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19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4. 19. 07:08

2021 4월 19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요한 6,22-29)

 

Do not work for food that perishes
but for the food that endures for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 삶의 결정적인 방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뵈려고 성경 공부를 하고, 열심히 미사 참례하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만나 뵌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자들을 만나면 그 병을 고쳐 주시고, 죄인을 만나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드시고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다스리는 세상, 곧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자기 삶의 방향으로 정하는 것이 신앙인이 지닐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을 만나 세상과 삶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사랑의 구조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이’, 곧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구조로 보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시듯 하느님께서는 인간도 필요하십니다. 오로지 내어 주시고자 전능하시고 완벽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그토록 귀한 존재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도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서로 필요합니다. 이 사랑의 구조로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과 자연을 바라볼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이제 이웃, 자연, 세상을 향하여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내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타조를 아십니까?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고, 동물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타조 농장도 인기라고 하더군요. 타조는 조류이지만 키가 2.4m나 되고, 무게도 155kg 정도 됩니다. 날개는 퇴화하여서 날 수 없지만 달리는 속도가 빨라 시속 90km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말의 속도가 60~70km/h이기 때문에, 말보다도 빠른 속도입니다. 여기에 발길질은 얼마나 쎈지 발길질 한 번에 커다란 동물을 단숨에 죽일 수도 있습니다.


빠르고 엄청난 발길질이 있는 타조입니다. 그런데 겁이 많아서 맹수에게 쫓기면 같은 곳만을 뱅뱅 돌다가 모래나 바위틈에 고래를 처박습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타조 같은 모습을 취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심리학 용어 중에 ‘타조 콤플렉스’가 있더군요. “나는 못 해.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라고 하면서 외부세계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주장을 못 해서 타조처럼 같은 곳만 맴돌며 그러다가 고개를 처박으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최악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나만의 장점이 있으며, 할 수 있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타조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 뜻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본 뒤에 예수님을 쫓아 옵니다. 왜 쫓아 왔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무엇인가를 얻을 생각만 가지고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육체의 양식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자신은 능력과 힘이 없으니, 주님께서 알아서 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것은 그들이 덧없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추구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펼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과 늘 함께하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갖게 됩니다. 큰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 내 편인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믿음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합니다.
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책임을 다하면 꼭 성공한다(데일 카네기).


잊어버리는 은총

도심지에서와 달리 갑곶성지에서는 아주 다양한 동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고라니, 어렸을 때 만화로만 봤던 딱따구리, 며칠 전에는 너구리를 만나서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밖에도 참 많은 동물을 보게 됩니다.

작년 가을, 아침에 성지 마당을 산책하는데 청설모를 만났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를 옮겨가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청설모를 보며 언젠가 책에서 봤던 글의 내용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바로 청설모와 다람쥐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청설모와 다람쥐가 가장 좋아하는 식량은 도토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청설모와 다람쥐는 겨울철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땅속 곳곳에 맛있는 도토리를 숨겨 둔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청설모와 다람쥐의 머리가 너무 안 좋아서 숨겨 둔 도토리를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양이 자그마치 숨겨 둔 도토리의 95%라고 하네요.

이렇게 못 찾은 도토리는 어떻게 될까요? 땅속에서 싹을 틔워 나무가 됩니다. 청설모와 다람쥐의 나쁜 기억력이 나무를 자라게 해서 숲을 이루게 합니다.

기억하지 못함도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주변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적당히 잊을 수 있는 것, 이것도 은총이 아닐까요?

 성체가 하느님임을 믿으면 벌어지는 일; 지금처럼 살지 않게 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표징에 이은, 성체성사에 관한 긴 요한복음만의 설교내용이 이어지는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며,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분명 우리에게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일 진데,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일, 곧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고, 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믿을까요? 믿지 못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모시고 다녀도 그분이 막상 물 위를 걸어올 때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던 것처럼 실제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라고 하십니다. 내가 영하는 성체가 그리스도이심을 진정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모세에게 일러주신 하느님의 이름, “나는 나다.”에서의 “나다.”입니다.

