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3. 20. 06:51

2021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
요한 7,40-53)

 

"Never before has anyone 
spoken like this m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아집과 고집, 이 두 가지야말로 사제가 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며, 혼자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좁은 생각에 갇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실수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결정된 의견을 절대 바꾸지 않는 고집도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자리를 차지해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아집과 고집은 이미 내 삶의 많은 부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첫 마음을 되새겨 봅니다. 그렇게 살아가지 말자며 다짐하였지만 삶 속에서 타협과 핑계로 그 다짐은 무참히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그 현실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첫 마음과 반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악습이 됩니다. 악습은 더이상 잘못을 잘못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굳어 버린 마음, 굳어 버린 시선, 굳어 버린 이해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마음을 ‘완고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라는 물음에 여러 대답이 나옵니다. 저마다 시선과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은 성전 경비병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굳어 버린 시선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또한 니코데모의 의견도 무시합니다. 그들의 굳어 버린 마음과 시선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굳어 버린 마음과 시선인 ‘완고한 마음’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을까요? 습관이 되어 버린 잘못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까요? 다시 우리를 바라볼 시간입니다. 굳어 버린 시선과 마음, 굳어 버린 생각과 행동은 없는지 반성하고 살피는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서경의 ‘열망’편과 ‘춘추좌씨전’에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평소에 미리 준비가 철저하게 되어 있으면 환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잘 준비하기가 쉬울까요? 특히 그 누구도 잘 준비하지 못하고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느낀 뒤에야 땅을 치며 후회합니다. 그리고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라면서 서운해합니다. 인생 자체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인데도 아직 멀었다고 합니다. 늘 후회만 가득합니다.

신앙인은 특히 이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토록 가고 싶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집니다. 그 첫 번째가 주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죽음에 대한 가장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면 죽음의 준비는 또다시 맨 뒤로 미뤄지고, 언젠가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말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예!!”하고 곧바로 응답할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그분이 보통 사람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지도자들에게서 아무런 지침을 받지 못한 그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 여전히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그분이 나자렛에서 자라셨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그만큼 구원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뿐더러 그분께 크게 감탄했습니다. 군중에게 일어날까 봐 바리사이들이 걱정하던 일이 오히려 그들이 보낸 경비병들에게 일어났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보낸 이들은, 생수에 관해 예수님처럼 말할 수 있는 이는 살아 계신 하느님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이한 점은, 율법을 모르던 이들은 믿었지만, 율법을 안다고 자처하던 이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최고 의회 의원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구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또 많은 배움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믿음, 그 믿음이 주님과 함께 하는 시작이 됩니다.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테오프라스토스).


행복

사람들은 행복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위해,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고,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합니다. 건강하기 위해 운동하는 것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행복 Happiness는 우연을 뜻하는 Happening과 같은 어근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예상치 못하게 등장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 주어지는 것일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주어질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나의 시간에 최선을 다할 때였습니다. 물론 얻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실망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행복은 우연이니까요.

 성경 해석: 빛으로 빛을 보는 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성경 해석에 관한 요한복음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복음사가들은 생각했습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어떤 이들은 그 반대로 나아갈까?’

루카 복음은 그 사람 안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부자와 거지 라자로’ 비유에서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 즉 성경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부활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희들에게 표징이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이 너희 눈을 가려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예언자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다고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성경은 모두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성경을 읽어도 그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요한은 루카 복음에서 더 전진하여 결국 그들 안에 ‘사랑’이 없어서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뒤에 나오는 것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율법대로 그녀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을 존중해 주면서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율법 위에 자비와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들 안에 사랑이 없으니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하는 행동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빛으로 빛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꽃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꽃이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주가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인식할 수 없는 이유는 우주 밖으로 나가 우주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계 내에서 보이는 것만 인식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없다면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됩니다. 의족으로 걸어야 하는 아들을 엄마는 일으켜 주지도 않습니다.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라며 모질게 떠납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들은 그런 어머니가 미웠습니다.

      운동회 날 아들은 학교 가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엄마는 빨리 일어나 운동회에 가라고 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운동회에 가라는 엄마가 밉습니다.

