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19일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Margaret K 2021. 3. 19. 07:08

2021년 3월 19일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오 1,16.18-21.24ㄱ)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When Joseph awoke,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his wife into his h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습니다.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함께 가자며 손을 잡아 주었고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었습니다. 기쁘고 행복하였던 환희의 순간에도, 아프고 힘들었던 고통의 순간에도, 어떤 것을 선택할지 갈등하고 고민하였던 결정의 순간에도 그 친구와 함께하였습니다. 서로 비슷한 점은 없지만 언제나 무엇이든 이해해 주고 자신의 의견보다 친구의 생각을 더 잘 알고 전달해 주는 사이, ‘벗’이라며 같은 길을 걸어가 주는 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우리를 부부 같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동반자, 반려자라 부릅니다. ‘함께 의지하며 짝을 이루고 같이 걸어가는 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도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라고 이야기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꽃길뿐만 아니라 험난하고 어려운 가시밭길도 함께 걸어가는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 성인을 경축합니다. 요셉 성인은 성모님의 힘들고 어려운 여정에 언제나 함께하였기에 성인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라 합니다. 성인은 상대의 생각과 판단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약혼자의 몸가짐을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고, 믿어 주고 참아 주며 끝까지 함께 걸어갔습니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일들을 참아 내며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픔과 역경을 함께 이겨 냅니다. 그래서 소년 예수님께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사랑과 호의를 삶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따르시는 고난의 길에 요셉 성인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배필이신 마리아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걸어 주고 짝이 되어 주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이해해 주고 안아 주고 울어 주고 고민해 주는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동반자의 손을 잡고 오늘도 한 걸음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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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왕이 세자빈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여러 심사를 통해 3명의 규수를 마지막 후보로 선발하고서 소량의 쌀을 나눠주면서 숙제를 주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으로 한 달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

성인이 아껴먹어도 한 달 살기는 너무나 부족한 양의 쌀을 주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세자빈이 되기 위해 이 명령을 충실히 따라야만 했습니다.

한 달 뒤, 두 처녀는 너무나 말랐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처녀는 이전보다도 더 좋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한 시루 머리에 이고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왕이 “적은 쌀로 한 달을 먹고, 떡까지 해올 수 있었느냐?”라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 쌀로 떡 을 만들어 장터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남은 쌀로 떡을 해서 이렇게 임금님께 바칩니다.”

어떤 규수가 세자빈이 되었을까요? 당연히 쌀로 떡을 만들어온 규수가 세자빈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무엇인가라도 해서 당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길 원하실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요셉 성인에 대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성인은 아직 혼인하기 전에 성모님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사실 주님 탄생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그 신비는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 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이 자제를 배우고 위로를 받도록, 그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 그가 느낀 것, 두려워한 것, 하고자 마음먹은 일을 그에게 낱낱이 드러냈습니다. 천사는 또 요셉에게 구원자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베풀었으며, 아이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도록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중에 마리아를 당신 제자에게 맡기시듯이, 지금 마리아를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요셉에게, 아버지로서 아들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도 주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뜻을 요셉은 받아들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묘사된 것을 보면, 그가 성모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메시지를 받고서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바로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에 그대로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십니다.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우리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우리는 종종 광고를 보게 됩니다. 식당 광고, 물건을 파는 광고, 관광지와 영화, 공연 광고 등등 참으로 많은 광고가 있습니다.

이 광고를 왜 할까요? 사람들이 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식당을 이용하면 저희가 부자 됩니다.’, ‘이 영화를 많이 봐야 저희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면서 광고할까요? 아닙니다. 대부분 돈을 써도 절대로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도록 광고합니다. 그리고 자기 돈을 쓰고라도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단순히 헌금만 내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생명과 구원, 나눔과 기쁨을 주는 곳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알리고 있을까요? 

 요셉 성인이 알려주시는 '적극적 고독의 힘'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을 우리는 ‘의롭다’라고 표현합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타인의 죄를 용서할 때 생깁니다.

