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5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 3,31-36)
The one who is of the earth is earthly
and speaks of earthly things.
But the one who comes from heaven is above all.
He testifies to what he has seen and hea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지만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기에 당신께서 몸소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신 친교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늘 복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와 마치실 때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1요한 4,16 참조). 사랑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주시는 분이신 아버지께서 사랑을 주시려면 이를 받으실 아드님께서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주시고자 하실 때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아드님 손에 내주십니다. 그러면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다시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 드리십니다. 순수한 영이신 아버지와 아드님께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내어 주시고 또 온전히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계시어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 일치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그 아드님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생명을 거부하여 죽음의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부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자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아이를 키울 여력이 안 돼서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요즘 자녀를 키운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부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제 형제는 자그마치 여섯이나 됩니다. 동물이야 두세 달이면 스스로 독립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 독립할 수가 없습니다. 거의 이십 년 이상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요즘에는 이 보호 기간이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저희 형제를 부모님께서는 자그마치 여섯이나 키운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때 이 점을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여섯이나 낳고 키우셨어요?”
그때 어머니께서는 “글쎄, 지금은 못 키우겠지. 그런데 그때는 힘들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제 성격만 봐도 이런 저 하나만 키우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와 비슷한 형제를 여섯이나 키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힘들지 않았다고 하셨을까요? 분명히 힘드셨을 것입니다. 지난 과거의 일이기 때문에, 지나고 보니 힘들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고통과 시련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힘들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고 따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땅에 속해 있는 세상을 따르지 않고 주님을 따를 때 사람들의 반대를 부딪치곤 합니다. 이 순간이 커다란 고통과 시련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시는 분을 믿고 따를 때, 고통과 시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분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땅에 속해 있는 세상의 고통과 시련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이를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늘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바로 이 순간, 주님께서 이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또 주님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성찰을 통해 지금을 이겨낼 수 있으며,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가 좋았어.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치유 받았다’라는 것은 병이 낫더라도 죄는 남아서 또 다른 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가 치유된 다음에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또 예물을 바치는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런 과정을 생략하십니다. 용서되어 깨끗해졌기 때문에, 굳이 사제에게 갈 필요도 없고 예물을 봉헌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가난과 연결된 병자를 예물이란 짐에서 자유롭게 해줄 뿐 아니라, 이런 의식을 재생산시키는 예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십니다. 치유 너머까지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결과가 ‘병’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과 행동은 새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기성 종교의 반발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기성 종교의 반발을 누르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사랑의 길을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원리원칙을 내세우면서 사랑의 길을 지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의 길만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왜 진리의 증언을 믿지 않으면 진노가 따르는가? 진리와 능력은 하나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입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을 믿어야 하고 그러면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도 없을뿐더러 하느님 진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진리 안에는 성령의 힘도 함께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견하실 때 지팡이의 능력도 함께 주셨습니다. 말과 능력이 합쳐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믿고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이 따르지 않는 증언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둘이 아니시듯, 진리는 능력과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지 않으면 진노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지 못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보육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7세 담임을 하던 시절 만난 재혁이(가명)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형과 사는 아이였습니다. 바쁜 아빠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고, 아이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비난과 훈계를 일삼았던 분이었습니다.
저희 원에 3세부터 다니던 재혁이는 집에서 채우지 못하는 욕구와 감정을 원에서 해결했습니다. 아이들을 때리고, 교사들을 괴롭히기 일쑤였죠. 당연히 교사들은 재혁이 담임이 되는 걸 두려워했고, 재혁이로 인해 많은 엄마의 불만이 차고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재혁이 담임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첫날 다른 친구들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재혁이를 아이들 앞으로 세웠습니다.
‘얘들아, 사람은 모두 다른 장점이 있거든. 우리 재혁이는 튼튼한 몸이 있어서 1년 동안 우리 친구들과 선생님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보디가드가 될 거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재혁이에게 도움을 청하자. 재혁아 도와줄 수 있니?’
그리고 수시로 교실에서 재혁이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재혁아, 선생님 좀 도와줄래?’
‘재혁이가 있어서 선생님은 너무 든든해.’
‘재혁아, 너는 참 괜찮은 친구야!’
