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29일 성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3. 29. 07:19

2021년 3월 29일 성주간 월요일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요한 12,1-11)
 

Mary took a liter of costly perfumed oil
made from genuine aromatic nard
and anointed the feet of Jesus and dried them with her hair;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oi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오랫동안 알던 분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느님 곁으로 가실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소식도 함께 말입니다. 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병원에 도착하여 그분을 보았습니다. 활달하고 활기찼던 모습은 사라진 채, 야위고 안쓰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그분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잡고 함께 기도하고 생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이마와 손에 기름을 발라 주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일주일 뒤에 부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안식을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순명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참여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리는 일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가올 두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다 이스카리옷은 오직 자신의 돈주머니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하여 한 발짝 더 내딛으실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맡으시겠습니까? 마리아입니까? 아니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까?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길을 걷는 것 자체도 어렵겠지만 그 길의 끝이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 아프고 힘들게 합니다.
이제 마리아처럼 우리도 그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에 우리도 한 발짝 더 다가가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참 신기하죠. 내 고민엔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면서 남의 고민을 들으면 해답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고, 내 집 대청소를 할 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남의 집 정리하는 거 도와주러 가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정리를 잘하냐는 소리를 들으니 말이에요.’(이석원,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중에서)


언젠가 읽은 책의 한 구절입니다. 이 책의 내용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하면서 남은 너무나 잘 보는 것 같습니다. 내 눈이 나를 향해 있지 않고 남을 향해 있어서 그럴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비판을 가지고 남을 설득하려고도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예측을 쏟아냅니다. 이 말대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전문가의 예측은 실제로 50%도 맞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전문가의 말도 정확한 예측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도 이런데 하물며 비전문가인 나의 말은 얼마나 맞을까요?

비판적인 시각이 이 세상을 발전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적인 시각이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향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이는 그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머리에 향유를 붓지 않고 겸손하게 시중을 든 다음에야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런 겸손에서 주님께서 받으실 고통과 시련을 위한 준비가 나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에 유다는 신심을 가장하여, 자신이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그분 목숨에 매긴 값보다 향유를 더 값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주님과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사랑 행위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과 대립하는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체로, 곧 그들 곁에 오래 계시지 않을 주님을 영광스럽게 한 행위로 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사랑의 실천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제쳐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선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맡기실 수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보다, 주님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용기있게 앞으로 전진하며, 식별을 통해 하나가 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찾아내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프란치시코 교황).


넘어진 덕분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아이다 미츠오의 ‘넘어진 덕분에’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덕분에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수와 실패를 반복한 덕분에 조금씩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궁지에 몰린 덕분에 인간으로서 연약함과 칠칠치 못함을 진저리가 날 만큼 알게 되었습니다.

속고, 배반당한 덕분에 바보처럼 정직하고 친절한 인간의 따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인생의 덧없음과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맛보게 되었습니다.

넘어진 것도, 쓰러진 것도, 속은 것도, 배반당한 것도 절대 유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삽니다.

 감사 없는 사랑은 기름 없는 자동차, 실이 없는 바늘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베타니아의 마리아로부터 비싼 향유로 발씻김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것에 대한 제자들 감사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제자들이 씻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께 죄의 씻김을 받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키우시는 목적은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 전까지 제자들은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감사함 없이는 참다운 사랑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 없이 사랑하려는 시도는 기름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이를 대표하는 제자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다 먹일 수 있는 빵이 2백 데나리온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향유 한 병에 3백 데나리온이라면 그 가치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어쨌건 겸손한 봉헌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감사 없이 이웃사랑만 강조하는 가리옷 유다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들으면 가리옷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하느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도둑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삶 안에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부부 사이에 사랑만 강조하며 감사는 잊고 살지 않습니까?

호랑이 남편과 아내 소의 이야기입니다. 호랑이 남편은 소 아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래서 귀한 고기를 잡아 옵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인 소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호랑이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고기를 잡아 와도 식탁에 오르는 것은 항상 채소입니다. 자기를 토끼로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합니다.

      상대에게 감사를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만 하려 했던 이 둘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혼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감사 없는 사랑은 실이 없는 바늘과 같습니다.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꿰매는 것은 없고 상처만 남습니다. 감사 없는 사랑은 기름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사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이로부터 사랑을 받아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면 남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성당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도 내 향유 옥합을 깨뜨릴 수 없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좀 지난 이야기이지만, 요즘 같이 어려울 때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좋은 영향을 미쳤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홍대 철인 7호 치킨집 사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여의고 몸이 아픈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두 형제는 치킨이 먹고 싶어 5천 원을 들고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치킨집에서 퇴짜를 맞은 상태였습니다.

