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26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3. 26. 07:18

2021년 3월 26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 이다.” 
(요한 10,31-42)


If I do not perform my Father's works, do not believe me;
but if I perform them, even if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works, so that you may realize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고 느낍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어서 미워하기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가서 미워하기도 합니다. 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미워하기도 하고, 나를 이해해 주지 않기에 미워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 가운데 수천 번 미워하지 말자고 되뇌어 보지만, 그 결심과 결단은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무너지고 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좋은 일을 하더라도, 아무리 착하고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의 그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선한 행동이 우리에게는 나쁜 의도를 가진, 선을 가장한 악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그 맹목성은 그렇게 우리를 미움의 구렁텅이로 빠뜨립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도 미움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미움과 증오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들을 나쁜 일들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빼앗으신다고 느낀 순간 예수님께 쏠렸던 군중의 인기와 환호는 이제 마움과 분노로 바뀝니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약자들을 보호하며 고통을 함께 겪으셨던 예수님의 그 선한 일들은 그들에게는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려는 나쁜 의도를 가진 일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신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딸이라 이야기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유다인들에게 매력적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친근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미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르기에 예수님을 반대하고 싫어하며 미워합니다.
우리도 미움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좋은 일을 나쁜 일로, 좋은 생각을 나쁜 생각으로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욱 미워하고 반대하며 더욱 격렬하게 갈라섭니다. 우리는 유다인들과 같이 어리석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의 것을 빼앗아 갔더라도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고,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미움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시선에서 벗어나,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합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가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말이 와닿는다고 하는 분도 많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거든요.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이 말에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특히 오래 살기를 원한다면 이런 생각을 아예 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유대감은 건강 수명을 늘리고 오래 사는 비결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심혈관계 질환, 성격장애, 정신병, 인지력 저하 등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의료 문제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외로움은 매일 담배를 15개비 피우는 것보다도 더 건강에 해롭다고 합니다. 만성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 앞으로 7년 안에 죽을 위험도가 자그마치 30%나 증가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고립보다 함께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갈수록 혼자 살아간다는 생각보다, 갈수록 더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 함께는 사회적 기준만을 내세우면 절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즉, 내가 하나를 받았으니 하나를 줄 수 있다는 합리적 기준보다,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지만 사랑하기에 줄 수 있다는 마음이 있을 때 함께 하는 조건을 만들게 됩니다. 받는 것이 없어서 억울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내 건강 수명을 늘려서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충분히 많은 것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이 함께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할 때 더 쉽게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진정한 사랑을 간직할 수가 있게 되고,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면, 세상의 조건만을 떠올리면서 혼자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돌 맞을 짓을 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입증해 줄 많은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인성만 보면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으로 유대인들을 설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적대적인 마음으로 잡으려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십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함께할 수가 없게 됩니다.
두려워서 시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아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토니 로빈스).


번아웃

우리나라의 영재들이 미국에 가서 성공한 경우는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고, 또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0대가 되면 다들 무대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뇌를 너무 일찍 태워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Burn Out’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20대에 열심히 공부해서, 30대에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사람에게는 번아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10대, 청소년들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30대 학자를 쥐어짜야 이 세상의 과학이 발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두뇌만 그럴까요? 감정에도 번아웃이 있습니다. 사회복지사처럼 감정노동과 사회적 약자를 상대하는 사람의 자살률이 올라간다고 하지요. 번아웃 상태에 들어선 것입니다. 따라서 한계를 넘어서는지 늘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휴식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살기 위해서는 번아웃에 빠지지 않기 위한 휴식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왜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위선인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왜 유다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셔야 했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임을 자처하고 있는 근거는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면 ‘인간임을 자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들도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요한 8,4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이들의 차이는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고 유다인들은 자신들은 인간이란 믿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늑대라는 믿음으로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처럼 두 발로 걸으려고 할까요? 아닙니다. 인간이라고 믿으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이 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신앙에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당신은 하느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성당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저희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만약 “우리는 하느님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치 그리스도를 돌로 치려고 했던 것처럼 그런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람이라고 끝까지 믿으려는 이유는 사람으로 하는 일들을 관두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돈을 좋아하고 육체적이고 교만한 일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본성이 하느님이라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고 돈에 집착도 할 수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위선적으로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은 인간이라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려면 자신도 하느님이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이선희 씨가 ‘힐링캠프’에 나와 어떻게 ‘J에게’란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선희 씨는 친구들과 길을 걷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선희야, 저쪽으로 가면 음악 사무실이 있더라. 혹시 알아? 저기 가면 음악을 할 수 있게 해 줄지?”

