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11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Margaret K 2021. 4. 11. 06:58

2021년 4월 11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대답했다 
(요한 20,19-31)
 
 

"Put your finger here and see my hands,
and bring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and do not be unbelieving, but believe." 

Thomas answered and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진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려고 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양쯔강의 삼협이라는 곳을 지났습니다. 그곳을 지나면서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 어미 원숭이가 환온이 탄 배를 쫓아 백여 리를 슬피 울며 뒤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배를 강기슭에 대자 어미 원숭이가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올랐지만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답니다. 병사들이 하도 이상하여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창자가 끊어질 만큼 자식을 잃은 슬픔이 컸던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자비’는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으로, 성경에서는 ‘가엾이 여기다’로 자주 표현됩니다. ‘가엾이 여기다’는 그리스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인데, 오장육부, 곧 창자 등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애끊는 마음’, ‘단장의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자비의 마음을 아주 잘 나타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살피는 사마리아인의 마음입니다(루카 10,33 참조). 또 되찾은 아들의 이야기에서, 유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굶어 죽게 되어 힘없이 돌아오는 작은아들을 멀리서 발견하고는 한숨에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 맞추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루카 15,20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 당신의 온 인격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십니다. ……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 ……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 주라고 요청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성령의 두두림

-키엣대주교-


숨은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성령과 용서…세상의 물질과 욕망의 노예가 된 나약한 인간의 영혼은 점점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어둠 속의 영혼에 자유와 해방의 구세주이신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용서는 성령의 은총을 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자신과 타인을 용서한 사람만이 진정한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맞이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폴 클로델은 성령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느 폭풍우 치는 외롭고 쓸쓸한 밤에 갑자기 노크 소리가 났다. 현관문이 아니라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저 아래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던 잊혀진 낡은 문을 누군가 두드리고 있다. 한밤중에 도둑처럼 그분께서 오셨을까? 한번만 두드리고 가실수도 있기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낡고 닫혀있는 문을 열러가는데 너무 오래 닫아놓고 잊혀진 문이라 열쇠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부끄럽습니다. 어떻게해야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열쇠구멍에 기름칠을 하는데 바로 그때 바람과 함께 무형의 그분께서 들어오셨다. 그런데 불안하고 두렵다. 보이지 않는 모든 곳에서 나의 어둠 속까지 보시는 성령의 주님, 제발 저의 마음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두렵습니다.

그동안 알지못했습니다. 당신께서 수도 없이 많이 나의 마음을 두드렸지만 알지 못했다는 것을요. 그럼에도 당신께서는 내가 잘 들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시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심지어는 꽉 닫힌 문을 밀고 들어오시려 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내옆에 계시기 위해서.

"오, 하느님,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당신께서 세게 두드리시면 당신과 저희 마음도 아프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가두고 있는 낡은 문은 바람조차 들어올수 없게 꽉 닫아버려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진실을 가리는 문은 자신과 타인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로막고 권력과 명예의 욕망에 갇히게 합니다. 문 뒤에 원망과 분노, 탐욕과 불공정의 재산들이 차곡 차곡쌓이고 있습니다. 이제 문이 넘어질 정도로 가득찼습니다. 그 무게를 버티느라 문도 지쳐가고 있습니다.

오늘, 성령께서 그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러나 문을 열기가 두렵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나의 어두운 진실을 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두려워마십시오.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여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성령께서는 감춰둔 어둠을 밝혀주시고 건강하고 정의로운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나의 영혼을 환기시켜주실 것입니다. 영혼을 옭아매던 사슬을 끊어주시어 온전한 자유와 가치를 주실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은 더욱 더 발고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성령의 자유 안에서 나와 타인을 진실로 용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령께서 나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2. 꼭 닫은 문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3. 닫힌 문을 활짝열어 성령을 맞이합시다. 그리고 나와 이웃을 진실로 용서하는 삶을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까지 저 자신을 올빼미형 인간이라 생각했습니다. 밤이 되면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고, 아침에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면서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형 인간은 절대로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신부가 된 후, 어느 교육에 참석해서 새벽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소중함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기 힘들었지만, 자명종 시계 몇 개를 머리맡에 두고서 억지로라도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현재, 아무리 전날에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5시 전에는 일어납니다. 20년 이상을 이렇게 변함없이 살았기에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지금껏 우리가 꾸준히 해왔던 어떤 행동에는 습관이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듀크 대학교 연구진의 논문에 따르면 우리 행동 중 40%는 의사결정이 아니라 습관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나쁜 습관을 하나하나 좋은 습관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담배를 몇십 년 동안 펴오셨다는 분이 어느 날 보니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가능한 것인 줄 알았는데, 몇 달 동안 계속해서 피우지 않다 보니 별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나쁜 습관을 버려야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된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잘못된 습관으로 주님과 가까워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잘못된 습관이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못했습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믿기 힘든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는 부활의 표징을 미리 보여주셨고, 공생활 중에 당신의 부활을 자주 언급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다.”라는 단정이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믿지 않았던 토마스 사도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강한 메시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현을 목격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상황은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닐까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몸과 마음을 느끼면서, 이 세상을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나의 좋은 습관이 되어서 더욱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혼자 외롭게 살지, 둘이 괴롭게 살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보통 사람?