 

      그날 철인 7호 치킨집 사장도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그날 치킨을 한 마리도 팔지 못했고 그래서 월세도 밀려 시름에 잠겨있던 차였습니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뒷문을 열고 나가니 골목에서 이 두 형제가 대화하는 것을 듣습니다. 동생은 연신 “치킨, 치킨!”이라고 외쳐댔고 형은 5천 원을 꼭 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치킨집 사장은 아이들에게 가게에서 가장 잘 팔리는 치킨 요리를 먹도록 해주었고 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사탕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배고플 땐 언제라도 찾아오라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동생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치킨집을 찾아왔고 사장은 동생을 예뻐해 주며 미용실에서 이발도 시켜주었습니다. 이 사정을 안 미용실 사장님도 돈을 받지 않고 아이 머리를 깎아주었습니다.

 

      거의 1년이 흐른 뒤 고등학생인 형이 이 사연을 편지에 빼곡히 적어 가맹점 대표에게 보냈고 그래서 이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가맹점 대표는 1년간의 월세와 천만 원의 물품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돈쭐’을 내줘야 한다며 먹지도 않으면서 치킨을 시켜 돈을 기부하는 등 엄청난 돈 폭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박재휘 사장은 잠시 가게를 닫는다는 말을 하고 그동안 도와주신 것들에 자신도 더 보태서 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6백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자신이 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현재 많은 관심으로 인해 주문 폭주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밀려드는 주문을 다 받자니 100% 품질을 보장할 수 없어 영업을 잠시 중단합니다. 이른 시간 안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글을 남겼습니다.

 

      가맹점 대표에게 편지를 보냈던 형은 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저도 사장님처럼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며 사는 멋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형은 아무리 사랑을 하려 해도 세상은 불공평한 곳이란 믿음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아가 강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치킨집 사장님의 사랑을 받고는 그와 같은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 편지로 그 감사를 전했습니다. 이렇게 누구에겐가 나의 향유 옥합을 깨뜨릴 사람이 없다면 그런 상태로는 어떤 진정한 사랑도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셋입니다. 이 셋의 사랑의 단계는 이렇습니다.

첫째. 모기인 상태인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에 감사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이입니다. 모기는 항상 배고파서 감사의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둘째. 아기로 사랑하는 마리아의 단계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향유를 깨뜨립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곧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분의 사랑에 감동하고 감사의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셋째. 하느님 자녀인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게 만들어서 귀한 향유 옥합을 봉헌하게 만드십니다. 사랑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철인 7초 치킨 사장님처럼 감사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 있는지요?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불가능함을 명심하고 나도 이웃도 사랑이 솟아나게 합시다.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겠지만 오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 오는 부활의 행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군사독재를 바라지 않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군부는 같은 국민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고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교황님께서도 폭력사태를 안타까워 하셨습니다대화로 문제를 해결 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국제사회도 한 목소리로 폭력사용 중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젊은 학생들이 대한민국 대사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대한민국은 군사독재 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대한민국 역시 민주주의의 제단에 희생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386세대인 저도 거리에서 최루탄 냄새를 맡았습니다백골단에 의해서 매 맞고 잡혀가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광주의 참혹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얀마에 더 이상의 희생이 생기지 않기를 기원합니다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미얀마에 민주주의의 봄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주간 월요일입니다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는 사탄의 깃발입니다수석 사제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합니다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미얀마의 군사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의 힘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을 감금했습니다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41년 전에 한국에서도 무고한 시민들에게 발포명령을 한 집단이 있었습니다민주주의를 외친 사람들을 폭도로 몰아 잡아가고 고문한 집단이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복음을 선포하였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집단이 있었습니다한 사람이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예언이라고 말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과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고 백기완 선생님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민중을 위해서 평생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사랑도 명예도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하였습니다그분의 글에 곡을 붙인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장소는 달라도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곳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있었습니다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에 있어야 할까요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느 깃발 아래일까요?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을 것입니다. 

 

손님 맞이의 총 책임자는 언제나 마르타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본당 성모회장으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들고 굳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사람, 이웃의 필요성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하는 사람이 마르타였습니다. 성격은?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기도 하고 쉽게 흥분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일행들 식사 준비에 바빠 죽겠는데, 동생 마리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복음 10장 40절) 

 

마르타는 예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친한 오빠처럼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동생을 향한 언니 마르타의 까칠하고 날선 발언을 통해 마리아의 성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에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살짝 ‘공주과’라고나 할까요?