간판에 ‘장욱조 음악실’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이선희 씨는 무턱대고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왜 왔어?”

“노래하러 왔는데요?”

“한 번 불러봐.”

장욱조 씨는 이선희 씨의 노래를 듣더니 “노래 잘하는데? 여기 한 달에 00만 원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선희 씨는 노래를 배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벌써 본인은 가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양하고 나오는데, 그날 마침 어떤 무명의 작곡가가 “아, 진짜. 내가 온종일 돌았는데, 아무도 이 노래를 안 부르겠데.”라며 쓰레기통에 악보 한 다발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선희 씨는 “그럼, 제가 이거 불러도 돼요?”라고 물었습니다. 작곡가는 어차피 쓰레기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선희 씨는 뭔지 모르지만, 그냥 악보라는 것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이미 가수라 믿었기 때문에 모든 악보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안에 ‘J에게’란 곡이 있었고,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며, 그 곡으로 대학 가요제에서 데뷔하게 된 것입니다.

      이선희 씨는 언제부터 가수였던 것일까요? 만약 본인이 가수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돈 내고 배우기 위해 학원을 전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가수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좋은 곡을 받아 가수가 되려고 하지 남이 버린 곡을 자신이 불러보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태인이 이 세상에서 그 많은 성과를 내는 것도 그렇고, 수많은 자수성가 한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있는 마음은 ‘믿음’입니다. 이미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중에 되는 것입니다.

 

미국 초등학교 한 반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꿈을 써내라고 했습니다. 한 흑인 아이만 ‘대통령’이라고 써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다 이뤄집니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믿으면 될까 두려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는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 음료수와 술이 가득 찬 냉장고에서 소주를 찾다가, 누군가가 “저거 뭐야?”라고 물을 때, 그것을 가까이서 보고 “어, 이건 병이야!”라고 대답한다면 그게 정상일까요? 병인 것은 맞지만 그 안에 소주가 들어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주를 찾다가 술병을 보고 “여기 소주다!”라고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두 본성이 합쳐져 있을 때 보통 그 겉을 싸고 있는 것보다 그 안의 물질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문지에 쌓인 굴비를 보며 어머니가 “저게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신문지라고 대답할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성체는 밀떡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하느님이라 고백하면서,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데도 우리는 그냥 사람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믿음 때문에 내가 진짜 그리스도처럼 변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모두 신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따라서 우리도 말씀을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인간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며 “나는 하느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퇴색시키지 않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이라고 믿어야 인간의 행위를 시작하는 것처럼, 내가 하느님이라 믿어야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숨을 쉬어도 그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믿고 하는 행위는 겉보기에는 사랑일 수 있어도 본질에서는 그저 인간의 덧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하느님이라 고백할 용기가 없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사랑은 인간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 없이 나오는 모든 행위는 선행처럼 보일지라도 다 위선입니다.

