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9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요한 13,16-20)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receives the one I send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셔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는 당신 제자들과 사랑의 만찬을 나누십니다. 만찬이 끝나고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던 가운데에 체포되시고,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이 마지막 시간에 당신의 큰 사랑을 더욱 극진히 보여 주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맨발에 샌들을 신었습니다. 흙길을 다녀야만 하였던 당시 사람들은 외출하고 돌아오거나, 다른 집에 초대받아 가면 가장 먼저 종이 와서 더러워진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 일은 오직 종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끗하게 하실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그러나 늘 그렇듯 이 아름다운 말씀을 삶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2014년 8월 16일 오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꽃동네 희망의 집에서 장애인들과 만나셨습니다. 당시 행사를 기획하다 보니 정작 아이들과의 만남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이 한 명당 60초가량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맞추어 연습을 하고 철저히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행사 당일 교황께서는 일정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시고,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가 행사를 준비하면서 시간에 사람을 맞추었다면, 교황께서는 오로지 가장 낮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셨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이 제게 말합니다.
“신부님, 얼굴이 좋아 보여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사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좋아 보인다”라는 말보다 “안 좋아 보인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운동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몸을 위해 운동해야겠고, 또 이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시간을 내서 운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몸이 쑤시고 걷는 것도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운동하는 새벽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 들은 말이 바로 “안 좋아 보인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 동안 계속하면서 운동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쑤셨습니다. 운동하면서 땀을 내면 몸이 개운해지고 행복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듣게 된 말이 “좋아 보인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요? 사람, 일 그리고 하느님까지 사랑할 대상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무엇일까요? 나를 예쁘고 멋지게 만들어 줄 대상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됩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스승이신 주님께서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랑은 말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직접 무릎을 꿇어서 발을 씻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음을 밝히십니다.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해서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신자까지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직접 몸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본받는 것이며,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길이 됩니다.


어느 제빵 공장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붙었습니다. 이 공고를 본 한 청년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입사 지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면접시험을 치렀지요. 그러나 그는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험 문제의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거든요. 그 시험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림에 있는 빵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주원료는 무엇인가?”
제빵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답변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고민 끝에 이렇게 적었지요.
“정성”
이 청년은 합격했습니다. 면접담당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제빵 지식보다 더 중요한 걸 알고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이 제일 중요한데도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 정성을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기본이 늘 첫 번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면 왕과 종이 생긴다. 그래서 행복해진다.
-전삼용신부-
오늘 제목을 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사랑은 평등한 두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부부가 협의하듯 함께 동등하게 나아가는 것이라고 여길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순종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왕직’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면 왕과 신하만 생길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종이 되어 순종하여야 하고 파견받아 소명을 완수해야 하는 게 왜 행복일까요? 많은 개신교 교파는 목자를 장로들이 투표로 결정합니다. 대통령을 뽑는 것과 같습니다. 싫으면 있던 사람을 내보내고 다른 목사를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라고 해서 왕정을 실천하는 부탄과 같은 나라보다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부탄이 행복도에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습니다. 평등한 것보다 순종하는 주종관계가 더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 복이 없으면 남편 복도 없고,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
만약 누군가 고아로 자랐다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배울 수 없을까요? ‘순종’을 배울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순종할 수 없다면 남편의 사랑에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당연히 사랑을 받지 못하여서 자녀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사랑을 채우려고 하기에 자녀들은 이용당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게 자녀들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여 나의 교만을 꺾어 순종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분이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부모에게 반항하여 미국을 떠나 아프리카로 온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같은 또래의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 그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프리카 청년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게 “무릎을 꿇어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미국 청년은 아들에게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어서 내게로 오너라.”하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포복으로 아버지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미국 청년은 그런 가부장적인 모습에 자신의 부모를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일어나라.”라고 말하며 아들을 안아주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머리 위 나무에 매달린 커다란 독사를 보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미국 청년은 그제야 알았습니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사랑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임을.
순종할 대상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가요? 예수님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유다를 꼽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직후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이 주님이요, 스승으로서 발을 씻어주었으니 가서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는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발을 씻겨주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순종하게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가스펠 헤럴드지에 게재되었던 이야기입니다. 세실 씨는 어느 날 그의 사랑하는 어린 딸의 방으로 갔습니다. 딸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준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아버지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구슬이 아주 예쁘다고 감탄을 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얘야, 그것을 불 속에 던져버려라.”
어린 소녀는 잠시 당황하고 망설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계속 말하는 것입니다.
“네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너에게 맡기겠다. 이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나를 믿는다면 그렇게 해라.”
