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4일 예수 부활 대축일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1-9)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Mary of Magdala came to the tomb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and saw the stone removed from the tomb.
So she ran and went to Simon Peter
and to the other disciple whom Jesus loved, and told them,
“They have taken the Lord from the tomb,
and we don’t know where they put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빈 무덤이 부활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직접 본 증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이 비었으며, 예수님의 수의인 아마포와 수건이 개켜져 있는 사실 앞에서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운 때에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바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보고 믿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탐욕으로 죄를 짓고, 그 결과 세상에 죽음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파괴되고 죽음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십니다”(요한 3,16). 이 세상에 오신 아드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끝까지 이르는 사랑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되살리시고 죽음의 사슬을 끊어 버리십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다시 사랑의 관계로 회복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새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에 따르면 우리가 사회에서 맺을 수 있는 인맥의 최대 숫자는 150명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마당발이라 불릴 정도로 관계의 폭이 넓은 사람도 그 이상의 인맥을 형성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 숫자는 1,000명이 훨씬 넘습니다. 얼마 전에 한 차례 정리했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100명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관계를 만들어나가려 해도 한계가 있다는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이 정도 해줬는데 상대방은 내게 왜 그 정도도 못 해줄까 하면서 관계 맺지 못하는 상대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덜 상처받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을 줬으니 상대도 사랑을 그만큼 줘야 한다는 세상의 법칙은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계속해서 따르고 싶나 봅니다. 그래서 인맥의 최대 숫자가 150명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유일하게 이기신 분이 되셔서 우리에게 더 큰 사랑으로 오신 것입니다. 큰 사랑을 주셨지만, 이 사랑을 죽음으로 돌려준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관계를 끊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거부한 것조차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크게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나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150명과도 관계 맺기를 힘들어하는 우리인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끊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그 사랑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관계를 끊는 것에 집중하는 삶이 아닌, 관계를 이어가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삶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할 것이 많아집니다.


‘차를 바꿀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우선 10년 이상을 타서 주행거리가 많다는 것, 계속 새로운 잔고장이 생긴다는 것, 여기에 요즘 좋은 차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 고민의 이유입니다. 주변에서도 “경유차 10년 이상 타면 잘 탄 거야.”라면서 지금도 쌩쌩 잘 달리는 제 차 바꾸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특히 자동차의 앞 유리가 깨져 있어서 교체해야 하고, 타이어도 모두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지금이 차를 바꿔야 할 적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워낙 차 한 대 가격이 고가이다 보니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는 고민하지 않기 위해 정비소로 달려갔습니다. 자동차 앞 유리를 교체하고, 타이어 역시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얼마의 비용이 들었는지, 운전하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큰돈 들여서 교체하고 나니 고민이 사라졌습니다.
제대로 한 결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민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민이 길수록 갈등이 커지고 삶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운이 좋은 사람은 항상 운이 좋을까?
-전삼용신부-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옵지 못하면 주님 부활을 기뻐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다 기뻐했던 것은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주신 이들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극소수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부활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났는지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가장 처음 부활의 소식을 접하게 된 여인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활 성야 미사에서 읽히는 복음에서는 여인들이 주일 아침 일찍 향료를 사서 주님의 무덤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막고 있는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돌이었습니다.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사실 이성적으로는 그녀들은 무덤 앞에서 허탕 치고 다시 돌아왔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고 천사가 그녀들을 맞아주었습니다. 그녀들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음을 우리는 그녀들이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두려워 입을 막고 있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막연하게나마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를 헛되게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주십니다. 그녀들이 무작정 무덤으로 달려가서 얻게 된 것은 천사와의 만남이었습니다. 행운은 바로 막연하게 행동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진정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떠한 식으로든 체험하고 만나는 것은 ‘행운’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운 앞에는 항상 커다란 돌이 놓여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서 그런 행운을 만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을 위해 막연하게나마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있고, 막연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무언가 하는 사람 마음 안에는 ‘희망’이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 막연함을 지금 처지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핑계 대는 이유로 삼습니다. 우리는 행운이 누구에게 찾아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막연한 희망으로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나 무엇이라도 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고 물으면 모두에게 빠지지 않는 답 중의 하나가 ‘운이 좋았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에게만 그런 행운이 찾아드는 것일까요? 바로 ‘희망’의 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희망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왕에게 근심이 생겼습니다. 중국 왕이 우리나라 왕에게 선물을 보내왔는데 그중에서 가장 비싼 것을 가려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보내온 것은 배가 뿔룩 나온 승려 상 4개였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어느 날 한 선비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아주 가느다란 철사를 꺼내 승려 상 하나를 택해 그 철사를 찔러넣어 보았습니다. 철사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선비는 말했습니다.
