느꼈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31-32).”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복음서 저자는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말은 과장된 말이고(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고),

사도들과 몇몇 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똑같은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왜 누구는 믿고,

누구는 안 믿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5).”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딴 생각을 하느라고 제대로 안 듣는 경우도 있고,

듣기 싫은 말씀은 흘려듣고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 골라서 듣는 경우도 있고,

말씀을 듣기만 하고서 그 말씀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삶으로 실천하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강론을 듣는 동안에는 ‘참 좋은 강론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듣지만,

미사가 끝난 뒤에는 무슨 강론을 들었는지 다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일에 관한 말’로만 들을 때 흔히 그렇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런 일이 많이 생깁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지만,

그 씨를 잘 가꾸어서 열매를 맺는 일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2)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일들이 곧 당신의 신원을 증명하는,

즉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아버지의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메시아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메시아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곧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을 믿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들이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처음에는 나를 믿지 않았더라도

이제 그 일들을 통해서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3)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의 양이 아닌 사람이

있다는 말씀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런 말씀은 아니고,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내 양이 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함으로써

예수님의 양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해서 예수님의 양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떠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을까?

그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5,42).

예수님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또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알아봅니다.)

마음속에 욕심과 이기심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을 받아도 받은 줄을 모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4)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이 말씀에서 ‘알아듣는다.’는 ‘알아들어라.’ 라는 권고로,

‘나를 따른다.’는 ‘나를 따라라.’ 라는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는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입니다.)

그리고 ‘알아들어라.’ 라는 권고는, “나의 가르침을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으로, ‘나를 따라라.’ 라는 권고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라.” 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고(요한 15,9-10),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예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조욱현신부-


성전 봉헌 축제 기간 중 예수께서는 솔로몬 주랑에서 당신에게 빌미를 잡으려 주님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하라고 하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들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알아듣는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사람들이며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바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하셨으며,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또한 아드님이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으로 낳으심과 동시에 아들은 당신과 동등한 분으로 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하느님으로서 하나이며,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아버지와 나는’ 두 위격으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이시다. 바로 성령 안에 하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강조하시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거듭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여러 경로로 보여 주셨음에도 그들이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거나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실 때 결코 당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일만 할 뿐이고, 그분의 말씀만 전할 뿐이라고 누차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느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기 위해 그분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맞아들이시어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목숨을 바쳐 끝까지 지켜주시는 착한 목자시지요. 아버지께서 선택해 아드님에게 보내시는 이들은 구원의 여정 안에 든, 복된 이들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예수님 입에서 드디어 결정적인 말씀이 선포됩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아마도 명확하게 듣고 싶기는 하지만, 실은 직면하기 두려운 내용일 겁니다. 그런데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란, 그것도 율법이 정한 신분에 속하지 않는, 출신이 뻔한 일개 목수 아들의 자기 계시는 유다인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들릴 뿐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사랑의 확증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라는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닮아갈 수 있는, 우리에게도 실현 가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만물의 근원이시고 창조주이신 분, 우리의 주인이신 분이 친히 우리 곁에 내려와 우리 곁에 사시며 목숨까지 바쳐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결코 어둠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큰 죄인이어도 그렇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의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사도 11,22)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처음에는 이방 지역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 예수님의 복음은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곳곳에 신도의 무리가 형성되게 되지요.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그곳에 바르나바를 파견해 그들의 신앙이 잘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지역이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하느님의 백성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사도 11,25-26)
바르나바는 주님을 체험한 후 돌아선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복음 선포의 협력자로 합류시키지요. 사도행전 저자가 서술한 대로 바르나바가 착하고 선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가능했을 겁니다. 이 둘의 관계가 물론 끝까지 이어진 건 아니지만 그 또한 교회 성장을 위한 주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 안에 역동적으로 보여지는 교회의 모습, 즉 교회가 교회를 낳고, 신생 교회의 성장을 도우며 함께 자라나는 여정의 모범이며 희망은 아버지와 아들, 성령 안의 사랑과 일치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고, 삼위 하느님이 사랑의 유대로 한 분이신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이 일치를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 말씀을 통해 그 사랑 안에 푹 잠기고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언젠가 천상 혼인잔치에서 주님 얼굴을 마주뵙고 누릴 영원한 행복을 주님께서 잠시나마 미리 맛보게 해 주시는 은총을 허락해 주시길 빕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 사랑의 유대 안으로 초대되어 주님 안에 한 형제된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무명의 선포자들

 -김찬선신부-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설립되고 확장되는 과정이 선명합니다.

 

처음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되는데

스테파노 사건으로 박해를 받아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나 키프로스나

안티오키아에 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는 유다인에게만 전했는데

그들 중에 일부가 안티오키아에 가서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고,

이곳 이방인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유다인들이었다면 여전히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어제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는 그리스도교인이라

불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누군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말씀을

전해 받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 말을 제가 왜 할까요?

 

그제 어떤 분과 이태석 신부님 얘기를 하다가 이태석 신부님보다 먼저

어쩌면 더 훌륭한 일을 하다가 돌아가신 평신도 선교사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범한 약사였던 분이 아프리카 선교를 꿈꿔 40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하여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갔는데 막상 아프리카에 가서 보니

소아과 치료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다시 한국에 와 전공의 공부를

한 뒤 계속 선교하다가 결국 전염병으로 아프리카에서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지금 이분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비록 아무도 없어도

이런 분이 사실 더 성인이라는 얘기가 그분 말씀의 골자입니다.

 

사실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사랑하는 사랑이 

원수 사랑 못지 않게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간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사랑 때문에 사랑한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사랑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오늘의 말씀 선포자를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 못지않게 위대한 말씀 선포자임을 알아야 하고,

알뿐 아니라 나도 그런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능력도 없고 위대한 선포자가 못 될지라도

나도 선포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발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베드로든 바오로든 그리고 무명 선포자든 나든 결국

선포자로 쓰시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무명의 선포자는 자기가 전한 말씀이 받아들여지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자기로부터 말씀을 들은 이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리라는 것도 상상도 못했는데, 실은 그렇기에

그것이 성령께서 그를 도구 삼아 말씀을 선포하신 표시지요.

 

그러므로 나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나의 사랑도 업신여기지 말 것입니다.

나의 작은 선포도 성령의 역사 안에선 위대하니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5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