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24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4. 24. 06:26

2021 4 24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0-69)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많은 유다인이 생명의 빵과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 거북하고, 따를 수 없다며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유다인들뿐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따라나선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자 환호하던 이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살 수 있다고 하시자 그만 돌아서고 맙니다. 이들이 돌아선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 영과 육의 대비를 보면서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사람의 마음 안에는 흙으로 빚어진 육에서 나온, 더 받고 싶은 마음, 곧 탐욕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숨에서 나온 하느님의 마음, 더 내어 주고 싶은 마음, 곧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탐욕으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가 서로 어긋나 이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들어옵니다. 이 고통과 죽음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십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아드님께서는 아파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되어 아버지께 건너가시게 되자 그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십니다.
더 받고 싶은 마음, 탐욕이 고통과 죽음을 들여왔다면, 목숨까지 내어 주는 그 마음, 사랑이 생명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내어 주신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살게 되고, 생명을 얻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내어 주는 사랑 앞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믿지 않는 자들’이 되어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고단한 사랑의 길이다. 나와 함께 이 고통의 길을 걷겠느냐? 아니면 떠나고 싶으냐?’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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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사람들이 제게 “왜 빠다킹이에요?”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 ‘빠다킹’은 저의 별명입니다. 이 별명을 내세워서 ‘빠다킹 신부’라고 부른지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별명에 대한 설명도 20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강의하기 전에 자기 소개를 하면서, 책에서는 저자 소개란에서, 인터뷰 할 때에도 ‘빠다킹’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면, 목소리가 느끼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빠다(느끼함) + 킹(왕), 즉 왕느끼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20년 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질문합니다.


“빠다킹 성인은 어떤 분이세요? 왜 이런 별명을 쓰는 거예요?”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는 저의 어떤 말과 행동도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매번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남의 시선에 신경 쓰며 살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분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주님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힘들면 겸손하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늘 새롭게만 느껴집니다.

제자 중 많은 이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힘들어합니다. 제자들이 이럴진대 예수님의 원수들은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제자들 역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말씀과 행동을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또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을 설득시키지 않습니다. 더 어려운 말씀을 하면서 그들이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을 더 독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주님을 잊고 있으며, 주님 곁을 떠나려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내 뜻에 맞추는 삶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필요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위에 비교하면 족하지 못하지만, 아래에 비교하면 남음이 있다(명심보감).


노력 측정

결과에 크게 실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곤 합니다. 모든 것이 실패할 이유처럼 생각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발전도 있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외부의 조건을 항상 내게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자신에 대한 ‘노력 측정’입니다.

리더십 전문가 마셜 골드스미스는 ‘결과가 아닌 노력을 측정하라.’고 권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면 ‘운동을 했는가?’가 아니라 ‘운동하려 최선을 다했는가?’라고 물으라고 합니다. 운동하지 않는 이유를 찾으면 외부에서만 찾게 되지만, 최선의 문제 해결은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노력 측정’을 사용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 보십시오. 실패의 가능성보다 성공의 가능성을 찾게 될 것입니다.

 내가 육적인 인간인지, 영적인 인간이지 알아보는 법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긴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성체에 관한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이해하면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면 육적인 사람입니다.