“이 승려 상은 귀가 막혀 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 상은 값싼 것이옵니다.”
선비는 다른 상에도 철사를 찔러넣었습니다. 철사가 귀로 들어가더니 다른 쪽 귀로 통과되어 나왔습니다.
“이 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뜻이니 남의 말을 소홀이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것도 값싼 물건입니다.”
선비는 세 번째 상에 귀에 철사를 찔러넣었습니다. 이번에는 철사가 입으로 나왔습니다.
“들은 것을 바로 발설하는 자이니 이것도 값싼 것이옵니다.”
마지막 상의 귀에 철사를 찔러넣었는데 철사는 계속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비가 설명했습니다.
“귀로 들어간 철사가 계속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말을 듣고 깊이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상이 가장 비쌀 수밖에요.”
[출처: 『돈보다 운을 벌어라』, 김승호,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운명은 내가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은 것을 다른 귀로 흘려보내거나, 입으로만 말하는 것으로는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들은 것이 몸에 소화되어 ‘행동’으로 나와야 합니다. 들은 것이 ‘희망’이 되었다면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사람만이 들은 것을 행운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제가 십일조를 하라고 해도 하시는 분들보다 안 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을 것임을 압니다. 분명 들은 것을 아무 생각 없이 해 보려는 사람보다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거나 다른 귀로 흘려버리거나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행운이 오겠습니까?
그들을 막고 있는 그 막연함의 돌이란 ‘내가 옳다.’는 자기주장입니다. 그 내가 옳다는 생각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희망도 자신 안에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그 돌 뒤에 있는 행운의 천사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좌 때 군대에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귀신을 본다고 무서워 매일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괴롭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으며 그 귀신에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나는 이 세계에 머물고 싶지 않아. 나는 다시 인간 세계에서 살고 싶어.”라는 의지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런 막연한 시도가 귀신이 더는 괴롭히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어머니와 청년은 막연하게나마 주님이 계심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매일 전화하는 것을 선택했고, 어머니는 오랜 냉담을 풀고 사제인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이런 마음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희망’이란 것이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히는 할 수 없어도, 그냥 무엇이라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막연함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행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체조배에 관한 저의 동영상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실제로 성체 앞에 시간을 정해서 앉아있으려 하고, 어떤 분들은 그런 행동까지 가지 않습니다. 행운은 내 엉덩이를 집 소파가 아닌 성당 의자로 옮겨 놓는 행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막연한 희망에서 나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돌이 치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돌로 막혀 있는데도 막연하게나마 향유를 들고 길을 떠났던 여인들이 가진 희망의 덕을 묵상합시다. 왜 운이 좋은 사람들은 계속 운이 좋을까요?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기에 좋은 것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항상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희망의 힘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희망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없는 마음과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걱정과 근심이 있다면 봄의 향기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봄의 초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2020년 부활이 그랬습니다. ‘부활래불사부활(復活來不似復活)’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삼일 전례를 교우들과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찬송도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부활이 왔지만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지는 못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치고, 힘든 모든 사람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셨습니다. 2021년에는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제 부활 성야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자식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만을 믿고 광야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를 건너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거센 폭풍우에서 구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으로 고난과 고통이 다가왔지만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유배지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향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힘들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재물, 권력, 명예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참된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부활 성야 독서와 복음은 ‘빈 무덤’에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셨던 곳, 표징을 보여 주셨던 곳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탄생이 아닙니다. 부활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금 허리띠를 동여매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가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이 2000년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교회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입니다

거룩한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한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작년 늦가을 고마운 은인께서 보내주신 튜울립 구근을 성모상 앞에 줄줄이 심었습니다. 바닷가라 해풍도 세고 체감 온도도 만만치 않은데, 과연 봄에 꽃을 볼수 있으려나 걱정도 들었습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잘 나라고 왕겨도 얻어다 덮어주었습니다.
이윽고 한파가 지나가고 매일 이제나 저제나 하고 성모상 앞을 유심히 쳐다봤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3월에 접어들면서 기적처럼 연두빛 잎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기 시작하더니 오늘 부활절에 드뎌 노란 튤립꽃이 첫선을 보였습니다. 마치 주님 부활을 기다렸다는듯이, 자기도 주님 부활에 동참하겠다는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노란 튤립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네요. 결국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즉 주님 사랑을 의미하는가 봅니다.
