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18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Margaret K 2021. 4. 18. 07:16

2021 4 18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루가 24,35-48)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With tha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신학교에 입학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앞으로 4년 뒤면 신부가 될 터인데, 지금처럼 살아도 될까? 아직 아무런 하느님 체험도 없고, 하느님도 알지 못하는데 하느님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런 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마음을 두드리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학교 학장 신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성 생활은 영적 독서(Lectio Divina)와 함께 시작되고, 영적 독서를 끝내는 순간 끝난다. 먼저 성경을 읽어라.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아라. 그 찾은 말씀을 되새겨라.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라.” 그래서 다음 날부터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말씀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종이에 써서 그 말씀을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성당으로 가는 시간뿐 아니라, 수업을 듣기 전에 노트에 그 말씀을 가장 먼저 썼습니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되뇌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되새기며 살다 보면 그 말씀과 꼭 맞아떨어지는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면 그 말씀대로 살아 보고자 더욱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고 외우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깨달음이 올라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계시는구나! 그냥 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라 바로 곁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구나! 그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을 『공동 번역 성서』에서는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고 새김’으로써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의 은총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키엣 대주교-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주님을 원망하고 주님의 존재조차도 부정하게됩니다. 요즘같이 코로나로 암울한 세상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의 시련이 주님의 탓이 아니지만 침묵하고 계시는 주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실패를 당하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주님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라는 걸 잊지말아야합니다. 고통과 절망의 순간,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바로 내 옆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시련이 없는 세상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련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는지가 중요합니다. 시련을 통해 주님의 뜻을 찾고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를 돌아보십시오.

자신의 믿음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직접보면서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돌아오자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보게되고 믿게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수천년전부터 계획된 하느님의 사업이며 수 많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수없는 계략에도 하느님의 권능을 막지 못했습니다. 죽였지만 죽일 수 없었고 아무리 무거운 돌로 무덤을 막았어도 주님을 가둘수 없었습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살아왔던 영혼없는 낡은 나를 보내고 새로운 나를 맞이해야합니다. 나를 가두었던 거대한 무덤은 바로 나의 영혼없는 육신입니다. 이기심으로 가득찬 욕망과 무거운 육신의 무덤에 낡고 무거운 나를 버리고 성령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삶,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태어나십시오.

그 옛날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볼 수 없지만 미사와 복음 속에서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십시오. 혼자드리는 기도와 묵상 중에 주님을 정중히 초대하시면 주님께서 옆에 오실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믿음의 확신을 갖고 독서와 묵상, 회개를 통해 주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께서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심치말고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할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십시오.
함께 묵상해 봅시다.

1.하느님께 버림받은 슬픔을 느껴본적이 있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2.복음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보십시오.

3. 부활하신 주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묵상해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 방에는 운동기구들이 많습니다. 헬스장 가는 것도 일이라는 생각에 혼자 할 수 있는 바벨이나 덤벨 그리고 그 밖의 운동기구들을 사들이다 보니 꽤 많아졌습니다. 사실 허리 다친 적이 있어서 운동을 평소에 하지 않으면 통증이 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잘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운동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새벽에 평소처럼 운동하다가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 가지 운동을 하고 잠깐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30~60초 정도 쉽니다. 그런데 힘든 운동을 마치고 하는 이 쉬는 시간은 꿀맛이면서 너무 짧게 느껴지고, 가벼운 운동을 마친 뒤에 하는 쉬는 시간은 오히려 길게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고통과 시련이라는 힘든 시간은 너무 길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잠시의 즐거운 시간은 짧게 느껴지면서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너무 커 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더 활기찬 우리의 삶을 만들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운동을 오랫동안 쉬다가 하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운동하면 적당히 힘들면서도 몸이 상쾌해집니다. 고통과 시련이 적당한 삶의 무게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타나십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통의 순간 뒤에 제자들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였습니다. 고통과 시련에만 머물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 평화를 가지고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평화를 얻었기에, 제자들이 겪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커다란 은총이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기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사명을 전해주십니다.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든 민족에 대한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사명을 언제까지 지키고 따라야 할까요? 우리는 그날과 그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간직하면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조지 앨리엇).


균형감각 만들기.

저는 침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말한다면 아주 간단합니다. 침대에서 자주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디 여행을 가서도 침대가 넓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침대는 이런 이유로 편하지 않은 잠을 자게 합니다.

