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12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4. 12. 06:01

2021년 4월 12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1-8)


“Amen, amen, I say to you,
unless on e is born of water and Spirit
he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가끔 신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신부님, 도대체 왜 그러세요?” 그러면 저는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변명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보고 배운 신부의 모습은 가부장적인 팔·구십년대 사회에서 사목하던 모습입니다. 눈으로 보고 배운 모습은 아주 가까이 있고, 말씀으로 배웠던 ―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 목자의 모습은 아직도 머리에만 있어 몸으로 옮겨 오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여 변하고자 노력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다음 질문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고 대답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무엇이고, 가장 많이 본 모습은 무엇입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보고 배운 것은 무엇이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무엇입니까? 방송이나 다른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또 성당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왔고, 그것들이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이루는 데 어떤 역할을 하였습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일까요? 오늘 본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가 이 땅의 부모에게 받은 모습은 벗어 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살고자 함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신앙의 완성이요 구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완성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세례의 삶으로 묵은 인간은 죽고 새로이 태어나도록, 사랑의 삶으로 태어나도록 노력합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시골 성당의 마당 한쪽에 여러 과일 나무가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익지도 않은 과일들을 따 먹느라 동네 아이들이 야단입니다. 골머리를 앓던 본당 신부님은 개구쟁이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로 마음먹고는 다음과 같은 팻말을 만들어 나무 앞에 꽂아 놓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본당 신부님은 이 글을 보고서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따먹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본당 신부님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과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는 자기 입맛에 맞는 하느님만을 원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는 하느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이런 다양한 모습의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나의 이웃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모든 부분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바로 지도계급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학식이 풍부하고 백성들의 교사 격인 랍비라는 호칭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기도 한 니코데모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느님만을 받아들이는 다른 종교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새로 태어남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새로이 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코데모는 아직 믿음이 모자란 상태였기에, 이 새로운 태어남의 의미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빨리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어떻게 물로써 당신의 힘을 행사하시는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이름난 스승이면서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좁은 시각으로 하느님을 봐 왔던 것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이다(M.스캇 팩).


부자같게 사는 길

비좁은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경제 사정이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잘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집에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없습니다. 이 가정의 경제 사정은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몹시 어려운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40~50년 전, 어느 중산층의 가정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시간을 넘어와 보십시오. 4~50년 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더 풍요로운 지금 많은 것을 나누고 있습니까? 어쩌면 부족한 옛날에 더 많은 것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많은 부를 가지고 있어도 부자 같지 않게 살 수도 있고, 많은 것이 없어도 부자 같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길만이 진정한 부자 같게 사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지 알아보는 법: 하느님의 뜻을 묻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밤에 왔다는 뜻은 아직은 빛 속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 태어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은 육의 죽음을 의미하고 성령은 하느님 자녀로의 새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물속에서 사는 사람도 없고 성령 속에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정 물과 성령, 즉 세례로 새로 태어났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위선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났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도 육적인 사람인지 혹은 영적인 사람으로 새로 났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그 해답까지 주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영에서 태어난 사람은 바람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배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돛을 올려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가 부모를 찾으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요? 부모가 기뻐하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영에서 새로 태어난 이도 이와 같습니다.

    해체 직전에서 급 부활하여 지금 한창 인기몰이를 하는 ‘브레이브걸스’의 아버지라 부르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가 있습니다. 바로 ‘용감한 형제’라 불리우는 ‘강동철 씨’입니다. 그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하여 자신의 험난한 인생 여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강동철 씨는 본래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형만 좋아하고 동생인 동철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주먹의 세계에 빠집니다. 그저 동네 양아치가 아닌 진짜 폭력집단에 소속되어 결국엔 17세 때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포승줄을 차고 고무신을 신고 소년원에 들어갑니다.