  

산더미 같은 일감 앞에 언니가 쩔쩔 매고 있으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는 것이 당연할텐데, 동생에게는 그런 ‘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는 종종 존재 자체로 마르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모든 것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을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수난을 앞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방문하셨을 때, 예수님을 향해 보여준 마리아의 흠모의 정은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나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복음 12장 3절)

 

마리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이는 당시 그야말로 ‘내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가장 극진한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변사람들 오해사기 딱 좋을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 그리도 흠모했던 주님, 참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 앞에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준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떠나가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재산, 마음, 정신, 목숨, 에너지, 삶 전체를 다 바치는 마리아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겠지요. 정성과 진심이 담긴 행동으로 말입니다.

  

성주간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죄인들을 향한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이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온 잡안에 향유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배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 12,3)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내 형제인 마리아가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막상, 온 몸을 던져 헌신하고 있는 형제들의 사랑을 나는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이 숨 가쁜 사랑의 숨결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

형제들 가슴속 깊게 흐르는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그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왜, 공동체에 파고 든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내 온몸을 적시고 흐르는 그 사랑의 향기를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 그것은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

 

오늘도 내 형제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발을 닦아드리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는 왜 아직도 형제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 그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

 

오늘도 마리아인 내 형제들은 자신을 부수고 향유를 내뿜으며, 성체 앞에 머리 숙여 조아리건만, 나는 왜 이 아름다운 향기를 맡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그것은 아직도 나를 치장하기 위한 향유를 필요로 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

값비싼 것을 소모하고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

 

사실, 오늘도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사랑이 쏟아지는데 나는 왜, 이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 그것은 재치기로 코를 풀어내야만하듯, 내 영혼의 옥함에 불순물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 아닐까?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아직도 자신을 깨부수지 못한 나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

 

이토록 눈멀고 귀먹고 마음마저 굳어져버린 나는, 오늘도 자신과 물질을 버려서 예수님을 차지하는 마리아가 되기보다, 자신과 물질을 차지하여서 예수님을 버려버리는 유다가 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이제 나는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할 것입니다.

내내 토록 찬미할 것입니다. 그 향기 내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향 내음 되어 날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향내 온통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셰요. 그리고 향기가 되셰요.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요한 12,3)

 

주님!

옥함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내내 토록 취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온통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집안에 가득 퍼진, 그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심장이라도 내주고 싶습니다 

 -반영억신부-


성당 주변에 많은 꽃들이 피었습니다. 개나리, 목련, 벗꽃, 진달래의 순서인줄 알았더니 올해는 순서도 없이 마구 피었습니다. 들에는 복숭아도, 배꽃도 만발입니다. 아름다움만큼 열매도 풍성히 맺어지길 소망합니다. 우리 마음의 꽃도 활짝 피어나길 갈망하며 가장 아름다운계절에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다 퍼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심장이라도 내어주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눈이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 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감사와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얘긴데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남모르게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돈만 보일 뿐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늘 그 사랑을 외면한 채 약삭빠른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능력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모두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 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기득권을 누리려는 욕심이 있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1-3).”

이 이야기 앞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가
있습니다(요한 11,38-44).
그래서 베타니아에서 베풀어진 잔치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동시에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일은, 오빠를 다시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 때문에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 수배했다는 이야기도 앞에 있습니다.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요한 11,57).”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 했습니다.)
<마리아도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다는 것과
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 했음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비싼 향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은 일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과 사랑을
최대한으로 표시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12,4-6).”

