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Margaret K 2021. 4. 6. 07:08

2021년 4월 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요한 20,11-18)
 

"Stop holding on to me,
But go to my brothers and tell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마리아 막달레나가 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분의 죽음 앞에서 너무나 황망하여 어찌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지극히 사랑하는 분의 곁을 지키고자 아직도 어두운 새벽에 무덤으로 향합니다. 마리아는 당황스러워하며 더 큰 상실감에 빠집니다. 무덤이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너무 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무덤 안의 두 천사를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천사가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대답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어둠을 직면하여 슬픔과 고통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할 때 ‘왜 우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그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였듯이 우리도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께 횡설수설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할 때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발견하지만, 아직도 그 슬픔이, 그 집착이 커 여전히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뵙고도 정원지기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그분을 찾으려 애썼으면서도 정작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눈앞에 나타나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슬픔에 짓눌려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마리아야!” 이제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뿌니! 스승님!” 하고 예수님을 알아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슬픔과 아픔을 다 쏟아 낼 때, 그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때 우리 마음 안에는 그분을 향한 사랑, 기쁨이 피어오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연히 어렸을 때 봤던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시험 끝나고 학교에서 단체로 극장에 가서 봤던 영화였습니다. 당시에 너무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열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을 타고서 미래의 시간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래의 ‘나’를 만나게 되지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크게 실망합니다. 나이 많은 미래의 나는 젊은 현재의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여정 안에 수많은 ‘나’가 있습니다.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서 과거나 미래에 간다면 그 시간의 저 역시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황혼의 시간을 사는 미래의 ‘나’는 지금 중년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아주 어린 과거의 ‘나’ 역시 아저씨인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모두 같은 ‘나’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과거와 미래의 ‘나’ 모두가 지금의 ‘나’와 연관되어있지만, 너무 큰 차이로 자신조차도 인정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나’의 모습을 모두 인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은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으면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까지도 찾아갔겠습니까? 그 사랑 때문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문제는 그렇게 사랑한다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부활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모두 같은 ‘나’이지만, 과거와 미래의 ‘나’와는 너무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육화된 예수님만 기억하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냥 그곳에서 일하는 정원지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라뿌니!”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모습도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어떤 모습이든 다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판단보다는 이해를...

2년 전일까요? 강의 때문에 부산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KTX 고속열차를 타고서 부산역에 도착한 뒤에, 전철을 타고 강의할 성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중년의 형제님이 전철 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습니다. 전화 통화를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인상을 쓸 정도로 큰 목소리로 하는 것입니다. 또 자리에 앉아 있을 때에도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옆의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였고, 큰 목소리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지 않을까 싶어서 이분 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한 임산부가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임산부의 손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을 생각했지요.

‘저 아저씨는 절대로 자리 양보를 하지 않을 거야.’

저의 예상은 틀렸습니다. 이 중년의 형제님은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놀아주면서 임산부인 엄마가 잠시 동안이라도 쉴 수 있게 해줬습니다.

이때 이 형제님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여전히 예의 없는 못된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사랑 많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도 한 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남을 섣부르게 판단하기보다는 남에 대한 이해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언제 주님을 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수준이 되어야 주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주 오래전 어떤 남자 둘이 원인 모를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갑자기 깨어났는데, 두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도저히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그냥 하루 일해서 하루 벌며 술과 여자로 방탕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더러운 늪에 빠져 오물이 목까지 차올라왔습니다.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 사람을 구해주었습니다.

 