또다시 부활입니다. 오늘 인근 태안 본당 주임 신부님의 관대한 초대로 아름다운 태안 본당에서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오랜만에 많은 교우들과 함께 하는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면서, 새삼 주님 부활의 기쁨을 크게 만끽했습니다.
예수님 부활은 부활절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에게 두가지 강력한 요청을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두가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가르침이라 실천하기가 그리 어렵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① 일어서십시오! 죄와 악습과 죽음에서 일어서십시오. 사실 예수님꼐선느 생명과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굳이 죽음에 짓눌리고 패배하실 이유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죽을 운명에 처한 우리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자처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죽음의 긴 터널을 헤쳐나와 일어서신 주님을 따라 죽음을 딪고 일어서야겠습니다. 돌아보니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진정 살아있지 못하고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큰 목소리로 외치고 계십니다.
“죽음 별것 아닙니다. 나를 한번 보십시오.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나를 따라 죽음에서 일어서십시오. 죽음을 이겨내십시오. 그리고 나를 따라 영원히 사십시오.”
② 건너가십시오! 오늘 이 거룩한 날 우리는 파스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파스카란 말의 의미는 지나가다, 건너가다, 넘어가다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다시금 맞이하며 우리 역시 지나가고, 건너가고,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부활대축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 파스카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그 묵상한 바를 삶으로 실천하는 날입니다.
파스카(Pascha)란 말은 ‘지나가다’, ‘건너가다’ ‘넘어가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한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삶에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인간적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삶에서 이웃의 슬픔과 눈물을 내 슬픔과 눈물로 여기는, 이타적 신앙인의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천박하고 미성숙한 삶에서 품격있고 성숙한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세상 것에만 죽어라고 목숨을 거는 지상 시민의 삶에서, 관대하고 너그러운 시선을 지닌 천상 시민의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홍해 바다 건너편 피안(彼岸)의 언덕 위해 서서 우리에게 빨리 건너오라고 손짓하고 계십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죄와 악습, 인간적 미성숙과 극단적 이기주의를 모두 이쪽 땅에 내려놓고, 주님께서 서 계시는 반대편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습니다.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조욱현신부-
“주간 첫날”(1절), 오늘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셨지만,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인다. 살아계실 때처럼 똑같이 ‘주님’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 부활의 표지이었다. 누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과 함께 아마포까지 다 들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보이는 현상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으로 얻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켜야 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이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방효익신부-
사도들과 예수님의 목격증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빈무덤(요한 20,1-2)에 대한 기억과 함께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심을 “부활하셨다”(일으키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라고 선포했습니다(35년경에 글로 쓰였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던 이들의(1코린 9,1) 이 선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이 선포를 한결같이 한 여인의 증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몹시 사랑했기에 끝까지 십자가 곁에 머물러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요한 19,25)가 “주간 첫날”(안식일 다음날 = 주일 = 그리스도인들이 전례에 모이는 날),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 혼자서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사람이 아니라(요한 11,41) 누군가에 의해 치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인은 즉시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요한 20,2)고 합니다. 요한복음이 당시 유다인들 사회에서 법적 증거능력이 없던 여자의 증언을 끌어들인 것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실제로 있었던(역사적)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요한 20,2)가 무덤에 도착했으나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간 것은 베드로였습니다(1코린 15,5). 이들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24) 빈무덤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아마포가 따도 한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길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아마포로 시신을 감싸지도 않았을 것이며, 누가 시신을 훔쳐갔다면 수건을 걷어서 개킨 다음 아마포와 따로 두는 성가신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신 채로 가져갔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에 많은 몰약을 발라 아마포로 감쌌다는 것은 앞일을 내다본 것입니다.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요한복음 강해』, 85,4) 부활의 표징이 된 빈무덤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순수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셨기(요한 13,1) 때문에, 그리고 땅에서 들어 올려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요한 12,32).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빈무덤을 보고서야 믿었습니다(요한 20,8-9). “옛것은 지나갔고,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라는 깨달음이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사건도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부활) 뒤에야 알아들었습니다(요한 12,16).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정화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2,22). 이렇게 제자들은 빈무덤을 보고나서야 부활에 대한 것은 물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고, 구약성경을 다시 읽고 나서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요한 5,45-46).
