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22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3. 22. 07:28

2021 3 22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요한 8,1-11)

 

"Let the on e among you who is without sin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사순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어려운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고해소 앞에 섭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미움과 증오가 왠지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때가 생각나 가슴이 저려 옵니다. 머리 속에서는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이 떠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그 말씀이 더욱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 옵니다.
큰 죄를 지은 여자가 유다인들 앞에 있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용서해서도 안 되는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여자를 용서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들이 용서하게끔 기다려 주십니다. 용서를 위하여 먼저 자신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모습을 둘러볼 시간을 주십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아흔아홉 개의 죄만 바라본다면 용서의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눈을 돌려 자신이 지은 작은 죄 하나라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시작됩니다.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교만과 오만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시작은 다른 이들이 지은 큰 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죄를 바라보면서 시작됩니다.
또한 용서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용서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평화만을 위하여, 나 한 사람의 구원과 깨끗함만을 위하여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청하지 않는 자에게,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였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무관심일 뿐입니다. 그들이 잘못하였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불의한 마음에 하느님의 정의를 새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잘못을 깨달았을 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를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종이 다른 모든 종의 최상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유연한 언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기는 하지만 인간처럼 유연하게 또 자세하게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100마리 넘는 집단을 동물은 형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사소통되지 않는 사람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유연한 언어 중에서도 가장 큰 결속력을 가져오는 것이 ‘뒷담화’라고 말합니다. 뒤에서 남 얘기하는 것은 분명히 나쁘지만, 대규모 협력을 일으키기 위해 큰 역할을 이 뒷담화가 담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결속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모든 종에서도 가장 최상위 종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뒷담화도 무조건 나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인류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측면에서는 말의 사용이 중요합니다. 즉, 어떤 뒷담화를 하느냐에 따라 함께 행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 빠지는 뒷담화가 아니라, 힘을 더하는 뒷담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거짓이 아닌 진실의 뒷담화가 되어야 합니다. 미움이 아닌 사랑의 뒷담화가 가득한 우리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 하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마주치신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곤혹스러운 문제에 부딪히십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율법 준수 여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고발은 사랑이 전혀 없는 말이었고, 거짓의 말이었으며, 힘 빠지게 하는 뒷담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고발한 자들을 아무 말씀 없이 땅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시는 행동을 하십니다. 침묵 속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부터 의로움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장면 하나는,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을 뿐 그들을 바라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고,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은 힘을 더해주는 말이고, 진실의 말이며, 사랑 가득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말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한 해가 끝날 때, 그 해의 처음보다 더 나아진 자신을 느낄 때이다(톨스토이).


행복을 담는 상자

어떤 남자가 꿈에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뭔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지요. 무엇을 포장하는지 궁금해서 묻자, “행복을 포장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에게 나눠줄 행복이요.”라고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포장을 너무 단단하고 튼튼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도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면 너무 멀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튼튼하게 포장하고 있답니다. 이 포장지는 ‘고난’이거든요. 이것을 벗기지 않으면 행복이란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남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천사님! 그 고난이라는 단단하고 튼튼한 포장은 어떻게 하면 열 수가 있나요?"

천사는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고난이란 포장을 쉽게 열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포장은 스스로 벗겨지며 행복이란 선물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왜 행복을 잘 찾지를 못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감사라는 마음의 열쇠로 쉽게 풀 수 있네요. 오늘도 감사의 마음으로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세요.

 죄책감이 우상숭배인 이유 부모는 자녀를 태어나지 전부터 용서한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당연히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도 무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당신 본성인 자비는 더욱 포기할 수 없으니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타인을 단죄하는 사람들은 그 단죄하는 자아가 자기 자신까지 단죄하고 있으니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시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단죄하지 않을 때 당신도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타인의 심판을 받아들이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선 타인이 나에게 하는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완벽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피를 말리는 삶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 앞에서 완벽하게 보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부족한 자신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유롭기만 합니다.