어떤 청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어머니의 눈높이가 너무 높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혼할 때가 되어 가끔 선을 보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반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안 좋다,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인물이 별로다….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시는데, 도저히 어머니의 마음을 채울만한 자신의 아내는 세상에 없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어머니는 전에 이런 말씀을 제게 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욕심 없어요. 그냥 보통 사람이면 돼요. 그리고 자기들끼리 좋아하기만 하면 되지요.”

정말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보통 사람의 기준이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욕심이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만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보통이라고 내세운 조건은 가장 까다로운 조건이었습니다.

자기 기준이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기준은 내게만 너그럽고 남에게만 엄격했던 것은 아닐까요? 어떤 기준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교회는 용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십니다. 당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에게만 있다고 믿었는데, 또 제자들이 그러한 권한을 행사하러 다닌다면 이는 분명 목숨에 위협이 되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다녔다면 이는 분명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음을 보여줍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들과 함께 없었기 때문에 감히 죄를 용서해주는 사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한 것이 동시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갖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하나가 되어 여드레 뒤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된 이후로는 따로 그러한 권한을 받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부여되었음을 믿게 됩니다.

​    따라서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것만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는 비단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과 자비를 베풂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 황송함과 기쁨에 놓아주고 용서합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이들도 그 용서하는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발견합니다.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도 이러한 용서의 모범은 수없이 많지만, 개신교 한 집사님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 교회 이모 집사님은 직장 전도훈련(BBS)을 열심히 합니다. 그 BBS 동료인 A라고 하는 어느 집사님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A집사님은 어느 날, 직장 회식 자리에서, 자꾸 권하는 술을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계속 거절하다 급기야 화가 난 직장 상급자에게 뺨을 맞게 되었습니다. 처자식이 있고, 연배가 있는 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분하겠습니까?

    집에 와서 며칠 동안 회사도 무단결근하며 분을 삭이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려 결심하고 사표를 내기 전,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드렸습니다.

​    뺨 맞은 서러운 생각, 분한 마음, 막상 직장을 그만두려니 막막한 두려움 등으로 간절히 하느님께 호소하셨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중 뜻밖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겨우 뺨 한 대 맞은 것으로 그렇게 분해하고 억울해하느냐? 나는 모든 이에게 멸시 천대와 고난을 받았고,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

    침 뱉음을 당하고, 저주와 욕설, 살을 찢는 채찍으로 맞으시면서 아무런 자존심도 혈기도 변명도 없이 묵묵히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길을 오르셨던 우리 예수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조롱하던 그 무리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셨던 그 예수님의 음성이 아닙니까? 뺨 한 대 맞은 것을 어찌 고난이라고 분해하고, 직장까지 그만두려 했을까?

    A집사님은 그 신비한 음성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와서 다음날 직장에 출근하였습니다. 며칠 간 무단결근 후에 출근 한 회사에서는 그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뺨을 때린 상급자가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징계를 받을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상급자가 회사에서 처리했던 여러 일이 문제가 되었고 그중에 A집사님의 뺨을 때린 사건도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A집사님은 자신의 뺨을 때린 그분을 두둔하며, 그분의 구명을 위해 힘썼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A집사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분을 도우니 결국 회사에서 내리려던 징계도 잘 해결되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뺨을 때렸던 그 상급자는 A집사님의 ‘이해하지 못할’ 관용과 사랑에 감동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지금은 직장 선교회의 한 지부의 leader(지도자)가 되어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뺨을 때렸던 바로 그 사람이 말입니다."