    부모와 함께 있는 아이도 두려움이 없는데, 하느님과 함께 있는 우리야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여전히 무언가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런 것들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곤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며 할 행동은 아닙니다.

    실제로 내 안에 하느님을 모시면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자매님께서 이런 체험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분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고아처럼 자랐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은 두려운 곳이었고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불만을 가지며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술과 담배, 그리고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결혼은 했지만 같은 수준끼리 만나게 되어있는 것이기에 자신보다 더 우울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약을 앞에 놓고 누가 먼저 죽을 것인지 이야기하는 게 대화의 주제였습니다. 자매는 이미 3번이나 시도하여 위세척으로 살아났지만, 여전히 삶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자녀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자녀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빚으로 더는 삶을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어릴적에 세례는 받았지만 자매님은 성당에 제대로 다닌 적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산에 올라갔다가 밑에 성당이 보여서 찾아갔습니다. 마침 소공동체 모임을 하는 날이어서 동네 사람의 초대로 엉겁결에 소공동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소공동체 복음 나눔의 내용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는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가엾은 마음’이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고 쓰다듬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성경 구절에서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이 틀림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것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이후 3년 동안 울었다고 합니다. 3년 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에 눈물이 흥건했다고 합니다. 처음 받아본 진짜 사랑 때문에 자아가 죽어 눈물로 솟구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님은 “예수님을 만나고 눈물을 흘려보지 않았으면 거짓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개신교에서 개종하여 처음 성체를 영한 자매님이 눈물을 흘리며 “저는 지금까지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여겼는데, 진짜 그분의 살과 피를 이제야 먹고 마시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그냥 영하고 들어가는 기존 신자들이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번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너는 담배를 끊을 것이다……. 이제 끊었다.”
그때까지 20년 넘게 하루 두 갑씩 담배를 피워왔는데 그 순간 딱 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끊으려고 수없이 노력했는데도 안 됐는데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다시는 냄새도 맡기 싫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체가 진짜 하느님임을 믿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제로 성체가 하느님이라 믿고 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기 위해 믿음을 성장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깨닫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체험들로 시작하여 성체만 영하면 아무리 큰 풍랑이 와도 이미 정박해 있는 배처럼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흔들리는 이유는 세상 많은 것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그 집착은 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깁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조재형신부-

 

자전거로 맨해튼을 다녀왔습니다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자유의 여신상도 보았고, 9.11 기념관도 보았습니다센트럴 파크도 지나갔습니다자전거 전용도로가 있어서 좋았습니다그런데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차가 올 수 없도록 철재로 된 봉이 있었습니다자전거는 충분히 지나 갈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그런데 제 눈에는 공간이 너무 좁게 보였습니다공간이 좁게 보이니 속도를 줄이게 되고속도를 줄이니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봉과 봉 사이를 지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함께 한 신부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봉을 보지 말고 멀리 앞을 보세요.’ 멀리 앞을 보니 봉과 봉사이의 거리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그 뒤로는 봉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봉을 볼 때는 봉이 문제였는데봉을 보지 않으니 봉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신부님의 말이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멀리 앞만 보세요.'

 

바둑의 용어 중에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하수는 눈앞에 있는 것만 봅니다고수는 멀리 앞을 봅니다고수가 작은 것을 주면 하수는 덥석 눈앞에 있는 것을 차지하게 됩니다그러는 사이에 고수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게 됩니다하수는 작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큰 전투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신앙의 여정에서도 소탐대실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그러나 금송아지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가 없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셨습니다유다는 세상의 권력과 명예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고 말았습니다욕망도두려움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 수 없습니다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습관처럼 책상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부모님께 길을 찾아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학생입니다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알고 있는 학생입니다그런 학생은 공부하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책상 앞에서 공부를 하기 마련입니다그 길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정답을 먼저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제자들은 각자의 의견을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방법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셨습니다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빵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그리고 그것은 제자들이 직접 행동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빵을 배불리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표징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면 빵은 언제든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참된 구원은 지금 당장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를 먼저 신뢰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을 주시지 않았습니다커다란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다다만 하느님의 아들이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고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그 믿음 위에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그 믿음이 온갖 박해와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여러분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가락은 이 세상 너머,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불멸의 생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힐링 피정 오신 교우들을 안내하며 차창 밖을 내다보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환상적이던 풍경들이 순식간에 뒤바뀌고 있었습니다. 잠시 화려하고 찬란했던 나무들은 속절없이 꽃잎들과 작별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영원하지 않다는 것, 한결같지 않다는 것,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아쉽고 안타깝지만 이 세상 것들이 지닌 특징입니다. 절정의 나날에 그 화사했던 얼굴들이 며칠 사이에 고개를 떨굽니다. 유한하기 그지없는 세상 것들이 지닌 형상을 바라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은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입니다.