​    물론 가리옷 유다처럼 남아있다고 해서 다 영적인 것도 아니고, 지금 믿지 못한다고 해서 완전히 육적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이며 생명에 관한 것인데, 육적인 사람은 이 말씀을 육적으로만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투덜거리고 다 떠나가지만,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님 곁에 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수준 때문에 말씀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당시에 그곳에 있었다면 제자들처럼 예수님 곁에 남았을지, 아니면 떠나갔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영적 인간인지, 육적 인간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에 한 여자와 남자의 나체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나체 그림이고 매우 야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것은 그 그림을 어린이들은 돌고래들로 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메슬로우는 망치를 손에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시각과 이해력은 나의 욕구에 의해 좌우됩니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을 먼저 찾습니다.
따라서 길을 지나가는 여자를 볼 때, 남자들은 나체의 모습을 상상하고 여자는 여자의 모자와 옷, 핸드백이 얼마짜리인지를 스캔합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아무리 영적인 말씀을 하셔도 육체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가리옷 유다를 뽑았습니다. 그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도둑이라고 말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더 심하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
사람이 악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 그 사람이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적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의 정체성을 바꿔야 합니다. 나를 육체로 본다면 그 사람은 육체적 행복만을 추구할 것이고, 나를 영혼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 앞에 소개하실 때, “나는 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의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육적인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줄타기를 하는 한 서커스 단원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다 강철 줄을 걸어 놓고 그 위에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손에 땀을 쥐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이리 건너오고 저리 건너가고 하면서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사람들 앞으로 와서 말했습니다.
    “누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타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어깨에 메고 건너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 소년이 “저요!”하고 손을 들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이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겁나지 않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지?”
    그 소년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어떤 사람의 말을 믿으려거든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가 먼저 정립되어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믿을 수 없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먼저 믿지 말을 먼저 믿지 않습니다. 관계가 먼저이고 말이 그 다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합니다. 오늘 남은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믿을만한 분임은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요?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 자신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적인 행복은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육적 욕망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고 더욱 영적인 인간이 되면 말씀을 더 믿게 되고 더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육적인 인간이기 때문임을 명심합시다.
    육적인 인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육체, 즉 자아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라 여기는 것에 의해 규정됨을 명심합시다.
    우리 안에는 성체로 들어오시는 “너는 나다!”라는 분이 계심을 명심합시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을 수 있으면 이미 영적인 인간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며칠 전입니다한 형제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사제 생활 30년을 하셨는데 그만 두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마치 제게 결혼한 지 45년이 되었는데 힘든 일이 많았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주님께 죄송한 적은 참 많았습니다성실하지 못했고나만을 생각했고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교회의 보살핌으로 사제직에 머물고 있음에 늘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사제로 살아온 날이 사제로 살아갈 날 보다 많아졌습니다새삼 달릴 길을 충실하게 다 달리고 원로사목자가 되신 선배 사제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는 상설고해 사제를 신청한 친구가 있습니다상처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다고 합니다본당 신부를 해 보았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서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고 합니다. 20년을 보좌신부로 있어야 하는 후배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입니다. 10년 훌쩍 넘기며 도시빈민 사목을 하는 동창들이 있습니다사제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때로 힘들고때로 외롭고때로 거친 삶을 살아가는 동창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1991년 함께 서품을 받았던 동료 중에 하느님의 품으로 3명가 갔습니다늘 가난한 이들을 먼저 생각했고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이해했던 사제였습니다성지순례를 위해서 지도를 제작하였던 사제였습니다언제나 깔끔하고정갈했던 사제였습니다비록 길지 않은 사제 생활이었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고달릴 길을 충실하게 달렸습니다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새로운 길을 찾았던 동료도 있습니다예수님을 따르는 사제의 길이 힘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제자들과 같습니다사제의 직무는 떠났을지라도 신앙의 길은 충실하게 가기를 기도합니다.

 

여행을 가면 따로 방을 마련해 주시는 교우들의 배려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음식을 먹을 때 다른 분들은 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사제라는 이유로 음식을 갖다 줄 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자가용으로 모시러 오고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아니라고 지하철 타고 버스타고 간다고 말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사제생활의 길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하루를 살아도 그리스도와 일치하고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주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베드로는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무서워 떨었지만다시금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훌륭하게 하고 있습니다환자들을 치유하고죽은 사람까지 살려냈습니다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믿는 이들을 세례의 물로 새로 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저희를 지켜 주시어 저희가 온갖 오류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충실히 간직하게 하소서.”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오던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을 “생명의 빵”(35절, 48절), “하늘에서 내려온 빵”(41절)이라 밝히시며,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고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말다툼(52절)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순명으로 실행하는 사람, 곧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그들 안에 머무를 것”(54절, 56절)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은 말씀을 발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설한 말씀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를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씀은 읽는 이 안에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에제케엘서>(37,1-14)에서 보여주듯이, 죽은 문자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돋게 하고 뼈와 살이 붙게 하고, 문자를 성체가 되게 하여 우리가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로마 8,2)이라는 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참 생명이 영으로 말씀이 되시어 육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의 대담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육화를 활성화시키시는 분이시다.”

 

바로 여기에, 성령의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동반자이며 해석자가 되시어 성경을 읽는 이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계시헌장>(12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111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이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속내를 꿰뚫어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통해서 쓰려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하시며,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며, 하느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어 왔고 또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예수님을 ‘떠난 제자’와 ‘남는 제자’가 분리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왔고 그래서 아는 자들’은 남은 제자가 되었고, 반면에 알고 믿고자 한 제자들은 떠나갔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알고 믿는 것’보다 믿어서 알게 되는 삶이 먼저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생명이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먹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더라도 언제나 당신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

몸은 머물러 있는데도 마음이 떠나 있고, 마음은 머물러 있는데도 몸이 떠나 있고,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시건만, 저는 당신을 떠나 있습니다.

당신은 떠나고 싶어 해도 떠나지지도 떠날 수도 없는,

붙들고 싶어 해도 붙들어지지도 붙들 수도 없는 분이면서도,저를 꼭 붙들고 계십니다.

본래부터 저는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아멘.

