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1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Margaret K 2021. 4. 1. 06:19

2021 4 1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요한 13,1-15)


"Master, are you going to wash my feet?"

If I, therefore, the master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ought to wash one another's feet.
I have given you a model to follow,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오늘부터 우리가 지내는 파스카 성삼일은 일년 가운데 가장 거룩한 시기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류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열두 제자와 함께 파스카 만찬을 거행하십니다. 파스카 만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하느님 체험, 곧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이집트 탈출을 기억하여 현재화하고, 새 예루살렘을 재건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축제입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고자 서둘러 떠나왔음을,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통하여 하느님 말씀의 빵으로 살아감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얻은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기에 그분께서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파스카 식사 때 마시는 포도주는, 이집트를 탈출하던 그 밤에 짐승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피하고 생명을 얻게 된 것과 시나이산에서 속죄의 피로 맺은 계약으로(탈출 19,3-8 참조)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하고 다음에 올 메시아를 기쁨 속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빵과 포도주의 축복에 이제 예수님께서 새롭고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시는 성체성사를 세우십니다. 빵을 들어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 말씀하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흘리실 피로 당신 스스로 어린양이 되십니다. 당신 목숨을 죽음이라는 대가로 내어 주셔서 많은 이가 죄에서 해방되는 속죄를 선사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파스카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당신 죽음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많은 이의 관심이 가는 물건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마스크’가 아닐까 싶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하니 본인에게 편한 마스크를 찾게 됩니다. 특히 저의 경우는 말을 많이 해고 또 안경을 쓰고 있어서, 김 서림이 없고 말 전달이 잘된다고 하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마스크뿐이 아닙니다. 텔레비전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건강식 광고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에게 유익한 것, 자기 몸을 편한 것을 찾는데 우리는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에 편하고 유익하다는 방향을 쫓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좋은데, 꼭 필요한 것인데도 외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먹고 사용하는 것은 몸에만 좋다면 약간의 불편함도 기꺼이 감수하면서, 이것은 그렇게 힘들지도 않은데도 외면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바로 미사 참석을 통해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진짜 살과 피로 되어 있다면 우리가 모시기 힘들까 봐, 자그마한 빵과 포도주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을 외면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쩌면 나의 영원한 생명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주님 만찬 미사로 교회는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교회 전례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 중요한 시간의 첫 부분을 바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사랑은 과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내려지는 커다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라고 전해주고, 이 사랑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자기 몸에 편하고 유익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내 영혼을 구해주는 주님의 사랑을 좇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본을 철저하게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를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면서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사르트르).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의 평온을 위한 기도문(Serenity Prayer)

오 하느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화를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하루를 살아도 한껏 살게 해 주십시오.

한순간을 즐겨도 한껏 즐기게 해 주십시오.

고난은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해주십시오.

죄로 가득 찬 이 세상, 주님께서 그대로 끌어안으셨듯이 저도 이 세상을 제 뜻대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끌어안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뜻에 순종할 때 당신께서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신 것을 믿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소박한 행복을, 저세상에서는 지극한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해 주십시오. 아멘.

너무나 감동적인 기도문입니다. 주님의 가장 큰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인 오늘, 적합한 기도문인 것 같아서 이렇게 옮겨 적었습니다.

 발을 씻기 전 목욕을 했다는 의미: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아버지께 다시 돌아가는 지도와 같은 ‘길’을 알려주심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란 ‘은총과 진리’로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은총은 ‘사랑’이고 진리는 ‘가르침’, 혹은 ‘모범’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그 피로 상대의 자아를 씻어줌입니다. 이를 ‘왕직’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봉사를 받은 이는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됩니다. 왕은 피로 상대의 불순종을 씻어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일은 ‘겉옷’을 벗었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그 방법은 수건으로 허리를 감는 것인데, 이는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진리요 모범’임을 알려주십니다. 당신처럼 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가는 ‘길’을 잃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발 씻김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성체 안의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 저의 발을 씻어주고 계셨는데도 지금까지 저는 그분의 머리를 밟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발 씻김을 받으면 주님께 다 내어놓고 싶은 마음만 남습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해 볼 내용은 가리옷 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그 엄청난 사랑에도 쉼없이 예수님을 배신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을 텐데 유다는 왜 그렇게 성체 성혈을 영하면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진정으로 자신의 발을 주님의 손에 맡길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발 씻김을 거부하던 베드로도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나라의 상속권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는,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라고 하십니다.

