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3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요한 8,21-30)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잊지 말자고 다짐하였던 어떤 분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보고 싶을 때 찾아가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분과 함께하였던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의 목소리, 함께 나누었던 대화, 호탕한 웃음소리, 호기심 어린 눈빛. 우연히 듣게 된 그 이름 때문에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추억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그 이름으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여쭙니다. “당신이 누구요?”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나는 나자렛 사람 예수요.’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임을.” 이 대답은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들었던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있는 나,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이름을 깨닫는 사건은 오늘 독서의 ‘불 뱀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불 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기둥에 구리 뱀을 달아 그것을 쳐다보면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신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나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름을 듣고 누군가는 하느님과의 추억과 관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 이 이름을 듣고 어떤 추억을 떠올립니까?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삶의 이야기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고 우리는 그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만약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 이름을 잊고 살았다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불러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01년부터 시작했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은 당시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면서 신부 같지 않은 생활을 하는 저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했습니다. 부족한 실력을 채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기도와 묵상을 소홀히 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반 사회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반년 정도 하다 보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생겼습니다.
신부로 살려고 시작한 것이 매일 새벽마다 쓰고 있는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입니다. 20년을 꼬박 썼습니다. 어떻게든 신부로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글 쓰는 재주도 없었고 게을러서 작심삼일에 그칠 때가 많았던 저의 모습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그런데 나를 변하게 할 계기는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계기로 만들어낼 변화의 크기가 아닐까요? 그러나 이 크기를 결정하는 시작은 늘 작은 계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계기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계기도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계기 하나하나에 집중할 때마다 변화의 크기는 더 커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적대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을 때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믿음 없음을 보시고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엄포를 놓습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이런 엄포가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구는 이 계기를 통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했고, 또 다른 이는 이 계기를 무시해서 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던 이들을 바라봅니다. 그 기적들도 분명히 자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변화를 가져올 큰 계기인데, 이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주님께서 주시는 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작은 계기도 소홀히 하지 않는 모습에서 큰 믿음을 키울 수 있고, 이로써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는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란성 쌍둥이라 누가 누군지를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성격이나 하는 행동도 그리고 말투까지도 거의 똑같았습니다.
이 쌍둥이를 고등학생 때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얼굴만 똑같지 모든 점에서 달랐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란성 쌍둥이는 DNA가 똑같습니다. 즉, 유전적으로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똑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신체적 특성 중에서 90%만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전적 영향은 사춘기 때부터 쇠퇴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정신적인 요인, 환경의 차이 등을 비교할 때 일치의 확률이 현전하게 낮아지는 것입니다.
유전적으로 DNA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똑같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춘기를 시작으로 한, 자기 삶의 모습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유전적인 이유를 붙여서 자신의 부족함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유전적 영향은 사춘기 전에 이미 끝났습니다.

결국엔 자녀는 아버지가 속한 곳에 속하게 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주제는 ‘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요한은 그들이 땅의 아버지에게서 났고 그래서 땅에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향하지만,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땅의 아버지에 묶여 땅의 욕망을 추구하며 죽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44)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느 아버지에 속해있고, 어느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욕망’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하늘 아버지를 믿는 것이 왜 필요한지 잘 설명해줍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아버지가 속한 세계로 향하고 그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보통 자녀에게 인간임을 믿게 하고 인간으로 생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남에게 무언가를 내어 줄 줄 알아야 살아갈 수 있는 수준으로는 들어 높이지 못합니다. 어머니에게만 자라면 아기는 필연적으로 매우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인터넷 카페에 나와 있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외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남편과 사별한 김모 할머니(78·서울 관악구). 남편의 죽음은 살림만 챙기던 할머니를 아무런 준비 없이 냉정한 세상으로 내몰았다. 가진 기술이나 밑천이 없던 할머니는 파출부를 전전했다.
그렇지만 하나뿐인 아들 교육만큼은 소홀하지 않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 흉을 볼까, 혹 자신의 가난이 그대로 대물릴까 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끼니도 걸렀다. 재혼할 기회도 있었지만 포기했다. 아들만을 ‘삶의 희망’으로 삼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았다.
그런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일류대학’을 졸업했다. 아들이 결혼한 뒤에도 할머니는 입주파출부 생활을 계속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사치란 생각에 조금이라도 목돈이 생기면 아들의 사업자금에 보탰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돌아온 아들 가족의 태도는 냉담했다. 파출부도 힘에 부쳐 1년 전부터 어쩔 수 없이 아들 집으로 들어갔지만, 손자 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예 밥도 같이 먹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더 나이 들어 병이라도 걸리면 양로원에 버리겠다.’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김 할머니는 ‘지금까지 자식 하나만을 위해 내 앞으로 된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하고 살았지만 이런 대우를 받으니 너무 억울하다.’라고 하소연했다.”