보통 잠을 잘 때, 50번 이상을 뒤척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일반 어른은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며 뒤척이지만, 아이는 한 방향으로 뒤척이기에 침대에서 종종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몇 차례 떨어지면 몸이 기억해서 균형감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그럴까요?

솔직히 몇 차례 떨어지다 보니 특단의 조치를 많이 취했습니다. 이불 양옆을 침대에 묶어서 위로만 이불에 들어갈 수 있게 한 적도 있고, 지금처럼 침대를 치워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균형감각이 생기지 않았나 봅니다. 떨어져야 균형감각이 생긴다고 하는데, 이를 아예 피하려고만 했던 저였던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침대 위로 올라가서 균형감각을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됩니다.

고통과 시련도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삶의 활력소와 함께 자신을 더 성장할 수 있게 해줍니다. 삶의 균형을 맞춰줍니다.

 체벌을 하면 안되는 이유: 자녀는 어치피 부모를 닮는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십니다. 당신이 영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생선토막을 먹어 보이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설명해주시며 구약의 모든 예언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신약에서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구약에 모두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듯 당신의 삶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음을 밝히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사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이 다 이것이라 굳이 예를 들 필요는 없겠지만, 아담과 요나의 예언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깨어난 것처럼 당신도 부활하실 것임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러야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회개시키기 위해 땅속에 그렇게 묻혀계셨어야 했습니다. 결말은 니네베의 회개였습니다. 니네베가 교회라고 본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회개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으로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결정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구약을 성취하기 위해 사셨다면, 우리는 신약을 성취하려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었고, 신약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는 말이 많은 나라의 속담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매를 때린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매를 때리지 않으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매를 때린다는 말은 “넌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란 말이 들어있고, 그렇게 체벌을 많이 당한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자존감이 떨어지는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고귀함을 채우려 하는데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은 돈이나 쾌락, 명예로 채워집니다.
 

    유대인 600만 명,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내게 만든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는 어떤 부모에게서 자랐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순종적이기만 한 어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적인 면에, 어머니는 가정적인 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히틀러는 사회적으로는 폭력적으로, 대내적으로는 순종적으로 사람들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체벌은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으려는 것은 ‘본능’입니다. 생존본능입니다. 만약 전갈이 개구리나 인간을 닮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어디에서나 소외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고 싶은 마음만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 생활이 필요한 어떤 동물이건 자신의 부모를 찾아서 닮고자 하는 것은 생존본능입니다. 그러니 자녀가 말을 안 들으면 부모 자신이 모범을 보이는지 살펴야지 자녀 탓을 할 것은 아닙니다.
 

    임영웅의 큰아버지는 2020년 3월 12일, 미스터 트롯 결승전에서 임영웅이 어떤 노래를 부를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1995년 3월 12일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아버지의 애창곡인 ‘배신자’를 부를 것을 예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임영웅은 아버지가 5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애창곡을 부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버지가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춘기 전까지만 해당합니다. 그 이후에는 자녀들이 더는 부모를 닮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신들의 참 창조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때 기필코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게 해야 합니다.
 

    요즘 박수홍 씨 이야기가 뉴스에 많이 올라옵니다. 그는 결혼할 여자를 어머니께 데려갔는데 어머니가 반대를 하여 여자와 헤어졌습니다. 지인들에 의하면 둘이 잘 맞았고 헤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아직 육적인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자녀는 결국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커다란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게 주님이 참 부모임을 믿게 하지 못한다면 부모에게도 결국 손해란 뜻입니다.

 