어린 소녀는 고심하다가 결국 순종하기를 택하고 그 상자를 불 속에 던졌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아버지는 그녀가 오랫동안 갖고 싶어 하던 훨씬 더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단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하느님은 여러 차례 네가 이유를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릴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그때 네가 나를 믿었듯이 하느님을 믿는다면 너는 언제나 그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흐릅니다. 그래서 나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은 항상 나의 하느님이 됩니다. 이것이 왕직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은 권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해주셨기에 그분이 나의 왕이요, 주님이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파견받습니다. 그분께 순종하면 우리는 그분을 품에 안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을 받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게 된다는 말은 그분의 뜻을 실천한다는 말이기에 파견받는다는 뜻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순종하여 누군가의 뜻을 따르고 있고 그분이 나를 사랑해주신 분이라면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순종으로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내주신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은 부모입니다. 그리고 교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제자를 뽑을 때 자신의 말대로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온 사람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순종은 사랑받았다는 증거이고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좋은 이유는 나를 순종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나의 교만이 고통의 원인인데, 나를 버리고 순종하게 해 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러나 순종은 사랑을 믿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음을 믿읍시다. 그러면 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자발적 순종은 사랑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행복하다는 증거입니다.

-조재형신부-
매일 아침 산보 가는 길에 성당 앞을 지나게 됩니다. 며칠 전입니다. 성당 앞에서 차가 멈추더니 한 어르신이 내렸습니다. 내리면서 짐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저를 부르시면서 짐을 성당까지 옮겨달라고 하셨습니다. 길을 가는 중이었고, 시간도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짐을 옮겨 드렸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침 미사에 오신 분들을 위해서 전복죽을 끓여 오셨다고 합니다. 짐을 옮겨 드리는 중에 어르신께서는 제가 사제라는 것을 알아보셨습니다. 신부님인줄 몰랐다고 하시면서 미안해 하셨습니다. 잠깐의 일이었지만 어르신을 도울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도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키레네 사람 시몬도 저처럼 길을 가고 있었을 겁니다. 로마의 군인은 기력이 약해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지니 걱정이 되었을 겁니다. 빨리 목적지에 가야하는데 예수님이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침 키레네 사람 시몬이 길을 가고 있었고, 로마의 군인은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기쁜 마음으로 갑자기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그러기에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길 5처에서 그의 행동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작년 8월입니다. 부르클린의 한인 성당에 계시던 신부님이 3개월간 한국엘 다녀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제게 미사를 부탁하였고, 3개월은 충분히 도와 드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홍보를 다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가신 신부님은 사정상 다시 성당으로 돌아 올 수 없게 되었고, 후임 신부님이 결정되지 않아서 10개월째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허락되는 만큼은 미사를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부르클린 교구에서 후임사제를 결정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을 보면 기쁜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베로니카 어르신은 후원금을 잘 모으십니다. 후원금을 모아서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는 신부님들에게 전해 주시기도 합니다. 남미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에게 전해 주시기도 합니다. 제가 있는 가톨릭평화신문에도 후원금을 전해 주셨습니다. 8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늘 건강한 모습으로 기쁘게 지내십니다. 건강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우시기에 건강하신 것 같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허물이 있는 사람도 있고, 다시 잘못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언쟁을 벌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은총의 빛으로 교회를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할 때 우리의 부족함도 우리의 허물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허물을 씻어내는 가장 큰 방법은 바로 겸손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을 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 내가 만나는 분들을 주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정성껏 우리들의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甘味)이시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배고픈 우리를 먹이십니다!
-양승국신부-
꽃과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 이어 인접해있는 도시 시에나에 들렀을 때였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느낌, 시간이 멈춰 선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 사이로 빼곡히 들어선 고풍스런 옛 건축물 사이를 걸어 다니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토록 고색창연한 명품도시 시에나를 더욱 빛나게 하는 인물이 있으니, 아름답고 매력 넘치는 성녀(聖女)로 유명한 시에나의 카타리나 동정 학자(1347~1380)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도미니코회 재속3회 회원으로서 그녀는 탁월한 신앙생활은 즉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 빛나는 수덕생활, 사심 없는 이웃사랑의 실천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지상에서 머물러야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불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단명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후세 사람들은 대신비가, 탁월한 중재자, 위대한 신학자, 명설교가, 간호사들의 수호성인, 최초의 여성 교회 박사 등의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카타리나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았고 만났으며, 사랑의 합일로서 주님과 일치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주님 사랑에 깊이 빠져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벌거벗음을 덮어주시는 의복이십니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甘味)이시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배고픈 우리를 먹이십니다. 오, 영원한 삼위일체이시여!”