 

그에게 걸림돌은 비탈진 골목길 계단이었습니다. 일반인도 오르내리기 어려운 경사의 길을 매일 지나다녀야 했습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은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항상 눈이 쓸려 있었고 그것을 어머니가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모진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눈이 오는 어느 날, 병원에서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급히 달려간 아들은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 앞에서 눈을 쓸고 있는 것입니다. 짜증 난 목소리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아들이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못 알아보고 말합니다.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학교 가야 하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그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 “혼자 일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했던 말과 “운동회라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간다고? 그럼 평생 숨어 살아!”라고 했던 말이 이해됩니다. 어머니가 사랑이셨다는 것을 다시 믿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겉옷을 벗어서 열심히 눈을 쓰는 어머니를 덮어드리고 안아드립니다.

[출처: ‘치매 걸린 어머니가 한겨울에 눈을 쓸고 있었던 이유’, 유튜브 채널, ‘JTBC Voyage’]


      먼저 사랑을 믿어야 사랑의 행위가 보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믿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머니의 모든 행위가 미움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믿으니 모든 것이 사랑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심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같은 성경을 보고도, 같은 십자가를 보고도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직전에는 당신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인 성령을 받으라는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에 의해 쓰였습니다. 사랑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하느님 사랑의 계시인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 수님은 당신은 빛이시고 어둠 속에 머물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인데, 진리는 성령의 빛으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죄를 지은 사람 안에는 머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요한 8,34)라고 하시고, 그들이 성령을 지니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거짓의 아비”를 따라서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요한 5,44) “아비의 욕망대로”(요한 8,44)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것이 빛이 아닌 어둠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그 어둠 속에 빠져있기 때문에 빛을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믿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편 36,10 참조).

 -조재형신부-


동료 사제들과 함께 겨울 산행을 다녀왔습니다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작은 산을 오르는 산행이었습니다겨울 산행이기에 장비도 마련했습니다아이젠피켈각반을 준비했습니다편안한 마음으로 모처럼의 겨울 산행을 시작했습니다맑던 날씨가 어두워지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한국의 산과는 달리 미국의 산은 표지판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가는 길에 나무에 칠한 색을 보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한국의 산은 미국의 산에 비하면 친절한 편입니다정상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고먼저 간 사람들이 남긴 리본이 있어서 길 찾기가 수월한 편입니다.

 

담소를 나누면서 시작한 산행이지만 눈발이 세지면서조금씩 긴장되었습니다눈에 가려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무릎까지 눈이 쌓였습니다흰색 표시를 보고 길을 떠났는데 그 길로 가면 너무 늦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고길을 바꾸기로 했습니다저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는 의견을 냈습니다구글의 맵을 통해서 짧은 길을 찾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호수를 향해서 내려가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구글 맵을 중심으로 짧은 길을 찾아 가기로 했습니다다행히 호수 근처로 무사히 내려왔고 산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겨울 산행은 작은 산이라도 신중해야하고날씨의 변화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수석사제와 바리사이파 그리고 최고의회 의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자신들만이 율법과 계명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듣지도 보지 못했던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고오히려 박해하려했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잘못이 있었습니다자신들만이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입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들어도 듣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았던 사람들은 배우지 못했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예수님에게는 새로운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예수님과 대화를 하였던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진리를 찾으려는 갈망이 있는 사람입니다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갈망과 희망이 만나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습니다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던 마리아와 같은 사람입니다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식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일의 종류나 일의 가치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일을 하는 장소와 일을 하는 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자세입니다아무리 누추한 곳이라 해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은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됩니다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그곳에 탐욕과 분노가 있다면 그곳은 악취가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을 보고 있습니다하느님 나라를 장소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사랑이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기에 있다저기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있습니다.”