어리둥절해서 하고 있을 때 많은 하인이 와서 자신을 구해준 이를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혀 줍니다. 그런데 왕과 같은 옷차림이었습니다.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그 사람이 죽다 살아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동생아!”라고 합니다. 이름을 어떻게 알았고, 왜 자신을 형제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신하들도 다 그렇다고 말해주는 눈치입니다. 그 사람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며 그저 자신을 구해준 분을 붙잡고 감사의 말을 전하려 할 때, 그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냐, 지금 나를 붙잡지는 말아줘. 동생을 찾았다는 소식을 빨리 아버지에게 전해야겠다. 금방 다시 돌아올게. 내 아버지이며, 너의 아버지가 저기 계시는데 동생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지 알아? 나 빨리 가서 아버지 먼저 만나고 올게. 그리고 다른 동생도 함께 있지? 그 동생에게 내 아버지이며 너희 아버지께 내가 먼저 갔다고 알려줘, 알았지?”라고 말해줍니다. 왕이 향하는 곳을 보니 그분이 만나러 가는 아버지는 누가 봐도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사람의 정체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누가 봐도 이 사람도 왕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처럼 방탕하게 살 필요는 없는 존재임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을 형제라고 부르고 아버지가 같다고 말하는 왕자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자신을 구해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임금을 아버지로 믿게 된다면 이전의 죄의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혹은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해준 맏형을 만났음을 형제에게 전해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런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죄 속에 있었다면 ‘우리가 이런 죄 속에서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이전의 죄 속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 서울 교구 어떤 여자 신자분이 남긴 댓글 내용입니다.

이 자매는 억압되고 불화가 잦은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공부만 해야 하는 억압된 환경에서 소아 때부터 만성 불안증,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자살 기도까지 했었습니다. 겉으로는 성당을 다니면서도 속은 어둠과 절망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20대 때 청년 꾸르실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꾸르실료에서 부모님이 자신을 많이 사랑해주신다는 것과 또 주위 청년들의 사랑, 더군다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는 하늘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어둠뿐이던 삶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프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무속인들이 걸리는 신병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아프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려움으로 고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물이나 성모님 이콘이 무서워졌고 알 수 없는 예지력 같은 것도 생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안에 있던 어둠의 세력이 청년 꾸르실료를 통해 받은 사랑과 은총 때문에 더는 숨어있지 못하고 자신이 문 것을 놓지 않으려고 발악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당시 은퇴 구마 신부님에 의해 구만 예식을 하였습니다. 마치 검은 사제들에 나오는 것과 같이 엄청난 증오심과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구마 예식은 3시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그 자매가 기억하는 것은 이 싸움을 할 때 사제가 “십자가를 바라보세요!”라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귀는 “이 여자를 죽여야 이 집안이 망한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결국 “꽥!”하는 소리와 함께 나갔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그 어둠의 시절에 주일학교 피정을 하러 가서 “주님을 알게 될 때까지 절대 죽지만 말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미사, 성체조배, 기도 안에 머물며 한 가정의 아내요 어머니로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와 위 서울 교구 자매는 예수님을 만난 것에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참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나의 삶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느님이면 하느님 자녀의 품위에 맞지 않는 삶은 어색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은 사랑과 희생에 의해서만 생깁니다. 예수님은 7마귀를 지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참 아버지를 믿게 해주시며 죄에서 해방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방된 여인은 다른 형제들에게도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전에 인간으로서 짓는 죄들을 아직도 짓고 있고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면 아직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지금의 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체취가 묻어있는 무덤에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일 수 있고, 성경, 혹은 위 자매처럼 피정이나, 책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에 머물다 보면 천사를 만나게 되고 예수님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전에 사로잡혀 있던 죄에서 해방되어 점점 하느님 자녀의 품위를 갖춘 삶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모두 죄에 묶여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만 그 죄의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형제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부활 선물로 자전거를 받았습니다. 자전거를 처음 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자전거를 빌려서 타곤 했습니다. 그 뒤로 자전거를 탈 기회가 적었는데 1999년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도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논두렁도, 강가의 길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고, 길가에 핀 코스모르를 보았습니다. 본당을 떠나 사목국으로 오면서 자전거를 탈 기회가 없었습니다. 20년 만에 다시 자전거를 타게 되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들 대부분이 자전거가 있고, 자전거로 뉴욕을 쉽게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선물 받은 기념으로 신부님들과 부르클린 브리지까지 다녀왔습니다. 25킬로미터입니다. 자전거로는 먼 길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길게 느껴진 여정이었습니다. 사실 본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앞에 가는 신부님의 뒷모습만 보고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자주 다니다 보면 예전에 본 것처럼 하늘의 새도 보고, 바람을 느끼고, 자유의 여신상도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 베드로 사도는 나약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물위를 걷다가 두려움을 느꼈고,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면서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베드는 두려움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절망에 빠지고, 어둠 속으로 빠졌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전에 세상의 것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당당했고, 두려움도 없었고,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에만 신자가 삼천 명 가량 늘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는 많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배움이 부족했던 백정도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도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력이 약한 노인도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는 지식도, 나이도, 건강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을 받으면 주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셨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즐겨했던 오락, 취미, 만남이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선교 그리고 나눔의 삶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제 내 삶의 우선순위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도록 결심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끊어 버릴 수 있다면, 주님 부활의 의미를, 주님 부활의 기쁨을 보다 진실 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 결국 각자의 복음을 매일 새롭게 써내려가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여사도이자 애제자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행동의 몇가지 측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초의 반응은 몰이해요 착각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음 속은 그저 사별한 스승님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만으로 가득했습니다.