복음서 저자는 유다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유다가 ‘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쓸데없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행동’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신앙인들의 신심 행위를
“쓸데없는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유다가 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돈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인데,
아마도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공개적으로 지명수배한 일에 대해서도 관심 갖지 않고
돈에만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에게만 온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 갖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옹호해 주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서 저자의 설명은, “마리아가 한 일은
향유 가격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더라도,
예수님의 장례를 의식하고서 향유를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장례를 미리 치른다는 생각을 하고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장례에 연결해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해석’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의도를 대신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는 “마리아를 비난하지 마라.”입니다.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에는,
“마리아의 행동은 내 장례를 상징한다.” 라는 뜻과
“내 장례 때에 마리아의 행동을 기억하여라.” 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이미 전부 다 예수님의 발에 부었기 때문에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기름을 간직하라는
뜻이 아니라, 마리아의 행동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쓸데없는 일에 돈을 낭비하는 행동’으로 생각하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훌륭하고 거룩한 행동’이라고 옹호하셨습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마리아가 평소에 늘 잘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하느님 사랑 실천’과 ‘이웃 사랑 실천’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두 사랑의 실천이 일치되어 있는 참된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특별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우이웃 돕기’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특별하고 예외적인 비상 상황이니까 특별한 지출이 필요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지금은 나의 수난과 죽음에 더욱 집중해야 할 때이고,
동참해야 할 때이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나를’, 또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내가’, 또 ‘우리 모두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가난하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요한 12,1-11: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1절) 베타니아로 가셔서 라자로의 집에서 식사하신다. 그 식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파스카 양을 준비하기 전에 잠시 흥겨운 시간을 가졌는데, 양을 마련한 후에는 축제 때까지 단식이나 정화하는 데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식사 준비를 하고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영예를 갖는다. 그리고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족의 시중드는 것을 흐뭇해하시면서 받아주신다. 마리아는 여기서도 시중을 들지 않고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이렇게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유이다. 자선을 베풀고, 병자를 찾아가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겸손, 친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 향유가 온 집안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내로 가득 채우는 값진 향유가 될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유다는 열두 사도 중의 하나였고, 돈주머니를 관리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믿음이 없고 사악한 유다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에서 훔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믿어준 주님을 배반하고 만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 여기서 보면 유다가 순수하게 말하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당신 신비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즉, 당신이 곧 돌아가실 것이며 향료와 향유로 당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고 하신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8절)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이 살려주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러니까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려고 결의한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눈먼 자의 눈먼 생각이 아닐까?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을 죽이더라도 당신은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죽은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고 죄를 용서받아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샘하며 그들이 다시 죽기를 바라고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살해에 또 살해를 저지를 생각을 한다. 라자로를 죽이면 그 기적의 힘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면서 이 성주간을 지내야 하겠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요한 12, 7)

-한상우신부-


사랑으로
빚어진
우리들이다.

가장 힘든
순간이
가장 큰
은총의
순간이 된다.

어둠을
향기롭게 하는
빛같은 향유가
있다.

사랑은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지를
다시금 묻는
십자가의
시간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의
약함까지
기쁘게
나누는
것이다.

슬픔과
약함을
함께 나누는

은총의
성주간이다.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람의
존재이유또한
사랑에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소중한 향유를
부어야 할
때가 있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려야 할
때가 있다.

사랑하기에
슬프고
사랑하기에
아픈 것이다.

고통 속에서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를
살게 해주는
모든 것이다.

사랑은
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인생을
향기롭게
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은
이론이 아닌
실천이다.

하느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랑이다.

사랑과 고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사랑을 위한
최선의 길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논쟁을 멈추고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이 더더욱
필요한
성주간이다.

참된 사랑은
향기롭고
참된 사랑은
허물까지
닦아준다.

회개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르드 향유로 도유되신 일화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십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3)
어제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도유 기사를 기억해 보면, 어제의 복음에서는 어떤 여자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지요.(마르 14,3) 그런데 오늘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둘 다 매우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요.

두 도유 사건 모두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예식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밝히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고, 요한 복음의 마리아는 발에 부음으로써 본래 시신의 온 몸에 바르는 향유 예식을 저마다의 신학 안에서 상징하고 있지요.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면서, 이로써 자신의 겸손과 사랑의 심정을 극대화해 드러낸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임금님이 잔칫상에 계시는 동안
나의 나르드는 향기를 피우네."(아가 2,12)
나르드는 인도에서 나는 값비싼 향유로서 사랑의 매혹제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그토록 값진 향유를 고른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 최고의 예를 갖추려는 애틋한 마음과 함께, 아가 신부의 뜨거운 사랑의 심경까지 느껴집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들려 줍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이사 42,1)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인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게 영을 부어 주십니다. 영은 기름부음으로 주어지지요. "사무엘은 ...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1사무 16,13)는 다윗의 도유 기사에서 보여지듯, 예수님도 주님께서 움직이신 한 여인의 행위를 통해 메시아의 결정적 사명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신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이사 42,6)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펼칩니다. 예수님도 백성을 위한 "새 계약"이 되셨으며, 모든 민족을 비추는 "빛"이 되십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옵니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향기가 풍겨내는 냄새는 공기를 타고 경계를 넘어 집 안의 온 공간마다 스며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맺으신 "새 계약"도 세상이 구획 지어 놓은 모든 구분의 경계를 넘어서지요. 민족과 인종과 성별과 문화를 넘어 그리스도의 향기로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빛" 또한 독점하거나 꽁꽁 감추어 둘 수 없는 특성을 지닙니다. 빛은 어느 틈엔가로 새어들어 와서 결국 모든 이에게 보여집니다. 점점 전달되고 퍼져나가 어둠을 물리치지요. 우리가 고대하는 부활의 빛 또한 그러합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해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
예수님은 사랑 앞에서는, 사랑을 가로막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합리성을 유예하라고 명하십니다. 다만 장례날까지라도 말이죠.