  

결국 영원히 시들지 않는 것, 끝까지 청청하게 남아있는 것, 언제나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뿐입니다. 오늘도 한치 앞 눈앞의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제게 예수님의 권고말씀이 쿵 하고 큰 울림을 건넵니다.

  

“너희는 썩어 업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복음 6장 27절)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듯 해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없어질 양식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과 식별력을 청해야겠습니다.

  

빵을 많게 하신 예수님의 기적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군중의 태도는 아주 집요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기대치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더 엄청난 기적, 더 큰 파워, 더 놀라운 표징...

 

군중의 그러한 태도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들의 삶은 그만큼 힘겨웠고, 절실했던 것입니다. 오랜 외세의 압제와 무능한 왕권, 부실한 지도자들로 인한 백성의 나날은 언제나 불안하고 곤궁했습니다. 그로 인해 백성의 마음 저변에는 보다 강력한 지도자, 이 비참한 현실을 단번에 바꿔놓을 수 있는 절대 권력자, 초강력 메시아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장 오늘, 단 한치 눈 앞의 세상에만 몰두하고 전념한 나머지, 한 차원 너머, 이 세상 너머의 보다 가치있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군중을 책망하십니다.

  

군중이 집요하게 요구하고 기대한 표징은 외적이고 물리적이며 현실적인 기적이었습니다. 오늘 이 이해못할 현실을 단 한번에 뒤바꿔놓는 기적, 오늘 이 고통스런 병고를 단번에 치유하는 기적, 우리의 끝도없는 다양한 욕구들을 원없이 충족시키는 기적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손가락은 이 세상 너머,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불멸의 생명을 가리키고 있는데,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발밑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는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이유는 현세적인 충족이나 만족을 넘어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여러 기적이나 표징의 최종적인 주체와 목적 역시 하느님 한분 뿐이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한편, “일용할 양식”마저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식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밥그릇만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체 어떤 양식에 허기져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5)

 

그렇습니다.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하느님의 일”이란 단어를 만납니다. 여기서,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일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복음: 요한 6,22-29: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조욱현신부-

 

빵의 기적이 있은 다음 날,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이 말씀은 ‘너희는 영이 아니라 육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찾는다.’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현세에서 이익을 얻어 보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다. 교회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다른 것을 위해 나를 찾는다. 나를 원해 나를 찾아야 한다.’라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이 양식이시라는 진리를 암시하신다. 즉 “빵의 기적을 통하여 길이 남아 영혼을 기르는 음식을 찾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즉시 덧없는 음식을 찾고 있다. 너희는 육체 대신 영을 살지게 하는 음식으로 인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신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7절) 하느님의 모습이신 아드님은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그 양식을 주실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은총에 의해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새로이 변화한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 아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 은총을 받는다. 빵의 기적 의미는 우리의 참 생명을 위한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엉뚱한 것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양식을 얻고자 힘써야 한다. 이 양식을 우리에게 주는 이는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드님이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는 누군가?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이는 누구인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안에서 자랑으로 여겨야(1코린 1,31 참조) 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아드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찾는 굶주림을 주셨다. 이것은 세상의 음식이나 현세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그러한 만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현세적인 만족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즉 참된 생명,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듣고 실천해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 27)

-한상우신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로
오셨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참된
기쁨이다.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처럼 우리도
실천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삶이다.