 

부활하신 스승님께서 바로 앞에 등장하셔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승님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스승님을 묘지 관리인으로 착각하고, 혹시 그분의 시신을 다른 무덤으로 모셨는지 물었습니다.

 

“마리아야!” 마침내 스승님께서 세상 다정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자 마침내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분을 알아뵐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야!” 이 얼마나 은혜롭고 황홀한 부르심입니까? 되살아나신 주님께서 살아생전 당신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친히 내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말입니다.

 

마리아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의 정으로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나를 일곱마귀의 횡포와 죽음으로부터 되살려주신 주님, 내 삶의 의미요 전부이신 주님, 그분과 영영 작별한 줄 알았었는데, 그분께서 기적처럼 되살아나셔서, 내 앞에 나타나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을 것입니다.

 

십자가 형을 통해 주님과의 끔찍한 사별을 맛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순간 자동으로 주님 발치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 다시는 스승님을 놓치지 않으리라.’는 마음에서 그분의 두 발을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안쓰러우면서도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한 가지 사명을 건네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복음 20장 17절)

 

부활하신 주님께서 매일 우리네 구체적인 일상사 안에 살아 숨쉬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으니 오늘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한명 한명 역시 예수님 부활 사건의 목격 증인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생활로써 이토록 은혜로운 소식,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 결국 각자의 복음을 매일 매일 새롭게 써내려갈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시기 전례 안에서 특징적인 측면이 한 가지 있다면 부활초를 켜는 것입니다. 부활 시기 동안 모든 본당 대성전에는 독서대와 제대 사이에 놓여있는 큰 초가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야 미사 때 사제들은 부활초에 분향하며 예를 표하는데, 이는 부활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시기 동안 우리 역시 매일 매일 우리 영혼의 심지에도 불을 붙여야겠습니다. 주님 섭리의 손길에 힘입어 지천으로 활짝 피어나고 있는 꽃들처럼 우리의 얼굴도 화사하게 피어나야겠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 역시 부활하신 주님처럼 성령의 불꽃으로 활활 타올라야겠습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해줍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은 예수님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신부-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1-13)”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 지켜보면서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지는 바람에 더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마리아가 천사들을 보면서 놀라지도 않았던 것은
그 충격과 슬픔이 너무 커서 그랬을 것입니다.
여기서 “여인아, 왜 우느냐?” 라는 천사의 말에는
“울지 마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천사는 “울지 마라.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으니.”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마르 16,6).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천사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묵시록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마리아는 큰 슬픔 속에서 울면서도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하느님 나라를 간절하게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 희망은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희망을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 주신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은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4-15).”

