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1일 사순 제5주일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요한 12,20-33)
“I am troubled now.
Yet what should I say?
‘Father, save me from this hour’?
But it was for this purpose that I came to this hour.
Father, glorify your na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강의에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한 학기의 여정을 함께해 주고, 부족한 강의를 열정적으로 들어 준 이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한 학기를 총정리하고 요약하면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도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시간에는 감사와 정리와 간절함을 담아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을 준비하십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짐을 아시고 이제까지 걸어오셨던 당신의 삶을 정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이 당신의 죽음으로 완성될 것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께서 이야기하시고 살아오셨던 복음의 삶이 이루어질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처럼, 앞으로 일어날 수난과 죽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사람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도 그 죽음을 두려워하십니다. 그 죽음의 길을 피해 가고 싶으십니다. 그러나 그 희생이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포기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묵묵히 그 두려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두렵습니다. 예수님처럼 죽음과 두려움의 길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이고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어떤 길 위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고통은 참 행복의 시작이다
-키엣대주교-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을 맺으리라’
씨를 뿌린다는 것은 밀알의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이 주신 삶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밀알이 썩어서 사라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나를 버리고 가족과 이웃을 위한 삶, 그 삶을 위해 익숙하고 편안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영육의 고통까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을 맺으리라’
인간의 삶도 그렇습니다.
태아가 생명으로 태어나려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어머니 자궁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학교라는 사회에 발을 들여놓기위해서 부모님을 떠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수 많은 선택과 포기를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포기함으로써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을 맺으리라’
우리의 영적인 삶이 그렇습니다. 영적인 죽음이란 자신의 죄로 인해 죽는 것이고, 자신의 의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욕망을 단절해야 합니다. 수 많은 유혹으로부터 격리되고자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혹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그것이 무엇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 안에, 내 옆에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일부가 된 익숙하고 친근한 유혹과의 단절은 많은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더구나 단절을 통한 손실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 유혹들은 언제가는 나의 삶의 가치를 빼앗고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손실"을 받아들인다면 미래에는 반드시 "이득"이 될 것입니다. 그 "손실과 고통"을 통해 "영원한 참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주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질때만이 가능합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만이 주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거듭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없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뜻을 버리고 주님을 향해 갈 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얻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버려야합니다.
가장 고귀한 가치를 위해 평범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이 세상의 일시적인 행복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 황금빛 벌판을 보며 풍성한 수확을 위해 썩어 없어진 수 많은 밀알의 고통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주기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죽음의 고통을 견뎌냈는 지 잊고 살았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님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가장 선한 것을 선택하는 지혜를 주소서. 선을 위해 썩어 없어지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서. 이 세상의 안위가 아닌 하늘나라의 참 행복을 위해 영적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영적 죽음을 통하여 새생명의 신비를 일깨우게 하여주소서. 아멘

1. 지금까지 가장 고통스러웠던 포기는 무엇이었습니까?
2. 고통스러운 포기를 통해 무엇을 얻었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한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밀알은 형체가 사라질 때 비로소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의 ‘밀알’인지 잠시 생각해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청년이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청년을 데리고 물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물속에 들어가 잠수를 하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물속에 들어가 잠수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숨이 차올랐고, 그는 물 밖으로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청년이 나오지 못하도록 머리를 세게 누르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청년은 발버둥을 치면서 겨우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숨을 헉헉거리며 말입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청년을 향해 묻습니다.
“자네가 물속에서 정말로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공기입니다.”라고 말하는 청년에게 소크라테스는 이야기했습니다.
