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Margaret K 2021. 4. 9. 06:54

2021년 4월 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요한 21,1-14)
 

"Cast the net over the right side of the boat
and you will find someth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고향인 갈릴래아로,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돌아왔습니다. 아직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 하니 다른 제자들이 따라나섭니다. 어부인 그들이 밤새 그물질을 하였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어느덧 새벽이 되어 한 줄기 빛이 비추자 예수님께서 물가에 나타나시어 물으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한 번 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할 때도 있습니다. 또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피정, 강의를 통하여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영적 열매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영적 열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일을 하느님과 함께 해 내는가와 그 일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나가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직업이 어부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을 새워도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자신의 상태와 하고자 하는 일을 솔직하게 상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일할 때 우리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얼마 전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제게 읽어보라며 보내준 책이었습니다. 원래 공짜로 받은 책은 잘 읽히지 않는데,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인상 깊어서 곧바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당뇨 합병증으로 만성신부전증을 앓게 된 남편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해 준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이식 전의 감정과 이식 후의 감정을 담담하게 적었습니다. 사실 신장을 이식해준다는 것이 부부관계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큰 고통과 어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공여자의 고통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여자 모두가 신장을 이식받고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니랍니다. 또 공여자는 더 이상 개복 수술을 받을 수가 없으며, 여러 암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아내도 급성골수성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사랑만으로 이 모두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식 수술로 인한 인간 육체의 고통도 문제지만, 수여자의 건강이 좋아지지 않고 공여자인 자신도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아주 열심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이겨냅니다. 신앙을 통해 사랑이 커지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을 때였습니다. 처음 제자들을 부를 때 곧바로 순종했듯이,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그물을 던졌고 너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만이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주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요한이었지만, 주님께 먼저 다가가기 위해 호수로 뛰어 들어간 것은 베드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라는 말에 곧바로 응답했던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리고 예수님과 전교 여행을 함께 하면서 그들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커졌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니까요. 그러나 그 사랑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진짜 사랑을 주님께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주어진 삶을 살아라. 삶은 멋진 선물이다. 거기에 사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나이팅게일).


사랑 실천의 중요함

한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불에서 고생을 하며 그는 자신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비록 남을 위해 특별한 사랑을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생 죄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외쳤습니다.

“왜 제가 지옥에 있어야 합니까? 저는 죄짓지 않았어요!”

바로 그때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맞다. 너는 평생 어떤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는 좋은 일도 한 적이 없다. 너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사랑 실천이 전혀 없었습니다. 즉, 죄인은 용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지만, 사랑 실천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긴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그렇게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죄의 있고 없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있고 없음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가장 쉽고 빠르고 완전한 법: 복음을 전하면 됨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명이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밤새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물가에서 어떤 낯선 이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을 무시하나 싶어 화가 날 법도 하지만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자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물고기는 백쉰세 마리였는데, 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히브리말 숫자와 같습니다. 즉, 배는 베드로를 포함한 교회를 상징하고 그 교회가 많은 영혼을 낚으며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모든 것일 불가능했음을 깨닫고 교회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되는 장면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고 하시는데, 누구도 감히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이러한 일은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본 사람만이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낳을 때 남편의 심정은 어떨까요? 자신이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분만실에 함께 들어가 손을 잡고 남편도 함께 고통에 동참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렇듯 선교는 그리스도의 자녀를 낳는 것이기에 이 일을 할 때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기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선교하는 이에게 주님께서 가장 명확하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개신교 선교사의 편지이고 아주 특별한 경험도 아니지만, 중국 선교를 하며 체험한 한 잔잔한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선교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 이만월 선교사는 소수민족을 선교하던 중 체험한 이런 경험을 편지로 보내왔습니다.

