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0일 성주간 화요일
“주님, 그게 누굽니까?
(요한 13,21-33.36-38)
"Master, who is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인생에서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 가운데 한 부분은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기억일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과 이익을 위하여 나의 사랑을 이용한 연인,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갔지만 위기의 순간에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린 동료, 온갖 좋은 말로 나에게 다가와서 믿고 의지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는 이중적 태도를 가진 친구. 우리 삶에서 배신과 배반의 경험은 큰 상처로 남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믿음을 저버리는 배신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더 큰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지금의 사랑에 실망하고 좌절하였기에, 아니면 자신의 사랑이 그보다는 더 크기에 다른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배신일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으셨고 사랑하셨고 동행하신 제자들입니다.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놀라운 일들과 기적을 목격하면서 그 사랑과 기대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명은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섭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과 입으로 들어오는 넉넉한 빵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돈과 빵에 대한 사랑으로 변해 갑니다. 베드로는 아직까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그 사랑이 베드로 자신의 목숨에 대한 사랑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사랑은 이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도 배반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위기가 닥쳐오면 더 사랑할 것을 찾아 주님의 사랑에서 돌아서려고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한 번 더 바라보며 돌아설 준비를 멈추었으면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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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어떤 아이를 보고서 너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와 함께 신나게 놀았는데, 다음날 시험에서 늘 100점을 맞는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는 100점을 맞지 못한 저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쉬운데 왜 100점을 못 맞아?”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성적을 맞는 친구, 운동을 너무 잘하는 친구, 남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는 친구,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 등등 제 주변에는 부러운 친구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사라졌고, 늘 소극적인 자세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친구들은 모두 평범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공부 잘했던 친구는 장사하고 있고, 운동 잘하는 친구는 공무원입니다. 그 밖의 다른 친구도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능력의 큰 차이가 그 순간에는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았지만, 사실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우리 삶의 장애물 셋을 극복하는 사람만이 특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셋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포기의 유혹. 둘째, 두려움. 셋째, 크고 작은 문제의 연속적 발생.
이를 극복한 사람만이 특별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포기의 삶이 아닌 한 번 더 시도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또 두려움보다 희망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 다가오지만, 그 안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끼길 원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하는 특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눠주셨고, 유다도 예수님께 빵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축복받지 못합니다. 유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를 꾸짖기도 하셨지만 소용이 없었지요. 사탄은 유다의 약한 곳을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을 포기했고, 예수님 팔아넘긴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삶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능력과 재주가 많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외적인 환경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는 특별한 삶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삶은 유다와 반대의 삶을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의 유혹을 벗어던지는 용기 있는 삶을 살 때, 두려움에 좌절하기보다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간직할 때, 문제가 너무 많다면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정말로 특별한 삶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특별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한 젊은이가 추운 날 길을 걷다가, 길거리에 한 어린 소녀가 오들오들 떨면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올라 하느님께 외쳤습니다.
“하느님! 왜 이런 걸 보고만 있습니까? 대책을 세워 주세요.”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대책을 세웠다. 그래서 내가 너를 만들었고, 또 너를 그곳에 보내지 않았느냐?”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요? 단순히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에서는 그쳐서 안 됩니다. 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자신의 꿈과 비전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를 찾기가 쉽지 않지요. 바로 그때 사랑의 관계를 떠올려봐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이유가 될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전문가가 되려거든: 맛을 보고 무엇을 넣었는지 기억하는 과정을 반복하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리옷 유다의 배신을 요한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가리옷 유다처럼 되지 않으려면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증가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앙생활에 발전이 없다면 가리옷 유다의 잘못을 되풀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증가시켜야 할까요? 