      그다음은 ‘자신도 타인을 판단’합니다. 나도 돌을 들어야 죄책감에 짓눌린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판단하고 그렇게 관계의 단절을 경험합니다. 누구도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판단을 멈춰야!’ 합니다. 내가 판단하니까 타인의 판단도 가치를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타인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내가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심판하면 타인도 나를 심판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습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무서운 심판관으로 여겨 자신들에게 벌을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의 탓을 다른 이에게 돌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참 창조자요 부모로 여기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자는 창조할 때부터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왕좌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많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르자 그 적들은 신변에 위협과 함께 극도의 불안에 싸였습니다. 흘러나오는 말에 의하면 왕은 자기를 반대하고 대립하던 모든 사람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것이고 더욱이 그 명단의 이름 하나마다 왕이 직접 검은 색깔로 십자가를 일일이 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들이 들리자 어떤 이들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부랴부랴 파리를 벗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간 이들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임금이 전의 적이었던 그들을 분명하게 용서했으며 목숨을 보장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그들의 이름 위에 직접 그린 검은 십자가는 그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가 용서받은 이들임을 되새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부모가 아기를 뱃속에 가졌을 때, 아기가 태어나서 많은 죄를 짓고 살 것을 예상합니다. 그렇지만 그 아기를 여전히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고 죄를 짓기 이전부터 자녀의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 표징이 ‘십자가’입니다. 이 용서를 받아들일 때야만 참으로 그분을 창조자요 부모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안의 죄책감으로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타인에게 돌리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을 창조자요 부모로 여기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타인을 판단하는 것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하느님을 창조자요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심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마셜 로젠버그’란 심리학자는 ‘비폭력대화’를 주창했습니다. 판단은 타인에게 하는 폭력입니다. 폭력을 가하면서 대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폭력을 일단 거둬들이는 방법이 ‘판단중지’입니다.

      로젠버그가 어린 시절, 누가 봐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름이 뭡니까?”(What’s your name?)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요.”(I am Jesus Christ, the Lord)라고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시지 않아서 뒤의 “The Lord”라는 말만 듣고는 “아, 로드(Lord)씨, 그러면 잠깐 들어오시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잠깐이 7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집에서 7년 동안 머물러 살게 된 것입니다. 7년을 살았다면 그 사람이 완전히 정신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할머니는 잠깐의 판단을 중지하여 오랜 친구를 사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공공의 적’이란 영화에서 아들이 부모를 시해하고 유산을 빨리 물려받으려고 했을 때 부모는 죽어가면서도 자녀의 부러진 손톱을 삼켜 자녀의 잘못을 덮어주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여깁니다. 유일하신 심판관께서 우리 죄가 당신 탓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또 다른 재판관을 고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법정에 재판관은 한 명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그 한 명을 우리는 우리에게 항상 무죄를 선언하시는 우리 아버지로 고용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유일한 심판자로 믿는 증거는 내가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판단이 중지됨’이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많은 이들과 깊은 친교가 이뤄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부모로 믿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무지(無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무지는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성서에는 무지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카인은 동생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죽였습니다동생을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빼앗았습니다욕심 때문입니다하버드 대학의 렘지어 교수는 학자로서의 양심을 버리고 한국의 위안부들이 돈을 받고 일한 매춘부였다고 주장했습니다일본 기업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학생들은 물론동료 학자들에게도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렘지어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한국의 학자들도 있습니다아직도 일본의 식민지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무지한 권력에 의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시간이 걸릴지라도 역사는 무지한 이들의 야만과 폭력을 심판합니다억울한 이들의 눈물과 고통을 위로합니다한국에서도 재심(再審)’ 청구를 통해서 피해자들이 억울한 누명을 풀 수 있었고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오늘 우리는 수산나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이려했던 두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두 노인의 욕망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비굴하게 살기보다는 명예롭게 죽기를 택하였던 수산나에게 다니엘을 보내셨습니다다니엘은 지혜로운 판단으로 욕망에 눈이 멀어서 무지한 행동을 했던 두 노인을 심판하였습니다수산나는 누명을 벗었고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을 통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이웃을 사랑하고부모에게 효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우상을 섬기고하느님과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뉘우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은 유배지의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시편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가 있으오리까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주님을 섬기라 하시나이다하느님 자비하시니 내 허물을 없애 주소서내 어미가 죄 중에 저를 배었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을 데리고 온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과 대화를 하였습니다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율법에 따라서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예수님께서도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천대받고 무시 받았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에게 이방인의 선교를 맡겨 주셨습니다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율법에 의해서 죽어야 했던 여인은 용서를 받았습니다새롭게 태어났습니다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씻어 드렸습니다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었던 수산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렸습니다죽어야 할 운명에서 용서받고 다시 태어났던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누가 더 큰 은총을 받았을까요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면서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이 어처구니 없는 사랑,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 기막힌 사랑!