 

      손과 머리, 몸을 씻음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세례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백성이 되기를 ‘결단’하는 순간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 즉 하느님 뜻에 순종하기로 하지 않은 사람은 이 발 씻김이 소용이 없습니다. 성체 성혈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물이 유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바로 ‘회개’입니다. 내게 ‘세속-육신-교만’의 욕구를 일으키는 자아를 따름이 고통이고 그와 반대되는 ‘가난-정결-순명’이 행복임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면 주님 뜻을 따를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영하는 성체는 그에게 어떤 효과도 낼 수 없습니다.

 

      유다는 여전히 돈과 권력, 육적 욕망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돈이 더 행복인가요, 가난이 더 행복인가요?”를 물을 때, 대답을 못 하고 있다면 그 사람도 성체를 영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과 피를 내어주셔서 우리 발을 씻어주시는 그리스도를 배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1977년 부산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홀로 키우며 고생고생하며 살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임종이 가까워져 오자 흩어졌던 4남매가 다 모였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런데 평생에 다이아몬드 반지 한번 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원통하구나.”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녀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데 자식 된 도리로 안 들어 드릴 수 있겠느냐?” 하면서 조금씩 돈을 내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 드리기로 했습니다. 이때 맏며느리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최근에 옆집 아주머니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는데 그것을 빌려다가 끼워 드리고 어차피 돌아가실 어른이니까 나중에 빼서 되돌려 주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모두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옆집 아주머니의 반지를 빌려다가 고급상자에 넣은 다음 누워계신 어머니께 가지고 갔습니다. 반지를 받은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는 불빛에 비춰보고 얼굴에 비비시며 한참 좋아하시더니 물 한 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이 물을 갖다 드렸더니 어머니는 반지를 빼내 입에 털어 넣고는 꿀꺽하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만족한 듯 자리에 누우시면서, “너희가 선물한 반지 어미가 극락까지 가지고 갈란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자녀들 사이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어떻게 찾아 돌려주어야 할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들들이 어머니의 배를 갈라 반지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어머니를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결국, 화장을 시켜 드리고 잿더미 속에서 반지를 찾았는데 너무 손상되어 버려 도저히 돌려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4남매가 돈을 모아 새 반지를 사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이 어머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놓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죽음의 손도 그 여인의 발을 씻어줄 수 없습니다. 오늘 가리옷 유다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손은 죽음입니다. 그분 손에 발을 맡긴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세상 것에 가치를 둔다면 그분 손에 온전히 발을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마릴린 몬로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폐장한 해수욕장 같다.”라는 말을 남기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와 같다.”라는 글을 남기고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노인과 바다는 평생 노력했지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허무감을 잘 표현한 어쩌면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종말에서 나폴레옹이 한 말이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했지만, 나의 왕국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사랑의 왕국은 나날이 번져 가지 않는가? 이상한 일이다.”

      이런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주님께 발을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그분이 나의 발을 씻으면 나는 지금까지 추구하던 모든 욕구를 버리고 그분을 위해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세상의 허무를 많이 겪어봐야 합니다. 헛되고 헛됨을 알아야 그분의 손에 나의 발을 맡겨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가졌던 솔로몬 왕은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전도 1,2)

      유다는 아직 세상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발 씻김을 받았지만, 전적으로 발을 내어드리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분의 발 씻김이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것의 포기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990년 우주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의 여러 행성을 촬영하고 태양계를 벗어나기 전에 처음으로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서 지구를 찍고 사진을 전송했습니다. 지구는 우주의 아주 작은 점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태양계 안에서 찍었는데도 점에 불과한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지지고 볶고 살아갑니다.