[출처: ‘자녀에게 올인하는 부모들’, 다음 카페, ‘인천만수초등학교38회’]
김모 할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들이 그렇게 어머니에게 모질게 대하게 된 것일까요? 할머니의 잘못은 없습니다. 다만 아들이 나누는 본성을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무엇을 직접 주지 않고 어머니를 통해 줍니다. 따라서 자녀는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과 아버지에게 받는 사랑을 다르게 느낍니다.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은 자기 자녀를 생존하게 만드는 어쩌면 이기적인 사랑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를 내어주는 사회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어머니에게 보은할 줄 모르는 저 자녀는 사회생활도 원만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 세상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사랑도 이와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끝까지 알려주시려는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아버지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예수님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속할 수 있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는 삶은 그야말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만들어낸 것 중의 하나가 ‘아기 공장’(레벤스보른)입니다. 아리아인들의 혈통만 남긴다는 신념으로 나치는 금발에 장신, 그리고 푸른 눈을 가진 친위대원과 미혼의 여성들을 말 그대로 ‘교배’시켜 아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치의 선동에 넘어갔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비극 자체입니다.
아기는 먼저 어머니를 만나고 집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며 아버지를 만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춥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믿고 따르는 아버지의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읍시다. 그래야 하늘 나라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문틀에 곧바로 서서 볼펜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문틀의 선에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작은 형의 표시는 한 뼘은 높은데 있었습니다. 형제들 중에서 키가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빛바랜 선들이 기억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다른 지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건강 검진을 통해서 ‘몸무게, 체지방, 혈당, 간수치, 지방간, 청력, 안압’과 같은 지표를 살피게 됩니다.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몸의 다른 부분들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운동, 규칙적인 식사, 긍정적인 생각,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지는 사람의 건강지표는 파란 불일 겁니다. 반면에 과도한 스트레스, 지나친 음주와 흡연, 불안과 불면의 날을 보내는 사람의 건강지표는 빨간 불일 겁니다. 지난 1년은 코로나19로 많은 분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백신이 나왔으니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학교의 긴 담에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이라는 표어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있었습니다.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에는 경제성장의 지표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가발을 수출하고, 월남전에 파병하고,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가 가고, 중동으로 근로자들이 갔습니다. 지금은 학교의 담벼락에 경제지표를 표어로 그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경제지표는 더 이상 전 국민이 알아야 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제 다른 지표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합니다. 전 국민 의료보험을 통해서 건강을 지켜나갑니다. 검표원이 없어도 기차를 탑니다.
복지, 신뢰, 교육, 문화와 예술의 지표를 생각합니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중산층이 많아지는 나라가 됩니다. 빈부의 격차가 큰 나라는 경제지표가 높아도 코로나19의 파도를 쉽게 넘지 못하였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적은 나라는 경제지표가 높지 않아도 코로나19의 파도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큰 나라는 우울증, 중독, 자살, 범죄의 비율이 높았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적은 나라는 우울증, 중독, 자살, 범죄의 비율이 낮았습니다. 미국의 아메리카 드림은 빈부의 격차가 적고, 중산층이 많았을 때라고 합니다.
신앙의 지표를 생각해 봅니다. 성당, 신자 수, 헌금과 교무금, 사제와 수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단체와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교계제도와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8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외적인 성장이 있었습니다. 많은 본당이 신설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의 신자가 늘었습니다. 70년대에 100만 명이었던 신자는 2020년 5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의 수도 늘었습니다. 이렇게 외적인 지표는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지표는 박해시대를 견뎌왔던 70년대 보다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신앙생활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의 전례를 지키기보다는 여행과 여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기 어려워집니다. 성적이 오르면, 좋은 대학에 가면, 성공하면 신앙생활은 나중에 해도 좋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는 가지는 말라서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코로나19를 지내면서 신앙의 지표를 돌아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서필사를 하고,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고, 영상을 통해서 영성강의를 듣습니다. 위기는 위험은 또 다른 기회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지표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부모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형제요, 부모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 만큼 소중합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전율이 일어납니다. 혁신과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사람의 아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희생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가야할 길을 알고, 충실하게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나는 위에서 왔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이영근신부-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묻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받기 전에, 자신의 신원을 이미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그가 누구에게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그의 신원을 알려줍니다.
나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자입니다. 또 하느님께로부터 뽑혀 왔으니, 분명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그런데, 나는 위에 속해 있는가?