“공기를 간절히 원한 만큼 지식을 갈구해야 하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얻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간절함이라는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간절함 없이는 얻는다고 해도 진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간절함’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것은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땅에서 새 생명으로 싹이 터, 본디 그것을 낳은 식물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비유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해골 터에 떨어져 돌아가시자 교회가 무수한 밀알로 싹이 터 성체라는 생명의 빵으로 구워졌으며, 그 빵은 그것을 받아 모시는 우리 안에서 몇 곱으로 늘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이 생명을 잃고 얻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그리스어에서 ‘생명’이라는 낱말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옳은 방법과 그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 안에서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른 방법이고, 하느님의 모습 안에 있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제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따른다면 섬김의 길은 영광의 길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를 때 간절함을 가지고 있을까요? 세상 것에 대한 간절함이 먼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 것을 위한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에 관한 예고를 하십니다. 이미 당신 죽음을, 십자가상의 모욕적인 죽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간절함과 하느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한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간절함을 두고 있으며, 특히 주님께 간절한 믿음으로 다가서고 있는지를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2,000년 여름, 제가 어느 성당의 보좌 신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주임 신부님께서 본당 공소인 덕적도에 여름에 많은 피서객이 오니, 여름 동안 지내면서 피서객을 위한 미사를 하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워낙 피서객이 많이 오는 덕적도였지만(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사제가 없으면 미사를 할 수 없으니 당연히 가야만 할 것 같아서 기쁜 마음으로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미사에 참석하러 오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피서객은 하나도 없고, 서너 분이 오셔서 미사를 하는데 모두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나 편안했고 휴가를 받은 것처럼 기분 좋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미사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그리워졌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던 2,000년의 여름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사랑으로 함께 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창조목적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밀알의 신비: 발 씻김 받는 것보다 발 씻어주는 게 더 행복하게 될 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분명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가치에 관해 묻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가치 있는 죽음이란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2,500년 간 이어지는 철학의 주류를 형성한 사람입니다. 그의 열매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을 연상하시며,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열매를 맺는 죽음은 나를 위한 생이 끝나는 ‘그냥’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자발적인’ 죽음이어야 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진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았고, 예수님도 그 길로 가고 계십니다. 그러며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라고 청하십니다. 이는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도 영광을 받으시라는 청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응답하는데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
아드님께서 당신을 위해 죽어가심으로 또한 끊임없이 영광을 내려주셨는데,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도 성령으로 부활시키는 영광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이 말씀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며칠 전 저의 논문지도 교수님이셨던 돈 조르지오 마짠티 선생님이 병환으로 아버지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분께 논문을 쓰던 다른 교구 신부님들과 서로 연락하며 슬픔을 달랬습니다. 부족하기 그지없지만 저희가 그분의 작은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서신학을 하다가 교의 신학으로 바꾼 이유도 그분에게 논문지도를 받고 싶었던 이유가 매우 컸습니다. 사제가 되어 다시 유학을 떠날 때 그분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갈 곳 없는 청년이나 알코올 중독자들, 또 집을 잃은 부부와 함께 사제관에서 산다는 말을 하였을 때 그것을 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분이 가난하게 사신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지가 찢어져 팬티가 다 보이는 모습으로 옷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입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사제관에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맞아들이셨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 어려웠습니다. 함께 논문을 쓰는 신부님들과 방문하였는데, 역시 성인처럼 사시고 계셨고 본당 신자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러하셨습니다.
논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국으로 초대하겠다고 약속드렸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쁘게만 살아오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병이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분께서 주시는 마지막 가르침이라 여기고 유튜브에서 4년 전에 신자들에게 하셨던 한 강의를 들어보았습니다. 용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진정한 용서가 무엇일까?’란 주제에서 그분은 “용서를 하는 사람은 기쁘고, 감사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진정으로 용서하는 아버지는 기뻤고 윤리 주의자였던 맞이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 않으면 참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교수님은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으셨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당신 본당에 부모님이 머물러 오셨었는데 아버지와 크게 싸웠고 매일 싸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해도 교수님은 용서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용서는 했는데 매일 싸웠습니다.
신부님은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며 그 이유를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나를 용서하시며 기쁘실 텐데 나는 왜 아버지를 용서한다고 하면서 기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네가 용서하면서 상대보다 더 높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베드로의 발을 씻어줄 때 그보다 높다고 여겼다면 그런 행위를 할 때 나에게 기쁨이었겠느냐? 내가 하느님이면서도 내가 낮아지게 만들어주는 제자들에게 나는 감사할 수 있었고 그래서 씻어주면서도 기뻤다. 기쁘고, 감사하지 못하면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그분은 묻습니다.
