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2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 6,44-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for the life of the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저는 단팥빵을 보면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린 시절 마당에서 동생들과 뛰어놀고 있으면 해 질 무렵 길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우리 맏손주 어디 있나?” 하고 저를 애타게 찾으시는 할머니 목소리입니다. 그러면 저는 놀던 것을 멈추고 곧바로 할머니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달려오는 저를 향하여 엄지를 척 들어 올리시며 “우리 맏손주가 최고지!” 하시고는 몸뻬 바지 속주머니에서 단팥빵을 꺼내시어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새참으로 나온 빵을 챙겨 두셨다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맏손주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루는 맛있게 빵을 먹다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안 드세요?” “응, 나는 욕지기가 나서 안 먹어도 돼.”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느 날 단팥빵을 먹다가 할머니가 주신 빵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농사일하시느라 허기지셨을 텐데 손주에게 주시겠다는 생각으로 참으셨구나!’ 그 순간 목이 메어 그 빵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하십니다. ‘내려온’이라는 단어는 과거 시제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어놓으신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셨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어린양으로서 당신의 살을 빵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살”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희생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희생과 사랑으로 당신의 살을 내어 주시어 세상에 생명을 주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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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일을 먼저 해야 할까요? 아니면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할까요? 급한 일이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급하다는 마음에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참 많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일까요? 아니면 별것 아닌 일일까요? 신앙인이라면 아마 100이면 100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핑계는 이렇게 말할 때가 참 많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도 없어요.”
세상일이 급하다고 말하면서 중요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번까지만, 여기까지만, 올해까지만,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만….’ 등의 말을 하면서 급한 불을 먼저 꺼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까지만’이라는 급한 일은 도저히 끝나지 않으면서 정작 중요한 일을 못하게 만듭니다.
급한 일을 포기해야 하냐고 묻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특히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관점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급한 일도 하면서 중요한 일을 행하는 멋진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나는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는 당신과 우리를 합쳐 하나의 빵 덩어리로 만들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반죽하시며, 이 결합을 통해 부패와 그 안에 숨어 있는 죽음을 파멸시키십니다. 그래서 성찬의 살아 있는 빵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보다 훨씬 위대한 것입니다. 이 빵은 영원한 생명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께서 육이 되심으로써 당신의 육이 생명을 주게 하시어, 그것을 먹는 모든 이가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보다 급한 일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는 것이야말로 가장 급하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은 눈에 직접 보이기 때문에 더 급하고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어떤 것에 더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더군다나 그분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가장 힘센 분이십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1. 마음은 게으르고, 몸은 함부로 놀려서, 그저 놀고 편한 것만 생각하고 구속받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2. 늘 부산스럽게 뭔가를 하고 가만히 있지 못해서 고요하게 자기를 추스르지 못하고, 분주히 움직이며 남과 수다 떠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3. 남 따라 하는 걸 좋아하고 남과 다른 것을 싫어해서 세속에 잘 동화되어 자기 자신을 수양해서 변화해 보려 하다가도 남과 부딪히게 될까 두려워한다.
4. 문장을 잘 써서 한때의 명예를 얻는 데에 취하고, 경전을 표절해서 겉만 그럴싸하게 꾸민다.
5. 글씨와 편지에 공을 들이고, 악기 연주와 술 마시기를 일삼아 유흥을 즐기면서 이걸 스스로 ‘운치있는 삶’이라 말한다.
6. 한가한 사람들과 게임을 즐기고, 종일 먹기를 탐하고 내기를 일삼는다.
7. 부귀를 부러워하고 빈천을 싫어하며, 보잘 것 없는 옷과 음식을 매우 부끄러워한다.
8. 기호와 욕망에 절제가 없고, 돈과 이익과 놀이와 연애에 탐닉한다.
500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나요?