제1독서(사도 10,34ㄱ.37ㄴ-43)는 이방인(로마인)을 향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신(마르 16,9) 마리아 막달레나가 알려준 대로 빈무덤을 확인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간략하게 그분의 출신과 갈릴래아에서 보여주신 구세주로서의 삶(좋은 일, 악마로부터의 해방, 치유)을 요약합니다. 루카(사도행전의 저자)는 간략하지만 결정적인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를 초기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모범적인 방식(그리스도론)으로 삼았음을 말해줍니다. 동료 사도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인 베드로는 로마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했던 설교에서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 준수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이 나자렛 출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다고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목격증인으로 미리 선택되었음은 물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했다면서 확실한 목격증인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이심을 선포하고 증언하라는 선교사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다시 읽고, 구약의 모든 말씀(율법과 예언서)이 예수님을 미리 증언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옛 계약을 어긴 죄를 용서받는다고 선포합니다.
제2독서(콜로 3,1-4)는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에 결합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가르쳐줍니다(콜로 2,20-3,17).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이미 죽었고, 아직은 충만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드러날지 모르니 옛 인간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영광 속에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므로 항상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저 위에 있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계시된) 새 생명의 법칙을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오르기 위해 지금 아래에서부터 부단히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10)
빈무덤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내용은 언뜻 보기에는 어설프지만, 역사적이면서도 믿음의 사건이라서 말문이 막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월적인 사건이라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서 복음사가들은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도 끊임없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증하셨고, 이에 대한 믿음을 계속 요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아드님이심을 확인해주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는 항상 너울(율법)이 덮여 있어(2코린 3,15)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들도 이제 빈무덤 사건을 통하여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8)
우리는 주님의 빈무덤으로 달려갈 수도 없고, 아마포를 볼 수도 없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빈무덤에 대한 증언을 전해줄 사람은 많습니다. 매우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지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주님에 관한 기록들(루카 24,27)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사건 자체가 역사적이며 인간적인 이해(인식) 방식을 벗어나기 때문에 사실 복음서들도 자세하게 설명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자신과 사도들이 체험한 진실을 전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만일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시간과 날자는 물론 구체적인 인물묘사 등 많은 것들을 함께 적었어야 했지만 복음사가들은 단지 예수님의 체포, 수난, 죽음, 무덤이 비어있음, 그리고 그분의 발현을 통해 체험한 사실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증언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체험으로 말미암아 사도들과 목격증인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 곧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임마누엘) 생명의 하느님이심을(사도 2,28)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콜로 3,1)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뀐 것입니다(2코린 5,17).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로마 6,4; 12,1-8)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는 운동(선포)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사도 9,2)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마태 5,11). 그런데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계속되었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십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가로 간 시간적 배경을 서술한 이 문장 안에는 많은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사흘 전 예수님을 잃고 도성 구석구석으로 숨어버린 제자들의 마음, 사랑하는 이를 비극적으로 떠나보낸 여인들의 마음,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 예전에 천사에게 들었던 구원자 잉태 소식을 떠올리는 성모님의 마음, 창조주를 잃은 모든 피조물의 마음... 분명 예수님은 부활하셨건만 아직 이를 모르는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동이 트기 전의 어두움 상태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간 마리아가 말합니다. 시신조차 사라져 버린 철저한 주님 부재의 상황 앞에서 인간의 한계는 "무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무덤에 다다른 두 제자 역시 모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들이 믿었다는 건, 그저 마리아가 전한 빈무덤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걸 확인으로 믿었다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합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말씀을 깨닫는 것은 인간 고유의 능력을 넘어섭니다.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과, 말씀이신 아드님의 순종을 성령께서 일깨워 주셔야 가능한 은총이지요. 비록 제자들이 그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여러 차례 듣기까지 했어도 그들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 초입의 시간적 배경처럼, 빈 무덤 앞에서 제자들의 앎은 "아직 어두운" 상태입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의 설교 부분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사도 10,39)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이 하신 일을 직접 본 증인임을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사도 10,41)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도 자신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이야기하지요. 비록 그분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전복되어 관계를 부인하고 도주하고 숨었지만,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 그분과 먹고 마시면서 믿기지 않았던 부활의 현실을 직접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42)
제자들의 무지와 배반의 흑역사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증언과 선포의 소명으로 바뀝니다. 부끄럽지만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엄청난 변화가 부활의 은총을 더 강력하게 보여 주니까요.