노아의 벗은 모습을 형제들에게 알린 아들 ‘함’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덕분으로 살아남은 사실을 잊고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셈과 야펫은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고 뒤로 들어와 아버지의 겉옷을 덮어드렸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죄가 용서받은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 요셉은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을 모르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을 덮어주려 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여 성모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모님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러면 아기 예수님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의인 성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여 잉태시키고 이젠 싫어지니까 파혼하고 버려버리는 파렴치한이 됩니다. 마리아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기 위해 마리아와 그 가족, 또 자신의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을 의롭게 만들려면 자신은 십자가와 고독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마 사순절에 요셉 성월이나, 성인의 축일이 겹친 이유도 이러한 섭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의 고독을 사랑하지 않으면 의로워질 수 없음도 함께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도 의로워지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홀로 가셨습니다. 이 힘은 바로 의로워짐으로써 당연히 거쳐야만 하는 ‘적극적 고독’에서 나옵니다.

 

      적극적 고독은 내가 세상과 나를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버려지고 미움을 받을 때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골방’과 같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신지, 계시지 않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면 힘들기는 하지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받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모든 사실을 알려준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이런 고독을 느껴보았습니다. 형제는 물론이요, 부모님도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때였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있던 고향이 아닌 먼 곳으로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 타지에서 그래도 역시 타지로 다니는 한 친구와 친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로부터 그 아이가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저 혼자 나서서 아이를 구해주었습니다.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또 수원역에서 그 친구가 깡패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그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이미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누구도 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친구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는 결국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모인 학생들의 집단이지 가족과 같은 끈끈한 우애를 발견하기는 힘든 곳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세상에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외롭다, 외롭다.’라고 느낄 때 한 개신교 다니는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왜 외로워?”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냐?”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저는 학교에 등하교하기 위해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 때 시원한 바람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느낌과 함께 그분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외로움이라는 것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친구들이 엄청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외로움을 느끼니까 친구가 없었던 것이고, 고독한 나만의 방이 생기니까 친구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이고 고독은 절대적인 분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도시에서 느끼고 고독은 광야에서 느낍니다. 외로움은 타인을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만족이고 고독은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머무르려는 골방입니다.

      요셉 성인이나 예수님은 이 고독의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의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요셉 성인이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타지에 갔다가 임신하고 돌아왔을 때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만약 요셉 성인에게 고독의 골방이 없었다면 용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면서도 그녀와 함께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사실 외로운 사람이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미워하면서라도 그 사람을 자기 머리에 잡아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그 골방이 있다는 이유로 미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 골방 안에서 운이 좋으면 절대자가 보낸 천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을 즐기십시오. 이것이 ‘적극적 고독’입니다. 이 노력이 ‘광야’로 나오는 삶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혼자 산을 올라도 좋고, 여행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무작정 혼자 일주일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을 만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느끼는 소외감 같은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 친구,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고독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재수가 좋으면 천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는 고독을 즐길 줄 알 때 시작되고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알게 된다면 굳이 미움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내 안에 잡아놓을 필요까지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의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사순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요셉 성인의 선물일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이웃 본당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중에 장례미사가 4번 있다고 들었습니다제가 아침미사를 대신하겠다고 했습니다신부님께서도 고마워하였습니다아침미사를 하면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제게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요셉형제님 부부가 매주 부르클린 성당까지 운전해 주십니다덕분에 6개월 넘게 편하게 다니고 있습니다지난달부터는 6주 동안 부르클린 성당에서 롱아일랜드 성당까지 저를 데려다 주십니다덕분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편안하게 주일 미사를 2번 할 수 있었습니다롱아일랜드 성당 미사가 끝나면 요한형제님 부부가 신문사까지 데려다 주십니다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입니다연극 반에서 3년 동안 함께 했습니다주인공은 거의 하지 못했고단역을 하거나뒤에서 도와주는 일을 했습니다연극에 필요한 의상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고효과음에 필요한 소리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습니다한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뒤에서 도와주는 일도 많았습니다무대를 만들고조명을 준비해야 합니다연습하는 동료들을 위해서 간식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데미안결혼크리스티나 여왕이 무대에 올랐습니다아름다운 꽃이 피기위해서는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아 올리는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멋진 그림이 전시되기 위해서는 벽에 못이 있어야 합니다주변을 보면 뿌리와 같은 분이 있습니다그림을 빛내주는 못과 같은 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성인은 뿌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못과 같은 분이셨습니다성모님과 예수님이 드러날 수 있도록 묵묵히 뒤에서 도와주었습니다요셉 성인은 상식적인 사람이었고의로운 사람이었고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그 정도만 살아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고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마치 운전을 한다면 준법운전은 물론 안전운전까지 하는 사람입니다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살게 됩니다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비록 자존심이 상하고이해 할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그러기에 우리는 요셉 성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그분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에게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구약의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 이집트로 보낸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욥은 재물건강자녀들을 잃어버린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여인의 딸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신분으로 살았는지어떤 피부색으로 살았는지어떤 성별로 살았는지얼마나 큰 업적을 쌓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았는지 일 것입니다그런 기준이라면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성인을 생각합니다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들은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신 성 요셉!