믿음은 ‘시험’을 통해 증가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려면 한 번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믿는 이유는 다른 사람은 잠깐 나에게 잘해줄 수 있지만, 부모는 못 해주는 건 잠깐이고 대부분은 나에게 잘해주는 것을 내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전장치 하나도 없이 손가락 한두 마디로 버텨야 하는 ‘프리 솔로’ 암벽등반으로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975m에 달하는 바위산 ‘엘 카피탄’을 오른 ‘알렉스 호놀드’는 어떻게 그 산을 오를 수 있는 믿음을 얻었을까요?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계획을 세우고 안전장치를 이용해 50번을 등반하고 나서야 그런 믿음이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면허를 따고 운전대를 잡으면 도로에 나가기 두렵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면 그런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자만심만 아니면 초보 때 두려워할 때보다 훨씬 안전하게 운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두 뜻이 있습니다. ‘주님 뜻을 죽이고 내 뜻을 사는 것’과 ‘내 뜻을 죽이고 주님 뜻으로 사는 것’입니다. 두 뜻은 반대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굳이 당신 뜻을 알려주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은 내가 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고 주님 뜻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선택은 이 두 개만 구분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뜻인지 살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뜻은 분명 결과가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은 생명력입니다. 행복하면 살고 싶고, 행복하지 않으면 죽고 싶습니다. 가리옷 유다의 선택은 내가 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살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려는 이유는 이 뜻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뜻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면 십자가 앞에서도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되지만, 지금 어떤 뜻을 따르는지 구분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믿음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여성이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살았습니다. 딸도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취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안 좋아진 상태였습니다. 마침내 어머니는 딸에게 집안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사파이어 원석이 박힌 금목걸이를 돈을 많이 쳐 주는 금방에 가서 팔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딸은 후해 보이는 아저씨가 있는 금방에 들어가서 사파이어 금목걸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은 대뜸 “이거를 왜 팔려고 하지?”라고 물었습니다. 딸은 “네, 저희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금방 아저씨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보조가 필요했는데 네가 내 일을 좀 도와줄래? 그리고 미리 가불을 해 주면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이것은 나중에 팔아도 되잖아.”
딸은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보석상의 보조를 하며 보석을 감정하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딸이 그 일을 매우 좋아했으므로 보석 감별 능력도 뛰어나게 발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딸에게 보석을 감별해 달라고 부탁하러 그 가게에 들렀습니다. 이런 때 보석상은 말했습니다.
“자, 이제 가보로 내려오는 사파이어 목걸이를 팔아야 하지 않겠니?”
그녀는 어머니에게 가서 목걸이를 팔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걸이를 보았는데, 좀 다르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목걸이는 순금이 아닌 도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파이어도 미세한 금이 가 있어서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보석상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그때 보시고 이 목걸이가 값이 나가지 않는 것임을 아셨을 텐데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걸 말해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니? 난 네가 스스로 그 값어치를 분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기를 기다렸던 거야. 그러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것 아니겠니?”
[출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유튜브 채널, ‘책읽는 다락방 J’]
예수님도 제자들을 뽑으시고 누가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따름이, 곧 사랑을 따름이 더 행복이고, 더 행복하다면 그 길이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분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는 그 분별 능력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은 자신이 선택할 때 어떤 뜻을 선택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때는 나의 선택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라 여기고 나쁠 때는 예수님을 따르니 그런 것이라 여겼습니다.
믿음을 증가시키려면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어떤 재료 때문에 이런 맛이 나는지 명확히 알아서 조금씩 재료와 조미료, 조리방법을 바꿔가며 음식을 완성해 갑니다. 우연히 아주 맛있는 음식이 나왔는데 조리법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음식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도 시험하며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뜻’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뜻은 내 뜻과 주님 뜻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매우 쉽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보면 됩니다. 당연히 이웃을 행복하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나중엔 더 큰 행복이 온다는 결과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항상 똑같습니다. 결과가 안 좋다면 그것은 내 뜻인데 주님 뜻으로 위장하여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넣었는데 맛이 달아질 수 없고, 설탕을 넣었는데 짜질 수 없습니다. 항상 결과를 보고 무엇을 넣어서 그런 맛이 나는지 살피는 과정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지속 되면서 오직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만이 참 행복이요 생명임을 구분할 수 있는 믿음의 전문가가 됩니다.