‘그동안 재혁이 마음이 아팠던 건, 그래서 친구들을 괴롭혔던 건 재혁이 잘못이 아니야. 사람들에겐 모두 사랑 창고가 하나씩 있는데 어른들이 우리 재혁이 사랑 창고를 채워주지 못해서 재혁이가 친구들에게 줄 사랑이 없었던 거야.’
‘오늘도 선생님과 친구들이 재혁이 도움을 많이 받았네. 고마워.’
그렇게 재혁이는 달라졌습니다. 졸업식 날 재혁이 아버님께서 참 많이도 우셨습니다. 재혁이에게 미안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재혁이와 약속했습니다.
‘이제 아빠도 괜찮은 아빠가 될게.’ ”
[출처: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다음 카페, ‘광양 시립 진상 어린이집’]
이 보육 교사는 분명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고 그래서 사랑밖에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진리이고 능력입니다. 위 교사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 증언대로 아이를 변화시켰습니다. 진리 안에는 능력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그동안 아버지가 재혁이에게 했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진노가 따를 것입니다. 변화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기적보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듯 진리의 증언에는 능력도 함께 따르기에 믿지 않으면 고집을 부리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중국 무술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실전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는 중국인이 있습니다. 바로 가짜 무술 헌터라고 불리는 쉬샤우둥입니다.
알리바바의 마윈까지도 쉬샤우둥을 이기는 중국 무술 고수가 있다면 수십억 원을 주겠다고 돈을 내걸었습니다. 이에 중국 무술 고수들이 도전했다가 번번이 창피를 당했습니다.
그는 김치가 중국 것이고 태권도도 중국 것이라는 주장에 김치도, 태권도도 한국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면서도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누구도 그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는 말이 옳아지려면 그에 따른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무술은 계속 시대에 뒤떨어져 그의 말대로 서커스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진리를 믿지 않는 데서 오는 진노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그분의 대를 이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감히 시작할 용기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능력이 있음에도 믿지 않는다면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중국인들이 왜 쉬샤우둥의 말을 믿지 않을까요? 그들이 하는 무술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진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증언 앞에서 그러하면 안 됩니다. 그분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교회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능력과 함께 선포되는 진리는 믿지 않으면 남는 것은 진노뿐입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의 예수회에서 노예제도에 대해서 사과하면서 1억 달러를 배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예수회는 100여명의 노예를 매입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돈을 주고 샀습니다. 이는 신앙의 길에 위배되는 결정이었다고 성찰하였습니다. 노예들의 후손을 찾아보니 5,000여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회는 1억 달러를 모금해서 절반은 흑인들의 권익을 위해서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일부는 흑인들의 교육을 위한 지원금으로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일부는 지금 살고 있는 노예들의 후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법적으로 위배되지 않았지만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잘못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였습니다. 사과와 더불어 배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결정으로 예수회의 정신과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예수회의 근본정신인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은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안부가 있었다고 해도 계약에 의한 자발적인 참여라고 합니다. 국제사회가 위안부의 문제는 여성의 인권에 대한 탄압과 모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친일본적인 학자들을 통해서 일본의 주장을 옹호하는 논문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하버드 대학의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그렇습니다. 학자로서의 양심과 책임을 망각한 논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이와 같은 행동은 법적인 문제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규모와 국제사회에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 바람직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독일과 같이 일본이 피해 당사국과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였다면 일본은 도덕적으로도 존경받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들은 비록 박해와 고통이 따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예수회의 결정은 비록 비난을 받고, 비용이 들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교황님 역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결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입니다. 식민지의 백성들은 제국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과 같습니다. 제국이 식민지에 길을 내 주었고, 공장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길과 공장을 통해서 수탈이 이루어졌음은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욕망, 시기, 질투, 불신, 분노, 원망의 삶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신뢰한다면, 함께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바로 이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랜 세월 사랑스런 유치원생들과 지구 살리기 운동에 헌신해오신 수녀님을 모시고 생태 환경에 대한 소중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구 살리기가 얼마나 중요한 테마인지에 대해서 이론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았던 지난 삶을 깊이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 중에 제 가슴을 크게 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현재 지구는 생태 용량이 초과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후손들이 쓸 용량을 앞당겨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이 세상을 인간이 쓰기에 좋은 세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환경 위기 앞에서 가장 큰 피해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동식물들입니다.”