제2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려면, 그 전에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으니, 우리는 그 죄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 죽음이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2)
물론 지상 순례길에 묶여 있는 동안 땅의 것과 전혀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살고 낳고 키우고 부양하고 성취하려면 땅의 원리와 완전히 별개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부활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나 "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 하느님 나라와 영의 원리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은 땅에 살되 땅에 묶이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먹고 살고 낳고 키우고 부양하고 성취하면서도 땅을 딛고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지만 아직 마음속에 먼동이 트기 전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부활은 오늘 복음 속 제자들에게처럼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 들음, 만짐, 체험, 깨달음을 통해 점진적으로 열리는 신비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제 부활 성야 미사 때 우리는 "예, 끊어버립니다!", "예, 믿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결단과 신앙을 비장하게 고백했지요. 비록 여전히 마음 안에 동이 트지 않았고 무지와 의혹의 빈 무덤 가를 떠나지 못한 상태라 해도 괜찮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각자의 때에 맞게 점진적으로 다가오시어 우리를 일깨우고 평화를 선사하실 것이고, 어둠이 짙을수록 그 변화의 폭은 엄청날 테니까요.
주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평화는 감정을 넘어서는 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의 은총을 믿으며, 부활의 증인으로 불리웠음을 믿는 이는, 믿는 대로 행복할 것입니다. 여러모로 녹록치 않은 현실이지만, 믿음으로 복된 부활 대축일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우리는 세상의 빛
-김찬선신부-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 독서들은 하느님의 천지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장대하게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천지창조와 구원 사이에
창조 질서를 훼손하는 인간의 죄와 그 벌로서의 고통의 역사가 있지만
하느님은 인간이 회개하도록 벌도 내리지만 구원도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 거시적으로 보면 창조와 구원의 역사인데,
문제는 우리의 역사를 하느님의 역사하심이라는 관점에서
크게 보지 못하고 미시적으로 보기에 구원과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거시적인 역사는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고 없애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넘어뜨리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일으키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찌르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꿰매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어제 아침 성무일도 독서 호세아서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백성은 괴로움을 참다 못해 마침내 나를 애타게 찾으리라.
어서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 주신다.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살려 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그런데 모든 것을 하시는 이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주인공이신 하느님을 빼고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을 수 없게 될 것이고
우리는 당장의 현상을 미시적으로 보고 거기에 함몰되고 말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신앙인이 보는 역사는 하느님의 역사이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벌을 주시고,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길도 분명합니다.
하느님을 무시하고 창조질서를 어겼던 옛 인간의 죄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는 하느님 자녀가 되고 새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현 상황에 비춰 보겠습니다.
코로나를 의료인이나 과학자들은 의학적으로 그 원인을 보고
당연히 의학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정치인들은 이것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고 해결책을 찾습니다.
경제인들은 당연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고,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은 코로나 불루 해결책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 다 좋고 모두 각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때 종교인들과 우리 가톨릭은 어떻게 해야 하고,
더 좁혀서 이때 우리 지도자들과 수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원인을 찾아 신앙인다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데 신앙인다운 해결책이라면 어떤 것입니까?
무당이 굿을 하듯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기도가 필수이고 기본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이 어두운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빛이심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백신보다 빛이 되겠습니까?
아니, 세상의 빛 이전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빛이 되고 있습니까?
마스크가 코로나를 더 잘 막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 되고 우리의 빛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이런 면에서는 빛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빛이고 다른 희망이며
이것을 우리가 존재로서 증거해야 하고,
그래서 어둠을 밝혀 달라고 한 뒤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의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프란치스코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마스크와 백신은 필요없고 그리스도만 믿는다는 그런 믿음도 아니고,
마스크와 백신만 믿고 그리스도는 믿을 수 없다는 그런 믿음도 아니며
이 모든 것들과 함께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그리스도가,
의사가 옆에 있는 것보다 더 듬직한 그리스도가 우리 배에
함께 타고 계시기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올바른 신앙 위에 확고한 희망이 있게 되겠지요.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고 코로나와 함께 있는 사람은 코로나와 함께 죽지만
오늘 제2독서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희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으로 증거해야 할 것은 부활로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능력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부활로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코로나가 설쳐도 하느님의 사랑이 같이 죽지 않고,
이까짓 것 때문에 하느님 사랑이 죽지 않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시고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비추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엇이 빛입니까?
사랑이고 무엇보다도 두려움 없는 사랑이 빛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코로나를 핑계로 사랑을 멈추었거나
코로나에 의해 우리의 사랑이 죽어 있었는데
죽어있던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시 살아나고 그래서
멈추었던 우리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올해 우리의 부활이 아닐까요?
미얀마 사태 때 용기있는 두 수녀님이 미얀마인들에게 빛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두려움 없는 사랑도 코로나 불루를 이겨내는 데 힘이 돼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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