 -조재형신부-


세계적인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게리 채프만은 화목한 가정행복한 가정존경받는 가문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이들 가정의 부부와 자녀들은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게리 채프만은 이를 토대로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이야기하였습니다인정하는 언어함께하는 언어봉사하는 언어선물하는 언어몸으로 하는 언어였습니다인정하는 언어는 상대방의 허물을 탓하거나불평하기 보다는 격려하고칭찬하는 언어입니다함께하는 언어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언어입니다아버지가 자녀와 놀이를 하는 것은 놀이도 좋지만 놀이를 통해서 공감하기 때문에 좋습니다봉사하는 언어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놓습니다선물하는 언어는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선물도 좋지만 선물을 준비하면서 상대방을 생각하기 때문에 좋습니다몸으로 하는 언어는 보듬어 주고다듬어 주는 언어입니다육체적인 접촉을 전혀 갖지 않고 지낸 아이들보다는 안아 주거나 키스를 해 준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는 이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정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갈릴래아의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여러분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베드로 사도에게는 시몬 바르요나당신은 이제부터 베드로입니다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내가 천국의 열쇠를 줄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믿음이 강한 백인대장에게는 참으로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하셨습니다부정한 여인에게는 나도 당신을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라고 하셨습니다구하면 받고찾으면 얻고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두 세 사람이라도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무엇을 마실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하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안드레아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입니다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을 하시지 않고 와서 보시오라고 하셨습니다안드레아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세례자 요한이 말한 그리스도가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은 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보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셨고라자로의 동생인 마르타와 마리아를 찾아가셨습니다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자캐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회개한 자캐오에게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왕으로 모시려는 사람들을 피하면서 사람의 아들은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체성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봉사의 언어를 하셨습니다제자들에게도 언제나 봉사를 강조하셨습니다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사제와 레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우리의 죄를 사해 주기 위해서 3번이나 넘어지면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물의 언어를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제자들을 벗이라고 하셨습니다종은 주인이 아는 일을 모르지만 친구는 안다고 하셨습니다제자들에게 마귀를 쫓는 권한병자를 고치는 권한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협조자인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고통 중에서도 기뻐하였습니다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거저 받았으니여러분도 거저 주십시오.’ 수고하고 힘든 사람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나의 멍에는 편하고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측은한 마음으로 굶주린 이들을 보셨습니다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성하신 후 나누어 주셨습니다.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예수님께서는 몸으로 하는 언어를 하셨습니다아픈 부위를 만져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열이 난 곳을 만져 주시자 시몬의 장모는 열이 내렸고시중을 들었습니다눈이 먼 사람의 눈을 만져 주시자 소경은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고예수님을 따랐습니다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셨고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물위를 걸어서 배에 올랐습니다어린아이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하느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사람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준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그리고 하혈이 멈추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귀가 먼 사람의 귀를 만지시면서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귀가 먼 사람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죽은 소녀를 어루만지시면서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소녀는 죽음에서 일어났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세상 속으로 오셨습니다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우리와 함께 머무셨습니다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되셨습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주님을 찬양하여라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곤경 중에 나 주님 부르고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이들 안에서 말씀이 되는 일, 곧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 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나를 비우면 더 큰 것으로 채워진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 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신앙인의 ‘삶’

 -송영진신부-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이 말씀 앞에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이며,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 ‘일들’은 하느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만일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느님의 일들’을 하지 않고
세속적인 일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믿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하느님의 일들’이니
그 일들을 보고서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것도”,
즉 예수님과 하느님이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것도 믿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코르넬리우스’ 라는 사람의 집에서,
‘예수님의 일’에 관해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사도 10,36-39ㄱ).”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를 직접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믿은 증인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은,
사도들의 믿음과 증언을 바탕으로 해서 이어져 내려온 신앙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체험을 하고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도 있고,
부모의 신앙에 따라서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사람도 있지만,
교회 전체적으로는 사도들의 믿음과 신앙이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우선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는 ‘일’이라는 말을
‘삶’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말’로 증언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삶’으로 하는 것이 먼저이고,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으로 하는 증언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 말씀은, “착한 행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만일에 신앙인들이 착하게 살지 않으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밀어내는 것과 같다.”입니다.

착하게 살지 않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여기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합니다.
만일에 세상을 향해서 문을 닫아걸고 신앙인들끼리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랑 실천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증거가 된다.” 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 실천 없는 신앙인은 신앙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에도 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착한 행실’로써 세상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이 말은,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 그대로 ‘행동으로 실행하는 참 사랑’을 실천하라는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사랑한다는 말을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심이 들어 있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지도 않는 말은 ‘빈말’일 뿐입니다.