그래서 위를 바라보며, 위에 계신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속한 이입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그분께 속해 있는가?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소유로 살고 있는가?
그래서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진정 그분의 소유, 그분께 속하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까?
그렇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처럼 죽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톨스토이가 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예를 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먼저, 임금님은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양치기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하느님은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교부들은 이를 ‘거룩한 교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분께 속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하느님과 같아지도록 우리의 것을 받으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옷을 입히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옷을 입히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인간을 하느님의 옷으로 입히십니다. 당신께 속한 당신의 소유로 만드시고, 우리를 당신께서 오신 ‘위’로 데리고 가십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혼자 버려두지 않는다
-반영억신부-
국어공부를 잘 한 사람은 ‘주제파악’을 할 줄 알고, 산수공부를 잘한 사람은 ‘분수’를 알며, 지리공부를 잘 한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고 말합니다. 주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이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행함에 있어서 당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고히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 버림받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시며 명의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가 명확해졌습니다.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가지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난 것이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 없이 행복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왕이면 주님과 더불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일과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 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0). 사랑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습니다.
램프를 쓱쓱 문지르니 요정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단, 한가지만입니다.” 그 젊은이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돈도 가지고 싶고, 예쁜 여자도 만나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까 한참을 망설이며 생각했습니다. 머리가 좋아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 좋은 머리를 달라고 할까? 아니야 돈을 달라고 하자. 돈이 많으면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할 수도 있을거야! 그러나 한 가지를 청해야 하니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생각했던 것을 한꺼번에 램프의 요정에게 말했습니다. “머리, 돈, 여자!” 요정은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젊은이는 ‘머리 돈 여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송영진신부-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24).”
1) 여기서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언’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나를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
라는 경고인데, 반대로 생각하면, 너무 늦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는 간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활동 기간이 곧 끝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하시는 날이
곧 다가온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이 닥친 뒤에 예수님을 찾는 것은 너무 늦은 일이 될 것입니다.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날이 닥치기 전에,
즉 ‘지금’ 서둘러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날이 되면 회개할 시간은 없고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곳입니다.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자기 죄 속에서 죽는 사람은(멸망하는 사람은)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2)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라는 말씀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이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고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지적하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아래에서 왔다. 이 세상에 속한다.” 라는 말은,
“죄에 물든 세상에 속해 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위에서(하늘에서) 오신 분,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죄에 물든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쪽으로 가야 합니다.
‘위’와 ‘아래’에 동시에 속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쪽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누리는 것들이 아무리 좋게 생각되어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쓸모없는 것들과 허무한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중요한 것과 영원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3) “꼭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론들도 많습니다.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와 다른 이론들을 사이비라고 공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유일한 ‘참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말씀만이 ‘구원의 진리’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앙인은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고, 그 진리 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고,
그 생명 외에는 다른 생명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요한 8,26).”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라는 말씀은,
“너희에게는 심판에 관한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즉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꾸짖을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라는 말씀은, “나를 보내신 분은
진리 자체이신 분인데”, 즉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 라는 뜻입니다.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나는 그분의 뜻에 따라서 구원을 선포할 따름이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구원’이 선포되는 시간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지금’이라는 시간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갑자기 닥치는 ‘심판의 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은 모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깨닫는 일을 언제 하느냐?”입니다.
