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3일 파스카 성야

Margaret K 2021. 4. 3. 06:57

2021 4월 3일 파스카 성야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르코 16,1-7)


But go and tell his disciples and Peter, 
‘He is going before you 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as he tol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파스카 성야 예식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우리는 제1부에 성야의 장엄한 시작인 빛의 예식을 행합니다. 빛의 예식에서 우리는 이 거룩한 밤에 불을 축복하여 파스카 초를 밝힙니다. 이 촛불은 어둠을 이긴 빛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고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인도한 불기둥이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나타냅니다. 성대한 제2부 말씀 전례는 7개의 독서와 서간 그리고 복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거룩한 밤이 바로 빛이 창조된 밤이자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밤이고, 그리스도께서 암흑의 세상에 파견되시어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밤이라는 것을 알려 주며,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줍니다. 제3부 세례 전례와 제4부 성찬 전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몸소 체험하고, 그 새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큰 소리로 환호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신앙 진리의 정수입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를 중심 진리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전이 근본 진리로 전승하였고, 신약 성경의 기록으로 확립되어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 신비의 핵심 부분으로 가르쳐 온 신앙 진리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38항).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증언에서 시작됩니다.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 아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예수님을 찾아 무덤에 갔을 때,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젊은이, 곧 천사가 말합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이제 여인들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사도 13,32-33).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믿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영근신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죄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남을 체험한 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났다는 이 사실, 곧 부활했다는 이 사실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1-3)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숨겨져 있어 볼 수 없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곧 ‘빈 무덤’으로 비어 있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비어 있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체험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던 사람,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토록,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알렐루야!

 

오늘, 진정 우리는 그렇게 새로이 탄생되었고, 변화 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화와 탄생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변화된 생명은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곧 부활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 우리도 기꺼이 모든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봅니다. ‘빈 무덤’,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 어떤 일인가가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죽은 이를 묻는 곳이라면, ‘빈 무덤’, 그것은 죽음 그 자체를 묻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은 부활의 근거는 될지언정, 부활이 사건으로 체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빈 무덤’은 제자들이 눈으로 직접 본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활의 참 뜻을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상징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예수님마저 죽어버린 예수님의 빈자리인 자유입니다. 곧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하는 빈자리 입니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빈자리 입니다. 곧 우리의 제한된 시선에 갇혀지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삶은 또한 예수님의 자유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일 것입니다. 주님의 자유로움에 신뢰와 의탁을 두고 내맡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르 16,7)

 

주님!

곁에 계시는 당신을 두고도

모르는 척 무시하고 비껴가도 당신께서는 저를

형제라 아우라 부르시며 다정히 손을 잡으십니다.

붙들려 있게 하소서. 꼭 붙들려 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늘 붙들리게 하소서.

꼭 붙들고 늘 함께 동행 하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형제들 안에서 보고 계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저희들 안에 들어와 꽃을 피우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아멘.

 복음: 마르 16,1-7: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 날 부활하셨다. 구약의 안식일은 이제 주님의 부활하신 날 주님의 날로 바뀌게 된다. 옛 시대의 안식일은 해가 떠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밤을 밝힌 촛불 같은 것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경배한 이들은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하여 무덤에 간다.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매우 이른 아침”은(2절)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고귀한 품위를 얻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이른 아침을 경사롭게 만드시고, 당신 부활의 빛으로 빛나게 하셨다. 여인들은 안식일을 지내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열심한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하고(1절) 무덤을 향해 출발하여 새벽에 무덤에 도착하였다. “누가 그 돌을 굴려 내 줄까요?”(3절) 여자들은 돌아가신 분을 만나기 위해 돌을 굴려내야 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의 눈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닫힌 돌을 굴려내면 무덤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에 향유를 부으면 부족한 믿음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영광을 믿음의 빛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4절) 이것은 주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실 수 있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이미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천사가 돌을 굴려낸 것이었다. 예수님은 닫힌 무덤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여인들은 무덤으로 들어가 웬 젊은이가 하얀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기서 오른쪽에 앉아 있는 천사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 왼쪽은 현세의 삶을 상징하고 사탄의 세력을 의미하며, 오른쪽은 영원한 삶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생명을 넘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셨으니 부활을 전하러 온 천사는 오른쪽에 앉아 있어야 한다. 천사가 하얀 옷을 입은 것은 부활의 기쁨을 알리는 것이다. 천사가 앉아 있는 자세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제직과 왕직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앉는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나라의 당신 어좌로 오르시는 분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왕좌에 앉는 것은 임금의 행위이고, 희생 제사의 자리에 서는 것은 대사제의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씻어주시는 사제이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왕국을 주시는 임금이시다. 그래서 천사들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 그 왕좌에 앉으시려 하늘나라에 가셨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마르 16,5 참조) 나타나기도 했고, 대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루카 24,4 참조) 천사는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6절) 우리는 십자가를 공경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도 죽음이 죽을 것이다.

 

빈 무덤에서 위대한 사명이 여인들에게 공동체와의 연관에서 항상 유효한 사명이 세 마디로 내려진다. “가라, 제자들에게 알려라, 말씀들을 기억하게 하여라.” 항상 의심하고 있던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말씀이 바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7절) 여기서 이 갈릴래아는 평야지대가 아닌 갈릴래아 산, 예루살렘이다. 거기서 하늘에 오르실 것이다. “거기서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성령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 결정적 모상을 뵙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계시요,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역사라고 할지라도, 이 부활사건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활하신 주 예수의 모습은 바로 영광스럽게 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 부활의 신비는 우리 안에서 드러나고, 선포되어야 하는 신비이다. 영광의 주님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큰 대가가 지급된 사건이다.