우리는 여전히 어머니 태중에서 생존한다
-전삼용신부-
오늘도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 설교의 일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역시 이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를 어머니처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머니라면 아버지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는 어머니의 살을 먹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의 것이 하늘나라의 비유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는 일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는 일의 비유입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났더라도 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이 없으면 짐승처럼 살 수밖에 없기에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부모의 희생과 모범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자녀로 살려면 하느님의 희생과 모범이 필요한데, 하느님의 희생은 당신의 살과 피로, 하느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우리게 주어졌습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우리는 어머니로 상징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은 이 지상에서도 어머니의 살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이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 엄마에게 자유로워질까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마치 아기가 엄마 태중에서 엄마의 영양분을 먹고, 또 태어나서도 엄마 품에서 젖을 먹는 것처럼 엄마의 살과 피를 통해 들어옵니다. 이것이 태중에서부터 단절되면 태어나서도 여전히 그 태중의 배고픔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실 어떤 누구도 어머니의 태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김경희 루시아’ 수녀님의 강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수녀님은 많은 사람이 칭찬하고 영광을 주어도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수녀님이 있다면 갖은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그 수녀님을 욕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자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이런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묵상을 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엄마는 언니만 사랑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다른 수녀님과의 관계가 분명 어머니와의 관계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수녀님은 묵상을 더 깊이 했습니다.
어머니가 수녀님을 잉태했을 때 부산에서 살다가 인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곳으로 남편만 믿고 왔을 때 어머니의 마음이 매우 불안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불안함을 먹고 살았고 태어난 후에도 아직도 그런 불안함에 싸여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그런 불안함 속에서 아기를 낙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태중에 있었던 아기는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겠습니까?
태어나서 그 불안함이 끝나면 모르겠지만 태어나서도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엄마에게 사랑받기 위해 3살 때 부뚜막에 올라가 설거지를 하려 했고 빨래와 심부름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언니만을 사랑했습니다. 학교 갔다 왔을 때 어머니가 언니를 반기는 표정과 자신을 반기는 표정이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언니는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사랑받았습니다. 그러니 태어나서도 사랑받습니다. 본래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녀님은 태중에서부터 어머니가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태중에서 벌어진 일이 태어나서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장해서도 여전히 어머니의 살과 피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한쪽 팔에, 수녀님을 다른 한쪽 팔에 꼭 안아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어머니를 용서하고 그리스도 품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동안 막혀있던 무덤의 돌이 굴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도 사랑받을 준비가 된 얼굴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치 어머니에게 미운 감정이 있으면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구걸하듯, 다른 수녀님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를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랑받고 싶다면 지금 내가 잉태된 어머니에게 이미 사랑받고 있어야 합니다.
[출처: ‘희망기도로 내면 치유’, 김경희 루시아 수녀님, 유튜브 채널, ‘Bruce Lee’]
육체의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태중에서 사랑받으면 됩니다. 그 사랑의 양식이 당신의 살과 피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그리스도의 태중에 잉태된 삶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리고 천국에 태어날 최상의 태교가 이뤄집니다. 천상에서 태어났을 때는 진정 그분이 차려주는 밥상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살과 피일 것입니다. 어느 세상이든, 태중이든, 이 세상이든, 나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것은 어머니의 살과 피입니다. 그리고 그 힘이 이웃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한 청년 자매님의 예를 들었습니다. 아기는 태중에 있을 때 아이를 떼라는 아버지의 말에 “넌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말을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상처가 세상에서도 살기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여전히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태어나도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사랑할 힘이 생깁니다. 어떤 피조물도 창조자가 아닌 이상 자력으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누군가의 태중에서 영양분을 먹으며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랑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다른 존재의 태중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탄의 태중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사랑과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만약 하느님의 태중에 있다면 하느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부모의 뜻과 반대로 살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당신 태중에 살라는 뜻입니다. 생명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은 어머니의 살과 피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엄마의 살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요한이 그리스도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는 말은 그리스도께 잉태되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생존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조재형신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이야기입니다. 원효대사는 친구인 의상대사와 함께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으니 당연히 걸어서 갔습니다. 어느 날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밤에 목이 말라 그릇에 있던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꿀맛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일어나서 보니 어제 먹은 그릇은 사람의 해골이었습니다. 그렇게 맛있었던 물이었는데 일어나서 먹으려니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원효대사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은 장소에 있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은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효대사는 유학을 중단하고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원효대사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던 것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습니다. 