깊은 묵상과 관상기도 안에서 주님의 형상을 뵙고 난 카타리나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시자 두근거리던 제 가슴이 진정되었습니다. 저도 그분을 향해 방긋 웃었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자 제 마음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부활절 아침 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성탄전야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눕혀드릴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길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으며, 살아있는 주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그녀에게 주님께서는 오상(五傷)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천국을 확신한 그녀였기에 임종 직전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이여, 이렇게 울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나는 이 눈물의 세상을 떠나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 속에 쉬러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셔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와 늘 가까이 있겠고, 또 하늘에서는 더욱 열심히 어머니 역할에 충실할 것을 약속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니 가겠습니다. 주님의 귀중한 피로써 나를 구원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앙무 몫도 나뉴어 받지 못한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모든 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를 알고 실천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섬김의 도는 실행함에 있습니다. 실행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는 도입니다. 그러니 실행하는 자가 복됩니다. 곧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김을 실행하는 것이 복 있으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실, 섬김은 실행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그래서 당신은 공관복음에서 말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이토록,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섬기심을 실행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섬김과 존경을 받고 싶고, 크고 높은 자 되고 싶어 합니다.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먼저 섬기는 이가 섬김을 받고, 먼저 존경하는 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낮출수록 사실은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을 섬기면서 주인을 섬기게 되고, 파견 받은 이를 섬기면서 파견하신 분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
-반영억신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아는 데 있어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그 자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한 몫이 있는데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식으로서의 몫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위치도 다릅니다. 기관의 장이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위치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분수를 알면 알맞은 처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을 빌미 삼아 나를 내세우지 말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도구로써 만족하라.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믿음을 표현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 안에는 주인이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니 그보다 높지 않은 종은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탐할 때 반역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중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내가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고 하셨습니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걸립니다. 지금 열심히 사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는 주님의 말씀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주어진 몫에 더욱 충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분명, 우리는 파견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 예기치 않은 일 등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은총의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헤아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알면 아는 만큼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하면 행복합니다. 분수에 맞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1) 이 말씀은, 당신이 본을 보여 주신 대로(요한 13,14-15)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의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요한 13장).>
제자는(신앙인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고,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면서 살면,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사람은 참된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2) 마태오복음에서는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이
예수님보다 더 심한 고난을 겪는 일은 없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4-25)”
이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과
같은 고난을 겪을 텐데, 그 고난이 예수님의 것보다 더 심하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참고 견디셨으니 제자들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충분하다.’는 말을, “그 이상은 필요 없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보다 더 심하고, 더 고통스러운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앙인이 예수님께서 겪으신 것만큼의 고난을
꼭 겪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받는 탈렌트가 다르듯이
각자 지고 가는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라는 말씀이 요한복음 15장에 다시 나오는데,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마태오복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3)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라는
말씀을,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여기서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씀은,
“참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리시는 영광에 신앙인들이 참여하기를 바라시는데,
그 ‘참여’가 바로 모든 신앙인의 희망입니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18-20).”
이 말씀은 앞의 17절의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이
‘모든 제자들’(모든 신앙인들)에게 자동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은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른 사람만이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제자였더라도(신앙인이었더라도)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떨어져 나간 사람은
그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끝까지 갈 때에만 신앙생활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중간에 변절하거나 냉담 상태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다가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떨어져 나간 사람은
처음부터 따르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루카 14,28-30).>
배반자 유다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사도로 뽑으신 사람이지만,
그 자신이 중간에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안 믿은 사람들’보다 더 나쁜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라는 말씀은,
유다의 배반은 ‘식사 공동체’를, 즉 ‘가족’을 배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큰 아픔을 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알고 계시면서 그 일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은, 유다의 배반을 비롯해서 당신의 수난 때에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은 ‘모르고’ 당하시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고, 당신의 수난 때문에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들입니다.
(‘섭리’ 라는 말은, 잘 만들어진 각본대로 진행된 일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배반자가 생긴 일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위신과 권위가 추락하게 될 것을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20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런 사도들을 위해서
당신이 그들에게 주신 권한과 능력에 변함이 없음을 재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복음: 요한 13,16-20: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16절)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은 겸손하게, 조용히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하셨다. 주님은 아버지의 선과 사랑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분은 주님이시면서도 우리 모든 죄인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부를 수 있도록 당신의 영을 주시어 당신과 같이 될 수 있게 해 주셨다. 우리는 ‘아들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7절) 이것은 우리가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사랑과 열정에 어울리는 것은 덕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의 지식이 실천으로 드러나게 될 때, 항상 생각지 못한 큰 결과를 얻게 된다. 실천이 없으면 지식도 심각한 불구가 된다. 믿음은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고백을 모두 포함하지만, 실천으로 나오는 빛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뽑은 이들을 아시고 발꿈치를 치켜든 자들을 아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다 아시면서 유다는 왜 뽑으셨을까?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창조하셨고, 사울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 유다를 뽑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분명히 제자가 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선택이 그러했다.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는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아담도 하와도 사울도 유다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택한 결과이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19절)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일이 일어날 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따라온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주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2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이는 바로 파견된 ‘사도’들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맞아들이는 이는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를 맞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파견된 이에게는 보내신 분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파견된 그리스도를 맞아들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그분을 보내신 분 아버지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사도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사도들을 가르치신 분을 발견할 것이며, 우리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찾는다면, 아들 안에서 그분을 낳으신 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 20)
-한상우신부-
꽃잎이
아래로
떨어진다.