여기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을,
“마리아야, 왜 나를 찾으면서 울고 있느냐? 내가 여기에 있는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도 “울지 마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음성도 알아듣지 못했을까?
그것은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시신만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찾는 예수님은 ‘살아 계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돌아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눈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의 음성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슬프게 울고 있는 동안에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 너머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다.” 같은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별’의 슬픔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이니, 믿음이 부족하다고 탓할 수는 없습니다.
(슬픈 건 슬픈 거고, 아픈 건 아픈 겁니다.)
그럴 때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은 함께 슬퍼해 주는 일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죽음에 대해서 묵상하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더욱 키우고 희망하는 일은,
시간이 좀 지나서 안정을 되찾은 다음에 하면 됩니다.
(너무 슬퍼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믿음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고
꾸짖는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않고, 상처만 주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정말로 ‘사랑 없는’ 행동입니다.
사랑은 함께 울어주는 일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마리아를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6-18).”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은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눈과 귀를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선택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 사도들이 아니고 마리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에 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또 더 깊이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편애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 쪽에서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시키신 일은,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소식과
곧 승천하신다는 소식을 사도들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뜻에 따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곧 올라갈 것이라고
내 형제들(사도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마리아는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꼭 붙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임무를 주시자마자
마리아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곧바로 예수님을 떠나서 사도들에게로 갔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일’ 때문에 예수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떠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복음: 요한 20,11-18: 누구를 찾고 있느냐?

 -조욱현신부-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고 묻는다.(13절)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고 답하였다.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 하였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이름을 부르신다.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너를 알아보는 이를 알아보아라.’라는 말씀이다. 마리아는 “라뿌니!”(16절) 즉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이 모든 지체로 만들어지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삶들도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부활절의 삶이 이러한 삶이 되어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하십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 15)
빈 무덤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지만 마리아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녀가 경험한 바로는, 예수님이 사흘 전에 처참히 죽임을 당하셨고, 바로 이 곳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니 시신은 반드시 여기에 남아 있어야 했지요.

"모셔 가겠습니다."
때로는 사랑이 사람을 대책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가냘픈 여인이 성인 남성의 시신을 모셔가겠다니요. 적당한 무덤자리라도 봐 두었단 말일까요? 게다가 예수님은 사형수의 신분이니 로마의 행정 절차로 보나 종교 기득권층의 적대감으로 보나 그리 쉬운 일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어처구니 없는 마리아의 말에서 참으로 진한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 시신마저 잃은 공허함이 얼마나 애틋하고 절절하면 저리 말할까 싶지요. 성토요일까지의 우리 마음도 그랬으니까요.

"마리아야!"(요한 20,16)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살아 생전에 그녀를 부르시던 그 톤과 온도였을 테지요. 아마도, 아니 분명히,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는 듣는 이에게 저마다의 울림이 있었을 겁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요한 10,3) 동행하니까요.

"마리아야!"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 안에서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육을 지니신 인간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 인격을 흠모하던 마리아가 지금 그분 육신의 흔적을 찾는 건 너무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새로운 영혼의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익숙했던 이름을 새로이 불러 주심으로써!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마리아의 사랑은 육에서 영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지금 그분을 붙잡는 건, 반가움과 기쁨, 안도감 등 사랑의 다른 표현이 되겠지만 영의 사랑은 그 차원을 뛰어 넘어야 하니까요.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
마리아는 실제로, 결과적으로, 진실한 바람대로 예수님을 "모셔 갔습니다!" 시신을 모셔 가겠다고 결심한 그녀가 예수님의 현존과 뜻을 모셔 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제자들에게 전한 것이니 그렇습니다.

"마리아야"
예수님께서 부르신 순간 마리아는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건너갑니다. 육의 공허와 아쉬움, 슬픔과 절망에서 영의 충만함과 기쁨, 희망에로 들어갔지요. 그녀는 더 이상 스승의 핏기 없는 육신을 붙들고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으로 예수님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모셔가 전하는 진정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가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믿는 성경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선포합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메시아를 자기들 손으로 처단한 사실에 당황하고 마음 아파하며 어찌 해야 할지 묻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회개와 세례, 죄의 용서로써 하느님 백성은 성령을 받을 준비를 갖춥니다. 성자 예수님은 떠나가셨지만 이제 성령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시며 성부의 사랑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는 영의 존재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족보와 율법에 의거한 육의 삶에서 회개와 세례를 통한 영의 삶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빈 무덤가에서 찾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지요. 육의 프레임 안에 그분을 가두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분이 부르실 때 흔쾌히 응답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야!" "요셉아!" "바오로야!" 혹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벗님의 이름을 부르며 느닷없이 나타나시더라도 그분을 영의 사랑으로 알아볼 수 있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도 주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말씀 나누기 - 부활 8부 화요일-어떻게 해야 합니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14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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