 -양승국신부-

 

읍내로 물건을 사러갔다가 인상 좋으시고 연세 지긋한 사장님을 만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안그럴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느릿느릿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데,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발소를 들렀는데, 말 잔치는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번에도 대충 들은 것 같았는데, 길고도 긴 대하드라마 같은 인생사를 고스란히 들어야했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결코 만만치 않은 분이 또 한분 기다리고 계십니다. ㅋㅋㅋ 

 

연세 조금 드시면서 갑작스레 말씀이 많아진 영감님들 케어하며 사시는 자매님들, 참 고생이 많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영감님은 어디 안 계실까? 생각해봅니다. 

 

입은 꼭 다무는 대신 얼굴엔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짓고 계신 영감님, 너무 아무 말 없으면 답답하니, 가끔씩, 백만번도 더한 아재 개그가 아닌, 신선하고 재미있는 아재 개그 구사하는 영감님, 너무 자주는 말고 하루에 세번 정도 뭐 필요하냐? 뭐 도와줄까? 물어봐주는 영감님,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설거지며 집안 청소며, 기쁜 얼굴로 척척 해내는 영감님... 

 

아마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양부이자 성모님 인생의 동반자셨던 요셉 성인은 구세사 안에 꽤 중요한 인물인데도 복음서 안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셉은 과묵한 의인, 침묵의 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면서 침묵하고 또 침묵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결혼 문화 안에서 약혼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집에서 거주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법적으로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 약혼녀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던지, 고무신을 바꿔 신어버렸을 경우, 큰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닭쫒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일순간에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꿈꾸던 단란한 가정도 물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헀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은 큰 무리없이 첫삽을 뜰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획하신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믿음안에 의로운 사람

-반영억신부-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요셉의 믿음
 -송영진신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18-21)”
 
1)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잉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요셉에게 바로 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잉태 사실만 말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들과
자신이 기꺼이 응답한 일을(루카 1,26-38) 모두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성령 잉태 사실을 전할 때 마리아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모습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라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요셉에게 성령 잉태 사실을 전할 때에도
똑같은 태도와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1) 이 말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믿고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은,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고,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성령 잉태’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마리아가 단 한 번이라도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면,
마리아를 전적으로 믿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고,
‘성령 잉태’ 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들었을 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마리아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령 잉태 사실을 요셉에게 전할 때에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따로 맹세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2)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유대교에서 원래 이 말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인지를 아직은 알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를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애썼음을 나타냅니다.
(마리아를 믿었으니까 보호하려고 애쓴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잉태했음을 요셉이 믿은 것은,
아기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요셉은
자기는 감히 아기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파혼하기로 작정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서 아버지의 위치에서
스스로 물러나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파혼을 ‘남모르게’ 하려고 한 것도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의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한 다음의 일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파혼 사실을 감추려면 부부 행세를 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해서 많이 망설였을 것이고,
그래서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3)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됩니다.
또는 마리아가 예수님 잉태와 탄생 예고를 들은 것과 같은 일,
즉 요셉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사가 한 말을 상황에 맞게, “마리아의 잉태는 마리아가 말한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아기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네가 아기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은
요셉에게는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지켜 주시니’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든 일을 요셉에게만 떠맡기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켜 주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위로와 격려의 뜻이 들어 있는 말로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4)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예수’(하느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아기의 이름을 짓는 일은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아기의 아버지로서 권한을 행사하는 일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내린 계시를 믿었고, 그 계시가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했습니다.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조욱현신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성령께서 감추시어 눈에 띄지 않는 성사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파혼하려 했을 것이다.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또한, 요셉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아무 죄가 없으며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즉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천사의 말은 동정 어머니를 그의 아내로 부를 자격을 갖도록 하였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도 보면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이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상급을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과의 약속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튼튼히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2독서에 나오는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자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즉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요셉 성인이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씩 실천하고 그 말씀을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한상우신부-