친구였던 의상대사는 가던 길을 계속 갔고, 당나라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의상대사 역시 큰 깨달음을 얻었고 신라로 돌아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의상대사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던 것은 당나라의 고승이었습니다. 깨달음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번개처럼 다가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이고 다른 하나는 가랑비처럼 다가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초대교회의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한분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나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유혹에 빠지고, 나약함 때문에 십자가를 외면하려했던 베드로 사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나약함 때문에 주님과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유혹을 이겨냈고,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다른 한 분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도 깨달음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위에서 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표징이었던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깨달음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생명의 빵’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르침이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생명의 빵’을 잘못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물, 명예, 권력’을 생명의 빵으로 착각합니다. 불 속으로 날아드는 나방처럼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을 번개처럼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랑비처럼 깨달음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해서 모욕과 굴욕을 받아들였습니다.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해서 순교하였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나에게 생명의 빵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분에게 ‘생명의 빵’은 어떤 의미인가요?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작은 물방울도 시간만 있으면 큰 바위에 구멍을 내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길을 찾으면 주님께서는 능히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기쁨은 초대 교회가 지닌 여러 모습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첫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7부제 가운데 성령이 충만했던 스테파노가 순교하자, 이어서 넘버2 필리포스의 행적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필리포스는 일곱 명의 부제 명단 가운데 두번 째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필리포스는 바오로 사도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하며, 카이사리아에서 루카과 첫만남을 가졌습니다. 4명이나 되는 여예언자들을 딸로 둔 것을 봐서 나이가 꽤 많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튿날 프톨레마이스를 떠나 카이사리아에 이르러,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로서 복음 선포자인 필리포스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머물렀다. 그에게는 처녀 딸이 넷 있었는데, 그들은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사도행전 21장 8~9절)
필리포스는 주님의 천사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외딴 길, 황폐한 사막길을 걷게 되는데, 그 길에서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를 만납니다. 그는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던 고위층 인사였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한 에피오피아 사람! 꽤나 의아스럽지 않습니까? 다른 대륙 아프리카 사람이 바다 건너 산넘어 예루살렘까지 멀고먼 영적 순례를 온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여왕 내시의 개종 사건은 초대교회의 비약적이고 폭발적인 성장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멀고도 다른 대륙으로까지 퍼져나간 것입니다.
필리포스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내시가 타고 가는 수레로 접근합니다. 필리포스는 내시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내시는 여왕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요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예수님이란 사람에 대해 잘 알아보고 오라는 특명도 받았을 것입니다.
필리포스가 묻습니다. “지금 읽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내시는 자신이 읽고 있는 이사야서 본문의 의미가 너울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내시는 필리포스를 자신의 수레 위로 올라와 설명해주라고 초대합니다. 필리포스는 수레 위에서 짧고도 강렬한 속성 예비자 교리를 실시합니다. 그가 읽고 있던 이사야서 수난 당하는 종이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라는 것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해줍니다.
필리포스의 초스피드 개인 예비자 교리에 깊은 감동을 느낀 내시는 기쁨에 넘쳐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필리포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내시는 크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
내시의 속성 예비자 교리와 세례는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엄청난 스캔들이었습니다. 유다 율법에 따르면 내시는 구원의 공동체에 가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메시지에는 그런 장애가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 뿐입니다.
초대 교회에 대한 박해는 이스라엘 전역으로 그리스도 신자들을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자나 도망자로서의 아니라 복음의 선포자요 구원의 설교자로 퍼져나갔습니다. 말씀의 기쁜 소식과 활활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이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반대와 박해는 교회의 생명력을 파괴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가장 위협받고 공격받는 순간에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성령의 역동적인 현존 역시 가장 큰 위기 앞에 두드러집니다.
특히 기쁨은 초대 교회가 지닌 여러 모습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모욕당하고 박해받는 것을 더없는 특권으로 여기고 기뻐하였습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영근신부-
요즈음 계속해서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언서의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여기서, “마지막 날”은 육체적 숨이 멈추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직전의 날을 말해줍니다. 곧 생명의 주님을 만나면 이전의 자신이 죽고 나날이 변화되는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일이요, “아버지”께로 이끄심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역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1코린 15,2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여기서, “살아있는”이란 말은 당신의 실재성을 말합니다. 곧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실재성입니다. 그 실재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생명의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빵”은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활동 중인 빵인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살리는 빵”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인 것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신성의 “당신의 살” 입니다.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지는 살입니다. 그리하여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우리의 살을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됩니다. 곧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살은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시고, 당신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에게서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인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입니다.