“지구는 우리 인간의 끝도 없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과도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담대한 생활 양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를 아껴야 합니다.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명확합니다. 에너지 재생, 자원의 순환, 미니멀리즘의 삶!”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복음 3장 35~36절)
공생활 기간 동안 계속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다보면 예수님 역시 몹시도 지구를 사랑하셨으며, 친환경적인 삶, 미니멀리즘의 삶을 살아가셨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지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 하늘의 새들처럼 자유롭게 살라는 당부, 전도 여행길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여벌옷도 지니지 말라는 지침 등등.
부활하신 예수님의 노선 역시 공생활 기간 동안 지속된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 앞에 발현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소박하고 청빈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부활 기간 내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궁극적인 승리를 확증하고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는 세상의 승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인한 승리였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을 통한 예수님의 승리와 관련해서 늘 유념해야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패배요 부활은 승리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야말로 참된 승리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언제나 십자가 상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삶은 시종일관 승리의 삶이었습니다.
부활을 통한 영광스런 승리의 삶은 결정적인 순간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목숨까지 내건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영광스런 부활을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셨고, 우리의 영생을 위해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안에서 또 다시 죽고, 부활하고, 승리하는 삶을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오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인 "CREDO"라는 단어 역시, 'CRO'라는 ‘가슴, 심장, 생명’이라는 말과 ‘DAER'라는 ’주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곧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너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곧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 입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골로 3,1-2)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주님!
저희는 당신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지지 않는 것을 줄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께서는 그것을 내어주시기에 진정, 사랑이십니다.
주님!
당신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을 이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5,5).
“위에서 오신 당신”(요한 3,31)을 받아들여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살기에,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아멘.

<위에서 오시는 분>
4월 15일의 복음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믿음’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일은, ‘예수님은 구세주’ 라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위에서(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만물의(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분이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위에서(하늘에서) 오셨다는 말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는 뜻과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마태 28,18).
‘모든 것’은 이 세상 만물과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연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라는 말은,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이신 분’이 가지고 계시는 ‘권한’은 ‘생살여탈권’입니다.
이 권한은 사람들을 살리거나 죽일 권한, 즉 구원하거나 멸망시킬 권한입니다.
바로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살고 싶다면’(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1-12).”
그런데 인간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구원의 진리’ 라고 주장하는 이론도 많습니다.
(종교와 거리를 두거나 종교를 부정하는 과학 이론들과 철학 이론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준으로는 그것들은 모두 ‘땅에서 난’ 것들이고,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땅에서 났다는 말은, 그것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라는 뜻이고,
땅에 속해 있다는 말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종교 사람들을 적대시하면 안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우리의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 사람들과 논쟁을 하거나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말싸움을 해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2-34).”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라는 말은,
뒤에 있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라는 증언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십니다(요한 10,30).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느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도 구원받는 일에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있고(많고),
그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의지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증언인데,
이 말은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이 하나로 일치되어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 분이 하나로 일치되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일이고, ‘하느님은 구원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5-36).”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전권’을 주셨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않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복음: 요한 3,31-38: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며 아버지의 광채요 모습이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3)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오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간다. 그러기에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우리도 말을 하려고 할 때, 말하려는 개념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말이 되어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본성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하셨다.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3, 36)
-한상우신부-
아드님 자체가
믿음이고
예수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의 본질은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하느님의
영원성을
다시
만나게되는
부활이다.
우리의
생명이란
수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는
십자가의
여정이다.
순종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맞아들이게
된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은총의 뜻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갈 길을
비추어준다.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믿음과 순종
순종과
영원한 생명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가능하다.
우리의 허약한
믿음조차
사랑으로
성장시키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사랑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
구원의
여정속에
수난이 있고
순종이 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간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수난과 순종의
삶을 우리도
살겠다는 것이다.
믿음과 순종으로
모든 여정은
은총이 되고
사랑이 된다.
하느님의
생명은 수난과
순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생명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과 땅에서 난 사람의 차이를 보여 주십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요한 3,31)
땅에서 난 사람은 육에 매여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의 가치관이나 관심사가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기에 그에게 아무리 영적인 사정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들 먹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요한 3,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즉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 외에는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하나이시고, 또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드님을 완전히 결속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요한 3,33)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확증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진리와 선, 아름다움이 하느님의 반영임을 관상하며, 성삼위 하느님의 참됨에서 눈을 떼지 못하지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이십니다.