 

이제 곧 이 오면 어두운 땅 속에서 파란 새싹이 나올 것입니다말을 하지 못하는 저 풀과 꽃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은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더욱 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리라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6 개월쯤 전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휩싸이어 급박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리라.”(요한 7,37-38)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여러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섰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은 그들을 보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라고 말합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분의 말씀은 어째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왜 오늘 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변화되는 것일까? 대체, 그 신비로운 힘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시요,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온전히 하느님을 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권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지만, 바로 그 안다는 사실에 걸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칫,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말씀을 거부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르면서 알 뿐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사실, 지적 정보의 한 파편, 아니 한 파편의 한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저 1미크론(1/1000 mm), 아니 1나노(10억분의 1)만큼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믿어버리는 이 어리석음의 ‘선입견’이 때로는 하느님의 계획까지도 거부하고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자칫‘안다’고 믿어버린 ‘선입견’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으로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알아듣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께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

근본에로 돌아가라
 -반영억신부-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 선출 이후 첫 미사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강하게 경계하며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야 하며 예수와 십자가라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많은 것을 세울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기보다는 자비로운 비정부기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어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이라며 “세속적인 가치를 앞세워도 교황이 되고, 주교, 사제가 될 수는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게 된다.” “세속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어떤 일을 이룩하려 한다면 어린이가 쌓은 모래성처럼 모두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교황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근본에로 돌아가 거듭 태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오래 전 도울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 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더 사랑하게 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지식이 명예와 안락한 삶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를 알아보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에게는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지 말고, 헛된 바람을 지니지도 말며 기도와 성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복음: 요한 7,40-53: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조욱현신부-


초막절을 지내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특히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b-38)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생명수의 원천으로 말씀하시고 또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이 초대는 바로 구원에로의 초대이며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모세가 약속한 예언자(참조 신명 18,15)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겠느냐며 논쟁을 하고 있다. 그분이 자라나신 나자렛에 가려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점으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즉 성전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에 압도되어 감히 예수님을 잡아서 끌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경비병들이 또한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46절) 하였을 때, 그들에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49절)이라고 욕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모르던 사람들이 율법을 내리신 분을 믿었고, 율법을 가르치던 사람들은 그분을 업신여겼다. 결과적으로 율법학자인 바리사이들은 눈먼 자들이 되었고, 율법을 모르면서도 율법을 만드신 분을 믿은 이들은 보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가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51절) 하였을 때,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52절)하고 니고데모에게 핀잔을 주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52-53절 참조). 이것이 비극이다. 믿음의 체험이 하나의 무미건조한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분은 우리가 올바로 알고 누려야 하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또한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셨다. 많은 경우,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 권력이나 지식이나 교만으로 쌓은 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것을 다 헐어버릴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의 기간이 진정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 52)

-한상우신부-


삶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가
중요하다.

베들레헴이
소중하듯
갈릴래아도
소중하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묻게된다.

건강한 신앙이
중요하다.

건강한 신앙은
이분법과
양면성에 벗어나
감사로 통합을
이룬다.

너무 많은
것에
묶여있는
우리들이다.

삶을 깨우시고
삶을 되살리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베들레헴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구원하신다.

예언자들의
출신배경을
따지다
정작 누려야 할
소중한 시간들을
다 놓치며 산다.

건강하고
진정한 삶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된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받아들이고
만나게한다.

삶에서
소중한 것은
소중한 관계이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고있는
우리들 삶이다.

모든 길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삶이다.

하느님께서는
새역사를
창조하신다.

섣불리 단정하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이다.

이 사순시기가
부정적이고
판단적인
언어사용에서
벗어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한다.

하느님의
가능성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이다.

사랑으로
넘실대고
빛나는
갈릴래아이다.

일상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여정이다.

어디에서
주님을
만날 것인가?

주님과의
관계는
마음의
관계이다.

마음을 열고
마음을 드리는
마음의 사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이 등장하시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의견만 무성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백성의 의견이 크게 두 축으로 갈립니다. 그분을 예언자나 메시아로 인정하며, 그 가르침을 놀라워하고, 그분에게서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보는 이들이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요한 7,40)
"저분은 메시아시다."(요한 7,41)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긍정의 의견들에 머물러 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수석 사제들, 최고 의회 의원들이 보기에 군중은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경탄과 경외는 진리를 향합니다. 내내 문자에 고착되어 완고히 고집을 부리는 종교 지배층과 달리 그들은 직관적이고 진실된 영감에 충실합니다. 