그 이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조직폭력배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전과 12범이 되기까지 어둠 속에서 삽니다. 지금은 그때가 지옥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20세 때 한 장의 CD를 듣고는 음악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어차피 인정받지 못할 것,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싸움꾼에서 바로 벗어나 형과 함께 집을 나와 음악을 시작합니다. 형도 아버지로부터 자신만 사랑을 받았기에 동생에게 미안하여 동생과 함께하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착한 형까지 꾀여서 나쁜 길로 빠뜨린다고 동철 씨를 나무랐습니다. 동철 씨는 코드를 모르는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6년 동안 형 흑철 씨는 동생이 음악에 열중하는 동안 막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그렇게 양현석 씨의 눈에 띄어 YG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 빅뱅을 히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처음 그의 노래가 히트된 곡이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란 곡이었습니다. 작곡가 이름이 ‘용감한 형제’로 되어 있어서 아버지는 자신이 작곡했다는 동철 씨의 말에 “그게 너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콧방귀도 안 뀌었습니다. 믿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MBC 9시 뉴스에 동철 씨가 유명한 작곡가로 소개되는 것을 보시고는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통화 했을 때, “너 맞네. 와 진짜 뭘 하긴 했다.”라는 말을 들은 후 그 인정받는 느낌에 전화를 끊고 한없이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상을 타와도 한 번도 칭찬해주시지 않던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당시 일 년에 수십억씩을 벌고 우리나라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그래. 네가 한 게 맞는 것 같다. 잘했다.”라는 인정이 그렇게 그리웠던 것입니다. “30년 동안 그 말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네요?”란 기자의 질문에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되게 이상했어요. 그냥 북받치더라고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터지더라고요.”라고 대답합니다.

    왜 모든 사람이 인정해 주는데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한스러웠을까요? 그것은 아버지에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나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이 인정해 주기 전까지 항상 배고픈 것이 자녀의 마음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영으로 태어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오늘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려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순간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고 내 뜻대로 산다면 그분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김완선 씨는 자신이 번 모든 것을 이모에게 맡겨서 무일푼이 되었습니다. 장윤정 씨는 어머니를 믿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즘 박수홍 씨도 형에게 그러한 사기를 당했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이 세상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믿습니다. 그러다가 사기를 당하면 자기 자신만을 믿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결국엔 삶이 의미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천상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분입니다.

    새로 난 사람은 이 세상의 의미 있는 유일한 것이 그분들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뿐임을 압니다. 그래서 항상 그분들이 원하는 것을 찾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이끄심에 살다 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    사람이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 영에서 난 이도 이 세상에서는 이와 같습니다. 순교하시는 분들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러한 삶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서 그러함을 잘 압니다.

​    적어도 아침에 오늘 주님께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물어보도록 합시다. 이것이 영에서 난 영적인 이들의 기본입니다.

 -조재형신부-


애틀란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부활특강을 준비하였고제게 강의를 의뢰하였습니다대림특강과 사순특강은 본당에서 준비하게 됩니다주님의 탄생을 준비하고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대림특강을 준비합니다나의 허물과 잘못으로 또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 위해서주님의 수난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임을 생각하며 감사드리기 위해서 사순특강을 준비합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고린토 전서 15, 12-22) 주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시작입니다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입니다주님의 부활은 우리들 또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저도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부활 성야 독서와 복음은 빈 무덤에서 끝이 납니다그리고 천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보아라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말씀을 선포하셨던 곳표징을 보여주셨던 곳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부활은 새로운 탄생이 아닙니다부활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부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부활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다시금 허리띠를 동여매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 아닙니다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하나는 십자가입니다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절망에서 희망으로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아픈 사람을 고쳐주고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의 차원이 아닙니다부활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세상의 것을 추구하였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절망과 슬픔 속에 있었다면 희망과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저희가 그렇게 할 때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그렇습니다주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합니다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그치지 않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잘 나가던 유명 인사가 있었으니, 니코데모였습니다. 그는 당시 인싸 그룹이었던 바리사이 소속이었고, 예루살렘 최고 의결기관이요 법정이었던 산헤드린의 최고의원이었습니다. 