아름다운
봄꽃의 설레는
계절이다.

우리 모두
배려가 필요한
소중한
사람들이다.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성 요셉의
기쁜
축일이다.

소중한 마음은
언제나
소중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요셉의
참된 사랑은
평생에 걸쳐
나자렛
성가정안에서
이루어진다.

평범한 일상을
돋보이게 하는
참된 사랑이다.

힘든 삶의
고비마다
진실하게
기도하고

겸손되이
받아들였던
성 요셉의
삶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기에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삶을
끝까지 신뢰하고
존중한 경청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삶의
여정에서
성급함은
금물이다.

완벽한 가정
완벽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삶이다.

가족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길을
걸어가게 했다.

예수님과
함께한 역사

마리아와
함께한 여정이
행복을
탄생시킨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하는가?

사랑과 믿음
보살핌과 도움은
성 요셉의 삶을
잘 표현해 주고있다.

사랑이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따듯이
잡아주는 것이다.

꽉 잡아준
도움의 손길이
가장 행복한
요셉이 되게
하였다.

행복은
함께하는
시간이다.

성 요셉은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셨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인
요셉 성인이시다.

성 요셉이시여
참된 사랑을
잃어버린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복음의 요셉과 마리아, 제1독서의 다윗, 그리고 제2독서의 아브라함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약혼녀 마리아가 혼인 전에 아기를 잉태한 사실을 알고 그녀와 파혼하려던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말의 뜻을 요셉이 얼마나 이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나고 자란 중동 문화 안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성경은 천사의 말을 그대로 따른 요셉의 모습을 군더더기없이 간결하게 전합니다. 그에게 왜 의문이나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런 인간적인 의혹들보다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 아기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더 컸던 까닭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국을 번영하게 만들 후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이렇게 나탄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은 단지 다윗의 아들 솔로몬까지의 계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두 번이나 "영원히"라는 수식어를 통해 이 나라가 단지 사람의 족보로만 계승되는 인간적 왕국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바로 혈통과 민족을 넘어서 이어진 영원한 믿음의 후손이라는 증거니까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으로 후손을 얻은 성조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 4,16)
아브라함은 믿었고 따랐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 늙은 나이나 떠돌이 유목민 처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지요.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말씀에 따라 ... 믿었습니다."(로마 4,18)
눈에 보이는 결과를 기대하는 것을 희망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현재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고 바라는 투신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희망의 근거는 망상이 아니라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요셉 성인의 믿음과 순종, 겸손과 인내, 충실함을 기념하는 오늘은, 역사에 족적을 남긴 무수한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억하며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생생히 되살리는 날입니다.

저마다의 녹록치 않은 인생 여정 안에서, 믿음 말고는 도저히 구원을 희망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어렵지만 더욱 단단히 믿음의 끈을 조이고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나아가야 하지요.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요셉처럼 말입니다. 미지의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역설 가득한 믿음의 모험에 담대히 뛰어든 여러분께 주님의 말씀을 축복으로 전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영성체송)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사순 4주 금요일-시험과 시련과 단련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3월 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오 1,16.18-21.2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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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나 고독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이고

고독은 절대적인 분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도시에서 느끼고

고독은 광야에서 느낍니다.

외로움은 타인을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만족이고

고독은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머무르려는 골방입니다.

      요셉 성인이나 예수님은 이 고독의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의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고독을 즐기십시오. 이것이 ‘적극적 고독’입니다.

이 노력이 ‘광야’로 나오는 삶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혼자 산을 올라도 좋고, 여행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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