 

      나의 인생은 이렇게 작은 점 안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모여 경쟁하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사는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나의 발을 씻어주겠다고 바로 내 앞에 무릎 꿇고 계십니다. 내가 이러고 있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으셔서입니다. 내 앞에 무릎 꿇고 손을 내밀고 계신 분이 온 우주의 창조자이심을 믿는다면 나는 내가 사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이 먼지에 불과함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손에 나의 발을 내어드린다는 의미는 나 자신과 세상으로부터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조재형신부-


평화신문 3월 7일 기사에서 부산 양산의 서학수 베드로 형제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형제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라자로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부자는 자주색 옷을 입었고평생 좋은 집에서 맛난 음식을 먹었습니다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살았습니다그러나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갔습니다가난한 라자로는 부자의 집 앞에서 구걸하면서 지냈습니다몸에는 종기가 났고지나가던 개들이 핥았습니다언제나 춥고배고팠습니다그러나 라자로는 죽어서 천국으로 갔습니다예수님께서는 부자처럼 살아서 지옥으로 가라는 뜻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라자로처럼 평생 춥고배고프게 살다가 천국으로 가라는 뜻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부자는 자신의 것을 나누어 라자로에게 주라는 뜻입니다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의 삶을 살고죽으면 둘이 손을 잡고 같이 천국으로 가야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과 같은 인생입니다아침이면 피었다가 말라버리는 꽃과 같은 인생입니다사랑하고사랑받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면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으며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뇌성마비로 태어난 서학수 베드로 형제님은 부잣집 앞에서 구걸하던 라자로와 같이 힘든 삶을 시작하였습니다제대로 걸을 수 없었습니다표현을 잘 할 수 없었습니다초등학교는 마칠 수 있었지만 중학교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성령기도회를 다니면서 천사 같은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아내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서학수 베드로 형제님을 걱정하였고집으로 가는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음이 따뜻한 서학수 베드로 형제님과 결혼하였습니다서학수 베드로 형제님은 본당의 배려로 성물방에서 봉사 할 수 있었고신부님들의 강론테이프와 강의테이프를 팔았습니다하느님의 축복으로 아들이 생겼고그 아들이 3년 전에 사제가 되었습니다서학수 베드로 형제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뇌성마비인 자신에게서 아들이 생겼고그 아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아들사제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았지만신부님은 건강한 몸으로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서학수 베드로 형제님은 자신의 장애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서학수 베드로 형제님 곁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많았습니다사랑과 나눔이 있는 곳은 이미 천국입니다.

 

오늘은 주님 만찬 성목요일입니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이 만찬을 미사로 재현하는 것입니다미사 중에 사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렇게 재현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마셔라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죄를 사하려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때에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이 됩니다성체성사는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고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아기에게 하는 일이요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이요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희생과 봉사입니다이제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억누르고권위를 내세우고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니라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기꺼이 봉사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주님의 만찬미사입니다모든 이를 품어주셨고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주셨으며스스로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끝까지 믿어주며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확신으로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던 주님이십니다그런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희생을 우리도 배워야 하겠습니다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배우며우리들 또한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씻어주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예수님께서 내어주신 몸과 피를 받아들이듯이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말씀이 살아 있다면우리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족례는 지고지순한 하느님의 손길과 비천한 우리 인간의 바닥이 맞닿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양승국신부-

 

생각만해도 살떨리는 수난과 죽음의 마지막 여정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십니다.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시간을 야속하게도 어김없이 다가왔고, 고난의 쓴 잔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착찹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시간은 째깍재깍 다가오지, 제자들의 미성숙은 그대로 남아있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시간을 이용해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십니다. 그 수업은 3년여간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르침의 총정리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가르침이 꽤나 파격적입니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라 백만번도 더 가르치셨지만, 잘 먹혀들지 않자 충격요법을 통해 가르치시는데, 그것이 바로 세족례였던 것입니다. 

 

세족례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신 후 가르침을 마무리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복음 13장 14~15절) 

 

참으로 은혜로운 표현 한 가지가 눈에 띕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러 건너가실 때가 된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복음 13장 1절)

  

발 씻김 예식을 주관할 때 마다 드는 느낌입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때 마다, 그 옛날 예수님의 겸손하신 얼굴이 떠오릅니다. 주인이시면서도 종의 발 아래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면서도 말단 병사 앞에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의 겸손하신 얼굴... 