‘빈말’을 남용하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는 죄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한 자 한 획도 ‘빈말’이 없습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믿음’과 ‘희망’에서도 ‘빈말’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큰 재난을 겪고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희망으로 인내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사람,
신앙인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 요한 10,31-42: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조욱현신부-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32절) 하신다. 유대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한 이유가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다. 그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이 되고, 아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35-36절) 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신(神)이 된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닐 수 있는가? 우리는 빛에 다가가 빛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러나 빛에서 물러나면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신들이 되게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37-38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그분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당신의 육체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불리기에 합당치 않다고 보인다면 그 일들만이라도 믿으라고 하신다.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다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40절)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다른 민족들의 교회로 가시는지를 보여 준다. 이 교회에는 세례의 샘이 있고, 많은 사람이 요르단 강을 건너 그분을 찾아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 건너편에 머무르셨다는 말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들로 건너가셨고,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41-42절 참조) 우리도 항상 아버지의 일을 살면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참 예언자의 고독이 짙게 드리웁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요한 10,32)
예수님은 지금 죽음의 위협을 직접 겪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백성을 위해 베풀었던 모든 진리의 말씀과 선의의 기적들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 증명하는데도 유다인들은 믿기를 거부합니다. 그저 외면하고 경계하는 도를 넘어서 이제는 그분을 제거하려 들지요.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예수님은 당신이라는 인간을 보지 말고 당신을 통해 일하시는 아버지의 업적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 일들이 곧 구원의 표징이니까요.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지요. 같은 이유로 예수님께 맞서는 이는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과 맞서는 것이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제거하려 드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악은 그런 이들을 좋아하고 가까이 합니다. 빛은 어둠을 이기기에 그들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지요. 그래서 그들 힘을 빌려 빛을 없애면, 어둠인 자신들이 마음놓고 득세하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율법과 전통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어둠인 악과 야합해 빛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수님과 비슷한 상황을 맞고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가 들립니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예레 20,10)
상상하기조차 싫은, 참으로 견뎌내기 어려운 고통의 정황입니다. 시편 저자 역시 이런 아픔을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고 저에게 대듭니다."(시편 41,10)라고 탄식한 바 있습니다. 이 슬픈 상황이 예레미야와 예수님에게 참 예언자의 운명으로 들이닥친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예레 20,11)
하지만 예언자는 그 고통 속에서 마냥 허우적대지 않고 반전의 심경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현존! 이야말로 예언자가 고달프고 슬픈 배척과 거부의 현실에서 달아나지 않게 해 주는 힘의 본질입니다. 예언과 가르침과 선포는 물론, 들숨날숨의 호흡 하나까지도 자신과 함께 계신 하느님 때문이기에 예언자는 투쟁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에레 10,13)
이 희망이 없다면 하느님의 작은 이들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이 희망 덕분에 예레미야는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버티었고, 예수님께서도 끝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무시와 억압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이들,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 약자를 위해 정의와 공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기득권 세력에 무참히 공격받는 이들은, 이 세상 질서 너머로 영원한 생명과 행복, 정의가 기다린다는 희망으로 삶의 질곡을 견디어 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요한 10,40)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일치를 체험한 곳으로 물러가십니다. 세례 때 그곳에서 예수님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셨지요. 소명의 발화점이고 영혼의 고향인 이곳에서 예수님은 앞으로 겪으실 참 예언자의 운명, 구원자의 운명을 위해 영혼의 전열을 가다듬으실 겁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포함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할 힘을 가다듬으실 겁니다. 그 사랑이 소명의 근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가깝고 신뢰하던 이들에게 등돌림과 배척을 당하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쏟아부은 사랑에 거부와 조롱이 되돌아오기도 하지요. 그럴 땐, 복음 속 예수님처럼 각자의 소명이 시작된 자리로 돌아가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깊어가는 사순절, 어느새 성주간이 지척입니다. 고독 속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하신 예수님 곁에 꼭 붙어있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힘내어 짙고 깊은 어둠의 시간을 묵묵히 걸어갑시다

 우리도 신이다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놀라운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은 신들이라는 말씀.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하느님 안에 내가 있다는 말씀과 더불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죽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은 신들이라는 말씀은 과연 신성모독인가?

신성모독인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 또는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건네지 않을 뿐 아니라

말조차 섞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짐승만도 못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건네는 것은

말이 통할 사람,

존재를 나눌 사람,

인격적 관계의 대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신 것은

당신과 말씀이 통할 존재,

얘기를 나누고 싶은 존재,

당신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당신이 있고 싶은 존재,

인격적 관계의 대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神化되고

우리는 신들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 되려는 교만함으로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기어올라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부르시고

말씀하시어서

하느님이 되는

하느님의 사랑들인 신들입니다.

 

김 춘수 시인의 시는

이 신비를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 이다.” (요한 10,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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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우리 본성이 하느님이라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고 돈에 집착도 할 수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위선적으로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은 인간이라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려면 자신도 하느님이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믿으면 될까 두려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는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주를 찾다가 술병을 보고 “여기 소주다!”라고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두 본성이 합쳐져 있을 때 보통 그 겉을 싸고 있는 것보다 그 안의 물질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문지에 쌓인 굴비를 보며 어머니가 “저게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신문지라고 대답할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성체는 밀떡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하느님이라 고백하면서,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데도 우리는 그냥 사람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믿음 때문에 내가 진짜 그리스도처럼 변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모두 신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따라서 우리도 말씀을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인간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며 “나는 하느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퇴색시키지 않습니다.

.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이라고 믿어야 인간의 행위를 시작하는 것처럼, 내가 하느님이라 믿어야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숨을 쉬어도 그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믿고 하는 행위는 겉보기에는 사랑일 수 있어도 본질에서는 그저 인간의 덧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하느님이라 고백할 용기가 없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사랑은 인간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 없이 나오는 모든 행위는 선행처럼 보일지라도 다 위선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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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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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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