‘심판의 날’이 닥치고 나서 뒤늦게 깨닫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 요한 8,21-30: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조욱현신부-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21절) 그분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박해하려고 찾았으며, 그분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그분을 찾았다. 바리사이들은 악의에 차서 잘못된 방식으로 그분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24절) 하신 것이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것은 그리스도를 잘못된 의도로 찾는 이들에게 일어난다. 예수님은 악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시는 데 이들은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21절) 하셨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이는, 진리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와 지혜를 믿는 이는 불의를 행하지 않고,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25절) 하고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25절) 이 말씀은 그들은 그분의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처음부터”라는 말씀은 당신 자신이 이미 “한 처음”(요한 1,1)이신 말씀이심을 나타낸다.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미래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당신도 참된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참되신 분의 아들로서 당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세상에 이야기하셨으나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27절) 한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28절)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이 수난을 통하여 들어 올려지기 전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들어 올려짐’은 십자가로 들어 올려짐이며 이 들어 올려짐은 그분의 치욕이었다. 이 수난은 이 말씀을 들은 이들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으나 언제나 함께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이 가신 곳이면 어디나 계시다. 아드님을 버려두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29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경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기회는 부여되어 있지만,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다시 그 은총의 때를 맞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있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때를 잘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는 결단을 내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결단을 내릴 기회가 주어져 있으므로 거기에 관한 결과도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책임 있는 선택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존재'와 '행위'의 골자가 모두 드러납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 엄청난 자기 계시의 발언을 하십니다. "내가 나"라는 말씀은 오래 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모세에게 당신을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드러내셨던 바로 그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하느님과 한 분이신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을 통해 당신이 하느님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로, 이스라엘의 구원이고 주인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예수님을 두고 왈가불가하며 좀처럼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던 유다인들이 이 말씀에 담이 서늘해진 듯, 곧바로 그분께 질문을 던집니다. 유다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역사 안에 남기신 이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오셨던 바를 다시 묻는 이유는, 그동안 그들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탓이겠지요. 그리고 이 무지와 회피는 그들의 때가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 것이다."(요한 8,28)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께서 하실 행위를 언급하십니다. "들어 올려지심"은 광야에서 모세와 주님께 대들다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을 구해 준 구리뱀의 표상을 소환합니다.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 21,8)
제1독서는 이 사건을 다루며 구체적으로 구리 뱀이 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합니다. "물린 자"는 뱀으로 인해 상해를 입고 죽어가는 이들입니다. 원죄의 상처로 고통 받는 이들, 죄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 갇힌 이들, 악의 독소로 영혼의 생기를 상실한 이들이 뱀에 물린 이들입니다.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비록 죄의 상처로 죽음의 올가미에 걸려든 이들이라도 처방을 믿고 구리 뱀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바라봄"은 절실한 생의 욕구와 믿음, 희망의 표현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는 미사 초입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지요.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입당송)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와 구원 행위에 대해 명확한 답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한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 나무에 높이 달리시어 구원을 보증해 주신 어린양이십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9,5)
유다인의 거친 질문을 가다듬어 우리의 목소리로 다시 주님께 여쭈어 봅니다. 그분께서 여러 방식으로 당신이 누구시며 왜 우리와 함께하시는지를 누차 밝히시는데, 마냥 의뭉하게 모르는 체하며 주님과 거리두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지요. 이제는 정말로 진지하게 여쭙고 답을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고백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어떻게 구원의 업적을 이루어가고 계시는지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존재와 이름이 하나이신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며 그분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듯, 우리에게도 그러하심을 생생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있는 나"이신 주님과 함께 머무르며 사랑으로 일치하여 하나가 되고자 나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조급증에 대한 처방
-김찬선신부-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오늘 우리가 들은 민수기는 조급함에 대해서 성찰케 합니다.
조급함은 죄일까?
아니면 그저 성격일 뿐일까?
조급한 성격이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그저 성격일 뿐이라면 죄가 아니지 않을까?
그런데 조급함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떼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조급함이 이렇게 죽음에로까지 몰고 간다면
조급함을 그저 성격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조급함 때문에 하던 일을 망치거나 회사가 망하고,
조급함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음에로 내몰 수가 있지요.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조급함은 성격입니까, 부덕함입니까?
성격적으로 조급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조급함은 부덕함의 소치입니다.
같은 저인데도 어떤 때는 조급하고, 어떤 때는 느긋하잖아요?
제 생각에 조급함은 욕심의 산물입니다.
욕심이 크면 클수록 조급함은 심하고
그런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느긋하지요.
며칠 전 양성을 담당하는 형제들과 술 한잔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양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피양성자들에 대한 걱정이 매우 크고 그래서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을 보면서 30대 때의 제가 생각났습니다.
그때의 저는 아주 조급하여 형제들을 기다려줄 줄 몰랐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방황과 고뇌를 거쳐 도달한 상태를
형제들이 1, 2년 내에 도달하기를 욕심부리며 죄고 닦달을 했고,
그래서 저는 그런 저를 경계하기 위해
줄탁동시啐啄同時를 경구로 삼아 자주 자신에게 되뇌곤 하였지요.
아무튼 조급하지 않으려면 욕심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
곧 마음의 가난이 관건인데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지요.
욕심을 이룰 수 있는데도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민수기는 스스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죽여주시고 살려주시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말하자면 뱀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하여 욕심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죽이시고,
다른 모든 욕심 버리고 오직 살기만을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살리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이런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정 이런 극약처방을 통하여
우리를 가난하게 하시고 당신께 순종케 하시며
우리의 욕심慾心을 신심信心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이런 인생역정을 거친 우리는 이제
조르지 않아도 주시는 은총의 하느님을 믿고,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 주시는 하느님을 믿으며,
고통을 주시어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죄를 지었어도 그 사랑 변치 않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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