    예수님도 ‘구약’, 즉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며 사셨습니다. 우리가 성취하며 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삶, 즉 신약입니다. 이 모범을 찾지 못한 사람은 부모 없이 늑대에게 길러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에게 어떤 예언을 주었을까요? 그는 아들 둘에게 사람들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 잘 될 것이라 믿게 한 것입니다. 희생을 통한 사랑만이 죄를 없앱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작은아들은 꼴찌 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두 아들은 성장하여, 큰아들은 큰 사업가가 되었고 작은아들은 아버지처럼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예언이 옳음을 증명하며 살기 때문에 항상 내가 이웃 사랑만이 유일한 진리로 가르치며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 중심, 회당 중심, 랍비 중심’으로 삽니다. 자신들은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회당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모든 대소사를 랍비와 상의합니다.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을 하느님 예언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인정하게 하고, 이를 위해 성당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며, 사제들에게 하느님 뜻을 먼저 묻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부모를 통해 자연적으로 참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분명 십자가를 거치겠지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5대양 6대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모습입니다그러나 오래 전 지구는 하나의 대륙이었다고 합니다하나의 대륙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하나는 대륙을 떠받치는 맨틀입니다맨틀은 하나의 대륙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대륙의 무게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맨틀은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화산이 폭발했습니다오랫동안 화산이 폭발하면서 지구는 몸살을 앓았습니다지구 생명의 대부분이 멸종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다른 하나는 생명 다양성의 문제입니다하나의 대륙은 갑작스러운 재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생태계는 사슬처럼 묶여있기 때문입니다때문에 하나의 대륙에서는 재난이 발생하면 모든 생명체가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화산폭발과 소행성의 충돌 등의 원인으로 지구의 생명은 5번의 멸종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대륙은 지금의 모습처럼 6대륙이 되었습니다. 6대륙이 되면서 바다의 생명도 풍성해졌습니다대륙마다 낮은 바다가 있었고낮은 바다는 생명이 살 수 있는 터전이 되었습니다지구의 맨틀도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6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입니다지금도 화산이 폭발하지만 하나의 대륙에서처럼 오랜 시간 대규모의 화산폭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재난과 질병이 발생하여도 6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져있기 때문에 멸종에 이르지는 않습니다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대륙은 지금도 매년 조금씩 이동한다고 합니다지금은 높은 산이지만 예전에는 깊은 바다였던 곳도 있습니다사하라의 사막도 예전에는 초원지대였다고 합니다고고학과 지리학은 지구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지구의 미래도 예측하고 있습니다하나의 대륙이 6개의 대륙으로 나눠진 것은 분열이 아니라 진화였습니다.

 

2000년 전예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여주셨고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로마의 식민 통치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부와 권세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묶인 이와 갇힌 이를 풀어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더 이상 율법과 계명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까지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성공과 권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도따르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예수님은 잡혀갔고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었고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부터 이상한 소문이 시작되었습니다그 소문의 시작은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에게서 나왔습니다여인들은 무덤을 찾았으나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천사들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여인들은 이 소식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누었습니다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미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그것은 허망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은 수치와 굴욕이 아니었습니다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새로운 시작의 이름은 부활이었습니다예수님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 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생선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 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성전 문 곁에 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한 다음, 솔로몬 주랑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셨음을 선포합니다. 곧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치유를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징표로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온 세상의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주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깨달음으로 변화된 삶, 부활의 삶으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깨우치시고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만지고 먹으면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그렇습니다. 눈도 귀도 마음을 열어주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영으로 하여 그 통로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비록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어도, 결코 마음을 열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막달레나 마리아도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눈을 떠야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면 곧 부활입니다. 눈이 열리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부활의 신적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시고자, 먼저 그들을 깨우치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46)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당신 빛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잉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질서, 당신의 뜻과 지혜,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신비들을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당신의 복음서가 되게 하소서. 아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송영진신부-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루카 24,36-40).”

 

이 이야기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결코 그분의 유령을 만난 것이 아니다.

그분은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셨고,

유령이 아니라 그 몸 그대로 되살아나신 분이셨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사도들이 만난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었다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몸 없이’ 영적으로만 나타나신 것은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이시고,

그 몸 그대로 되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갑자기 사라지시는 일을 반복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단순히 되살아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뒤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시는 것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이유는, 시공을 초월해서

신앙인들과 함께, 신앙인들 가운데에 살아 계시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도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부활도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그대로 되살아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이 몸을 똑같이 가지고서 부활하는 것은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1코린 15,42-44).>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고서 무서워한 것은

예수님께서 갑자기(유령처럼) 나타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자들이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증언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왜 놀라느냐?” 라는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니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라는 말씀은,

“나를 직접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왜 못 믿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마르코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제자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일 자체가 너무나도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들은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잠시 연기된 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완전히 물리치신 일이고,

그래서 그 일들과는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부활도 단순한 수명 연장이 아니라,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4-4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고,

그래서 그들이 성경의 예언들을 깨닫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긴 한데,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하신 설명의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 기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신 일이라는 것은(요한 1,29)

사도들의 서간문에도 기록되어 있고, 교리로도 정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고,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도 아니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모든 일이 다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미리 잘 짜놓은 각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부활과 승천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의 제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 계획, 섭리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게 바로 그것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그런 일입니다.