“왜 사제들은 고해소에서 용서해 주면서 기쁘지 않을까요? 용서해 주면서 신자들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는 아버지와 한 번도 다투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렇게 진정으로 용서받았다고 느끼며 다시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기쁘게 안아주어야만 진정으로 용서한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아마도 저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가시는 가르침이신 것 같았습니다. 용서는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준 상대에게 감사하고 그래서 기쁜 축제와 같습니다.
참 행복은 타인에게 호랑이처럼 강한 사람이 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군고구마처럼 양식으로 먹히려는 사람이 되려는 데 있습니다. 내가 호랑이가 아니라 고구마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나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내가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이 나의 은인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주는 자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영광을 받게 해 주는 사제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고구마가 되겠다고 강론을 했더니 어떤 분이 에어프라이어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남을 위해 먹히는 사람이 되려고 목숨을 내어놓겠다고 하니까, 하늘에서 그 고구마가 먹기 좋은 군고구마가 되게 만드는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고구마가 되게 만드는 이들을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서 기쁜 마음으로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발의 씻김을 당하는 사람보다 발을 씻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기쁘게 십자가에 올려지기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고구마가 되고 고구마로 만들어주는 이들에게 감사합시다. 덕분에 에어프라이어가 곧 내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넘어선 나와 나의 열매를 위한 축제의 자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조재형신부-
998년 9월 20일 서울대교구는 인터넷을 통한 선교와 소통의 장으로 ‘굿뉴스’를 출범하였습니다. 어느덧 23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명실상부한 서울대교구의 인터넷 선교매체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콘텐츠와 플랫폼으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교우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23년 동안 굿뉴스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교구의 지원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애정을 가지고 굿뉴스를 검색하고, 글을 올렸던 사용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출범 초기부터 인터넷을 통한 나눔과 선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묵상에는 2,700여개의 강론을 나누었고, 게시판에는 143개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1998년 10월 24일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많은 정보를 주고,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편적으로 보면 우선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고, 이런 인터넷을 통한 사업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인터넷이 가지는 엄청난 힘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길 원하고,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면에서 인터넷은 참 좋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지니는 긍정적인 면을 보면 이렇습니다.
1. 쉽고, 간편하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2. 사회나 정부, 언론 등에 압력 수단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3. 현대인들이 지니는 고독, 절망, 외로움, 소외감 등을 인터넷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습니다.
4. 자신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공감을 느껴주고, 자신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면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보람과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인터넷을 통한 스타도 탄생합니다.)
5. 삶의 현장에서 접속이 되었을 때, 반가움을 느끼고, 새로운 만남에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 인터넷이 지니는 부정적인 면은 없을까요! 물론 어느 정도 있습니다.
1. 공개된 정보가 자칫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2. 지나치게 인터넷에 매달리다보면 생활의 리듬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3. 인터넷을 오래하면 눈이 쉽게 피로해지고, 자칫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
4. 인터넷은 아직은 초기 단계이기에 질서와 윤리의식, 규칙이 부족합니다. 더러는 인터넷을 통해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애정이 애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5. 인터넷은 정보를 많이 장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지배될 수 있고 개개인의 사생활이 공개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물이라도 그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될 수 있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인터넷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자신도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용하게 사용하면 인터넷은 서로를 맺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우리 생활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며, 빠른 속도와 정확성으로 세계 모든 이웃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바르게 사용하는 인터넷 문화는 사랑과 기쁨으로 열매 맺습니다." 23년 전에 예측한 것들이 지금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굿뉴스는 관심과 애정을 가진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더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생각합니다.
2021년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는 서부지국을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였던 가톨릭신문이 아쉽게도 작년에 36년 역사를 뒤로하고 폐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몇몇 뜻있는 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에 서부지국 설립에 대한 제안을 하였습니다. 가톨릭신문의 빈자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출범하는 가족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아울러 우리들의 희생과 노력이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입니다!