제1독서는 사람의 뜻과 하느님의 뜻 사이의 식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대사제의 지시를 어겼다고 사도들이 다시 끌려가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당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주눅들지 않고 이렇게 진리로써 응답하지요.
사도들의 응답은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이나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인들도 응당 고백해야 하는 진리지요.
성령을 받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선포하는 사도들은,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를 관상하며 그 안에 함께 머무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이 사람의 말, 육의 관심사, 땅에 속한 것을 말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겠습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화답송)
땅에서 태어난 일차적 생명을 넘어서 영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 하늘의 일을 바라보며 추구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담아주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입은 주님을 향한 찬미와 감사가 끊이지 않지요.
그렇다고 그의 삶이 늘 태평무사하고 승승장구하며, 부귀영화만 누리는 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에 머물러 하늘의 일을 관상하는 이는 세상에서 피해갈 수 없는 거센 고통과 슬픔이 덮쳐도, 그조차도 찬미로 승화하는 영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탄식 중에서도 찬미와 감사가 새어나오는 이유는 그의 마음이 이미 하느님의 말씀으로 점령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의 생각과, 입에서 나가는 말이 주로 어디에 속하는 말인지, 영의 관심사와 육의 관심사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깨어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 위치가 어디 쯤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진리가 어느 쪽인지 조금 더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하느님과 우리를 결속시켜 주시고 그분 생각을 알게 해 주시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세상의 유혹과 과대포장된 거짓 위안의 허울을 넘어서, 영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발돋움하려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사람보다 하느님께 더욱 순종키 위해
-김찬선신부-
오늘 베드로 사도는 왜 자기들의 말에 순종치 않느냐는 지도자들의 말에
아주 당연한 말을 하는데 곧 이 유명한 말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이 말에는 지도자들도 맞다고 동의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더 마땅하다고 그들도 생각할 것이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땅한 순종을 인간이 안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줄 모르면서 인간에게는 순종하고,
어떤 경우는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줄 알면서도 인간에게 순종합니다.
먼저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줄 모르고 인간에게 순종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무엇을 할 때 하느님의 뜻을 생각지 않는 경우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무엇을 할 때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하느님 뜻을 무시하는 겁니다.
이 경우 자기실현이 목적일 때도 있고
고작 자기 욕망을 쫓다 보니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은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고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신명기 말씀처럼
가까이 계시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자기 안이나 가까이 계시지 않는 거지요.
그런데 저 멀리 일본에 계실 뿐 내 삶과 실천안에 아니 계시는 하느님은
주님께서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셨지만
지금 내 안에서는 여전히 죽어계시는 것과 같은 거지요.
또 다른 경우는 자기실현이나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경우,
곧 하느님 뜻보다는 가까운 위협에 굴복하는 경우인데
이 역시 하느님은 내 옆의 사람보다 멀리 계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 우리나라의 통일, 안보, 외교 부분의 전문가이시고,
이 부분에서 대통령 자문도 하신 분께서 초월적 외교라는 표현을 쓰시며
한국이나 일본 모두 미국과 중국 양 대국 어느 편에서 서지 않는 외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뜻으로 당신 의견을 피력했는데 저도 그분의
지향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과연 말대로 될지 생각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 보듯이 중국과 미국은 우리가 자기들 편에 서기를
바라고, 바랄 뿐 아니라 압력을 넣고 협박도 하는데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가 초월적인 외교를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초월도 마찬가지여서 초월을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것처럼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는 강의 구애를
받지 않지만 문제는 강의 구애를 받지 않기 위해 높이 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는 오늘 주님 말씀처럼
우리는 이런 성령의 힘을 입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초월적 힘을
지닐 수 없고, 그래서 하느님보다 사람들 눈치나 보고 하느님 뜻보다
사람들의 가까운 위협에 굴복하여 사람들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그 유명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성령을 받았기 때문임을 우리는 다시금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4월 17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0) | 2021.04.17 |
---|---|
2021년 4월 16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0) | 2021.04.16 |
2021년 4월 14일 부활 제2주간 수요일 (0) | 2021.04.14 |
2021년 4월 13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0) | 2021.04.13 |
2021년 4월 12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0) | 2021.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