[출처: ‘뺨 맞고 용서하신 집사님’, 다음 카페, ‘주님 오실 때까지’]

    비록 개신교 신자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현실과 매우 밀접하여 예화로 선택해 보았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이러한 크고 작은 용서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 상처에서 나오는 성령을 주시며 용서하라고 교회를 파견하십니다. 그 용서의 힘이 전교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마음에 미움을 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직접 우리 안에 모시기 때문입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내가 너를 용서하기 위해 당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미워해도 괜찮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분께서 나를 위해 참아주신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나에게 그만큼 고통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이 힘이 모이면 교회에 더 많은 신자가 모이는 선교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조재형신부-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첫 번째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는 신앙입니다불교유교는 수행과 공부를 통해서 진리를 찾으라고 합니다이를 자연종교라고 합니다자연종교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 욕구를 만족하고자 하는 가운데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종교입니다두 번째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깨달음을 얻는 신앙입니다그리스도교유대교이슬람교는 계시종교입니다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계시종교에 의지하고 있습니다신앙 안에서 계시는 3가지 차원으로 드러납니다첫째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셨는데 그것을 양심이라고 합니다양심을 통해서 사람은 부끄러움을 알고옳고 그름을 알고겸손함을 알고이웃의 아픔을 공감합니다두 번째는 예언자입니다하느님께서는 숨을 주시고자유를 주셨습니다사람은 자유를 통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만자유를 통해서 하느님과 멀어지기도 합니다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져 고통과 슬픔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위해서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우리는 예언자를 성인이라고 부릅니다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우리와 같은 삶을 사시면서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행복에 이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평화를 바라고행복을 원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재물을 많이 가져도명예를 얻어도권력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분노와 원망입니다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을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은 부모를 잘못만나서이웃을 잘못 만나서시기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면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갈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롭지 못한 이런 조건들을 다 극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라지금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너라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들의 꽃도 입히신다그러니 너희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막달레나에게도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남을 죽이는 말상처를 주는 말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사랑과 나눔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뚫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복음 20장 28절) 토마스 사도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복음 20장 29절)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토마스 사도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명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분께서 주신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 하나 단단히 붙들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희미한 안갯속 같은 신앙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한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안고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신앙 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종종 체험하는 강렬한 신비 체험이나 은총 체험들은 평생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혹은 두세번 뿐입니다. 그 은혜로운 체험을 가슴에 안고 믿음의 삶, ‘보지 않고도 믿는’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나무 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설명하기 정말 난해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들을 안심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이 부활일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를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는 제자들에게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나아가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 계약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처럼,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저희가 당신을 믿는 것보다 늘 더 저희를 믿으시오니,

저희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저희가 살아갑니다.

저희를 희망하시는 당신의 희망이 조희에게서 이루어지소서.

저희가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제 손을 펴게 하소서!

꼭 쥐고 있는 아집과 의혹을 내려놓게 하소서.

힘을 내려놓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손을 펴고 못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에 못 박히게 하소서. 아멘.

 정직한 믿음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하고 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위신과 체면을 앞세워 아는 척도 하고, 때로는 아닌 척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과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하라! 정직하라’ 말하면서 그 속에 자신은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감시하고 판단할 만큼 진실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벌거숭이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더니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토마스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아니 지금 주님을 잃고 너무 힘들고 절망스러운 상태인데 무슨 소리 하는 것이냐? 하는 하소연이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고백한 후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토마스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주셨습니다. 토마스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면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가 한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여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못 알아 본 것이지 주님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다만 내 안에 갇혀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들에 앞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11,1). 보고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 합니다. 어째든 토마스는 거짓 믿음보다 정직한 불신, 합리적인 의심을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거짓보다는 정직함으로 나를 드러냄으로써 부족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발현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서 누락되어 실망하고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토마스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 듣고 믿게 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 표징을 보여주시고 또 발현하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20,31)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또 전해야 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셨으니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시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는 도끼 발등 찍힌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믿으면 발등을 찍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믿지 못해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을 키워 주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믿어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더 큰 은혜가 다가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으로 제자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빵을 떼어주며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며 믿음을 키우시고, 토마스의 불신도,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던 제자들을 끝까지 참고 계셨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후에도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며 사람들을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까지 잡수시며 의심을 품지 않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들, 예수님을 못 박았던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지난날의 모든 잘못과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부족함을 채워 주시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완성을 이루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비를 입은 사람답게 이웃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정직했던 토마스처럼 나도 주님 앞에 정직하길 기도합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도 진실함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사십시오”(마더데레사).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불신으로 주님을 만난 토마스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눈높이로 다가오셔서 당신 손에 맞는 도구로 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얼굴이 잘 생겼는데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랍니다.
얼굴은 잘 생겼는데 말은 잘 못하거나 얼굴은 못 생겼는데 말은 잘하면‘천만다행’입니다. 얼굴이 못생겼는데 말도 잘 못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 베스트 거짓말
1. 자리 양보 받은 어르신 ; 에구…괜찮은데.. ; 양보 안 하면 속으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2. 정치인 ;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3. 옷가게 ; 어머 너무 잘 어울려요, 맞춤옷 같아요. 얼굴이 뭔 상관있어 매상만 올리면 되지!
4. 음주운전자 ; 딱 한잔 밖에 안 마셨어요. 잔의 크기가 문제지….
5. 친구 ;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조금 있으면 온 동네 다
소문나요!
*** 정직합시다.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에게!