-양승국신부-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 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짓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착찹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드리며, 일반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복음 12장 24~25절)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퍼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 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닌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이영근신부-
사순절의 5주일입니다. 다음 주에는 성주간이 시작 됩니다.
오늘 우리는 파스카에 대한 고통과 승리의 이중교훈을 만나게 됩니다.
<제1독서>는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예레미아서>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아는 시나이 계약과는 다른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을 예고합니다.
곧 ‘새 계약’으로 당신의 법이 마음과 정신에 새겨지고 허물이 용서되고 당신의 백성과 영원히 결합될 것을 예고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가슴에 당신의 법을 넣어주고, 마음에 법을 새겨줄 것이며,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제2독서>는 이 ‘새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으며, 또한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하셨고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음’(히브 5,7-9)을 상기시켜 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계셨는데, 순례하러온 그리스인들이 제자에게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 12,21)하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응답을 주시지는 않지만, 당신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한 것은 단순히 호기심으로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그래서 섬기고 따를 만 한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임을 아신 까닭입니다.
사실, 여기에 쓰인 “보다”라는 동사는 단지 물리적인 외적인 형태를 보는 것을 넘어 내면적인 의미를 파악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 안에 간직된 비밀, 곧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3-2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임과 타인을 위해 죽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려면, 당신을 따라 그 죽음의 길을 가야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때를 맞이하여 “마음이 산란합니다.”(요한 12,27)라고 고뇌의 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 하시면서도 “아버지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라고 하신 것처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8)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의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요한 12,28)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함이 곧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하시면서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순명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을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이는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를 가리켜주시면서, 마침내는 십자가의 순명으로 승리를 거두실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을 이루십니다.
이처럼, 당신께서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입으시기만을 바라시며, 바로 당신의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내시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바로 그 파스카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켜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고통과 영광에 우리를 참여시키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당신의 법을 새겨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지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아버지의 품 안으로 불러 모으시고, 우리도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한 사람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구원에로 초대 받은 우리의 축복된 삶을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루의 일상을 보내면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말입니다. 사실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감사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 하느님 안에 온전히 묻히신 결과입니다. 사실 씨앗도 온전히 묻히지 않으면 새에게 쪼아 먹히든 햇볕에 타버리든, 길바닥에서 밟혀 으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온전히 죽어서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통해 그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요, 부활은 그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제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될 때입니다. 목숨을 내 놓을 때입니다. 사랑의 승리를 위해 투신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일상 안에서 밀알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상대를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부자간에 이웃 간에 공동체의 구성원 간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미사참례 하실 때 앞자리부터 앉아주시면 늦게 오시는 분이 덜 미안합니다. 늦는 사람이 매일 늦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님과 함께하시려 부랴부랴 오시는데….도 어떤 사정이 있어서 늦기도 하는데….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봐요….이것도 배려입니다.
그러나 그 배려가 온전한 배려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품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성 프란치스코)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정도 했으면 됐지 뭐’, 또는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해 준 게 뭐 있니?’‘너도 이만큼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하는 마음이 든다면 온전히 묻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밀알이 되어 썩는다는 것은 또한 ‘내가 먼저 미안해’ 하는 것입니다. ‘염소 두 마리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습니다. “너 비켜”, “안돼, 네가 비켜”하며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한 마리가 말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놀라서 물었어요. “무슨 생각?” “여기서 늙어 죽을 생각이야”.(이규경)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것을 뭐라 하죠? “똥고집!”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을 관철하려고 엉뚱한 고집을 피우면 서로가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네가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보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미안해’ 한다면 그것이 밀알처럼 썩는 것이고 그래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까롤로 까레또).
서로 자기의 이익에 매달리는 오늘날, 밀알이 되어 썩는 이가 없다면 사회는 점점 더 각박해 지고 힘들어 질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들이 스스로가 밀알이 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주장만으로 온 가족을 휘두르고 싶어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불평하며, 자녀들은 무조건 요구만 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정에도 이 세상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상이 악한 기운, 이기심, 두려움에 지배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인류에게 주님은 용서와 화해, 희망을 가능케 하는 사랑을 선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진다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는 마음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바위와 마주선 느낌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 쓰는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요한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 ”(1요한3,16)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밀알이 되어 썩고자 하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소돔을 위하여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롯의 구원을 이끌어 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순명으로 구세주를 잉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 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순명, 한 사람이 짊어진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이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결국 밀알이 되어 썩는 나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이 구원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손발을 구원의 도구로 써 주심을 감사합시다. 한 사람 , 바로 내가 중요합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1코린4,10)하고 말합니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하기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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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의 다른 점이 있답니다.