 

    “2018년 6월로 기억되는데, 저는 선교 여행을 운남성 남녘 시솽반 나 멍송으로 갔었습니다. 그곳 멍송에서의 밤하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멍송 차 농가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원주민의 방에는 물 것이 많다고 하여 밖에서 자기로 하고 텐트를 쳤습니다. 나는 좀 예민한 편이라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게다가 텐트를 친 장소가 차잎을 말리는 곳이라 바닥에 울퉁불퉁한 나무 막대기가 깔려 있어 등이 배겨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소변을 볼 양으로 텐트를 열고 몇 발자국 걸어나가 바지의 지퍼를 내리는 순간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습니다. 아니 저 앞 나지막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걸어가서 마치 손으로 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머리 위를 쳐다보니 캄캄한 하늘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은하수가 유유히 흐르고 그 주위에는 이루 셀 수 없는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밤하늘 별들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때 번득 이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아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이 분명하고도 커다란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아브람에게 하시던 음성을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4천 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    나는 여전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이어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렇다. 하느님의 언약대로 이 세상엔 저 뭇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아브람의 영적인 자손들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나를 통한 복음으로 아브람의 자손 된 사람들이 저 뭇별처럼 밤하늘을 빛내겠지.’

 

​    나는 그때 선교의 비전이 열렸습니다. 또 선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역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밤하늘의 뭇별을 향하여 치켜들고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리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소리높여 찬양했습니다. 몇 번을 불렀는지 모릅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적시며 하염없이 흘러내리는데 얼굴엔 웃음이 가득합니다.

 

    나는 그 이후 밤하늘의 뭇별을 헤아리는 버릇이 생겼고 주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그 찬송을 좋아하게 되었고 제일 잘 부르기도 합니다. 나는 그 이후에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밤하늘을 우러러보았지만, 그때만큼 많은 별을 볼 수 없어 못내 아쉽습니다. 그때 그 감격을 재현해 보려고 해도 그 날밤 그만큼 많은 별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간 영영 한 번의 감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초조함으로 오늘도 밤하늘의 별을 헤아립니다.

    코로나로 아주 힘든 시간이지만 선교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기도로 승리하세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출처: ‘중국 선교지에서 들려온 기적 같은 이야기’, 유튜브 채널, ‘말씀의 검’]

 

    저는 매일 복음 묵상을 씁니다. 써온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 묵상할 때마다 ‘오늘은 아무 말씀도 안 주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여지없이 기도의 응답을 주십니다.

​    저는 복음 묵상을 쓸 때마다 매번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따르는 것 같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지금 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가장 절실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음 묵상 나누기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주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이 지금보다는 확실히 적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기쁨을 누리는 데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믿습니다.

​    복음을 전하는 이의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동행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자전거를 타면서 안장의 높이가 걱정이었습니다안장이 낮으면 타고 내리기가 편했습니다그러나 폐달을 밟는 모습이 팔자모양이 되었습니다당연히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동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었는데 모습이 우스웠습니다후배 신부님이 안장을 높여 주었습니다타고 내리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안장이 높아서 걱정했는데타고 내리는 법을 익숙하게 배우니 어렵지 않았습니다다리를 쭉 뻗어서 폐달을 밟으니 속도가 빨라졌고자세도 좋아졌습니다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둥지에서 나와야 합니다날개의 힘을 믿고 힘차게 둥지에서 날아야 합니다안장을 조금 높이니 더 빨리더 멀리 갈 수 있었듯이우리의 삶도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부활은 새가 둥지를 날아 높이 날아오르듯이위험하게 보이지만 안장을 높여야 더 잘 달릴 수 있듯이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내가 변한 것입니다내가 변한 만큼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목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목동은 양을 들판에 풀어놓습니다양들은 알아서 풀을 찾아다닙니다대부분의 양들이 돌아오지만 간혹 돌아오지 못하는 양이 있습니다풀을 찾아가다가 웅덩이 빠진 양이 있습니다양은 목동을 부르면서 웁니다목동은 웅덩이 빠진 양을 봅니다그러나 바로 웅덩이에서 양을 빼내지 않습니다시간이 지나 울다 지친 양이 쓰러져 있으면 그제야 목동은 양의 목에 줄을 걸고 양을 들어 올립니다양이 울고 있을 때 줄을 내리면 양이 올라오다가 몸부림 치고 잘못하면 양이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그래서 목동은 양이 울다 지칠 때까지 기다립니다어린 날 힘들고 괴로울 때가 많았습니다가난한 것이 어깨를 누르는 짐이 되기도 했습니다열등감도 있었습니다그때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던 것도 즐거웠습니다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꽃을 보고바람을 느낀 것도 좋았습니다열이 심하면 먼저 열을 낮춘 다음에 치료하는 것이 순서입니다예수님께서도 울다 지친 제자들을 기다려 주시는 것은 아닐까요목동이 울다 지친 양의 목에 줄을 걸어서 올려 주듯이주님께서는 울다 지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그리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다만 제자들이 변했습니다그만큼 세상은 하느님 나라와 가까워졌습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여전히 사도들을 감옥에 가둘 수 있었습니다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습니다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습니다여전히 밤은 찾아왔습니다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그 밤입니다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그 밤입니다물속에 빠져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외쳤던 그 밤입니다헤로데가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그 밤입니다제자들이 두려움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그 밤입니다그러나 제자들에게 밤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밤은 새벽이 다가오는 여명의 그림자일 뿐입니다비록 그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지만이미 저녁때가 되었지만 그것으로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지 않았습니다이것이 바로 부활의 힘입니다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복음 21장 5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밤새 헛탕친 제자들에게 말씀을 건네시자 제자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굴 놀리나? 우리는 이 바닥에서만 경력이 30년인 전문직 어부들이야! 누가 누구를 가르키고 있어 정말!’ 