<예수님과 토마스>

-송영진신부-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서 숨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평화가 하나도 없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박해 받는 것도 두려워했고, 죽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참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면,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게 되면,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곧 평화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4-25).”

 

다른 제자들은 토마스 사도에게 주님을 뵈었다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았다는 말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었다는 말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사도가 한 말은,

“당신들이 본 것을 ‘나도’ 그대로 보고 싶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토마스 사도가 한 말은 표현이 좀 과격하긴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말로 해석할 사람도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을(26절-27절) 생각하면,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믿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일은,

토마스 사도의 간절한 희망에 응답해 주신 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6-29).”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안 믿는(또는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표징’을 요구했을 때, 표징을 보여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예수님의 말씀은,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

표징을 보여 주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서 믿는 일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표징이나 기적을 보아도 안 믿고,

믿고 싶어 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표징과 상관없이 믿음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일은, 토마스 사도가 간절하게 믿고 싶어 했고,

믿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인데,

“증거가 없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증거가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다음에만’ 믿으려고 하는 태도를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만져 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데,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말을 한 것은

토마스 사도가 처음입니다.

(이 신앙은 요한복음서의 주제이고, 우리 교회의 기본 교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어떻게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즉흥적인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든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최초의 인물로 재평가되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못 믿고 있다가

직접 본 다음에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보려고 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말씀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뒤의 신앙인들은 모두, 오늘날의 우리도 모두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신의 교회는 증언에서 증언으로,

또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고,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본적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복음: 요한 20,19-31: 토마의 불신앙

 -조욱현신부-


주간 첫날, 새로운 창조의 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유대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과 마음을 닫아걸었다. 예수께서는 문이 잠긴 상태에서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셨다. 주님의 육체는 그들과 함께 사셨던 그 육체이다. 그러나 자기들 눈에 보이는 육체에 확신하지 못하므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잠긴 방으로 들어오신 몸을 만지도록 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 여기서 ‘평화’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때에는 영혼은 언제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19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명을 주시어 파견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절)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셔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려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고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성령으로 새로이 창조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권한을 주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관계회복은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성령의 첫 열매는 바로 하느님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다. 토마스라는 뜻은 본래,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다. 완전한 것만 좋아하는지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지 않는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죽음은 알고 있었지만,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본 것이 환상에 불과한 일이 되지 않도록 “직접 보고” 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한다. 토마스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분의 육체와 거기에 난 상처를 전부 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분을 만나기를 고대한 것이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자리에는 토마스도 있었다. 여기서 여드렛날은 교회에서 거룩하게 모이는 날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보아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토마스는 결국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하고 고백한다. 그는 그분의 육신을 만지고 그분의 신성을 고백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많은 사람의 모습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된 신앙인들의 고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토마스가 스승의 육체에 난 상처를 만진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토마스의 불신은 다른 제자들의 믿음보다 우리의 믿음은 위한 것이다.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의심 없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의심하는 자기 마음과 모든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그 상처를 그대로 두신 것은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오늘의 요한복음에서도 "보고 믿는다."라는 형태가 나온다. 그들은 믿음의 제1세대로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기 위하여 보아야 했고, 증언하여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은 단지 믿으면서도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선물은 부활이 예수님께 새 생명과 권능을 충만케 해주어 새로운 현존형태와 활동방법을 부여하였다. 이같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같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습의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은 주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또한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사도 4,32) 자기의 재산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모든 형제와 친교를 이루고, 새로운 생명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라고 한다. 이것은 의미가 깊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같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과 피로 세상에 오신"(1요한 5,6)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는 세례성사(물)와 성체성사(피)를 암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부활팔부 축일을 지내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과 '결실'로서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 되어 친교를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이라는 선물이 진정한 사랑의 나눔으로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당신의 신부인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며, 구체적인 삶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한상우신부-


하느님조차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으신다.