"우리의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는 예수님 추종 세력 중 드물게 바리사이요 최고 의회 의원입니다. 식자층이라고 예수님의 신원을 무작정 거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문자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거부하는 이들 앞에서 니코데모는 조심스럽게 식별의 율법적 절차를 거론합니다. 물론 면박만 받고 끝났지만요.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이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바는 출신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탁월한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으로 백성의 희망이 되어 주셔도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고 율법 깨나 안다는 이들이 이미 결론을 내린 까닭입니다.

예수님을 긍정하는 이들은 성령께 마음이 열린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새로움을 옷입고 다가오신 진리를 전통이나 관습의 틀에 끼워넣지 않지요. 반면 예수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이들은 목숨처럼 지키고 싶은 하나의 후렴구를 반복합니다. 완고히 굳은 마음에 빛이 스며들기란 참 어렵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를 들려 줍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예레 11,19)
이는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모습입니다.(이사 53,7 참조) 이 표상은 예수님께서 흠도 티도 없는 순결한 어린양으로 의인들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당신을 희생제물로 제단에 올리신 완전한 제사를 준비하지요.

최선을 다해 힘껏 주님의 말씀을 전했건만 예레미야에게 돌아오는 건 늘 모함과 공격, 조롱과 죽음의 위협입니다. 뻔한 패소의 결말을 전제하고 임하는 재판처럼, 이 세상에서의 순탄하고 무탈하며 전도유망한 영광은 언감생심 예언자에게 돌아올 몫이 아닙니다.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예레 11,20)
때문에 예언자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립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사람의 마음과 속을 다 아시는 주님께 변호인은 물론 판사도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주님 밖에는 의지할 이 없는 '주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는 편협한 지식과 세치 혀로 예수님을 두고 왈가불가 하는 소음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 예수님의 침묵이 더 묵직하게 여운을 남깁니다. 모든 송사를 주님께 맡긴 이는 침묵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순 제5주일을 준비하며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 한층 더 큰 무게로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예언자의 심정, 예수님의 심정, 하느님의 심정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각자가 처한 저마다의 상황이 우리를 더 깊은 공감과 일치로 이끌어갈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여러분의 발걸음을 축복합니다. 

 복수의 기도, 저주의 기도

 -김찬선신부-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주소서.”

 

보지는 않았지만 전에 영화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였지요.

그런데 복수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아니 복수는 하느님 거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고,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복수는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여러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청원기도,

찬미기도,

흠숭기도,

감사기도,

탄원기도,

축복기도 등이 우리가 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주의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는 보통 생각하는데,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의 기도를 보면 저주의 기도도 할 수 있네요.

 

염병을 앓을 놈.

벼락 맞아 뒈져라.

다리 몽둥이나 부러져라.

 

우리 욕에는 이처럼 직접적인 저주가 꽤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욕을 퍼부으면 속이 시원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욕일 뿐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신자들이라면 이럴 때도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내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복수하는 것이요,

기도도 하고 복수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중에는 어떻게 그런 저주의 기도를 바치느냐고,

그래도 되느냐고 주저하며 차마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의 입으로는 고상한 기도만 바쳐야 한다는 생각인 거지요.

 

그러나 고상한 기도만 바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 안에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할 때 축복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어쩌면 위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에 솔직하면서도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정말 의지적 사랑으로 저주 대신 축복의 기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까지 고상한 척하지는 말아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저주의 기도를 바쳐도 됩니다.

 

단죄하고 벌을 내리실지 말지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리라 믿고,

그리고 언제, 어떤 벌을 내리실 지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맡기고,

나는 저주의 기도로 저주를 내 안에서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주의 기도로 내 안에 있는 저주의 쓰레기를

하느님이라는 쓰레기통에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내 안에서 저주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쓰레기통이 되어주실 거라고 믿는 겁니다.

 

하느님은 진정 통 큰 하느님이시니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3월 28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7,40-53)

---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았던 사람들은 배우지 못했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새로운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던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진리를 찾으려는 갈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갈망과 희망이 만나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던 마리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식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