-조재형신부-
나라가 무너지는 원인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더 강한 나라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동에서 생겨났던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는 새로운 강대국이었습니다. 거침없는 침략으로 주변의 나라들을 무너트렸습니다. 남미에 있던 원주민들의 나라는 총과 대포를 앞세운 유럽의 침략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비극입니다. 내부의 부정과 부패로 인해서 나라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람 앞에 촛불의 신세가 된 나라는 주변 국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됩니다. 세계를 호령했던 나라들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하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극심한 자연재해와 같은 환경의 변화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연재해를 극복하지 못해서 사라진 고대문명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좀처럼 분열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구라는 조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구는 인사이동을 통해서 사제를 공동체에 파견하고, 파견된 사제는 임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오는 사제를 환영합니다. 사제가 개인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파견되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주어진 임기동안에 소임을 다하고, 공동체는 사제가 임기를 잘 마칠 수 있도록 협력하게 됩니다. 이주민 사목에서 가끔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사제가 현지의 상황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식으로 사목하면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현지의 상황에 따르라고 지나치게 요구하면 역시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함께 대화하고, 고민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 많은 어려움을 해결 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역사의 교회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던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스승이신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사랑하시던 제자들은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300년이 넘게 심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 사자의 먹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재판 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숨어버렸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고, 로마는 새로 시작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까지도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죄의 상태에서 돌아서서 다시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지만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배반도, 외부의 박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하였습니다.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어둠에 빛이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현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해도 하느님의 자비를 능가할수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두 배반자의 명암이 극명하게 비교·대조되고 있습니다. 두 제자의 차이는 딱 한끗 차이였는데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한 제자는 배신의 죄책감에 따른 비참한 자결로 인해 인류 역사 안에 세세대대로 부끄럽고 수치스런 이름을 남겼습니다. 반대로 다른 제자는 절절한 회개를 통한 참 제자로의 거듭났으며, 그를 통해 역사 안에 영원히 존경받는 수제자로 이름을 아로새겼습니다.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기까지 유다가 지니고 있었던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스승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얼마나 관대하고 너그러운 분이신지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자비를 믿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를, 흠결 투성이요 죄의 종합셋트인지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유다나 우리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머리칼보다 많은 죄속에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한 인간 존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망각했습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다해도 하느님의 자비를 능가할수 없다는 진리, 하느님의 자비 앞에 불가능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말종으로 손가락질 당하던 세관장 자캐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평생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온 우도의 급회개 앞에 직천당을 확증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우리 인간의 죄를 훨씬 능가하고 초월한다는 증거는 복음서 여기저기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크신 자비를 믿지 않은 유다의 운명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유다는 스스로를 셀프 단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단죄하지 않으셨는데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유다 자신을 용서할 기회조차 드리지 않았습니다.
유다와 정반대의 행보를 걸은 행운아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입니다. 그 역시 유다 못지않게 큰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베도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 스승님을 세번이나 배반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절렀지만, 큰 용기를 내고 가슴을 쾅쾅 쳤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록 자신이 아무리 큰 죄인이라 할지라도 스승님께서 자신을 용서해주시고, 다시 한번 제자로 받아주실수 있는 자비하신 분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스스로를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단죄해버렸습니다. 가장 큰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청하기만 한다면 백번 천번이라도 용서해주실수 있는 분인데, 거기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비참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었지만, 영원불변의 진리 한가지를 늘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자비로 충만한 분이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스승님은 죄인의 회개를 가장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 사도는 세번 배반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딛고 당당히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된 베드로는 동료 죄인들을 기꺼이 품어안을 수 있는 가슴 넉넉한 수제자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도 어둠과 절망이 깊어갑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습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 속에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는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입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게 하소서.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아멘.

배신의 죄보다 큰 사랑
-반영억신부-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하게 되며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 것을 보면 인정받던 제자입니다. 그가 유감에 빠져 배신을 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마음을 주고받는 소통이 없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 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에 따르는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용서와 자비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던 제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눈에 뛰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 부끄러움이 없이 묻고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주님과 소통을 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자책으로 목숨을 건 유다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결국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과의 끊임없는 소통입니다. 주님과의 대화로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요한 13,21-22).”
1)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예수님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은 것과 그의 이름을 언급하시지 않은 것은
유다 자신이 자유의지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십자가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당신의 목숨을 빼앗긴 일이 아니라, 내주신 일입니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2) 제자들은 배반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마태 26,22; 마르 14,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배반자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은
제자들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과
열성에 대해서 백 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또,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또 유다는 완전히 떠나기 전에 ‘성체’를 받아먹었습니다(루카 22,21).
그러나 한 번 떠나버린(차갑게 식어버린) 유다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도, ‘성체’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힘도, 성사의 은총도,
인간의 죄를 자동적으로 막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성사의 힘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는 인간이 스스로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유다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라고
장담했습니다(요한 13,37).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말한 뒤에
이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앞뒤가 다른, 또는 모순된 일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당시 상황이 그만큼 혼란스러웠음을 나타냅니다.