<각 개인의 인생에도 언제나 항상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이 무의미한 고통처럼 느껴질 때가 많고,

억울할 때도 많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지금의 고난이 영원한 영광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단련이라는 것도(1베드 1,7)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고,

끝까지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온 세상에 증언하라는 명령이고,

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명령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명령입니다(마태 5,13-16).

‘증언’과 ‘선포’는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방효익신부-


복음(루카 24,35-48)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클레오파스와 다른 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그들의 마음이 타올랐다(루카 24,32)고 합니다. 이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부활하신 분께서 알려주신) 일을 열한 제자와 동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고”,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일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밝히기 위해 친근하게 인사하시고, 손과 발을 만져보라 하시고, 그들 앞에서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셨고, 성경(율법, 예언서,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고, 성령을 보내주실 테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신 분”(루카 24,26)께서 불쑥 나타나 평화의 인사를 하신(요한 20,19-20) 것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언제 어디든지, 항상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분(마태 28,20)이심을 말합니다. 토마스에게 하셨듯이(요한 20,25), 유령이 아니고, 제자들도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육체적이며 감각적으로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셔서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나신(1코린 15,44)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의 썩지 않는 강하고 영적인 몸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1코린 15,35-44). 그러나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1코린 15,49)을 볼 수 있게 해주실 때에만 인간은 부활하신 분의 “영적인 몸”(1코린 15,44)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신비이기(1코린 15,51) 때문에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도 그분 안에 머무른다는 것을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알려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1요한 3,24; 4,13).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셨습니다.”(사도 10,41)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굼뜬 제자들에게(루카 24,25.2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하셨던 것(루카 9,22.44; 17,25; 18,31-33)과 당신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루카 22,37)을 들어서 가르치십니다. 전파능력이 탁월한 여인들(루카 24,1-12)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루카 24,13-35)을 통해서도 알려주었건만, 의심만 가득했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아시고 또 나타나셔서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이야말로 모두 당신께 대한 기록임을 강조하십니다. 살아 계실 때 하셨던 것처럼(루카 9,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 가장 완고했던 이들이 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당신께서 걸어오신 길을 가르치어 사람들이 당신의 길을 걷게 하라고(이사 2,1-3) 파견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루카 3,3)를 선포하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주라는 것입니다.”(루카 1,77)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갖춰야 할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이사 32,15; 루카 1,35; 사도 1,4-5; 2,2-4)으로 무장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오로지 말씀(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제1독서(사도 3,13-15.17-19)는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에게 회개와 돌아섬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장터(솔로몬 주랑)에서 유다인들을 상대로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되는 선언을 증언합니다. 유다인들의 조상들부터 믿어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인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영광스럽게 하셨고, 베드로의 업적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전 문 곁에 있는 불구자를 하느님께서 치유하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만일 유다인들이 구약성경을 잘 이해했더라면 결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다르고, 율법을 지키는 것과 실제 삶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유다인들이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올바로 믿을 수 없었고,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도 율법만 형식적으로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생명의 영도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끌어들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종”,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 “생명의 영도자”, “고난을 겪으시는 메시아”로 부릅니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유다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만 한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을 죽인 죄를 용서받는다는 핵심적 가르침을 반복합니다.