여자가 짝사랑을 하면 보고도 못 본 척 한대요,
남자가 짝사랑을 하면 목소리가 커지고
여자는 자랑할 일이 있으면 친구를 찾아가고
남자는 괴로운 일이 생기면 친구를 찾아간대요.
여자는 수다로 남자를 질리게 하고
남자는 침묵으로 여자를 오해하게 하고
여자는 몰라도 되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고
남자는 꼭 알아야 할 일에 전혀 관심이 없대요.
여자는 허영심을 위해 무엇인가를 들고 다니고 (짝퉁)
남자는 자존심을 위해 무엇인가를 들고 다닌답니다.
여자는 남자의 허풍에 속고
남자는 여자의 외모에 속는대요.
허영심도, 자존심도 버리고, 속지도, 속이지도 말고
내가 먼저 진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송영진신부-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3-26).”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1-32).”
1)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밀알 하나를 땅에 심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희생이라는 뜻입니다(요한 12,32).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일이기도 하고(요한 12,28),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일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드러나는 일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일입니다.
그 점에서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겉으로는 무기력한 패배처럼 보이는 일이지만,
사실은 부활로 이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승리이고,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던
죽음의 세력(사탄의 세력)을 심판하고 추방하는 일입니다(요한 12,31).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기 위한 ‘희생’이지만,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남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을 희생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희생이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한 ‘투자’와 같은 일입니다.>
2)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는 일은 희생이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살인입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라는 말을 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의 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요한 11,51-52).”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 쪽에서는 희생이지만,
예수님을 죽인 자들 쪽에서는 살인입니다.
(희생은 남에게 강요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강요하면 살인입니다.
희생은 희생하는 쪽에서 자원하는 일입니다.)
3)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것만을 추구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티모테오 2서에,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라는 말이 나옵니다(2티모 4,10).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 또는 보조자들 가운데에서 어떤 이는 복음 선포 활동을
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떠나고(바오로 사도가 파견하고),
어떤 이는 바오로 사도 곁에 남아서 사도와 함께 일했는데,
‘데마스’ 라는 사람은 ‘현세를 사랑해서’ 바오로 사도를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그처럼 누구든지, 지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더라도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릅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4)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그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다.’ 라는 말은,
앞의 ‘자기 목숨을 사랑하다.’와 대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고,
글자 그대로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39).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지금 말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들을 가지려고
집착하고 욕심 부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멸망의 길로 끌고 가는 것이니,
그것은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 파괴’입니다.
5)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가리키는 말이고,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을
뜻하는 말이고, 아버지께서 존중해 주신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조욱현신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의 전례는 파스카에 대해 고통스러우면서도 기쁨에 찬 묵상을 요구하는 사순절의 근본적인 주제들이 들어있다. ‘낮춤’의 신비보다 ‘고양’의 신비로 제시되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것, 자아 포기와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권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 앞에 우리의 선택에 따라 나타나는 구원과 단죄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사랑의 결정적인 선물인 '새로운 계약' 등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면서 그것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실 ‘새 계약’으로 결정적이고 절대 깨지지 않을 계약이라고 한다.