어떻든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장담했으면서도
나중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어쩌면 유다도 어느 시점까지는 자신이 배반자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고,
자기는 절대로 배반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만심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만일에 유다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다면 배반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5-27)”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1) 여기서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라는 말씀을,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분명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랑을 덜 받아서, 또는 안 받아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가 배반한 것에 대한 아픔과
안타까움이 들어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빵을 주신 일을,
그에게 사랑을 주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빵을 주셨기 때문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유다가 빵을 받은 일이 먼저 있었고,
사탄이 그에게 들어간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 주어졌고, 사탄의 유혹은 나중에 다가왔습니다.
사탄이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서 예수님의 사랑을 가로막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반대로 했습니다.
(유다가 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했는지,
우리는 그 이유나 원인을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을 배반하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유다 자신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입니다.)
3)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나를 배반하려는 너의 계획을 어서 실행하여라.” 라고
그를 밀어내시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네가 해야 할 일을 어서 하여라.”로 생각한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회개하여라.” 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배반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때는 밤이었다.” 라는 말은 유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유다 자신도 자기 마음이 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을 텐데,
이미 마음이 ‘악’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그는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향해서 갔습니다(요한 3,19-20).

복음: 요한 13,21-33.36-38: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조욱현신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에 노하시고 그의 사악함에 동요하심을 의미한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유다가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절)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이 취하신 인성도, 즉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 하신다.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영광의 결정적 순간 앞에서 제자들이 각자의 방향을 향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영적 여정 안에 있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지요.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
이 대목에서는 빛과 어둠의 대비가 극명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는 빛의 공간인 주님 현존 장소를 떠나 밤의 현실로 들어갑니다. 그가 다가올 주님 영광의 순간을 위해 쓰인 아픈 손가락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판단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 여쭈어 보게 하였다."(요한 13,24)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이 일화만 보면 예수님의 수석 제자인 베드로는 그분과 그다지 친밀한 밀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는 듯 보입니다. 몹시 궁금하면서도 직접 묻지 못하고 한 다리를 걸치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 목숨을 걸 수 있다고 자신하지요. 이 피상적 호언장담은 고의적인 허세라기보다 아직 자신을 잘 모르는 착각에 가까울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는 것 같아 보이지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사람마다 때가 있고 자기에 알맞는 고유한 자리도 있지요. 베드로의 때는 회피와 추락과 통회의 용광로를 거쳐 금처럼 정련된 뒤, 그제서야 빛이신 주님을 담아 그 빛을 내는 도구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중에는"
그의 때와 가능성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언제까지라도 그를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허공에 흩어질 맹세라도 그분께는 귀합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우리 안에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채 빛을 보길 기다리는 완성태를 관상하십니다. 그래서 늘 우리를 기대하고 기뻐하십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 물었다."(요한 13,23.25)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누군가에 의해 당신이 팔아넘겨지신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긴장시키십니다.
식탁에 둘러앉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유독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있었던 듯합니다. 스승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니 그만큼 친밀한 관계였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물리적으로 사랑하는 이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는, 영적으로 보면 그분의 품 안으로, 그 뜨거운 심장 안에까지도 파고들어갈 수 있는 거리로 가늠됩니다.
감히 스승을 팔아넘길 이가 누구인지 다들 묻기조차 두려운 질문이 그 제자에게는 가능했나 봅니다. 베드로의 고갯짓에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묻지요. 이 제자와 예수님의 거리는 점점 더 친밀히 좁혀지고, 이윽고 예수님의 속내가 흘러나옵니다. 이 제자와 예수님의 일치는 멀지않아 보입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입니다.