오늘도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곧 “그분의 살”을 먹습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의 생명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오늘도 먹히는 빵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 떼어주십니다.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신앙은 선물
-반영억신부-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어도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이, 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 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닮는 여정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송영진신부-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
이 말씀을 해설한 것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5장에 있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구약성경은 ‘메시아’를 예언한 책이고,
신약성경은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사실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잘 읽고 연구한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신앙의 순서는 ‘구약성경 먼저’가 아니라, ‘믿음 먼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구약성경을 읽어야
제대로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경우는 다른데, 신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들을 인도해 주는 책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6,46).”
이 말씀을 해설한 것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에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옛날에도, 또 오늘날에도, 자기가 직접 하느님을 만났다고 주장하거나,
하느님과 직접 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나 율법을 통해서, 또는 어떤 수행을 통해서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체험하거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은총을 받은 일이지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자기가 하느님을 직접 만났다고 주장하거나,
하느님과 직접 통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단이고, 사이비입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1-3).”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
이 말씀을 해설한 것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11장에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지상에서의 죽음을 면제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의 ‘두 번째 죽음’을 면제받는다는 뜻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는 ‘죽음’과 ‘저승’ 자체가 소멸되기 때문에,
심판 후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묵시 20,13-14).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이 말씀은 ‘성체성사’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생명의 원천이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어디 다른 곳에서 그 생명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 그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여기서 “나의 살이다.”는 “나 자신이다.”로 해석됩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원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은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그 빵에 들어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한 번 주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일회성 생명이 아니라, 결코 고갈되거나 소진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빵을 먹으면”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이 빵을 먹어야만”입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만나’는 처음부터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한 빵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만나’를 먹은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나’를 내려 주신 하느님을 제대로 섬겼다면,
그들도 ‘만나’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빵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빵이었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파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성체성사의 뜻과 가르침을 생각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고, 그냥 형식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영성체를 한다면,
성체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영성체를 한다고 해서
아무나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 요한 6,44-51: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조욱현신부-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즉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온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우느냐? 바로 아드님에게서 배운다. 그분은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아드님은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이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취하셨다. 생명이 죽음을 죽이도록 생명께서 돌아가셨다. 이 영원한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이 모이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주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명을 주신 말씀은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한상우신부-
생명의
빵으로 우리는
생명을 어떻게
대하여 하는가를
매순간
배우게된다.
생명의 빵으로
우리를 끝까지
품어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빵으로
생명의 가족이
되었다.
흙으로 빚어진
우리들 생명이
생명의 빵을
만나고 드디어
생명의 빵을
먹기까지 한다.
최초는 창조이고
최고는 생명의
빵이다.
하느님 친히
당신의
생명으로
밥상을
차려주신다.
삶을
차려주신다.
생명을
이어가게
하시는 분은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삶이란
다름아닌
생명을 향하는
생명의 삶이다.
생명의 빵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먹는 생명의
빵이 우리 삶을
변화시킨다.
생명의 빵으로
사랑하고
생명의 빵으로
화해하고
용서한다.
빵의 기적은
바로 살아있는
이 순간이 바로
기적의 순간임을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다.
생명의 기적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다.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으로
감추어져 있던
삶의 신비가
열리기 시작한다.
생명의 빵은
삶의 부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과정을 보여 주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예수님께 온 이들은 자기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선택하신 이들을 불러 당신 아드님께로 보내어 구원의 기회를 마련해 주십니다. 아버지 덕분에 아드님 앞에 나아온 이들은 아드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 계시하십니다. 말씀이 반복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드디어 진리와 맞닿습니다. 당신을,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빵으로 이해시키시면서, 영혼의 생명까지 주는 하늘의 빵이라고 하시더니, 결국 그 빵이 당신의 살이라고 맺으십니다. 모르는 이들이 들으면 가히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당신 생명을 내놓아 우리를 살게 하시겠다는 뜻이고, 이 세상의 끝에서 영원으로 이어질 성체성사를 준비시키시는 것이지요.
제1독서는 사도를 통해 복음이 전해져 한 인격의 핵심에 가닿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주님께서 천사를 시켜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필리포스를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인도하십니다. 그는 여왕을 보필하는 고관이였지요.