 -양승국신부-

 

제 어린 시절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겨울날 기억이 생생합니다. 뭐가 그리도 좋았던지 강아지처럼 산으로 들로 그렇게 뛰어다녔습니다. 추위도 잊고 신나게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곤 하던 어느 순간,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면 마지 못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오면 연탄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화력이 절정일 때는 난로 표면이 빨갛게 달아오르곤 했습니다. 장난삼아 뭉쳐진 눈덩이를 빨갛게 달아오른 난로 위에 얹곤 했었는데, 어린 제 눈에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눈덩이는 고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도 거치지 않고 순식간에 기체가 되어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젠가 태양같이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순간, 그간 켜켜이 누적되어온 우리의 모든 죄는 눈덩이 사라지듯 순식간에 사라지리라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며 부족함, 나약함이나 갈등, 고통과 상처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한번 뵙는 일입니다. 살아생전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한번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체험하게 될 은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새 인생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세계관이 열립니다.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 순간은 어떻게 보면 한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한 인생이 태초의 상태를 회복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이 어처구니 없는 사랑,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 기막힌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어두웠던 과거를 떨치고 눈보다 더 깨끗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기적처럼 예수님을 만난 한 가련한 여인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과의 은혜로운 만남으로 인해 오랜 악습과 방황을 마무리짓고 새 삶을 얻은 여인을 가리켜 교회 전승은 ‘순결한 창녀’라고 했습니다. 순결한 창녀,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향해, 또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복음 8장 11절)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인가 쓰셨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는데 사실 땅바닥은 여인의 가슴이었습니다. 그 땅바닥은 죄와 타락과 방황으로 얼룩진 여인의 마음이자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 마음 하나 하나에 당신 손가락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또 다른 한 말씀을 새겨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죄가 많아도, 너희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사랑한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11,7)

 

혹시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나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사실 그 돌덩이는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고발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더 큰 돌로 더 세게 내리치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는 예수님이 말씀에 그들은 나이 많은 이부터 돌아갔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곧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돌덩이로 오히려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나도 죄인입니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대해 수시로 판단을 내리고 단죄를 합니다. 심지어 영화나 텔레비전의 극을 보면서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여 열을 올립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에 화를 쌓아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삽니다. 남의 티끌은 유난히 잘 보면서도 자신의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어라고 쓰셨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 아니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죄목들’을 나열하셨을까?

 

주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기원하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당신이 보내주신 아드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요한 8,11)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반영억신부-
 
요한복음 8장 1절-11절,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의 전반부는, 산상 설교에
있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1-3)” 라는 말씀에 연결되고, 후반부는 요한복음 3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설이나 강론들을 보면, 대부분 여자를 붙잡아 끌고 온
사람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우리는 남에게 돌을 던지지 말자.” 라는 말만
하면서, 붙잡혀서 끌려온 그 여자는 잊어버리거나 무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붙잡혀서 끌려온 그 여자의 입장에서도 읽고 묵상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 앞에서 나도 한 사람의 죄인일 뿐이다.” 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면서 회개해야 하는 존재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9ㄴ-11)”
 
1) 여자는 왜, 자기를 붙잡아 끌고 온 사람들이
돌을 던지지 않고 모두 가버린 뒤에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을까?
갈 곳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자비에 감동을 받아서
서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가도 되는지를 몰라서)
그냥 서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여자가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심판관 앞에 서 있는 죄인의 모습,
즉 예수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2)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만 보면 이상한 질문입니다.
그 자리에 여자 혼자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버렸다는 것을
모르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람들이 모두 가버린 것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에는 너를 단죄할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일 뿐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습니다.” 라는 여자의 대답을,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가르침을 알아들었습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붙잡혀서 끌려올 때,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바뀌었고,
여자에게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 자체가
큰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사람들을 압도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신 분”이라는 깨달음과 믿음.)
 