제2독서(1요한 2,1-5ㄱ)는 말로는 수긍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지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이시고(1요한 1,5)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내주신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느님의 계시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잘 알기 때문에 빛 속에서 사는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 사는 이들로 나뉘어져 있다고 합니다. 단순한 흑백논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구원이 필요함에도 요한의 공동체를 뒤흔드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의로운 이들이고, 이미 구원받은 이들처럼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과 우리를 씻어주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변호해주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와 친교를 맺게 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도 그분을 통한 구원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공동체의 아버지로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빛이신 하느님께 봉헌되었으므로 빛 속을 걸어가라고 가르칩니다. 자기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쉽게 자주 떠올리게 되는 나쁜 생각들과 행실들을 떨쳐버리려고 애써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친교를 위해 빛 속에 머무르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잘 알고, 그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영과 육을 분리시키려는 당시의 그리스 사상에 맞서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성을 강조하면서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임을 매우 실질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것은 그분께서 당신을 스스로 드러내실 때에만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려면 먼저, 그분께 돌아서야 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에 대하여 잘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처음에는 몰라 뵈었지만 구약성경은 물론 살아계실 때에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나서야 주님을 즉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요구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을 겪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믿어야 알 수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주님을 안다면 주님을 더욱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을 모른다면 우리도 역시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잘못을 또 저지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셨고, 당신께 대해 증언하는 성경말씀을 깨달아서 뜨거운 마음이 타오르게 하시고, 당신께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선포할 것을 원하십니다. 결국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신비를 열어주실 때 그분을 구세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분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식구조에서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항상 함께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앙 안으로 들어온다면 믿는 것과 아는 것과 사는 것이 갈라집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앎은 그분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1요한 4,16),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호세 2,22; 1요한 4,8). 비록 서툴고, 때로는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가르침을 알고 지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요한 8,55; 1요한 5,3). 그런데 믿음과 앎과 말씀을 지키는 일이 갈라진다면 그분을 통하여 드러난 진리(요한 1,17)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고(요한 15,14),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거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요한 17,3; 12,50).
어둠 속에서 사는 이들의 “살과 피는 하느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1코린 15,50) 그러나 우리가 빛 속에서 살아간다면, 믿음의 내용인 말씀을 잘 알고, 지키려고 애쓴다면 우리가 부활하게 되는 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몸체를 주실 것입니다(1코린 15,38.40).

 하느님의 선물

 -조욱현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다른 주일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신비"로 이끌어주고 있다. 부활의 신비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성령의 힘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보여주신 그 무한한 사랑과 권능만이 아니라, 정치-종교적 범죄로 단죄되어 난폭하고도 무자비한 폭력으로 죽음에 처했던 그 행위가 어떻게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위가 될 수 있었고,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35-48: 틀림없이 나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 부활사건은 환상적인 사건이 아니다. 부활을 상상조차 못 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실제의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이렇게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신 것이다. 당신의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시고자 하셨다. 이렇게 하시려고 그분은 문 닫힌 방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이 행적을 통하여 당신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결합되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 말씀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즉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산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하셨다. 바로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행해야 하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가 증인으로서 전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제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알았다면,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당신을 바치실 수 있었듯이 우리도 이웃 사랑과 자신의 희생을 통해 세상의 변화와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 신비를 확산시켜야 한다. 우리가 이미 "부활한 자녀들"(루카 20,36)라면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 세상에서 희망의 증거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치유하고 군중들이 목격한 기적적인 일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믿음을 잃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죄를 용감히 물리치기를 권고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부활의 신비 안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참된 변화를 우리가 가지며 부활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 36)

-한상우신부-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다.

부활은
평화에
동참하는
평화의
삶이다.

하느님의
힘은 참된
평화로
드러난다.

평화는
평화가 필요한
우리를
향해 있다.

평화는
십자가를
되찾아준다.

십자가의
수난으로
일구어낸
참사랑이다.

십자가 없는
평화는
가짜이다.

평화는
우리의
가면을
벗겨낸다.

십자가의
여정이
평화의
여정이다.

평화는
묶여있던
이 모든 것을
풀어준다.

평화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예수님
삶 자체가
살아있는
평화
그자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평화를 이루는
삶이 참된
사랑의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하는
평화이다.

평화는
새로운
삶이다.

삶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부활의 삶은
평화의 삶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로
이어주는
평화가
우리들
가운데 있다.

그 평화를
기쁘게 나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경의 의미를 깊이 각인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루카 24,36)
실의에 차 엠마오로 낙향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동료들과 만나 서로의 체험을 나눕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의 축복을 베푸십니다.