 

우리가 전할 부활의 신비도 우리 자신이 지고 가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신비이다. 이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 신앙인은 매 미사 중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하고 응답하지 않는가? 이 미사 중에 우리의 삶이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힘차게 선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조재형신부-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친구의 문자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드디어 여기 위니펙본당신부님께서 캐나다에 입국하셨고저는 2월 27일 토요일 특전미사에서 전 본당신부님께서 귀국하신 후 5,6 개월 만에 영성체를 하였습니다입대해서 훈련받다가 맞은 첫미사냉담하다가 다시 주님을 찾아뵐 때의 그 감격과 같이 성체를 받아 모실 때 기쁨의 눈물이 났습니다이 감동 그대로 계속 살기를 주님께 청합니다그동안 사도를 기다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던 우리조상들의 마음을 백분의 일 정도도 안 되겠지만 느꼈습니다우리의 두 분 신부님 김 신부님조 신부님 항상 건강하세요우리 친구들 주님의 은총 듬뿍 받으세요.” 친구의 문자를 읽으면서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났습니다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세상의 것들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주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은 게을리 했었습니다.

 

오늘 하루 침묵 중에 신앙의 신비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예전에 식당에서 본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열어 보지 않은 선물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하나

그것을 열어 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눈과 귀와 손끝이,

발걸음이 그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그것은

당신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귀한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둠이 걷히면 새벽이 옵니다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는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존재가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마르 16,4)
충실하고 거룩한 여인들이 안식일 다음날 무덤을 찾아갑니다.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유를 미리 사서,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에 다다릅니다.

'열린 무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았던 커다란 돌이 치워져 있습니다. 장례날 군사들이 힘껏 봉인했던 무덤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 돌은 산 이와 죽은 이를 갈라놓는 돌, 어지간한 힘으로는 쉽게 밀어내기 어려운 거대한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모셔진 공간과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을 구분하는 장벽이기도 했지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놀라서 무덤에 들어간 여인들은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젊은이를 보고 놀랍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요한과는 달리 "천사"라는 언급을 아낍니다. 그 젊은이는 그녀들이 찾는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빈 무덤'
무덤은 열려 있고, 또 비어 있습니다. 더 이상 이곳이 그분 자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순간을 목격한 증인은 없습니다. 그저 열려 있고, 비어 있는 무덤을 발견한 이들과, 그들이 듣고 만난 분에 대해 전해진 이야기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의혹이 증폭되지요. 그들은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훔쳐간 뒤에, 생전에 말씀하신 '사흗날의 부활'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누구도 그 순간을 보지 못했으니 저마다 생각한 대로 믿을 뿐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제5독서>에서는 주님 "말씀"의 속성을 이야기하십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마는 말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차 말씀하신 수난과 죽음, 부활의 예고는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믿음으로 증명되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거나, 천사의 말을 믿거나,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말을 믿거나... 이렇게 부활은 '믿음을 기초로 확장되는 하느님 나라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나타나셔서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드시기도 하고 가르침을 주기도 하셨지만 끝내 믿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복음사가는 감추지 않습니다.(마르 16,14 참조) 그러니 여러 사람을 건너서 전해 전해 들은 이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분의 함께 다시 살아나리라고 믿는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낡고 완고하고 불결한 자아는 주님께서 넣어 주신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 새 생명으로 변모됩니다. 이 세상 끝날 모든 죽은 이들과 함께 누리게 될 부활의 은총은, 그분 부활을 믿음으로써 오늘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도 누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믿음으로써 우리가 얻을 새 창조는 전혀 새로운 무엇이 아닐 겁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내실 때, 보시며 흡족해 하셨던 그 충만하고 온전한 아름다운 평화의 상태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새 창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원죄에 물든 욕망과 교만으로 어둡고 음습한 무덤 안에 갇혀 버렸던 병들고 낡은 자아 앞에 비로소 그 커다랗고 육중한 돌이 치워집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거센 추격을 벗어나 마른땅은 밟고 바다를 건넌 것처럼(탈출 14,22 참조), 믿는 이 역시 죽음과 생명의 경계 장벽을 성큼 건너서,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네 영광을 남에게 넘겨주지 말고, 네 특권을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지 마라."(바룩 4,3)
<제6독서>에서 바룩 예언자가 외칩니다. 더 이상 원수들의 땅, 무덤 속에서 서럽게 늙어가지 말고 하느님의 길에 들어서서 평화를 되찾으라고, 하느님께 속한 그분의 백성으로서의 영광과 특권을 놓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믿음으로 얻은 새 피조물의 정체성을 단단히 붙잡고 나아갑시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누릴 부활의 열매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기쁨과 평화, 사랑과 연민이 빈 무덤을 가득 채우고,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룩 예언자의 환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구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알고 있다."(바룩4,4)

주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31일 부활 성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코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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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던 사람,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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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믿음으로 증명되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거나, 천사의 말을 믿거나,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말을 믿거나... 이렇게 부활은 '믿음을 기초로 확장되는 하느님 나라의 증거'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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