예수님이 잘 나가고 명성을 떨치며 승승장구할 때 곁을 지키며 과시하던 애정은 진정한 사랑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음을 우리는 수난기를 통해 절감했지요. 예수님을 향한 뜨겁고 애절한 진짜 사랑은, 처절한 실패와 죽음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또 맥없이 숨을 놓아버린 가련하게 창백한 시신에게까지 간직되고 베풀어져야 하는 진정성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동반하는 이 성주간에 더욱 뜨겁게 그분께 사랑을 바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행여라도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인 척 포장하지 않기를, 사랑이 시키는 일을 가로막지 말기를, 사랑이 원하시는 일에 충심을 다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무겁고 어둡고 슬픈 시간이 사랑으로 위로받을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성주간 월요일, 오늘은 그동안 간직해 온 벗님만의 귀한 사랑의 향유를 주님께 아낌없이 부어드리는 낭비의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라면 여러분의 사랑을 그분만 아시도록 살짝 '플렉스(flex,과시)'해도 된답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받으면 되겠다.

 -김찬선신부-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라."

 

가끔 저에게 갈등이 생기는데 참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갈등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선물로 받은 화분에 말라비틀어졌거나 비실비실한 가지가

있으면 잘라내고 싶은데 그 가지를 보고 어떻게 할까 갈등을 하는 겁니다.

 

내 눈에 거슬린다고 잘라내는 것이 그 가지에 대단한 폭력인 것 같고,

그 가지가 비록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저의 무도함이 마음에 걸리고,

설사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제 안에 내 눈에 거슬리면

제거하고픈 폭력성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했지요.

밭 가장자리의 잡초라고 생각되는 풀조차도 제거하지 말라고.

 

사실 그것은 잡초가 아니고 엄연한 생명이고 귀한 것인데

내 기호에 따라 또는 내 필요에 따라 내가 잡초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잡놈들도 그 어머니에게는 귀한 자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웬만하면 다 잡놈과 잡초로 만드는 인간이 있고,

반대로 온갖 잡초를 다 연구하여 그것의 이름을 알고,

알뿐 아니라 그것을 잘 가꾸고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던지는 것 자체가 너무도 우습겠지만

그들 중에 누가 더 사랑의 사람이고

누가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는 주님의 종의 사랑에 가깝겠습니까?

잡초가 아니라 소중한 풀로 여기고 가꾸는 사랑이 주님 사랑에 가깝지요.

 

그러니 이런 사랑에 가깝도록 저의 사랑도 한걸음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가깝지 않지만 점차 주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착각인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나이를 먹을수록

제가 이 사랑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제 눈이 도끼눈이라고 했는데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주님의 종은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고 하는데

저도 이제는 소리치지 않으며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치거나 기가 꺽이지 않는 주님의 종과 달리

제가 지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제 눈이 부드러워지고 큰 소리

치지 않고 분노하지 않음이 주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

아니라 기가 꺽이고 힘이 딸려서 그런 것이 아닌지 생각되는 것입니다.

 

실로 주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 아니라

노쇄 현상일 뿐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우선 힘을 아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한 것처럼

없는 힘을 엉뚱한 곳에 쓰지 말고 오직 주님 사랑에 쏟아야겠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힘을 얻어야겠습니다.

엉뚱한 곳에 힘을 빼지도 말아야겠지만 힘을 얻어야겠다는 말입니다.

 

이제 육신의 힘이나 인간적인 힘이 전보다 더 있을 수 없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아 영적인 힘이 생겨야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종이 지치지도 기가 꺽이지도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주셨기 때문이니 저도

이제는 더더욱 주님의 영을 받으면 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6일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요한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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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하면서 남은 너무나 잘 보는 것 같습니다. 내 눈이 나를 향해 있지 않고 남을 향해 있어서 그럴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비판을 가지고 남을 설득하려고도 합니다.

시간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용기있게 앞으로 전진하며, 식별을 통해 하나가 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찾아내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프란치시코 교황).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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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 없이는 참다운 사랑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 없이 사랑하려는 시도는 기름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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