복음: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성대하게 메시아 입성을 했던 예루살렘에 와 계시다. 그것을 보고 감동을 한 그리스인들이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21절) 하고 필립보에게 청한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예수님을 그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이 알아차리지 못한 그 비밀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독백처럼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신비스러운 점을 드러내셔서 그리스인들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바로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알처럼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신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노력이다. 여기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원을 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헌신에의 초대를 말하는 것이지 죽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풍요한 결실 능력을 확장하기 위한 밀알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때, 그리스도께는 최대의 영광이 돌아온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우선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더욱더 큰 사랑을 표명하는 것이며, 또 이러한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고 이끌어줄 능력을 갖추기 때문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3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뵙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은 구원으로 이끌려 들어오는 이방인의 세계를 나타내는 첫 번째 표현이다. 십자가는 이미 그리스도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주일의 복음의 ‘높이 들리다’라는 말을 만난다. 이 말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얻은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이 되기 전에 이미 ‘높이 들리심’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높이 들림’이라는 사실이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 예수님의 공포와 거부감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 무서운 상황 앞에 두려움과 마음의 동요를 표현하고 계시다. 그래서 성부께 기도하시면서 당신이 느끼시는 괴로운 긴장감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마음의 분열을 극복하고 이 세상의 역사를 위한 그 결정적 순간의 주인공이 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28절)라 기도하신다. 즉, 당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기도하신다.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28절). 아버지의 계시는 예수님의 전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봉인이다. 즉 예수님의 지나온 생애, 죽음을 감수해야 할 생애, 부활을 통해 더욱 빛나게 될 생애를 말한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이미 빛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내려지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신다. 그분을 죽이는 것은 빛을 거스르는 결정적인 죄였다. 이렇게 빛을 거부하고 단죄를 받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을 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단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자신을 충실히 내맡기고 그분 사랑의 선물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여야 한다. 사탄에 대한 승리는 결정적으로 여기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항상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는 내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것처럼 육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십자가의 고통 앞에 큰 소리와 눈물로써 기도하고 간구하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구해주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에게 십자가를 지워야 했던 당신의 뜻을 이룰 능력을 주심으로써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약을 깨지 않고 무한한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은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 됨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심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랑의 결과로 세상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들과 영원히 결합하셨기에 인간은 그분께 결정적인 사랑의 응답을 드려야 한다. 이 결합에 사랑이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분께 결합할 수 없을 것이다.
사순절의 여정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만남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 가능하고, 부활을 지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매 순간 그분에게 사랑의 응답을 드리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자기를 끊는 아픔을 이겨내도록 주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한상우신부-
밀알의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
밀알
하나는
하나의
십자가이다.
고통없는
변화
진통없는
출산은
있을 수 없다.
고통과
시련으로
우리 영혼은
봄처럼
새로워진다.
이기적인
자아가
밀알처럼
죽는 것이
부활의 기쁜
소식이다.
우리 삶은
죽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다.
밀알 하나처럼
죽는 것이
우리모두를
살리는
구원의 삶이
된다.
늘 십자가는
새로워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삶은
새로움으로
나가야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우리 삶은
자유로울 수 있다.
생명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다.
생명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은총의
사순주일이다.
생명의 본질은
사랑의 삶이다.
사랑의 삶은
십자가와
함께하는
사랑의 실천이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
죽음이 있기에
열매가 있다.
삶을 되살리는
십자가의
죽음이다.
죽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이다.
매순간이
새로운 삶의
죽음이고
부활이다.
밀알같이
죽는 것이
사는 것이며
죽어야
열매를 맺는
사랑의 신비다.
공동체의
열매또한
십자가에서
밀알처럼 죽는
내어드림의
열매이다.
시간과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밀알의 시간이다.
우리자아가
죽어야
열매를 맺는
구원의 신비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더 선명히 드러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은 누구나에게 친숙한 자연현상의 비유를 통해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고 싶은 생명과 죽음의 원리가 이렇듯 자연 안에 들어 있습니다.