영원한 생명은
내어맡기는
십자가의
삶에서
시작한다.

십자가의 삶은
용서의 삶이
되어 우리를
살리는 양식이
된다.

양식이
된다는 것은
이기적인 자아가
깨어지는 참된
사랑이다.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은
삶 자체를
변화시킨다.

우리의
생활에서
영원한 생명을
만난다.

우리의 생활이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다.

영원한 생명의
본질은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영혼을
제대로 보게한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치우니
영원한 양식이
무엇인지를
보게된다.

주님이시다.
부활이시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의 참맛을
보아야 할
우리들이다.

믿음이란
다름아닌
그 참맛을
맛보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양식인가?

바로
우리자신을
위한 양식이다.

오늘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그 양식을 먹고
그 삶을 따른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의 기쁨이 보입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25)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호수 위를 걷는 기적까지 보여 주신 뒤의 일입니다. 복음서의 설명을 보면 군중은 참으로 열렬히 예수님의 자취를 찾아 뒤쫓아온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무언가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시간을 들이고 배삯까지 들여가며 움직였겠지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잘 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기민하게 움직인 군중의 행위는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아가 3,2) 하던 아가서 신부의 종종걸음과 사뭇 구별됩니다. 그들은 영혼의 갈망으로 예수님을 흠모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지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예수님이 베푸신 빵이나 치유의 기적은 우선 육신의 결핍을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기적들이 육신뿐 아니라 영혼에까지 은총이 되어 온 존재를 새로워지게 하기 위해서는 표징 너머의 의미를 갈망하고 찾아야 하지요. 예수님은 군중이 육적인 충족으로 얻는 얕은 만족에서 멈추지 말고 더 깊이 들어가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신앙은 밥이나 직업, 명예나 신분 보장을 누리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의 신앙은 세상이 걸쳐 놓은 무수한 껍질들을 벗기고 들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 '감춰진 보물'이니까요. 현세적 축복이나 기적 때문에 신자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면, 아직 예수님 인격에 매혹되지 못한 채 껍데기 어디쯤에서 멈춰버린 상태입니다. 신앙의 정수를 맛보지 못한 건 말할 것도 없지요. 예수님께서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믿음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구원자 그리스도로 믿으며, 믿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믿기에 그분의 사랑과 선함을 닮고자 애쓰는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이전에 하느님의 은총의 초대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 주님을 자기 재물과 신분 유지를 위한 집사 정도로 여긴다면 하느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끌어내려 도구화한 우상숭배, 기복신앙일 뿐이지요. 신앙이 인격신인 예수님과의 사랑과 무관하다면 아직 하느님과 관계 맺지 못한 상태이고, 솔직히 자기 안위를 보장해 준다면 불교건 샤머니즘이건 이단이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이기심과 탐욕, 야망에 매몰되지 않고 진짜 신앙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로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 6,15)
초대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하나인 스테파노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서 "지혜와 성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최고 의회로 끌려갑니다. 모두가 스테파노를 거짓 고발하며 모함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지요.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는 선함을 잃지 않았고 진리를 전하는 데 담대했으며 온갖 악의에 찬 공격에도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세상이 들고 일어나 고발해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는 영혼의 평정심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하느님보다 앞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영성체송)
스테파노가 누린 평화가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자기만 편하고 안전하면 그만인 거짓 평화가 아니라, 세상 이익과 성공에 근거하지 않는 평화, 세상의 우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느님을 찾아 길을 떠난 이의 평화, 모욕과 죽음 앞에서도 기쁠 수 있는 평화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각자의 삶에서 우리는 누구를 찾아나섰고, 또  무엇을 뒤쫓고 있는지 되짚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변 사람은 우리가 보여 주는 대로 믿으니 모를 수 있어도, 주님이 아시고 자신도 알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세상 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세상 일을 하느님의 일로 만들기 위해 세상 한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답니다.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해 주님을 찾아나선 벗님을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3주 월요일-싸움이 없는 행복을 위해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27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요한 6,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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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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