이방인이면서 예루살렘까지 와 경배하고, 오가는 길에 성경까지 읽는 걸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는 꽤 열심한 사람입니다. 마침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읽으면서 자신의 실존을 건드리는 대목을 만나 그 참 뜻을 깨닫게 해 줄 누군가가 간절했던 찰나였지요.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사도 8,35)
성경 말씀은 읽는 이의 실존을 건드리며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자신에게서 멈추지 않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지요. 말씀을 읽고, 다가오신 말씀에 머무르는 건 말씀의 표면을 뚫고 진리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기도의 여정입니다. 표면만 흝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진실을 깨닫게 되고, 또 새롭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로써 결국 새로운 피조물인 자신을 통찰하는 지혜와 주님을 만나는 은총을 얻게 되지요.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사도 8,39)
그는 필리포스를 만나 말씀을 전해 듣고, 세례까지 청해서 받습니다. 주님께서 사명을 마친 필리포스를 그의 눈앞에서 데려가셨지만, 홀로 남은 그는 아쉬움이나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기쁨에 가득차 "제 갈 길"을 가지요.
말씀의 정수에 닿은 이는 그렇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친히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실 것이니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로 기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다가오시는 말씀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사랑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완고하고 무딘 우리 마음을 뚫으시려고 주님께서 당신이 생명의 빵, 사랑의 빵이심을 반복해 들려 주십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결핍을 잘 아시는 그분은 우리를 살게 하고 풍요롭게, 충만하게 하시는 빵이십니다. 생명이신 그분을 놓지 않고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고육지책
-김찬선신부-
어제 일종의 미술 치료를 하시는 수녀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남자들 중에는 미술 치료를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 않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시며 남자들은 자기표현도 잘할 줄 모르고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다 하려고 한다는 당신 생각을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남자들이란 자기 감정표현도 잘못하고 들어줄 줄도 모르며,
도움을 받을 줄도 모른다는 것인데 그것이 다 자기 힘으로
하려고 들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더 교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 관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길을 가다가 모르면 잘 묻지만
남자는 모르면서도 잘 묻지 않아서 길을 그르치곤 하지요.
그런데 길을 묻지 않아 누굴 만나러 가는 길을 그르치고,
일 보러 가는 길을 그르치는 것은 우리가 인생길과 황천길을 갈 때
인도를 받지 않아 그르치는 것과 비교하면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이끌리다>는 표현을 주목합니다.
독서에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겐타케와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이치나 이 세상 인생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와 같은 것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고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 이치나 천상길은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알려 줄 수도, 이끌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상 이치나 천상길을 이끌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앞서 봤듯이 우리가 이끌림을 받으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요한복음 6장에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세상 양식이나 구하지 천상 양식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예수께서 그 천상 양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시 어제 일인데 수녀님들이 빵을 구우셨고 저에게 권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밀가루로 만드는 데도 국수는 좋아하지만
빵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배고파야지 먹지 그렇지 않으면
잘 먹지 않는다고 대답하니 여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멋이 있고 멋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의 멋쟁이라는 말처럼
맛이 있고 맛을 아는 사람이라는 맛쟁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빵과 관련하여 저는 맛쟁이가 아닌데 그 이유가
어렸을 때 먹던 것을 커서도 고집하는 토종 맛쟁이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세상 맛쟁이이지 하늘 맛쟁이가 아니어서
하늘 양식을 맛 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쓰시는 방법이 고통이고 그렇지만
이 고통이 세상 것은 맛이 떨어지게 하고 천상 것은 맛 들이게 하는 거지요.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자기의 회개를 얘기하며
주님께서 자기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다고,
나병 환자를 보는 것이 쓰디썼는데 주님께서 자기를 나병 환자에게
데리고 가심으로써 쓰디쓰던 것이 단맛으로 바뀌었다고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는 방법이 고통이라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그것이 고집 센 입맛을 당신께로 바꾸시기 위한, 그야말로 사랑의
그 고육지책苦肉之策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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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빵”은 “살리는 빵”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시고, 당신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에게서 부활하십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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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3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0) | 2021.04.23 |
2021년 4월 20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0) | 2021.04.20 |
2021년 4월 19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0) | 2021.04.19 |
2021년 4월 18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0) | 2021.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