씨앗이 자기 몸 하나 보전하며 주변 안 돌아보고 아등바등 저만 챙기다 보면 언젠가 제 생명의 진액이 다 빠지는 퇴화의 시기를 맞아 그저 말라서 먼지가 되거나 굳어버립니다. 이젠 생명을 틔울 가능성을 품은 씨앗이라기보다 모래알이나 돌조각과 같은 무생물이 되어버리고 말지요.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 12,27)
예수님 앞에 다가온 수난은 그분의 마음을 산란하게 할 만큼 만만치 않은 고통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계시고 또 피하지 않으시지요. 바로 한 알의 밀알처럼 죽고 썩어서 새 생명을 틔우는 소명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그 옛날 광야의 구리뱀처럼 높이 들어 올려지면, 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옛 계약으로 이스라엘이 보장받았던 선택적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새 계약으로 완성되어 구원은 보편적 선물로 온 인류에게로 널리 전해집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새 계약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예레 31,31.33)
이 새 계약은 돌판에 새겨지지 않고 우리 가슴과 마음에 새겨집니다. 예수님께서 썩은 밀알처럼 우리 마음에 심겨져 우리 안에서 생명을 틔우시기 때문이지요. 그분께서 죽음을 불사하고 남기신 당신의 살과 피가 우리 존재 곳곳에 스며듭니다. 그 생명은 낡은 우리를 새사람이 되게 하고, 또 새사람이 된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새 생명이 번져나가게 합니다.
"모두가 나를 알게 될 것"(예레 31,34)
주님을 앎으로 가득한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누가 누구를 해치는 일도, 탐욕을 부려 타인을 짓밟는 일도 없는 세상입니다. 새 세상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과 허세에서 찾을 일도, 재물과 신분에서 찾을 일도 없게 될 겁니다. 모두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기에 그분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새 계약의 피로 맺어진 사랑 앞에서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 과정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새 계약, 새로운 피조물, 새 세상으로 가기까지 예수님도 우리도 반드시 겪어야 할 여정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전례력 안에서, 그리고 각자의 삶의 질곡에서 지나고 있는 시간입니다.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처럼, 우리가 받아들인 각자의 십자가와 고난의 여정이 우리를 구원의 협력자로 변모시킬 겁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지요. 예수님도 피땀을 흘리며 주저하셨던 길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사순 시기가 무르익을수록 각자의 십자가도 더욱 무겁고 버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이 또한 주님과 함께 걸으라고 전례 시기를 통해 주시는 은총이기도 하지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썩은 밀알이 되어 묵묵히 인내하고 희생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때
-김찬선신부-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저희 수도원 농장도 봄 농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밭을 갈아엎은 다음 고랑을 쳐 이랑을 만들고
두엄더미를 뒤집어 잘 썩은 두엄을 밭에 뿌리고
씨를 뿌릴 준비를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겨우내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말라비틀어진 나뭇잎과 삭정이를 걷어다 태우고 대청소를 하였는데
낙엽을 들추니 그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새싹들이
여기저기서 온통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싹들은 겨우내 이 낙엽을 이불 삼아 덮고 있었던 겁니다.
옛것의 퇴장과 새로운 것의 등장.
순간, 감동이 울컥 올라왔습니다.
파릇파릇 새로운 싹을 내민 것도 감동이었지만
겨우내 이불이 되어준 늙고, 낡고, 삭은 이파리들도 감동이었습니다.
이것들도 한때 새싹이었고 푸르른 생명의 때가 있었으며
하늘로부터 부지런히 태양과 바람을 날라주고,
때가 되었을 때는 기꺼이 땅으로 떨어진 것들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때보다 먼저 저무는 때가 있었고, 썩는 때가 있었으니
그러니 우리는 이 저무는 때와 썩는 때를 무시치 말 것이며
저묾이 그리고 썩음이 사랑 아니라고 우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새싹의 돋음이 사랑을 먹고 태어남이라면
잎새의 저묾과 썩음은 사랑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싹은 사랑이 되어준 잎새의 사랑을 먹고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때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청하려다
마음을 바꿔 이때를 위해 당신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란 당신이 돌아가셔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탄을 주던 가르침도 이제는 접으시고,
많은 이의 병고와 애달픔을 고쳐주고 달래주던 사랑도 이젠 접으시고,
죽는 사랑을 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때란 당신이 돌아가실 때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아버지의 때입니다.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때이고,
그 때에 순종하는 때이며,
이웃을 위해 썩는 사랑의 때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은 죽습니다.
자기 사랑,
이웃 사랑,
아버지 사랑이 그러니 이 죽음 안에 다 있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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