"모태에서부터"(이사 49,1.5)
예언자는 부르심이 모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반복해 이야기합니다. "모태"는 단순히 어머니의 태 안이라는 의미를 넘어 창조의 순간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과 주님의 종이 맺은 관계의 출발처럼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시작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태에서 부르심을 받고 이름을 받아 세상에 나옵니다. 그런데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이사 49,4)고 탄식하는 순간도 지나야 합니다. 세상 눈으로는 처참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인생일 수도 있지요. 참 예언자들도 그랬다고 성경의 갈피마다 증언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용광로, 그 광야를 거쳐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가지요. 근원을 향한 회귀입니다. 이 근원이 있어 우리는 스텝이 꼬이고 길을 잃어도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론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때론 스스로 눈먼 이인 듯, 때론 온통 폭풍과 들짐승에 둘러싸인 듯 두려워도 다만 멈추지 않는다면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온전한 일치를 향해 그분 품으로 파고들 수 있습니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그분에게서 나왔다가 온전히 그분에게로 돌아간 영혼, 온전히 자신이 됨으로써 그 자신이 평화가 된 이는 주님의 빛이 됩니다. 빛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빛이신 주님을 그대로 투영하는 빛입니다.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가 주님 안에서 빛이 되면, 세상은 그 빛을 보고 주님께로 나아와 구원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더 다가가 물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한 것처럼, 모호하고 막막하며 두려운 순간일수록 주님 가슴 깊이, 더 깊숙히 파고듭시다. 그리고 그분께 여쭙시다. 어떤 질문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여쭙는 모든 질문이 그분 심장을 두드리고 애간장을 뒤집어놓아 우리를 당신 안으로 와락 받아들일 자비를 흔들어 깨울 테니까요.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 품에 기대어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의 등급>
-김찬선신부-
오늘 이사야서 말씀이나 복음에서 주님 말씀은 우리를 혼란케 하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이런 말씀들이지요.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말씀하셨다."
주님의 종 입에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입에서
헛고생이나 헛심 같은 말이 나와서야 되겠는가?
예수님은 언제나 마음의 평화가 있어야 하는데 혼란이 있으면 되는가?
이런 혼란과 의구심이 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까?
그런 것이 무슨 결격사유라도 되는 겁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와 같아지시고 그래서
우리와 같으신 예수님은 위안과 힘이 되어 주시지요.
우리도 종종 헛고생만 했다는 허무감이 들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때 주님도
그러시다는 것은 위안이 되지요.
그런데 위안만 되면 안 된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힘이 되어야 하고 주님처럼 끙하고 다시 일어나 가야겠지요.
사실 일어나 가지 않고 위안만 받는다면 그것은
실패에 안주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짜 실패요 헛고생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헛고생만 했다고 하시고
심란해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당신의 사랑이 제자들의 배반
특히 유다의 배반으로 끝난 것 때문인데 당신 사랑이 배반당한 것으로
인한 분노와 사랑의 실패로 인해 상처를 받아 심란하신 건가요?
이런 이유로 심란하신 거라면 그런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 아니고,
이런 주님은 우리가 믿고 따를 필요도 없겠습니다.
제자들의 배반은 오늘 복음에서 배반할 거라고 예언하신 것처럼
이미 예상하신 것이고 각오하신 바이고 그래서 배신이 주님께
분노를 일으키지도 사랑의 실패나 사랑의 상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미래와 운명을 내다보며 심란해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제자들이 주님 사랑에 배신을 했어도
주님 사랑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사랑이 실패한 것이라면
사랑을 많이 할수록 실패도 많은 법이고
주님은 최고의 사랑 실패자라고 해야 하겠지만
사랑의 실패 여부는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패에 등급을 매기자면
사랑이 자기 안에 없는 것이 최대의 실패이고,
있는데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다음의 실패이며,
사랑에 실패하고 더 이상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사랑,
다시 말해서 새로운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이 그다음 실패이고,
사랑을 하되 끊임없이 보상을 바라는 사랑이 그다음의 실패이지요.
한 마디로 사랑은 포기할 때 실패하는 것이지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실패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지치지 않고 사랑을 하는,새로운 사랑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주님, 그게 누굽니까?(요한 13,21-3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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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주어진 두 뜻이 있습니다. ‘주님 뜻을 죽이고 내 뜻을 사는 것’과 ‘내 뜻을 죽이고 주님 뜻으로 사는 것’입니다. 두 뜻은 반대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굳이 당신 뜻을 알려주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은 내가 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고 주님 뜻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선택은 이 두 개만 구분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뜻인지 살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뜻은 분명 결과가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은 생명력입니다. 행복하면 살고 싶고, 행복하지 않으면 죽고 싶습니다. 가리옷 유다의 선택은 내가 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살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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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 속에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는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입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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