3)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도 죄가 있으니 너에게 돌을
던지지 않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은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앞으로는 회개하고 보속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말씀이지만,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여자의 죄가 완전히 깨끗하게 씻어지는 때는
회개와 보속을 완전히 마쳤을 때입니다.

(원래 회개는 용서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죄’는, 좁은 뜻으로는 여자가 이미 지은
그 죄를 가리키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모든 죄’를 가리킵니다.
‘모든 죄’에는 “남을 마음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죄”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누군가가 돌에 맞아 죽을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그 여자가 보게 되었다면, 그 여자는 자기가 겪은 일을 생각하고서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그 사람을 보호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함께 돌을 던진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자비와 용서의 은총을
전부 다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4) 각자 지은 죄의 크기나 내용이 어찌 되었든지 간에
누구나 다 하느님 앞에서는 그 여자와 똑같은 처지의 죄인일 뿐입니다.
(그 여자처럼 예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라고
간청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주려고,
또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자꾸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도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5) 이야기의 앞부분에 있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라는 말씀은, 여자를 붙잡아 끌고 온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 ‘죄 없는 자’가 하나라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너희도 모두 죄인이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에는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죄 없는 척 하면서,
또는 죄가 없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또는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자기가 먼저 돌을 던지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수산나를 고발하고 거짓 증언을 한 두 원로”가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다니 13장).
그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그래도 양심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 요한 8,1-1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

 -조욱현신부-


유대인들이 주님을 시험하려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십니까?”(4-5절) 한다. 이 말에는 교묘하게 함정을 만들어 예수님을 고소하여 없애려고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만일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으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가르치던 사랑을 잊었다고 비웃었을 것이고,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하셨으면, 예수님께 노여움을 드러내며, 율법과 반대되는 사악한 행동을 하는 자라고 당당하게 단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먼 사악함이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의 길을 방해하여 세상에 빛을 비추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6절) 예수님은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신다. 아마 그 여자를 단죄하라고 죄인들인 그들이 그 여자를 데려왔으나, ‘너희부터 단죄해야겠다,’고 하시는 것 같다. 이 행동은 지금 여자를 고발하는 자들과 죽을 운명으로 태어난 모든 이의 죄를 땅에 쓰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하셨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의 이름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를 용서하러 오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예수님은 그들의 함정을 아시고 그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양심은 있었다. 그들은 혼란에 빠져 서로 마주 보기도 불편한 듯,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모두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다시 땅에 무엇을 쓰신 것은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자비의 눈길을 보내신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1절) 하신다. 그 여자를 단죄하는 사람들은 없어졌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이다. 주님께서는 그 여자를 그렇게 단죄하셨다.

 

우리는 과연 이웃의 잘못을 어떠한 눈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성급히 판단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라는 말씀과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5)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용서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다. 하느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는 완성되지 못한 존재이다. 항구하게 우리 자신을 정화해 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7)

-한상우신부-


저마다의
삶의 자리를
지켜내며

활짝 꽃을
피우는 봄꽃이
우리 곁에서
피고 있다.

삶도 사랑도
절제가 필요한
십자가의
관계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유혹을
이겨내고

올바로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끈다.

사람은
죄를 묻고
하느님께서는
죄와 허물을
깨끗이
지워주신다.

참된 사랑은
죄와 허물까지
지워주는
것이다.

배신과
심판사이에
우리가 있다.

먼저
예수님께서
단죄의 돌을
우리 앞에
내려놓으신다.

단죄를 멈추면
사랑이 고픈
사람들이 보인다.

끝이 아름다운
사랑이 참된
사랑이다.

상처없는
사랑은 없다.

모든 사랑은
상처를 통해
하느님을
향한다.

소유와 집착
간음과 불륜은
스스로
돌무더기에
갇히는 꼴이
된다.

단죄의 돌을
던지는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자신이다.

참된 사랑은
욕구의 해소가
아닌 인격의
참된 존중이다.

하느님께서는
의심하고
질투하는
추한 욕정의
관계가 아닌

맑고 밝은
아름다운 관계를
원하신다.

죄(罪)를
치유하는 것은
아름다운
관계이다.

이제 아름답고
맑은 관계로
돌아서는
회심의 사랑이
필요한 때이다.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성장이
필요한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건강하게
다시 고쳐주신다.