복음: 요한 6,60ㄴ-68: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조욱현신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힘들어한다. 그래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하며, 결국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 물러갔고 더는 따라다니지 않았다(66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투덜거리는 것을 아시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구원을 주는 것은 성령이시라고 “영은 생명을 준다.” 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영은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분의 가르침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고 나서 그것이 당신 살이라고 하셨다. 말씀은 영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육은 그들이 이해했던 살점이었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며, 그 육도 영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영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변덕스러운 쭉정이 같은 믿음은 유혹이라는 돌풍이 불 때마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 주님의 말씀을 거북하게 느낀 제자 일부는 그분께 등을 돌렸다. 그러나 많은 제자는 그 때문에 그분을 따르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쉽게 신앙을 버리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67절) 이 말씀은 그들이 꼭 필요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주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이라 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시기 위해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신 것이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68절) 이 말은 ‘어느 누가 당신처럼 저희를 가르치겠습니까?’ 또는 ‘저희가 누구에게 가서 더 훌륭한 것을 발견하겠습니까?’라는 뜻이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8절) 이 말은 떠나간 제자들처럼 ‘듣기 거북한’ 말씀이 아니라, 끝없는 생명으로 데려다줄 말씀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발아래 앉아 그분을 유일한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9절) 우리는 알기 위해 믿는다. 먼저 알고 난 다음 믿으려 했다면 우리는 결코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알게 되었는가?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이시며 당신 살과 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 분이다.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남겨주신 성체를 열심히 영하여야 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심장이며, 우리 인간을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은 생명을 준다."(요한 6, 63)

-한상우신부-


삶의 방향을
바꿀
시간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를
십자가와
부활로
초대하신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일깨워주신다.

하느님의
영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영적인 삶이다.

영적인 삶은
하느님 사랑을
전적으로 맛보는
삶이다.

영적인 삶은
하느님
말씀으로
시작한다.

말씀은
허상을 버리고
빛으로 우리를
채워준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는
영적 존재이다.

영적 존재는
영적인 양식이
필요하다.

말씀과
생명의
빵이다.

영적으로
깨어나고
영적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육적인
쾌락에서
벗어나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만나는 삶이다.

신앙인의 삶은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는
삶이다.

성령께서는
거짓 자아를
내려놓는
십자가를
지게하신다.

자아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하느님을
만나게되는
은총의 삶이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필요로 한다.

우리를
살리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우리
자아가 아닌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의 삶이다.

우리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이
영의 삶이며
생명을 주는
사랑의 삶임을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방향성과 동선이 두드러집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요한 6,65)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서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것, 심지어 당신을 배반하고 팔아넘길 이도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지만 개의치 않고 불러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한계에 걸려넘어져 진리를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리는 것이 안타까우시지만,  결국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허락하신 대로 받아들이시지요.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북하게 여긴 제자들이 투덜거리다 결국 주님을 떠납니다. 예수님도 당신 말씀이 육의 귀와 육의 마음에 머무는 이들에게 거슬린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좋아하고 편하게 여길 만한 수준으로 진리를 각색하지 않으십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베드로가 답합니다. 예수님을 향하던 많은 제자들이 돌아서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을 택한 것과 달리,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그대로 있겠다고 응답합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이 비장한 고백은 예수님 곁에 멈추어 있겠다는 의미를 넘어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안으로 더 들어가길 원한다는, 새로운 방향성을 열어 줍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 사도가 행한 기적을 통해 많은 이들이 주님께 돌아섰다는 일화를 전합니다.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사도 9,35)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사도 9,42)
팔 년 동안 중풍을 앓던 애네아스가 치유되고 죽었던 주님의 여제자 타비타가 죽음에서 일어나자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섭니다.이 놀라운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께 방향성이 형성되지 않았던 이들이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몰랐거나, 그분에 대해 들었어도 자기와 연관된 접점을 체험하지 못했었기에 그랬을 겁니다. 이제 그들은 가까운 이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총을 보고 삶의 방향성을 찾습니다. 인생 안에 새로운 동선이 시작된 것이지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인생길에서 그동안 나아오던 방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어떤 영향을 통해 방향을 틀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일은 새로운 창조에 비견되는 모험과 같지요. 신중하고 책임 있게 새로이 시작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사실, 가장 먼저 방향을 바꾸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홀로 충만히 존재하시던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해 세상 만물을 지어내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 일부터 시작해서, 거듭 당신을 배반하는 인류를 위해 번번이 마음을 돌이켜 죄인 곁으로 다가오셨으니까요. 또 성자이신 예수님도 사람이 당신께 다가오길 기다리기 전에 사람들 곁으로 내려와 함께하셨지요. 이 방향성과 동선은 자기를 버리는 사랑의 결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이 우리를 당신 곁에 강제로 묶어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에게서 돌아서 떠날 수 있는 자유의지까지 허락하고 존중하는 분이시지요. 우리의 방향성과 동선이 당신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자유 안에서 결단하고 투신하는 사랑이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방향도, 조금 돌고 돌더라도 결국 당신께 와닿으리라는 믿음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혹 거북하고 거슬리는 내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멀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어쩌면 바로 그 말씀 때문에 그분 안에 더 깊이 침투할 수도 있답니다. 믿음이 약하고 편협한 우리는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 있지만 그분은 결코 그러지 못하시니까요. 우리가 아무리 멀찍이 물러선들, 그분의 뜨거운 심장은 우리를 향하고 있고, 어디서든 자석처럼 우리를 세차게 끌어당기시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가 들은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올려 드리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 말고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것이고 주님도 우리의 것이니, 주님 말고 갈 데 없는 우리 모두는 행복합니다. 아멘.

 말씀 나누기 - 부활 3주 토요일-위로건 격려건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2일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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