 

허리를 굽히고, 주전자에 담긴 물을 붓고, 내 발을 씻듯이 뽀득뽀득 씻기며, 마른 수건으로 꼼꼼히 젖은 발을 닦을 때 마다, 그 옛날 자상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이며, 내려가는 것이 올라가는 것이며, 죽은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 

 

세족례는 지고지순한 하느님의 손길과 비천한 우리 인간의 바닥이 맞닿는 은혜로운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예들의 일이었던 세족(洗足)을 하느님의 일인 세족례(洗足禮)로 승격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세족례를 통해서 이제 세족은 노예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몸종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한낱 피조물이며 죄인들인 인간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을 묵상하며 우리들의 삶을 한번 돌아봅니다.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봉사하고 더 기쁘게 궂은일에 소매를 걷어붙여야겠습니다. 국회의원들 4년에 한번만 앞치마 두를 것이 아니라, 매일 앞치마를 두르고 연탄배달 봉사를 나가야겠습니다.

  

내가 총장이니 교장이니 자랑만 할것이 아니라 기쁜 얼굴로 학생들을 섬겨야겠습니다. 장상이요 수도원장이라 할지라도 환한 얼굴로 마당도 쓸고 설거지도 해야겠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식사자리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마지막자리입니다. 이를 가리켜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십니다.

곧 당신의 유산으로 고귀하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명을 물려주십니다. 이름 하여, 성체성사를 설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를 유산으로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쟝 바니어 표현을 빌면, 당혹스런 쇼크요 스캔들입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신 까닭입니다.

영광스럽고 드높으신 분이 권위도 없이 천박하게 겉옷을 벗어 재끼고,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노예나 하는 일을 하는 것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발 씻김 안에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그 무엇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몫’에 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여기에, 발 씻김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곧 발 씻김은 단지 섬김의 본보기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넘어서, 무릇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성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무한한 행위요,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와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투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가 됩니다.

성체인 이 섬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됩니다.

섬김은 이렇게 구원의 성체가 됩니다. 곧 섬김은 성체성사가 현실 속에 실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인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몫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결국, 예수님과 함께 구원사업의 몫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 섬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섬김을 받은 자라야, 받은 바로 그 섬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양도가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섬김’은 예수님을 내어주는 성체가 되고, 신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생명의 전달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몫을 함께 나누고, 당신의 유산을 나누어받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행위요, 성체성사가 됩니다.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발 씻김의 성사는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화해성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발 씻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섬김’은 서로의 용서와 친교를 이루며, 화해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할 베드로와, 유다와, 십자가 아래서 옷마저 벗어버리고 도망쳐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전에 이미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

 

이토록, 발을 씻는 일은 깨끗함을 완성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일은 그 깨끗함의 완성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진정한 파스카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고 압도당합니다.

이 거룩한 섬김, 이 놀라운 ‘발 씻김’으로, ‘당신의 몫’을 건네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전달하는 이 놀라운 감격의 성체성사요 화해성사인 ‘발 씻김’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마침내 구원의 몫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도 이 고귀한 유산을 함께 나누고 전달해야 합니다.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일이 바로 그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주님!

제 영혼을 씻어주소서.

당신 사랑을 입고 생명을 몫을 얻게 하소서.

섬김 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낮아져 높일 줄 알고 작아져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쪼개지고 부수어져 내어주고 파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성주간 목요일

 -조욱현신부-


교회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다.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이 만찬을 미사로 재현한다. 탈출기에서는 야훼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한 파스카, 즉 죽음의 재앙이 건너간다는 과월의 축제로, 이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 대축일로 지내라고 하신다. 사도 바울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최후 만찬 때에 행하신 ‘성체 성혈의 의미와 그 의식을 우리가 행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밀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되는 이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복음: 요한 13,1-15: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1절) 예수님께서 ‘건너가심’은 세상에 계실 때, 하느님의 고귀함을 벗고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으며, 우리에게 맞추어 당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필리 2,7) 우리와 함께 계시던 분이 당신의 충만함(참조: 콜로 1,19; 에페 1,23)으로 돌아가신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을 곧 떠나야 할 때가 오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그 일로 그들의 사랑이 더욱 커지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아 그들이 장차 닥칠 끔찍한 일들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절) 여기서 ‘끝까지’는 ‘그리스도다움’을 뜻한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이 사랑은 만찬 때, 악마가 이미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은 후에 표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3절)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4절).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5절) 고 한다. 말씀이신 분,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분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려고 무릎을 굽히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일은 그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손수 부으셨다.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는 겉으로만 보이는 행동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르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행위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황송했다. 그래서 당황해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7절)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8절)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8절) 베드로가 나중에 알게 되는 신비는 그들의 발은 곧 기쁜 소식을 전할 발이므로 그 발을 씻고 당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닦음으로써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는 길이요”(요한 14,6)라고 하신 분께로 갈 수 있게 되었고, 또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깨끗한 발로 사람들에게 갈 수 있도록 아름답게, 제자들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비를 아직은 깨닫지 못하지만, 나중에 그것을 알고 나면 그 신비를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9절) 하자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10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다. 예수님은 그를 다른 제자들처럼 영예롭게 대하시며 그에 대해서도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발을 씻어 주시는 그 사랑을 십자가의 못으로 갚아드리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12절) 하신다. 그리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4절)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주인으로서 종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더러움도 씻는 것이다. 형제의 발 앞에 몸을 숙일 때, 겸손해지며 더욱 확고해진다. 이 겸손으로 교만해지려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15절) 예수께서 먼저 당신의 모습이 사랑하고 봉사하는 모습이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웃으로부터 멀리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가까이할 때이다.