 

대단한 인물이었던 니코데모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행하셨던 표징에 자극을 받고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큰 호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니코데모가 낮이나 저녁 시간이 아니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도들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했더라면 굳이 밤에 찾아오지 않고 대낮에 당당하게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예수님에 관해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관계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밤에 찾아온 것입니다. 아직 어둠에 속한 니코데모가 빛이신 예수님의 현존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모습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무지의 구름 속에 갇혀있는 니코데모에게 알쏭달쏭한 한 마디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복음 3장 3절, 5~7절)

  

요한 문학 안에서 육은 하느님과 고립되어 있는 인간성, 허약하고 죽음에 속한 인간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분리된 육은 초라하고 무력하여 죄와 죽음의 세력 하에 있게 마련입니다. 니코데모처럼 자신 안에 갇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힘입어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의해 변화된 인간 존재는 ‘영’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영은 육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말살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은 인간 생명의 원천을 죽을 운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느님께 소속시킵니다.

  

아래로부터, 1차로, 육으로 태어난 우리가 이 세상 머무는 동안 반드시 수행해야할 필수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래로부터 태어난 것에 만족하지 말고 다시 한번 영으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 다시 태어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끝끝내 다시 태어나기를, 위로부터 태어나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모습이 더할나위 없이 비참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옵니다. 세상 고통은 혼자 다 끌어안고 있는 듯, 지옥벌을 받고 있는 얼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태어난 사람들, 건너간 사람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늘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그치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그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영근신부-


니코데모는 최고의회 의원으로서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다 지닌 탄탄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한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밤에” 그가 찾아온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신중함이나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사실 ‘밤’의 의미는 무지와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세상의 기초들이 모두 흔들린다.”(시 82,5)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밤은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를 갖춥시다.”(로마 13,12)

 

오늘 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요한복음>에서 “위”(아노텐: 위, 새로)란 단어는 다섯 번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높은 데, 하늘 혹은 하느님으로부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유대인인라고 해서 다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단순히 생활 개선이나 악습을 고치거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에 의한 전적인 새로운 변화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는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그 물로 깨끗해지고, 예수님의 숨이신 성령으로 죄 사함을 받아 태어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생명을 말합니다. 그것은 선사받은 생명이요, 변화된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 3,8)

 

그처럼, 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오히려 변화의 영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 그렇게 변화되는 일, 그리하여 변화된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현존과 활동, 곧 그분의 사랑을 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영으로 새로워진 까닭인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에서 태어난 이(요한 3,8)

 

주님,

제 영혼의 무지를 깨우소서. 빛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제 영혼의 밤을 몰아내소서. 제 어둠의 행실을 벗기소서.

당신 빛으로 당신을 뵈옵게 하소서.

세상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은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제가 새로워진 까닭입니다. 아멘.

 복음: 요한 3,1-8: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조재형신부-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며, 새로 태어나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분을 더 깊이 알게 된다. 니코데모는 두 가지 태어남이 있지만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두 가지 태어남은, 하나는 땅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하늘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육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영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죽을 운명에서 비롯하고 하나는 영원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남자와 여자에게서 비롯하고 하나는 하느님과 교회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4절)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 ‘물과 성령’이란 바로 세례를 의미한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자 새로운 탄생이다. 부활한다는 것은 죽음 후에 새로이 창조된 것으로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물에 잠김으로써 죽은 것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물에 잠기는 것은 매장을 상징하고 머리를 물에서 들어 올리는 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6절) 육이라는 것은 죄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썩음을 모르시고 죽음을 넘어 생명을 주신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 멸망을 초래하는 삶에서 우리 자신을 떼어 놓아야 한다. 육적인 삶은 죽음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동반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는 것은 바로 “성령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영적이다.”라는 뜻이며, 영예와 은총에 따른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는 말씀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인간의 능력과 삶이 다다를 수 없는 그 이상의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우리 자신이 죽고, 자신을 끊고,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새로이 태어날 수 있고 참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며 바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을 체험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 7)

-한상우신부-

바꾸어주시고
변화시키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영적 탄생의
참된 시작이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아의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영적 근원이신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신다.