꽃잎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생명은
이와같이
떠나보냄을
통해
만나게되는
은총과
행복이다.
하느님께서
전부가 되시는
삶이 우리의
참된 행복이다.
내어 맡기시는
예수님의 삶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또한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예수님을 통하여
보게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의
본질이다.
참된 관계가
참된 행복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이다.
행복은
내어드림으로
만나게되는
깨어있는
기쁨이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의 여정은
받아들이는 법을
은총으로 배우는
여정이다.
믿음의 기쁨은
낮아지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겸손이다.
겸손이
성숙한
삶이다.
자아의 죽음이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가장 큰 행복이다.
삶 전체를
아우르는
행복이 있다면
내어맡기는
겸손이다.
겸손이 빛이 되고
겸손은 맞아들이는
참된 행복이 된다.
맞아들임이
은총이다.
낮아짐이
믿음이다.
내어드림이
행복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의 길을 알려 주십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행복의 비결은 자기 주제를 아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시작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보잘것없는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또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건 누구와 함께이건 그 자리로 파견하신 분께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가정과 일터, 공동체와 단체 어디서건 사실 우리는 파견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 눈으로는 마치 스스로 선택해서 온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존재의 모든 행로는 소명과 파견이라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보내신 분의 뜻을 경청하고 힘을 다해 그 일을 완수하는 충실하고 착한 종은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곳에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직장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주제와 위치를 알고 살아가는 지혜가 곧 겸손일 겁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우리는 자신이 파견된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 파견되어 온 상대방에 대해서도 환대와 수용의 자세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는 주님께서 나의 완성과 행복을 위해 보내신 사람이며,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럼으로써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을 맞아들여 그 사랑의 일치 안으로 들어갑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 일행이 이방 지역의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대목입니다.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사도 13,15)
그곳 회당의 회당장들이 먼저 바오로 일행에게 말씀을 청합니다. 낯선 이들이지만 여행 중에 회당을 찾은 걸 보면 자기들처럼 충실히 하느님을 섬기는 동족이라고 여겼을 터입니다. 이렇게 맞아들이는 태도가 시기심과 경계, 혐오에 빠지기 전의 가장 하느님 자녀다운 형제로서의 모습일 겁니다.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사도 13,23)
바오로는 바리사이로서 익혀온 박학한 성경 지식을 동원해 이스라엘의 유구한 역사를 단숨에 요약해 들려 줍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분,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선포하지요. 그리고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믿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까지 덧붙여 예수님의 신원을 증거합니다.
보내어진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이름을 심장에 인장처럼 새기고 가는 것입니다. 그 이름에는 파견된 사명이 들어 있지요. 받아들이는 이는 파견된 이의 겉모습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 환대와 수용은 결국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은총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 안에서 우리는 파견받은 사람인 동시에, 파견된 이를 맞아들이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모든 만남과 인연은 파견하시고 이어 주시는 하느님의 선한 섭리 안에 새겨진 궤적들일 겁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이를 기꺼이 맞아들임으로써 주님을 영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녹록지 않은 관계와 생활의 무게를 견디어가면서도 파견하신 분의 관대하고 자비로운 뜻을 실천하려 애쓰는 우리 모두는 행복합니다.

<혼자보다 하나가 낫다>
-김찬선신부-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부활 4주간의 복음은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며,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거라고,
당신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시고 당신과 제자들을 동일시하시는
말씀을 잇달아 하시는데 그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이런 주님에 비해 우리 인간 중에는 '나는 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다'가 좋습니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가 좋습니까?
'하나인 나'와 '혼자인 나' 중에 어떤 것이 좋은 것입니까?
혹평을 하자면 하나가 될 수 없으니
나는 혼자이고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을 포기하고
'나는 나'라고 하는 것으로만 제게 들린다는 말입니다.
물론 더 이상 남에 의존하거나 남에 의해 좌우되지 않겠다는
뜻에서 나는 나라고 할 수는 있겠고 이것은 석가모니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과도 일맥상통하는 거지요.
그러나 여러 차례 얘기한 바이지만 그래서 오늘도 또 얘기하지만
고독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지만 고립을 사는 것은 불행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느님과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존재들을 통해서 존재를 있게 하시고 파견하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도 불행인데 다 단절되어 혼자로 살아간다면 이처럼 불행은 없겠지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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