이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 거룩한 밤에 이 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상식탁에 앉을 때까지 당신의 말씀과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물과 피로 우리를 씻어 주시는 주님 손길을 감지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갈 때가 된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사랑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끝까지"라는 단어는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시간만 의미하지 않지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 이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세상의 끝날까지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우리 역시 "끝까지"의 수혜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3,7)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베드로가 불편해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어디 이 일뿐이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온 시간 동안 그들이 그분의 마음과 행위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얼마나 있었던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 안에서 느닷없이 마주한 사건과 사고, 추락과 실패, 모호함과 불확실성 앞에서 이를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어 망연자실 무지의 늪에 빠져든 때가 종종 있었지요.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장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눈물과 슬픔의 포장지가 벗겨지면서 그 안에 들어찬 사랑의 선물을 발견하고 깨닫는 순간 또한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솔하고 섣부른 판단을 멈추고,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다림은 그저 수동적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가능한 적극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의 파스카 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탈출 12,13)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의 피를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하십니다. 당신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치면서 지나가실 때 그 피가 곧 이스라엘 백성임을 증명하는 표가 될 것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대목입니다.

"이는 내 몸이다."(1코린 11,24)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1코린 11,25)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주신 몸과 피는 그분의 사랑입니다. 이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 곁으로 가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이 지상에서 당신의 현존 가운데 살아가도록, 또 그들도 자신의 생명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성체의 삶을 이어가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 극진한 사랑은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고 확장되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의 몸을 이루게 해 줍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우리 몸의 가장 낮고 더러운 발을 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씻어 주셨습니다. 이를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보면, 당신의 뜨겁고 열렬한 사랑의 피로 우리의 가장 죄스럽고 불충한 부분을 씻어 정화해 주신 것까지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닦아 준 이 피, 우리에게 묻히신 이 피야말로 구원을 보증합니다.

"나에게 당신은 피의 신랑입니다."(탈출 4,25)
문득 모세가 소명을 받은 뒤,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미디안을 떠나서 이집트로 들어갈 때 겪은 위기의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때 모세의 이방인 아내 치포라가 한 고백이지요.

"피의 신랑"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정배, 신부인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그분은 당신 피로 우리를 살리신 피의 신랑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이고 희생이며 완전한 자기 증여의 표지로 당신 피를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지금 그 뜨거운 사랑의 시간, 사랑의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만찬 저녁 미사부터 시작되는 파스카 성삼일은 우리 구원의 가장 거룩하고 의미 깊은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행하는 이 때를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낼 수 있도록, 스스로는 물론 타인에게도 삼가고 배려하며 지내면 좋겠지요. 복잡하고 분주한 일상 안에서도, 주님 사랑에 정향하고 집중하며 구원을 뼛속 깊이까지 체험하는 은총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로 함께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9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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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허무를 많이 겪어봐야 합니다. 헛되고 헛됨을 알아야 그분의 손에 나의 발을 맡겨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가졌던 솔로몬 왕은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전도 1,2)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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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십니다.

곧 당신의 유산으로 고귀하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명을 물려주십니다. 이름 하여, 성체성사를 설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를 유산으로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쟝 바니어 표현을 빌면, 당혹스런 쇼크요 스캔들입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신 까닭입니다.

곧 발 씻김은 단지 섬김의 본보기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넘어서, 무릇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성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무한한 행위요,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와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투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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