"바로 나다."(루카 24,39)
놀라고 두려워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 자신이심을 계시하십니다. 제자들이 깨닫도록 당신을 만지게도 하시고 무언가 잡숫는 모습까지 보여주시면서 그들의 완고하고 움츠린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늘 하느님 이야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대화가 가장 그리스도인답고 신앙인의 본질에 가까운지 오늘 복음은 알려줍니다. 세상사, 인간사에 훨씬 더 기울어진 이들은 복음이나 신앙체험 이야기를 쑥스러워하거나 불편해하고 오히려 세속적 관심사와 자랑, 험담을 더 익숙해 하지만, 우리가 신앙과 말씀에 대해 나눌 때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당신 이야기를 하는데 그분이 빠지실 리 없으니까요. 그래서 혹 스스로 하느님 체험이 없다고 여긴다면,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경청하는지 돌아보면 이유가 보일 듯합니다.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예수님에 대해서는 사실 유다인이 목숨처럼 믿고 지키는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그 모든 내용의 실현이시고, 또한 말씀 자체이시며 완성이시니까요. 다만, 마음을 열고 보아야 보이고, 또 귀를 열고 들어야 들립니다. 그래야 깨닫지요. 그분은 새로움을 거부하는 마음으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혜이십니다.

하느님과 성경 말씀에 대해 진솔히 나누는 자리에는 예수님께서 계시면서 더욱 깊은 통찰력으로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지혜가 지혜를, 선이 선을, 영적 성장이 성장을 부르지요.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 진다'(마태 13,13 참조)는 말씀이 딱 들어맞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성경 말씀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 3,18)
베드로는 유다인들이 이방인의 손을 빌려 죽인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세주이심을 명백히 합니다. 성경을 잘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결국은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으니 이제는 회개하여 죄가 지워지게 하라는 격려로 설교를 끝맺지요.

제2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말씀과 우리의 관계를 알려 줍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말씀을 듣고 믿는 이, 말씀에 머무르고 사랑하는 이, 말씀이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이 안에는 주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오매불망 말씀을 품고 당신을 바라는 이를 그분은 결코 외면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이는 어떤 굴곡진 삶의 현장을 지나더라도 말씀을 품고 있기에, 그의 삶 가운데에는 평화의 축복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항상 현존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어 가지요.

비록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하느님의 사랑이 존재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이는 神化(Deificatio)의 여정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어 갈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담고 그분을 닮아갑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되어 가지요. 말씀과 하나됨으로, 말씀이신 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복음환호송)
우리가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읽고 듣고 품으며 형제자매, 이웃과 나눌 때 바로 그 자리에,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오시어 우리 마음을 불타오르게 해 주십니다. 사랑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으로 더 깊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은 말씀이 우리를 사랑으로 변모시킵니다. 점점 더 사랑이 되어가는 이는 성삼위 하느님 안에 일치로 녹아들어가지요. 그가 말씀과 분리될 수 없듯이, 주님과 그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을 나눔으로써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조금 낯설고 쑥스럽고 생뚱맞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누군가 먼저 시작해 주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말씀 안에서 함께 풍요로워져 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말씀이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깨닫게 하시는 주님

 -김찬선신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오늘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인데

그는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라고

전혀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백성들에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베드로가 사실은 이 백성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곧 마찬가지로 무지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도망쳤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니 이 말은 나는 잘못이 없는데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남탓이 아니라

자기도 같은 사람이라는 공동 죄 인식에서 한 얘기이고

그래서 베드로는 백성들을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아시다시피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제자들 중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안 유일한 존재였고 그래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에 예수님으로부터 그것은 인간 누구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는 칭찬도 받고

베드로를 반석 삼아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럴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가 '너는 사탄'이라는 호된 질책을 받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 그리스도가 힘 없이 그리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라는 것까지는

몰랐고 그래서 예수께서 맥 없이 죽게 되셨을 때 배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배반하고 죄책감과 절망감에 빠져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이 죽은 그 예수이고 그러나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쓰시는 내용,

곧 당신의 손발을 보여주시고 빵도 같이 잡수시는 내용이 오늘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제자들이 깨닫게 하시려고 갖은 애를 쓰시고,

이런 내용의 복음을 우리가 지나쳐 읽지 않고 찬찬히 읽는다면 깨닫게 하려고

애쓰시고 공들이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깨닫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주님 사랑에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응답은 우리의 마음을 열고 깨닫는 것이고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생명의 영도자를 다시 죽이는 일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베드로가 무지하여 주님을 죽였다고 나무라는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우리도 생명의 영도자를 죽일 수 있습니다.

 

물론 알고서 원수 죽이듯 죽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깨닫게 하시려고 그리도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또 다시 죽이는 것임을 모르고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 것이고 수난과 부활의 주님 사랑을 느낄 것이며,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는 오늘 주님의 마지막 말씀처럼

주님 사랑의 증인, 수난과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4월 15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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