십자가의
상처는
간절한
사랑이다.

간절함이
간절함을
치유한다.

상처가
사랑이 된다.

하느님
사랑이
닿는 곳은
우리의
상처이다.

하느님 사랑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십자가의
상처를
만나는
은총의
부활이다.

십자가의
상처가
우리의
길이 된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

못자국의
상처에서
주님 사랑을
뜨겁게 다시
만난다.

상처에서
가슴 뛰는
고백을 다시
만난다.

상처를
들여다볼
용기를 청한다.

십자가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못된 상처가
아니라
고마운 상처가
된다.

십자가의
간절한
사랑의 상처가
참으로 많은
이들을
변화시킨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길이 열린다.

공동체는
서로의
간절한
상처를
싸매주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상처에서
치유가

상처에서
부활은
더욱 뜨겁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쏟아지는
사랑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부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자비를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태초에 하느님에게서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되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명하신 대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제자들이 앙심이나 복수심, 미움이나 증오에서 그 사명을 시작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겁니다. 스승을 죽음으로 내몰고 제자들의 생명마저 위협하는 무리들에 대해 제자들이 두려움과 원망, 적대감을 갖지 않도록 그들 마음에 사랑의 성령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그들을 용서하셨지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둠의 세력의 하수인이 된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연민의 사랑까지 품으셨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서운함을 토로하러 오신 게 아니시지요. 그분은 사랑에 사랑을 더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이 드러내 보여 주신 사랑의 상처는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용서 또한 마찬가지로 주님의 증거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하필 예수님이 오셨던 자리에 부재했던 토마스는 예수님을 만나 들떠 있던 동료들에게 '그분 상처를 확인하고야 믿겠다'고 어깃장을 놓았지요.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수고로이 다시 나타나시길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기싸움이 아니라 포용이고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러한 분을 어찌 믿지 않겠으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토마스의 고백은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체험한 모든 이의 고백입니다. 사랑의 상처와 용서, 자비야말로 그분이 주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 신자 공동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를 돌보며 가진 바를 나누고 함께 살아갑니다. 누구도 가진 게 넘쳐 사치와 향락으로 제 영혼을 좀먹지 않고, 누구도 가진 게 없어 굶주리거나 움츠리지 않는 세상, 어쩌면 하느님의 숨을 받은 이들이 보여 주는 가장 충만하고 아름다운 상태일 겁니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 4,33)
모두가 하느님 숨을 받은 그분 모상성을 살아가면 모두가 은총을 누리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부유해지려 하지 않으면 모두 부유해질 것이며, 모두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는다."(피터 모린)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념이나 시스템에 의존할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의 마음을 가지면 가능한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1요한 5,1)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 자녀인 우리 형제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로울 때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이신 당신을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형제들이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겸손한 나눔과 기꺼운 희사로써 형제가 지고 있는 물질적 부채를 덜어 주고, 용서로써 마음의 부채 또한 가볍게 해 그를 풀어 줍니다. 그로써 우리도 하느님께 지고 있는 영혼의 빚을 탕감받지요. 꼭 그걸 바라고 계산해서 한 행동이 아니지만, 하느님은 기억하십니다. 당신의 또 다른 자녀에게 베푼 형제적 사랑을 그분은 결코 잊으실 수 없습니다. 이 구체적 자비와 사랑은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 은총의 호환으로 "모두가 큰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자비 주일인 오늘, 우리 삶에서 베풀어 주신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용서와 자비, 사랑이 절실한 형제들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가 손 내미는 은총의 전파자가 되면 더욱 좋겠지요.

우리 안에 충만한 사랑과 자비를 보고, 우리의 형제들이 주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데 그만한 것은 없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 자비를 실천하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제2주일-사랑의 단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4월 8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