 

그러나 포스와 위엄이 잔뜩 느껴지는 그분의 말씀에 압도된 제자들은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거짓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터져나갈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눈치빠른 요한 사도가 알아차렸습니다. 베드로에게 보고를 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잡힌 물고기는 총 153마리였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에 따르면 고대 자연과학자들은 세상 모든 물고기의 종류를 153가지라고 여겼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그물 안으로 총집합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표가 그물 속에 든 153마리의 고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힌 물고기를 몇마리 갖고 오라고 하시고는 손수 숯불을 피우셔서 노릇노릇 맛있게 구으시고, 빵도 꺼내놓으시고는 외치십니다. “와서 아침을 들라.” 참담한 실패의 밤을 보낸 허기진 제자들 앞에 손수 빵과 물고기를 대령하시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 작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텐데, 그날 따라 단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뭘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상태에서 임재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 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부재 사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 안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현존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기쁨과 희망, 따스함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맛갈지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이영근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빵’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을 증거 하고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곧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상을 차려 올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배추 잎을 먹고 자란 배추벌레가 배추색깔이듯이,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고 자란 제가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신부-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3-6).”
 
1)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생각하면,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고기를 잡으러 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은, ‘먹고 사는 일’만 생각하는 인생은
허무하게 끝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남는 것이 없는, 또는 얻은 것이 없는 허무한 인생일 뿐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인생을 일률적으로 다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현세만 생각하면서 살다가는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라는 말씀은,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충만한 은총을 누리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는 루카복음 5장에 있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와 여러 가지로 많이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만 보면, 예수님께서 곁에 안 계시는 상황에서
어부들이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것이 같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을 던져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도 같습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이야기는, ‘먹고사는 것만 생각하는 어부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람 낚는(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새롭게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로,
즉 제자들이 새롭게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간 것을,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하러 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선교활동을 하러 간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그날 밤’은 그들이 예수님을 떠나 있는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 그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은 ‘예수님 없이’ 자기들의 힘만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물을 던져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은 일은, 그들이 예수님께 기도했고, 믿음과 기도의 힘으로, 선교활동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고, ‘예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도와드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 힘만으로 한다는 말은,
기도하지 않으면서, 마치 세속 사람들의 영업 활동처럼 한다는 뜻입니다.)
선교활동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3).”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라는 고백이고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에게 빵과 고기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을 그냥 ‘배가 고파서’ 한 일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사람 낚는 일’(선교활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을 먹이시고, ‘새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지칠 때도 있고, 허기와 갈증에 시달릴 때도 있고,
외롭거나 무섭거나 슬플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전례 때에 사용하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는 인사말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인사말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지쳐서 주저앉아 있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숯불과 물고기와 빵을 준비하셨을까?
아마도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작은 기적을 행하셨을 것입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라는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고,
잡은 고기의 수를 세어보게 하기 위한 상황 설정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미 물고기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먹기 위해서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153’이라는 숫자는 ‘충만함, 완전성,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언제나 항상 ‘넘치도록 풍성한’ 은총입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십니까?’ 라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복음: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3절) 하자 모두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못 잡았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제자들은 스승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았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7절).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분께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들이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8절).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고기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물고기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와야 하며, 죽어야 하고 불에 구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을 버리시고 즉 물 밖으로 나오셨고 돌아가시고(십자가형) 영광을 받으셨고(성령의 불꽃)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한다. 나의 고집으로부터 나의 선입견에서 과감히 벗어나(물 밖으로 나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이 죽는 삶(죽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삶(성령의 불로 타오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삶이(“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되어야 한다.