건강한 관계의
중심이신
예수님에게서
참된 사랑을
다시 배운다.

소중한 딸이며
소중한 아들이다.

봄꽃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겨울을 이겨내고
추위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약한 부분이
유혹이 아닌
기도와 응원
지혜와 봉헌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아름다운
사람의 길을
봄꽃과 십자가가
다시 가르쳐준다.

삶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
가장 향기롭고
가장 빛나는
꽃이다.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자.

지워진 길에서
길이 다시
시작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다니 13,46)
제1독서에서는 재판관 자리에 있는 두 원로의 욕정과 모함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구원받은 한 여인의 드라마틱 한 사연이 전개됩니다. 온 백성이 두 원로의 말만 믿고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주님께서 다니엘이라는 청년의 "거룩한 영"을 깨워 이 사건에 개입하도록 하심으로써 정의를 회복해 주셨지요.

한낱 군중 속의 젊은이에 불과하면서도 영의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한 다니엘, 청년 다니엘에게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원로의 지위를 인정한 다른 원로들, 무엇보다 사람에게 치욕과 모함을 받아 죽더라도 주님께 죄짓기를 거부한 수산나, 모두 주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 악이 흐트러 놓은 혼돈과 고통의 순간을 바로잡아 주셨지요.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다니 13,60)
자칫 슬픈 비극으로 치닫을 뻔했던 이 사건은 하느님의 정의로 질서를 되찾습니다. 다행히 땅은 무죄한 이의 피로 물들지 않았고, 결백한 이는 원래의 지위를 되찾았지요. 또 죄를 지은 이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5)
복음에서도 매우 긴박한 사건이 전개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성전으로 예수님 앞에까지 끌고 와서, 예수님의 반응을 시험하려고 합니다. 이 물음이 정말로 예수님의 뜻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지요.

종교 지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수치심과 모멸감, 두려움에 가득 차 떨고 있는 이 여인을 동정하지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저 짐승 몰듯 끌고 와서는 돌로 위협하며 예수님 앞에 미끼로 내놓았지요. 함부로 생사여탈을 논하면서요. 사람의 존엄이나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이토록 가혹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율법의 정신보다 형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예수님은 죄인으로 몰린 여인에게도, 정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피에 굶주린 듯 거세게 날뛰는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만 바라보십니다. 땅은 사람의 실존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하며 육적 관계적 한계로 뒤엉켜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지요."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제 사람은, 심판의 권한이 사람의 손을 떠났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흠 없고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심판의 권한을 온전히 위임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율법을 수호하면서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죄하지 않는 이는 단죄 받지 않을 것이고, 심판하지 않는 이는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는 이는 용서 받을 것이고도 하셨지요.(루카 6,37 참조) 자, 그러니 이제 죄 없는 이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그런데 죄 없으신 분, 예수님마저 단죄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의 곤혹스런 상황으로 톡톡히 대가를 치른 그녀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미래를 당부하십니다. 그녀가 하느님의 모상성을 회복해 더 온전하고 충만한 평화의 존재가 되길 바라고 또 축복하시는 겁니다.

구약성경은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된 어느 날을 기억하고 경축했지요. 무죄한 수산나에 대한 성경 저자의 기록을 보면 그녀는 과연 정결하고 의로운 이스라엘의 딸입니다.

다분히 대조적으로, 오늘 예수님 앞에서 피 흘림을 면한 이 여인은 정황으로 보아 간음한 사람이고 죽을 죄인입니다. 율법의 눈으로 수산나에 감히 비할 수 없는 처지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귀한 딸이고 소중한 인격체이며 존엄한 형제 자매입니다. 그분은 그저 불쌍히 여기실 뿐, 단죄하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대신 가장 무죄한 이의 피, 바로 당신 자신의 피를 이 땅에 흘리셨지요.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같은 시선으로 자신과 형제자매를 바라보고,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과 형제자매를 연민하며, 당신의 기도에 합하여 모두의 회개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사순절이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요. 용서하시는 주님 자비에 겸손되이 모든 걸 내어맡기는 한 주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순 시기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말씀 나누기 - 사순 5주 월요일-안에 있는 대로 밖을 보는 인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3월 30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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