하느님의
선하심을
깨닫게된다.

새로운 삶으로
나가게한다.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듯
성령께
맡겨드리는 삶이
살아있는 본질이다.

모든 진리를
꿰뚫어
이해시키는
진리의 영이
바로
성령이이시다.

부활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안내자가 바로
우리의
성령이시다.

사랑하도록
이끄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성장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간절히
원하신다.

삶이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신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
모든 은총이
있다.

새로운 삶의
은총이
시작되었다.

성령님께
의탁하는
새 날
새 아침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로 태어남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요한 3,1)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다교의 명망 높은 어른이고 율법을 수호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스승이지만, 계보도 없이 느닷없이 나타나 진리를 설파하고 표징을 보여 주는 예수님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을 느낀 듯합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어, 밤이라는 어둠의 시간을 택해 움직이지요. 빛이신 분 앞에 섰으나 아직 빛을 향해 열리지 않은 그의 내면이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지식과 명망, 재산 등 세상 것을 부족함 없이 누리는 그에게 예수님은 새로 태어남을 말씀하십니다. 그에게는 퍽 생소한 제안일 것 같습니다. 니코데모는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태생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나름 탄탄한 길을 걸었을 법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만큼 그 이상의 교육과 대우를 받으며 성경에 근거한 메시아를 기다려왔을 겁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사실 지금까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아니 아주 만족스런 삶을 누려온 이는 굳이 새로 태어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럴듯하게 갖춘 커리어의 그 무엇도 내려놓지 않으면서, 누려온 바에 그저 무언가 살짝 더 얹고 싶은 욕구 정도로 신앙에 접근하기도 하지요. 여기까지는 제 아무리 학식 있고 부유해도 아직 육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자신을 송두리째 뒤집는 새로운 탄생을 요구합니다. 이제까지의 완고하고 오만하며 자기중심적인 시야가, 그동안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돌보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인내를 깨달으면서 새로운 지평으로 열리는 신비입니다. 영의 생명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제1독서에서는 제자들의 놀라운 기도를 들려 줍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사도 4,29)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을 맞이한 동료들이 한마음으로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우리를 구해 달라'고 기도할 줄 알았는데, 더욱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청하다니요!

그동안 겁 많고 두려움에 짓눌려 비겁함마저 보인 제자들이 어디 간 걸까요? 지금 우리 앞에서 당당히 주님의 길을 걷는 이들이 이전의 그들과 동일인이 맞습니까?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사도 4,31)
제자들은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 지금의 그들이 되었습니다. 조심성 많고 의혹으로 주저하며 두려움을 덜치지 못한 복음 속 니코데모와 사뭇 다른 모습이지요. 물론 니코데모도 후일 예수님을 위해 큰 정성을 보일 테지만 그때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였지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열정과 선포에 있어 담대함! 성령을 받은 이의 특징입니다. 무엇을 많이 배워서도 아니고 주변에서 인정해 주는 신분이어서도 아닙니다. 믿음 하나 부여잡고 있는 그들을 움직이시는 힘은 성령이시지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화답송)
하느님의 마음이 시편 작가의 입을 빌어 드러납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이는 모두 하느님의 아들/딸이지요. 인간적 혈연 관계 안에서 누구누구의 아들/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보시며 "너는 내 아들/딸"이라고 하시는데, 이 사랑 고백을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십니까?

부활 시기에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누차 초대할 겁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듯, 그분께서 보내주실 성령 또한 순례길에 있는 우리에게 대전환의 힘이 될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대로 새로 태어나길 간절히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전히 주저하며 '이건 말고요, 이 부분만 조금요' 하는 우리의 의혹과 두려움을 성령께서 걷어내 주시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새로 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담대히 청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겁니다. 새 창조의 문턱에서 성령을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2주 월요일-담대해지기 위해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20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