 

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는 음식이 될 수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자신 항상 나의 편견이나 아집에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탈출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하느님 안에 기쁨이 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다음으로 153마리는 물고기의 종류가 또한 그만큼 된다는 것으로 모든 종류를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라는 그물은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들어와도 그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그물을 베드로가 끌어올렸다는 것은 그의 역할로서, 백성들을 모아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13절)

 

물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고기처럼, 하느님이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 구원의 빵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도 같은 삶으로 끊임없이 물 밖으로 나와 죽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그래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그분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의미 깊은 만남의 장이 펼쳐집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3)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몇몇 제자들이 다시 고기를 잡으러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되살아나신 그분을 만난 놀라움과 기쁨은 잠시이고, 부활의 메시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지요.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한때는 고기잡이가 전문 영역이었건만 오랜만에 돌아온 제자들은 밤새 헛탕을 치고 맙니다. 그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일러주시지요. 그분은 전문 어부는 아니시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한 어부들의 부르심 대목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지요.(루카 5,1-7 참조) 직관으로든 기억에 의해서든 요한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알아보는 건 분명 사랑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숯불과 빵과 물고기.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호숫가의 밥상은 참 소박하고 따뜻하며 온기 넘칩니다. 상을 차려놓고 누군가를 불러 음식을 나누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의 표현입니다. 밤을 지샌 노동으로 지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옛 삶을 기웃거리다가 빈 손에 실망한 이들에게야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예수님은 배반하고 도망가고 되돌아간 제자들을 탓하지도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상을 차려 주시고 먹이시며 말을 건네고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지금 제자들을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는 건 사랑뿐입니다. 아울러 대개 사랑을 베푸는 이도 그 사랑으로 위로를 받기 마련이니, 예수님도 그러시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최고 의회 증언 대목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4,10)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켰는지 묻는 종교 지배자들에게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군에 넘겨 죽임을 당하게 한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베드로는 에둘러 답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일은 치유 받은 이의 공로나 믿음에 의한 기적이 아니었지요. 제자들의 능력은 더더욱 아니었고요. 예수님의 신임을 받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분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자신의 약함을 직면했던 부끄러운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이 제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 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흘러나온 것이었지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말씀을 근거로 타 종교를 배척하는 건 하느님 사랑을 너무 편협하게 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교회는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지만 진리와 사랑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배제하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구원을 보증하는 탁월한 길인 이유는, 그 이름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그 사랑의 완성이며 절정이시니까요. 아무도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다정히 우리를 초대해 상을 차려 주시고 귀를 기울여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푹 잠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실패와 부끄러움을 아시는 그분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촐한 사랑으로 당신도 위로받으시지요. 죄인인 우리에게 구원을 보증하는 사랑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헛수고의 뜻

 -김찬선신부-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오늘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들은 주님을 잃고 난 뒤

그리고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씀을 들은 뒤

그 말씀대로 갈릴래아에 갑니다만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기에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나가자 같이 고기잡이를 나섭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복음을 읽다가 '그날 밤에는'이 눈에 꽃혔습니다.

이 표현은 다른 날이라면 고기를 많이 잡건 적게 잡건

고기를 잡았을 텐데 '그날 밤에는' 유독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무슨 뜻이고

그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겁니까?

아무 의미 없고 그저 그날은 운이 없거나 우연히 그런 건가요?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보면

우연이 아니고 운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에는 모릅니다.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서 계신 분도 주님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압니다.

수고가 헛수고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수고를 헛수고가 된 것은 내 탓이거나 운이 없어서가 아님을.

수고를 헛수고로 만드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가 될 때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그때가 주님이 나타나실 때라는 것을.

우리의 헛수고에도 뜻이 있음을.

우리의 고통에도 뜻이 있음을.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17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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